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의 친동생 박정희,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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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16> [이계홍 작가, 언론인]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바로가기 :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처음부터 보기

16장, 대구 6연대, 집단 허무주의
 
한 병사가 연대장실로 다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연대장실 입구엔 ‘제6연대장 김종석’이란 문패가 붙어있었다. 
“연대장 각하, 사고가 생겼습니다. 동료 병사 하나가 맞아 실신했습니다. 다른 병사들도 구타당하고 있습니다.”
각 소대의 복무일지를 점검하던 김종석 중령은 병사의 다급한 말에 눈을 치켜 떴다.
“뭐가 어쨌다구?”
“각하, 저희가 도둑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미고문단 소위가 후지모도 군조를 데리고 와서 내무반 관물대를 샅샅이 뒤지고 반발하는 병사들을 패고 있습니다.”
후지모도 군조는 한국 이름이 김춘택이었지만, 만주군 헌병대에서 일본군 중사로 활약했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지금까지 노상 사용하는 닉네임이었다. 그는 해방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자랑삼아 그 계급장과 이름을 내세웠다.
“뭐가 어째?”
“위병소에 둔 라디오, 후레쉬, C레이션, 피복류가 밤사이 사라졌다면서, 우리가 훔쳐갔다는 겁니다. 위병소에 가져다 놓은 것인데, 도둑맞았다는 것이죠.”
그런 일은 왕왕 있었다. 미고문단의 하위 계급자와 한국인 하사관이 작당해 군수품을 빼돌려서 돈을 만들고 기생집에 가서 실컷 주색에 빠지고 돌아오곤 하는 물품들이었다. 그들도 빼돌린 물품을 도둑맞은 셈이었고, 그래서 먼저 취하는 자가 임자가 되는 풍토였다. 후지모도 군조는 필시 손버릇 나쁜 병사들 짓이라 여기고 내무반에 들이닥쳐서 관물대를 뒤지고 병사들 몸을 수색하다가 불평하는 자를 팼던 것이다. 악랄하다는 일본 군대도 기습적으로 내무반에 들어가 모욕적으로 구타하며 팬티까지 내리게 하고 수색하는 일은 없었다.
“앞서라!”
내무반에 들어서자 과연 후지모도가 미 고문단 소위가 지켜보는 가운데 곳곳을 뒤지다가 감정이 치밀면 쭈그려 앉은 병사들을 불쑥 걷어차고 있었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한 병사는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고, 다른 병사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무슨 짓인가?”
“빨갱이새끼들이 하는 짓입니다, 각하! 비상식량과 피복을 빼돌렸습니다.”
빨갱이 짓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통용된다. 그렇더라도 이건 지나쳐보였다.
“그만두지 못해?”
후지모도가 행동을 멈추고 의아스런 표정으로 김종석을 바라보았다.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제지하니 뚱딴지 같고, 그래서 고개를 갸웃하며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만둬, 못된 놈아!”
“왜 그러십니까. 저 새끼들의 범죄를 묵인하는 겁니까?”
“니가 봤어?”
“그렇다면 귀신이 했을까요?”
후지모도가 연대장의 위아래를 훑듯이 살폈다. 상당히 건방진 태도였다. 아마도 미고문관이 곁에 있으니 그를 믿고 하는 행동일 것이었다. 전선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하사관 출신들은 일본군 장교 밑에서 병사들을 한없이 쪼았는데, 지금은 미고문관 밑에서 으스대고 있다. 
“야비한 자식, 앞으로 나왔!”
후지모도가 앞으로 나오자 김종석이 그의 정강이를 워카발로 냅다 걷어찼다. 에구구구, 후지모도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김종석은 쓰러진 그를 사정없이 군화발로 밟아버렸다. 
“스톱, 스톱!” 미고문단 장교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카멘더 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보면 몰라? 나는 이런 일은 일본 군대에서도 용서하지 않았다. 니들이 증거를 찾아 증명해야지, 야만적으로 족치며 불라는 것이 정당한 태도인가? 이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민주 군대  모습인가?”
후지모도가 피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연대장 각하, 억울합니다. 국준(국군준비대) 놈들이거나 학병동맹 놈들 수작입니다. 빨갱이새끼들이 하는 짓입니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또 국준 놈이라고 해도 그렇게 해야 되나?”
미군정이 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이 맹위를 떨치자 군벌을 해체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해산시키자 이들이 일거에 국방경비대에 들어왔고, 그들은 부대 내에서 충돌을 일삼았다. 말썽을 일으킴으로써 혼란을 부추기려는 의도가 드러난 행동이었다. 그렇더라도 이런 폭력은 누가 보아도 비이성적이고 반윤리적 행태였다. 군 내부는 각 군벌들의 각축장이자 좌우 충돌의 시험장이 된 지 오래지만, 새 나라의 군대는 이래서는 안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위관 장교를 보자 김종석이 말했다.
