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선배, 너나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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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0.23. 오후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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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부산국제영화제 초청받은 나
침대가 세 개나 있는 방 “야호”

마침 스태프로 온 친구 H와 밤새 술
다음날 부랴부랴 초췌한 몰골로 행사 가

취재차 온 대학 선배 K를 만나
살에 관한 그의 TMI 간섭 불쾌
일러스트 윤수훈




부산국제영화제에 와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당시 출강하던 경기도의 한 대학으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기나긴 여정에 조금은 지쳐 있던 상황이었다. 30년 동안 경기도에 거주했던 친한 소설가 S가 했던 “경기도인들은 인생의 30%를 대중교통 속에서 보낸다”는 말을 떠올리며, 경기도에 살면서 좋은 성격을 유지하기란 참으로 힘들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낯선 번호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자신을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머라고 소개한 남자는 나를 부산국제영화제의 ‘시네마 투게더’라는 프로그램의 멘토로 섭외하고 싶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얼른 (지난 화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는) 영화인 친구 H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그거 무조건 해.”

“페이(보수) 들어보지도 않고?”

“돈 안 받고도 하는 거야 그건.”

돈 없이는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나인데, 얘기를 들어보니 프로그램 자체는 크게 어려운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영화제 상영작 중 다섯 편 내외의 영화를 골라, 나를 멘토로 고른 10명의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고, 간단히 토론을 하면 된다고 했다. 기차표며 숙소 예약조차 쉽지 않은 영화제 기간에 호텔이며 교통편까지 다 제공해준다고 하니, 거기다 영화까지 다섯 편 볼 수 있다고 하니 땡큐지 뭐, 하는 안일한 마음이 들었다. 내게 닥쳐올 미래는 알지 못한 채.

영화제 측에서 잡아 준 해운대의 호텔에 도착했을 때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높은 층에, 창문까지 커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게다가 객실이 궁궐처럼 넓었고, 심지어는 침대도 세 개나 놓여 있었다. 도대체 나머지 두 개의 침대는 어디에다 쓰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융숭한 대접(?)은 살면서 처음이군, 생각했다. 호텔 1층에서 일하고 있는 영화제 스태프들에게 얼핏 들으니, 영화제에 참석하는 배우들도 나와 같은 호텔에 배정받았으며, 엘리베이터나 식당에서 초췌한 모습의 (?) 유명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고 했다. 영화 상영과 행사가 주로 열리는 센텀시티까지는 도보로 40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나는 삼박사일의 일정 동안 유산소 운동 할당량도 채울 겸 체류 기간 내내 숙소에서 영화관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지키지 않을 결심을 하는 데는 소질이 탁월한 나였다.)

짐을 풀자마자 부랴부랴 영화제 공식 행사 일정을 소화했다. 뒤풀이까지 다 끝냈는데도 시간은 자정도 채 되지 않았다. 영화계 사람들은 저마다 아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어디론가 떠나갔다. 나는 홀로 느릿느릿 호텔로 걸어왔다. 술도 깨고 잠도 오지 않았던 나는 별수 없이(?) 영화사 스태프의 자격으로 부산에 내려와 있는 H에게 전화를 걸었다. H는 다소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내 방에 침대가 세 개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얼른 내 방으로 오라고 말했다. 탐탁지 않아 하는 H에게 술과 안주 일체를 내가 쏜다는 말을 해주자 두말도 않고 내 방으로 달려왔다. H와 나의 숙소는 지도 기준, 도보로 10분 거리였는데 막상 H가 도착할 때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어온 그에게 캐리어에 고이 모셔온 보드카 한 병과 과자를 꺼내 주었다. 이럴 거면 도대체 왜 40분이나 땀 흘리며 걸어온 걸까, 피어나는 의구심을 술로 꾹꾹 누르기 위해 더 빠르게 마셨다. 평소처럼 별로 재미도 없는 얘기가 오고 가는데, H가 영화제에 오기 바로 전 고향 집에 갔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만난 지 십초만 지나도 으르렁대기 바쁜 우리 가족과는 달리 예전부터 H의 가족은 사이가 좋았다. 서로를 존중하고 친구처럼 다정하게 전화 통화도 하고 가끔씩 가족여행도 가는 등, 나는 H의 가족을 내심 부러워했었다. 그런데 이번 만남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고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엄마가 한 말이 뭔 줄 알아?”

“모르지.”

“‘너 왜 이렇게 살쪘니’였어.”

“나의 일상에 온 걸 환영해.”

“나, 정말 그렇게 심하게 살쪘어?”

“맨날 보니까 난 잘 모르지.” (라고 말한 후 H의 눈을 피하기 시작한 나.)

“아 진짜 죽고 싶어.”

