아편, 주석, 고무···그들의 삶을 바꾼 세 가지 [이 책을 댁으로 들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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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1.07. 오후 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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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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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과 깡통의 궁전-동남아의 근대와 페낭 화교사회

강희정 지음 | 푸른역사 | 496쪽 | 2만8000원




싱가포르나 말레이반도 지역을 여행해본 사람들이라면 ‘페라나칸’이라는 말을 꽤 들어봤음직하다. ‘현지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의 이 용어는 동남아 원주민과 중국인, 이슬람인, 인도인 등의 결합으로 태어난 혼혈을 지칭한다. 이들 중 압도적 숫자를 자랑하는 건 중국계였기 때문에, 페라나칸이라는 말 자체가 중국계를 지칭하기도 한다.

말라카해협 북부의 중심지이지 동서 교역의 교차로 역할을 해온 페낭 또한 페라나칸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페낭의 조지타운에는 도로 하나를 경계로 이슬람 모스크, 중국인 사당, 불교 사원, 힌두교 사원, 기독교 교회가 뒤섞여 있다. 말레이시아 최대 불교 사찰인 극락사의 만불탑에는 중국, 태국, 버마의 양식이 골고루 드러난다. 다인종·다문화가 제대로 녹아있는 이 도시에는 중국인이 이주한 곳 어디에나 있다는 차이나타운이 없다.

페낭은 1786년 영국의 불법점거를 시작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영국의 자유주의 실험이 촉발한 무관세와 자유이민은 페낭으로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중국인들은 ‘교역하는 디아스포라’의 전통을 이어 지역 경제를 점차 흡수했다. 저자는 “18세기 후반 이래 동남아시아의 전환을 압축적으로 드러내주는 축도가 곧 페낭”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영국 식민지 건설기부터 2차 세계대전 전까지 150여년간 페낭을 중심으로 벌어진 화인(화교)사회의 발전과정을 아편, 주석, 고무를 통해 조명한다. 아편은 페낭 화인사회의 ‘혁명의 시대’로, 주석은 ‘자본의 시대’로, 고무는 ‘제국의 시대’로 비유하기도 한다.

동남아 유럽 식민지 운영의 핵심이었던 아편은 페낭 화인사회의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유무역항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해 독점권을 주는 징세청부제는 아편팜에도 활용됐다. 특히 아편을 파는 자도, 소비하는 자도, 부자가 되는 자도, 망하는 자도 모두 중국인이었다.

통조림 깡통의 원료가 되는 주석은 페낭에 ‘골드러시’를 불렀다. ‘백색 황금’으로 불린 주석은 ‘검은 황금’ 아편과 짝을 이뤘고, 거부가 된 화인들은 유럽인 거주지역에 서양의 궁전을 본딴 대저택을 지었다. 현재 화려한 페라나칸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페낭 페라나칸 맨션’도 이 중 하나다.

20세기 자동차 시장의 발전으로 타이어 수요가 늘면서 말레이 반도는 ‘악마의 밀크’ 고무로 인해 재편된다. 페낭 화인사회는 아편팜의 붕괴를 맞고, 중화 민족주의의 도전을 받게 된다.

<아편과 깡통의 궁전> pp.298-299. 저자는 ‘아편’과 ‘깡통’(주석)으로 부자가 된 거부들이 ‘궁전’ 같은 저택을 지었던 것에 비유해 아편과 깡통의 궁전이라는 가상의 역사관을 세우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페낭은 도시 형성의 특수성으로 인해 남녀 성비가 2 대 1에서 시작해 최대 50 대 1까지도 벌어졌다. 남성 노동자들이 집중적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페라나칸은 이방인 남성과 현지인 여성의 결합이라는 종족 간의 혼혈과 문화적 혼종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페낭 화인사회의 지형도와 함께 미묘하게 달라져왔다. 같은 이주자라도 중국에서 갓 이주한 ‘신케’와 현지 물정에 밝은 ‘라오케’가 구별됐고, 라오케가 아편팜을 장악해 부자가 될 때 신케는 아편에 중독됐다. 사업 수완이 좋은 신케는 새로운 라오케가 되어 구 라오케를 위협했고, 페낭에 자신들의 궁전을 지었다. 저자는 페낭 화인사회에서의 페라나칸은 ‘현지 태생’이라는 조건보다 ‘페낭에 묻히겠다’는 선택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이자 신남방정책 특별위원회 민간자문위원인 저자가 국내에서 관람한 페라나칸 유물 전시회가 이 책을 쓴 계기가 됐다. 페낭을 시작으로 동남아 화인사회의 시각예술을 조명하려던 저자의 의도는 그러나 페낭 답사를 통해 완벽하게 뒤집어졌다. 실물 연구를 통해 페라나칸 시각문화를 조명하려던 연구 목적은 문헌 연구를 통해 페낭 화인사회의 이면에 집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스스로 ‘미술사가의 외도’라고 표현하지만,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형성 과정과 화교사회 형성을 조망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이 책을 댁으로 들이십시오>는 불성실한 사람이 불규칙한 주기로 씁니다. 처음에 눈에 ‘꽂히고’, 한동안 책꽂이에 ‘꽂히고’, 읽고 난 뒤 마음에 ‘꽂히고’ 나야 이곳에 소개합니다.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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