“소대장은 들으라. 귀관은 부대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지휘하는 일선 장교다. 그래서 위관급을 ‘카멘더’보다 더 친근한 ‘리더’라는 말을 쓴다. 자신의 부하를 직접 이끄는 지휘관이므로 리더인 것이다. 이런 못된 짓을 하는 하사관이 있으면 소대장이 과감히 조치하라! 책임은 내가 진다. 하사관에게 쩔쩔 매면 지휘관 자격이 없다. 그리고 김춘택 중사! 미고문관이 뭐라고 하든 상식에 벗어나는 명령은 단호히 거부하라! 민족적 양심을 지키라! 소대장은 부상 장병을 데리고 응급실로 가고, 병사들은 각자 제 자리로 돌아가라.”
병사들이 흩어지자 미군장교가 그의 앞에 대들 듯이 나섰지만 그는 가볍게 그를 외면하고 내무반을 물러나왔다.
-건방진 자식...
미군들은 대체로 한국인 병사들을 경멸했다. 한국인의 문화와 풍습을 이해하기보다 뒤떨어진 미개인으로 내리깔고 보았다. 훔치고 거짓말하고 불결하다고 야만인 취급하고 있었다. 
-공평하다는 자식들이 하는 꼬락서니하곤.... 
사실 미고문관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불편부당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군병사나 한국군 병사는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갖췄다고 했다. 공평하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이미 군 내부에는 한미 군사간에 차등과 차별이 있었고, 좌우 대결이 일상화된 가운데 좌익 성향을 가진 병사와 민족주의 성향의 병사는 불이익을 당했다. 불편부당과는 거리가 먼 차별적 대우였다. 그렇다면 애초에 모병할 때 성향을 분석해서 선발할 일이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해놓고, 잡아가두고, 심한 경우 불순분자로 몰아 소리 소문없이 없애버렸다. 끌려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예사였다. 점차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군부 내의 충돌은 일상화되었는데, 그것을 좌우 대결의 결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게 진실은 아니었다.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취약한 처우와 열악한 식사문제, 원칙없는 계급장 부여, 경찰과 대비되는 차별 대우, 광복군 팔로군 일본군 항일유격대 따위 출신 군별 파벌 때문에 터져나온 갈등들이 있긴 했다.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분란 책임을 좌익 소행으로 몰아갔다. 군 영내엔 말 그대로 시대적 모순이 압축되어 있는데, 좌익 소행이라고 몰아가고, 그렇게 몰면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것들은 좌익이 번식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결과적으로 군정은 좌익의 발호를 부추기는 꼴이었다. 불만 세력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여 제거하는 것이 비용이 가장 적게 들고, 국가 조직을 단일 대오로 이끌어가는 것이긴 해도, 그런 일련의 정책들은 일제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방식이었다. 인적 구성원이 각기 파편화함으로써 건국의 토대를 다져야 하는 막대한 인력이 손실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좌익과 비판 세력의 기준이나 경계가 모호하고, 승복할 수 없는 일들이 산적해서 본의 아니게 불만 세력, 즉 자생적 빨갱이가 양산되는 분위기였다.   

김종석은 경성고보(경기고교)를 졸업하고 일본육사에 입교한,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전형적인 학구파 지휘관이었다. 명석한 두뇌와 정의감이 투철한 품성은 장차 군 최고지도자로 설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늘상 남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것같은 느낌으로 살았다. 가슴 속의 허한 것을 채우지 못해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막상 해방을 맞아 조국에 돌아오니 그동안의 행적이 부끄러웠다. 
그런 자성이 뒤늦게나마 민족의식으로 내면화했다. 그가 별다른 생각없이 일본 군국주의를 위해 전선에 투입되었을 때, 지각있는 사람들은 눈보라 휘날리는 광야에서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몸을 불살랐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반성하고, 신조국 건설에 헌신할 것을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돌아온 그들이 자꾸 주변부로 밀려나고, 일부는 좌익으로 몰려 쫓기고 있었다. 그의 양심과 지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이었다. 정제되진 않았지만 그들이 가는 길이 옳았고, 열정은 높았는데 알게 모르게 설 자리를 잃는 것이 안타까웠다. 미군정에 굴종하며 협력하는 자들에 비해 타락하지 않았으며, 조국애에 대한 순정성도 뜨겁다고 생각했다. 영혼없이 외세에 굴종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이익을 탐하는 기회로 이용하는 자들과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기회주의자들은 독립운동자를 만주 벌판에서 비르적대며 연명한 마적떼라고 조롱했다. 숨거나 반성하고 있어야 할 그들이 그렇게 음해하고, 활보하면서 세상의 주역이 뒤바뀌고 있는 것을 보고, 김종석은 그들의 후견인이 미군정이라는 데 분노했다. 그는 이래저래 혼란스러웠다. 일본군 장교로서 미제(美帝)와 맞서 싸우다가 어느날 갑자기 미제 휘하의 장교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당황했던 것이다.  