아직도 몸무게가 두 자릿수인 주제에, 고작 몇 킬로그램 찐 것 같고 죽고 싶다느니 오두방정을 떨어대는 H가 가소로웠지만, 그래도 나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며 우아한 현대인의 자세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 나를 보며 H가 그윽한 시선으로 말했다.

“있잖아. 상영아, 세상에 우리 둘만 남았으면 좋겠어.”

“갑자기 뭔 (개)소리야?”

“그럼 내가 덜 뚱뚱한 쪽이잖아.”

나는 먹던 과자를 내려놓고 세상 가장 진득한 욕을 H에게 퍼부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보드카를 비우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위가 밝아져 있었다. 나와 H는 각자의 침대에 누워 있었고, 불길한 화창함이 내 몸을 감쌌다.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보니, 첫 상영작의 시작 시간이 채 20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튀어나가 후드티를 걸치고 곧바로 객실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발을 동동 구르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로비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문 앞에는 호텔의 임금 정상화를 위한 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호텔 앞에 택시를 잡아탔다. 나는 ‘영화의 전당’에 가 달라고 했다. 기사는 내가 타지에서 왔음을 바로 캐치한 듯했다. 그는 시위대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게 다 중국인들이 호텔을 인수해서 생긴 문제라며 호텔의 재무구조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였고 다만 빨리 좀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사는 자기 할 말만 계속 떠들어댔다.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영화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극장 앞에서 대기 중이던 나의 멘티들과 함께 무사히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전날의 과음 때문에 자꾸만 감기는 눈을 이겨내며 두 시간을 버텨냈다. 밖으로 나와 멘티들과 간단한 소감을 나눈 뒤 각자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두 번째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나는 ‘영화의 전당’ 안에 있는 카페로 가 해장용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얼굴을 비추며 눈곱을 떼고 얼굴을 살폈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고 아침에 세수를 하지 않아 얼굴 곳곳에 버짐처럼 튼 자국이 나 있었다. 객실로 돌아가 빨리 씻고 나와야 하나, 아니면 급한 대로 화장실에서 물이라도 발라볼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길쭉한 그림자가 내 얼굴 앞에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대학교 동아리 선배 K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황급히 티셔츠에 달린 후드로 머리며 얼굴을 가려보았지만, 이토록 거대한 머리가 가려질 리가 없었다.

“상영아! 나 너 못 알아볼 뻔 했잖아.”

내가 대학 사람들을 피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30㎏ 넘게 살이 찐 나를 보고 대개 놀라거나, 다짜고짜 웃음을 터뜨리거나, 아니면 몹시도 측은한 표정을 짓곤 하니까. K 선배는 계속 낄낄대면서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의자를 끌어다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작디작은 커피 잔으로 얼굴을 가리기 위해 노력하며 선배에게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나? 당연히 취재하러 왔지.”

그러고 보니 언젠가 선배가 한 유명 일간지의 기자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선배는 내가 작가가 됐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며, 내 소설이며 연재하고 있는 다이어트 산문(그러니까 바로 이 글)을 재밌게 보고 있다고 했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좀 쪘다 싶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장난 아니다.”

나는 사람 좋은 척 허허허 웃으며 선배의 이번 취재가 완벽히 망하기를 빌었다. 선배는 하고많은 부서 중 문화부 기자인 것이며, 나는 또 왜 하필이면 머리도 감지 않은 채 그와 마주하게 되었는가. 선배는 그래도 예전에 삐쩍 말랐을 때보다 지금이 오히려 보기는 더 낫다며 다만 체지방을 줄이고 근력 운동을 통해 건강한 몸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고 묻지도 않은 평가를 해주었다. 나는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은 마음에, 이미 일주일에 세네번씩 헬스장에 나가고 있다고 말해버렸다. 선배는 얼굴에 웃음기를 싹 거둔 채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상영아, 운동이라는 게 되게 진실해. 안 하던 사람들은 일단 시작만 하면 되게 빨리 몸이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게 하루에 한 장씩 티슈를 얹는 거나 다름없거든. 요행을 바라지 말고 매일 휴지 한장을 얹는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해야 해.”

선배도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대단한 몸은 아닌 거 같은데……자꾸만 내 몸에 관해 얘기하는 게 싫어 얼른 말을 돌렸다.

“선배는 퇴근하고 운동가시면 힘들지 않으세요? 프리랜서인 저도 너무 힘들던데.”

“나는 오히려 좋아. 운동하면 스트레스 풀리지 않니?”

전혀. 스트레스가 풀리기는커녕,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있나, 속에서 천불이 나곤 하는 나. 대화가 더 길어져 봤자 좋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영화 상영 시간이 임박했다며 자리를 떴다. 선배는 내게 신작이 나오면 우리 매체랑 인터뷰라도 하자고 명함을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상영관으로 걸어갔다. 선배가 돌아서기 무섭게 그의 명함을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오늘 밤은 기필코 굶고 자야지, 또다시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했다.

박상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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