-내가 어디에 서있지? 이게 바른 길인가. 내가 가는 길이 옳은가....
조국의 군인이 되는 것이 소망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길은 요원해보였다. 세상은 안개 속에 갇혀있는 듯 무엇 하나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없고, 분단의 어수선함과 좌우 대결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또다시 용병 신세라는 것이 그로서는 견딜 수 없었다. 미군정은 혼돈 상황을 방치하는 것 같고, 때로는 그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민생은 늪에 빠지고, 백성은 피폐한 몰골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대구 항쟁이 터졌다. 
대구 6연대는 창설되자마자 두세 달만에 연대장이 네 사람이나 바뀌었다. 부임한 지휘관들은 부임하자마자 줄을 대 다른 곳으로 보직을 받아 떠나버렸다. 사상적으로 드센 지역이어서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김종석 역시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를 붙잡는 장교가 있었다. 최남근 중위였다. ,
“이런 혼란한 곳에서는 정통 야전 군인이라야 기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최남근은 6연대가 창설되자 중대장을 거쳐 대대장, 그리고 잠깐 연대장 대리를 맡은 연대 창설의 산파역이었다. 김종석이 연대장으로 부임해오자 그 자리를 물려주고 대대장으로 복귀했다. 지식과 통솔능력, 호방한 성격을 갖추어서 인간적 매력을 풍기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관동군 중위로 복무하다 해방이 되자 북한을 탈출해 대구 6연대 창설멤버로 참여했다. 그가 어느날 김종석 연대장실을 찾았다.
“연대장, 오늘 저녁 시간 낼 수 있습니까?”
“좋은 일 있습니까?”
“중요한 분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어떤 분이시길래 새삼스럽게...”
“만나보면 압니다.”
최남근은 그 사이 토착세력과도 관계가 깊어져 지방 유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김종석을 시내로 나가자고 이끄는 것도 그런 유지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퇴근시간이 되자 두 사람은 서문시장 뒤편 달성공원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의 허름한 술집으로 갔다. 골방으로 안내되자 사십대 중년의 남자가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서로 인사 나누십시오.”
최남근이 김종석을 소개하자 중년남자가 지긋이 웃으며 말했다. 
“목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재복이오.”
김종석은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대구 항쟁의 중심인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아, 이재복 목사님이시군요.”
자리를 잡자 주안상이 들어왔다.
“이재복 목사님은 해방 신학을 하신 분입니다. 나도 만주땅 길림에서 교회를 다녔드랬지요. 그게 동티가 되더군요. 해방이 되어서 함경도를 거쳐 평양으로 들어오는데 관동군 출신이라고 해서 잡히고, 또 교회신자라고 해서 잡혔댔시오. 고약한 동네였댔지요. 빠져나오느라 힘들었댔시오. 소련 공산당 놈들은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다니까니....”
최남근이 이렇게 말하고 웃자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북한땅에 들어온 소련군을 보는 관점과 해석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자, 목사가 먼저 술 한잔 하겠습니다. 해탈한 목회자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재복은 체면과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격의없이 술잔을 나누었다.
“박정희 소위를 아시오?”
이재복이 물었다. 최남근이 받았다.
“만주군 시절 그와 한 방에서 한동안 뒹굴었댔지요. 연배도 비슷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봉천군관학교 신경군관학교, 족보가 복잡해서 선후배 관계가 좀 애매하지만 같은 만주군 인맥이란 공통점으로 인간 관계가 돈독했댔지요.”
“박 소위는 작년 대구 항쟁 때 전사한 내 친구의 막내동생입니다. 그를 내 동생으로 여기고 있지요. 조국관이 뚜렷한 명민한 청년이오. 두 분 지휘관들이 그와도 관계를 잘 유지해주십사 하고 오늘 자리에 모셨소이다.”
“영광입니다.”      
“희생된 그의 형 박상희 동지는 ㅅ다실 나라의 미래였지요. 큰 일을 할 인물로 보았소이다. 그런데 경찰 총에 희생되고 말았소. 박 소위도 백씨가 비참하게 죽자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을 것이외다. 존경하는 형님이 졸지에 희생됐으니 그 뼈아픈 속이야 오죽하겠소? 그를 위로해주기를 바랍니다.”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김종석이 생각난 듯이 말했다.
“대구 소요에 대해선 6연대는 중립입니다. 경찰이 저질러놓은 일을 군이 뒤치다꺼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좋은 말씀이오. 하지만 백성들의 참상을 본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오. 대구항쟁은 지금 한 마을, 한 집안 사이에서 관과 민, 또 같은 형제간에도 편이 갈려서 싸우는 전쟁으로 변질돼버렸소. 이것이 대구항쟁의 또다른 아픔이오. 모순을 극복하자는 것이 희망은 사라지고 보복과 혐오, 증오만 쌓여가고 있소. 이 모든 것이 경찰이 벌인 모략과 이간질 때문이오.”
김종석이 받았다.
“대구 사태를 미시적 관점으로 볼 것만은 아닙니다. 대립은 미소(美蘇) 양강이 서로 자기들의 판도를 넓히기 위해서 팽창 정책을 쓰는 원심력이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죠.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내 형제를 죽이니 너도 죽어야 한다, 경찰을 죽였으니 빨갱이도 죽여야 한다는 동물적 감정에 의한 분노만 분출시키고 있는 것은 바르게 보는 눈이 아니지요.”
“냉철한 지적이오.”
내친 김에 김종석이 길게 얘기했다. 
“2차 세계대전에 조선이 참여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간에 존재하는 발언권이 보장되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빛나는 항일 투쟁 대오가 있었으나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연합군과 합세하여 조선에 상륙해 조선을 해방시켰다면 당당하게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런 세계관을 갖지 못했습니다. 천추의 한입니다. 하지만 만주와 연해주, 시베리아, 중경, 상해에 있었던 우리의 독립군이 연대를 강화해 진격했더라면 늦었더라도 우리 일본 육사 생도들도 상황을 알아차리고 뒤늦게라도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물론 일본 육사 출신이 천황의 개가 된 조선인 출신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뒤늦게나마 뼈저리게 반성하고, 통한의 분단구조를 막고자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군대 조직은 사분오열되었고, 독립에 대한 목표는 있지만 실제에 있어선 분열적입니다. 구체적 시나리오가 없습니다. 승전한 강대국들의 잔칫상에 올라 처분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래가지고는 얻는 것은 없이 이용만 당할 뿐입니다.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까. 분단의 일차적 책임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요.”
“조선은 연합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연합군의 적이었지요. 거기서부터 왜곡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어떤 나라 틀을 짤까요. 우리의 식민지 상황을 제대로 알리는 일부터 착수했어야지요. 과연 연합국을 설득했나요? 영어 한마디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달려들었나요? 쥐새끼처럼 영합하는 놈들만 지 세상이 되었다고 날뛰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송병준, 이완용과 무엇이 다릅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외부세계를 너무 몰랐습니다. 소련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중일 3국 간섭을 주도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그 당시 한반도 39도 분할 논의가 있었고, 태평양전쟁 말기, 미국의 독려로 만주의 관동군을 접수하면서부터서는 한반도의 북쪽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38도를 경계로 해서 분할 점령하기로 하고, 38 분계선을 그은 것이 분단의 시초가 된 것이지요. 조선에 대한 그림이 없었던 미국은 애초에는 분단된 한반도를 원한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편의상 그은 선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미래를 보는 예지력 하나 없이 끌려오다가 지도자들끼리 불필요하게 헤게모니 쟁탈전만 벌이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외세가 분단 상황의 주범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이오. 이를 해결할 능력은 자국민에게 있는데, 외세라고 둘러대다니요? 대구가 이렇게 참담하게 부숴진 것은 분단 체제 모순의 극점으로 치닫기 때문이오.”
이재복이 받았다. 
“학구파다운 통찰력이오. 내 나름으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자면, 그래서 혁명이 필요하오. 혁명의 본성이란 것이 본래 그렇지요. 프랑스혁명이나 프롤레탈리아 혁명을 보시오. 피 흘리지 않는 혁명은 허약한 영혼일 뿐이오이다. 역사적 정의로 볼 때, 한반도가 분단돼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소. 조선 반도가 2차 대전을 일으킨 당사자거나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아니잖소. 일본놈들의 종이 되어서 개처럼 전쟁터에 끌려가서 억울하게 죽었을 뿐이오. 그런데 일본놈들은 멀쩡하고, 평화롭게 살아야 할 한반도가 세계 대전의 희생물이 되고 있소. 분통터지는 일 아니오? 인류 양심이나 정의로 보아서도 용납될 수 없소. 이건 미국놈들 때문이오. 그들 패권을 향유하는 입장에선 정당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 민족 정신의 관점으로 볼 때는 대단히 부당하오. 그들이 말하는 정의와도 배치되는 행동이오.”
“미국을 반대하면 해결된 것입니까? 그렇게 단수합니까?” 
“단순하오. 어려울 것이 없소.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평범한 소망들이 미국놈들 때문에 가로막히고 있는 것이오. 박헌영 동지도 그렇게 정리했소. 미국이 일제와 친일파놈들과 협력하는 가운데 한반도 정책을 관리해나가니까 무엇이 잘되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정리가 안된다는 것이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겠소? 양심과 정의가 누더기가 돼버렸지 않소? 민족자결주의라는 것도 그들이 만들어놓고 짓밟고 있소이다.”
“민족자결주의....”
촤남근이 음미하듯 뇌자 이재복이 목사 특유의 설교조로 다시 말했다.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때문에 우리도 영감을 받아서 3.1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우리가 살아갈 나라는 정확히 획정된 우리 영토를 가지며, 그 영토는 찢기지 않아야 하고, 그 안에서는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배제하는 확고한 주권이 적용돼야 하고, 그래서 민족적 자존감을 높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이오. 이 정신은 식민지 독립운동과 새로운 독립국가 탄생의 근원이 되는 것이었소. 하지만 지금 우리는 힘센 나라가 개입해서 분단이 고착화되어가고 있소. 미군정은 일제가 강탈했던 우리 재산을 모조리 친일파 세력에게 넘겨주고 있소. 남한 주요 산업 80% 이상을 일제 부역자들에게 분배하고 있소이다. 그들에게 있는 것조차 빼앗아야 할 것을 오히려 더 몰아주고 있소. 방직공장, 제사공장, 피복공장, 제련소, 조선소, 정미소는 물론 적산가옥들을 친일분자들에게 안겨주고 있소. 자본의 식민지화, 일본제국주의화를 다시 획책해가는 것이오. 착취한 재화를 가로채는 반민족적 매판자본 행태들이오. 이것이 진정 해방의 모습인가? 나라를 찾기 위해 분투한 항일 투쟁자들에 대한 예의인가. 그 재화를 국가 재산으로 환원하여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재건을 이루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넘겨주고만 있으니 욕망 세력은 끝간 데 없이 정신이 없고, 나라 발전은 요원하게 되었소이다.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근원이자 해방의 노획물이 어처구니없이 이렇게 넘어가니 그자들은 벌써 미국의 개가 되지 않을 수 없지. 강제 분단선도 국경선이 되면 어떻고, 미국놈 하수인이 되면 어떻고, 아라사 놈들 똥구녕을 빤들 어떠냐는 것들이오. 전승국 미국은 분쟁지역을 만들어서 2차대전 시 남은 전쟁 재고품을 처분할 기회로 삼고 있소. 그런 불바다에 한반도가 제공되고 있단 말이오. 한반도가 그 제물이 되고 있소이다. 전쟁의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소이다. 민족자결주의 정신은 헛된 구호가 되었소이다. 국민 수준이 낮으니 아무렇게나 눌러도 된다고 보는 오만이오이다. 깨우친 우리가 이것을 용납할 수 있겠소? 민족 정의가 용서할 수 있겠소? 평화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전쟁을 할 모양인데, 그건 일방적 군사주의 모험일 뿐이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하오. 우리가 이것을 깨부수지 않으면 나라는 산산조각이 나고, 식민지생활은 지속될 것이오.”
“미국은 평화를 사기 위해 안보를 튼튼히 한다는 것 아닌가요?”
김종석이 물었다. 
“일부러 그렇게 묻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분명 점령군으로 왔소이다. 전쟁의 꼼수를 감추기 위해 둘러댈 뿐이지. 군사력을 앞세워서 세계를 경영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이오. 그들은 이런 사실을 은폐·조작하는 기술을 갖고 있소. 평화를 위해 돈을 쓴다고 말이오. 그 돈은 무기요. 이런 허구를 비판하는 세력을 빨갱이라고 공격하고 잡아가두는 것이오. 빨갱이 사냥은 현지 주민간의 이간질과 분열ᐧ대립으로 몰아가오. 소련이라는 적국을 지렛대 삼아서 내부인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도록 유도하는 것이오. 일본놈들은 강압적으로 조선반도를 다스렸지만, 미군정은 내부인끼리 다투도록 방치하면서 다스리고 있소이다. 그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되고,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지요. 그런데 우리 정치인 놈들은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조그만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 서로 물고 뜯고 발작하고 있소. 한 마디로 짐승들의 태도요.”
김종석은 일방적으로 미국을 악으로 몰아가는 것이 거글렸다. 공포스럽게 북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소련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이용할 줄도 알아야지요. 우리가 미국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 오류를 범하는 첫째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저 역시도 미국을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적개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을 적으로 알고 싸웠으니까, 그런 소양이 제 몸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를 도우러 왔는데 우리가 역량이 부족해서 그들을 활용할 줄 모르고, 스스로 벼랑 끝으로 몰리는 것이 아닐까, 자성해봅니다. 우리 내부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미국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김종석은 이렇게 진단했다. 
“미군놈들을 몰아내야 하오. 양키 고 홈이오...”
공허한 구호처럼 그것은 허공에 맴돌았다. 의미없는 군가의 후렴 같다. 거대 미국의 실체를 모르는 좌익 세력의 관념적 수사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이재복이 김종석을 설득하기 위함인 듯 다시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번연히 깨질 것을 알면서도 일제에 저항했던 것은 행위의 정당성과 정의의 정신을 높이자는 것 때문이었소. 당대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연면히 이어가면 종국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역사의 긍정성을 믿기 때문이었소. 예수님이 거렁뱅이 청년으로 거리를 헤매면서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하나님 정신을 구현하겠다는 진리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예수 세상을 만든 것과 같은 이치요. 당대에 과실을 따먹으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오. 아시다시피 소련은 지금 원자탄을 갖고 있는 미국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소. 세계 국부의 삼분지 이를 미국이 갖고 있으니 겁을 낼 만도 하지. 그래서 이 시간, 이 시점에서는 미국이 세계경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니까 침묵하자? 세상 만물은 고정 아닌 것이 원칙이오. 불변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오. 부단히 모순과 부조리를 깨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오. 당대에 이루지 못하더라도 가야 할 길이오. 우리는 양강(兩强)의 긴장과 팽창정책에 의해 민족 운명이 좌우될 운명을 맞고 있고, 어느쪽을 선택하든 우리가 무너질 요소들을 구조적으로 지니고 있소이다. 그들은 우리 내부를 찢고, 가해자인 자신들이 들어야 하는 비난을 오히려 착한 백성들에게 떠맡기는 거요. 너희가 분열해서 망가지는 것인데, 무슨 뚱딴지 같은 억지냐, 우리는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지켜주는 십자군이다, 그러니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런 때 사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시간으로 활용하오. 사대주의자라는 이름의 기득권층, 보수층은 원래 가치보다 이익으로 뭉치는 집단이니까 내부의 분열을 오히려 즐기면서 자기 지분을 확장하는 기회로 삼지. 그렇게 해서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오. 그러면서 민족정신을 비틀고 모욕할 것이오.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 했다는 사람들을 비적떼라고 흠집내고 비웃고 혐오할 거요. 미국이 받쳐주니 그들은 마음 놓고 오만을 부리는 거요. 벌써 주류로 올라선 그들의 건국통치 프레임은 그렇게 굴러가고 있소. 그런데 그런 것들을 묵인하자?”
최남근이 말했다. 
“결국 남북의 당사자들이 해결사군요. 내가 보기로도 남의 탓 할 수가 없습니다.”
“맞소. 이건 남이 해결해주는 문제가 아니오. 우리가 분단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어야지. 그렇게 된다면 분명 우린 부강해질 것입니다.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오. 왜놈 따위를 뛰어넘는 강국이 될 것이오. 미소 양국의 대리전을 극복하면 우리의 길로 갈 수 있소이다. 그런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쉬운 문제를 어렵게 푸는 것이오. 진리란 간단명료한데 말이오. 정답은 의외로 단순하오. 그런데 탐욕주의자들은 쉬운 문제를 어렵게 푼단 말이오. 결집해야 하는데 서로 뜯고 발기고 있습니다. 박헌영 동지가 안타까워하고 있소이다.”
“그 사람 역시 자기 희생과 양보가 없으니 또다른 분파입니다. 배제하고 쪼개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면 그 역시 분쟁의 당사자일 뿐입니다. 강경하고 극단적입니다. 진정한 민족의 지도자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은 밤이 깊을 때까지 나라를 걱정했지만, 확실하게 대안을 찾지는 못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암울한 상호 인식만 확인했다. 술을 마시지만 동시에 허무감도 마시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김종석은 대전 2연대장으로 배속되고, 최남근은 춘천 8연대장으로 전속되었다. 

다시 만난 사람들

“햐, 몇 년만에 만나는 것 같다.”
모처럼만에 일본육사 60기와 마지막기인 61기생들이 종로통의 장안빌딩 구 건준 사무실에 모여들었다. 전남 나주에서 중학교 교편을 잡고 있는 장지성이 상경하면서 조병헌 이성유 오민균이 해산된 건준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이정길 방을 찾은 것이었다. 해방과 함께 숨막히는 시간을 보내다보니 귀국한 지 벌써 이 년의 세월이 흘렀다. 모두가 나이답지 않게 지쳐보였다. 돌아가는 세상을 지켜보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좌절하면서 나날을 보내다 보니 모두가 청년답지 않은 상처받은 모습들이었다. 
“서울 올라오는 길에 대전의 2연대장을 만나고 왔다. 입대를 희망하는 줄 알고 군대 들어올 생각일랑 접으라고 하던데?”
장지성의 말이었다.
“김종석 연대장 말인가? 후배한테 그렇게 사기 떨어지게 박정하게 대해도 되나?”
“김 중령은 국방경비대는 미국놈들 앞잡이라고 화를 내더군, 경비대는 미국놈들 하수인인데 뭐하러 들어오려느냐고 했어. 일본놈들 따까리한 것도 넌덜머리가 나는데, 또 미국놈들 뒤를 핥아줄 일 있냐면서 가서 공부나 하라더군. 설렁탕 한그릇 사주고는 쫓아버리더라구.”
“그럼 그는 왜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었지?”
그도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것이다. 한국 군대가 미국의 하수인이라고 하면서 그 역시 창설 연대의 상위급 지휘관이 되어있는 것이다.
“미군정 하는 꼴이 안타깝다는 뜻이겠지.”
장지성은 그의 입장에서 해명을 해주었지만, 그 역시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넌 어떻게 할 거야? 교사로 그대로 눌려있을 거야?”
조병헌이 물었다. 조병헌은 오민균과 함께 국방경비대사관학교 교관이었다. 함경도가 고향이지만 소련군이 점령하면서 일찌감치 고향을 등지고 살아오고 있었다. 
“군문에 들어가야지.”
그는 홍태화의 주선으로 전남 나주 민립 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나 그곳도 어수선하긴 마찬가지였다. 예로부터 나주는 유림을 중심으로 한 토착 민족주의 운동세력이 드센 지역이었다. 일제 초기 신간회 활동이 활발하고, 광주학생사건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인도 조심하는 곳이었다. 해방이 된 얼마 후 나주인민위원회는 귀국해서 고향에 머문 장지성을 찾아 보안서장으로 나서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주나 지식인들을 타격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인근 절에 가있다가 상경했던 것이고, 서울 오는 길에 대전 2연대를 찾아 김종석 연대장을 만났던 것이다.
“사관학교 들어갈 거야?”
“난 항공병과니까 항공사관학교를 가야겠어.”
“미군이 비행기도 안주는데 항공사관학교 가서 뭘해.”
미군은 비행기를 국방경비대에 주는 것을 꺼려했다. 비행조종사들이 엘리트들이 많은지라 민족의식이 강했고, 사상이 의심되었기 때문에 비행기를 내주는 데 주저했다. 실제로 조종사가 수송기를 몰고 북으로 탈출해버린 일도 있었다. 
“여러 생각 말고 경비사에 들어가. 그런 다음 진로를 정해야지. 벌써 후배들이 대위 계급장을 달고 일선에 투입됐잖아. 늦기 전에 입교하라구. 삼사 개월이면 임관하니까 빨리 마칠 수 있어. 다행히 오민균 조병헌 두 생도가 교관으로 있잖아.”
이정길이 오민균과 조병헌을 눈으로 가리켰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태화는 어떻게 됐나.”
“그는 전주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데 거기도 마땅치 않은 모양이야.”
“그 성격에 교편은 무슨... 물고기는 물에서 놀아야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 아냐?”
홍태화는 입바른 소리를 곧잘 해서 구설도 잦은 편이었다.
“제주에 이시하라 선생이 오셨다는데 홍태화가 다녀왔나봐. 아사코 소식을 들으려고 갔던 모양이야.”
“그래서?”
“미나미 여사가 죽고 아사코가 혼자 집을 지킨다는 소식을 듣고 못견뎌하더군. 그래서 밀선을 타고 도항하려고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야. 제주도 사정도 좋지 못해서 밀선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나봐.”
“고길자씨로부터 편지가 왔지요. 청년조직에 참여해서 활동하고 있더군요. 그의 동생이 서북청년단원에게 죽을만치 맞았나 봐요. 그래서 지금은 투사가 되어 있더라고요. 제주도도 지금 끓고 있습니다. 대구 항쟁보다 더한 폭동이 날 것이라고 걱정하고들 있습니다. 귀국한 유학생들이 주민들을 일깨우면서 벼르고 있다고 합니다. 좌익들도 개입해있고요.”
오민균이 소식을 전했다. 그는 마지막 기 생도였기 때문에 일본 육사 생도들이 모이면 선배들에게 깎듯한 존댓말을 썼다.
“그들의 풍습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면 안되나?”
“경찰과 청년단이 상선들을 밀선이라며 단속하면서 착취하고, 거부하면 족친다는 거죠. 제주도에도 곧 연대가 창설된다는데, 경찰들 뒤치다꺼리할 게 뻔하지 않을까요?”
“군사 정책이 ㄲ곡 소꿉장난처럼 묘하게 돌아가고 있어. 애초에 설정이 잘못된 거야.”
그들은 이런저런 정보를 나눈 뒤 헤어졌다.

사라진 청춘들

“이정길 소식 아직 없나?”
이쾌대가 종로 건준 사무실로 들어서며 사동에게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며칠 전 이성유를 만나 인천에 가더니 아직껏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전화가 없습니다.”
이정길이 이성유의 전화연락을 받고 급히 나간 것이 닷새 전이었다.
“인천의 오동태 말이야, 서울역에서 만났던 사람. 그한테서 구호 요청이 왔다. 빨리 서울역으로 와라. 오민균, 조병헌은 부대에 있으니 외출이 안될 거고, 너라도 와라, 라고 했다는 거야.”
이정길이 이성유를 만나 인천의 공장에 도착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공장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당 뒤편에는 해안인데, 갈대가 무성하고 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군중의 선두에서 오동태가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함성이 바람에 섞여 광장으로 울려퍼졌다.   
“악질 업주 물러나라!”
“근로조건 개선하라!”
“밀린 임금 내놓아라.”
“처우를 개선하라!”
그때 중무장한 시위 진압 경찰이 시위대 쪽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시위대를 뻘밭 쪽으로 밀어붙였다. 뻘밭에 빠지지 않겠다는 시위 군중을 향해 곤봉을 휘둘렀다. 오동태가 대오에서 벗어나 이정길과 이성유가 서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동지들, 우리는 단순히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오. 반미 반제 구국 대오에서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소. 공장 마당에서 진군식을 갖고 애관극장으로 갈 거요. 거기서 군중대회를 열겠소. 거기서 봅시다.”
언제 준비했는지 시위 군중의 선두가 ‘조선독립만세’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만세삼창을 외치며 시내를 향해 행진했다. 내동 사거리를 지나 일본인들이 사는 동네로 진입하자 대기하고 있던 다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 군중을 밀어냈다. 이때 오동태가 체포되어 지프에 실렸다. 그가 뒤따르는 이정길, 이성유에게 소리쳤다.
“젊은 생도들! 만주로 가시오! 만주로 가시오. 반제 만세!”
지프를 뒤따르던 이정길 이성유도 체포되었다. 무차별적인 곤봉 세례를 받고 두 사람은 정신을 잃었다. 
인천 지역은 대구와 함께 시민적 저항이 심한 곳이었다. 공장지대가 많아서 근로대중의 조직력과 의식이 다른 지역보다 깨어있었다. 조봉암과 이승엽 중심의 건국준비위원회 및 치안관리위원회, 인천선무학생대, 인천학생대 등이 반미를 외치며 움직이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한국인이 인천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으나 역으로 더많은 시민의 저항을 받았다. 경찰서장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우익 인사들이 경찰을 장악하면서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미군정은 이를 이용해 좌익과 민족세력의 활동근거지를 약화시켰다.  
인천은 한반도 정쟁의 중심에 서있었다. 일본인 경영자들이 인천 산업자본의 92.6%를 지배하며 일제 식민 지배의 전초기지가 되었기 때문에 광복에 따른 혼란이 그만큼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을 다시 친일 세력이 소유하고, 노동자들이 외면된 채 부당하다고 항의하자 이들을 체포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공장들이 일제히 문을 닫았다. 공장이 돌아가지 않으니 시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끼니조차 잇지 못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갔으나 결식 인구가 시 전체의 30-40%를 차지한 마당에 양식을 구하는 대신 옷과 휴대품을 빼앗기고 돌아올 지경이었다. 
광복은 잘사는 나라, 친일세력 청산, 경제의 올바른 흐름 등 대중의 의지가 반영되는 사회가 될 줄 알았는데, 정 반대의 길로 가면서 젊은 청년들이 항의했고, 그런데 자고 나면 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동태 이정길 이성유도 이때 사라진 뒤, 두 번 다시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쾌대도 쫓긴 나머지 부랴부랴 짐을 싸더니 북으로 넘어갔다. 불확실한 미래, 신분 보장이 안되는 나라에선 잠시도 편안하게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기호일보 8·15 기획, 항일도시 인천 ‘光復의 파고 온몸으로’-해방 전후의 인천 일부 인용>

춘천 8연대, 갈등의 진원지

허허벌판에 세워진 군용 막사들이 바람에 사납게 펄럭일 뿐,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춰진 시설이 없었다. 춘천 8연대였다. 관할 구역이 넓은지라 연대본부 겸 1대대는 춘천에, 2대대는 원주에, 3대대는 강릉에 각각 설치되어 있었다. 
춘천 8연대 장교들은 이북 출신이거나 농어촌 출신, 혹은 군대의 이단아들이 배속되었다. 자연 불평불만들이 많았다. 게다가 같은 연대 소속이라도 대대별로 각기 멀리 떨어져있는데다, 교통과 통신이 원활하지 못하니 대대는 서로 다른 부대처럼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 연대감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8연대 본부 병사들이 변소 뒤쪽 구렁창에 웅크리고 앉아서 담배꽁초를 빨고 있았다. 어떤 희망도 즐거움도 없다는 듯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하사관들의 놀이갯감이었다. 하사관들은 일본군 시절의 곤조를 내보이며, 경험 부족한 새파란 신입장교들을 제치고 병사들을 함부로 다루었다. 젊은 장교가 하사관에게 경례를 붙이는 것이 이때의 풍조였다. 하극상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랬으니 병사들은 그들의 밥이었다.  
어느날 강원도 경찰국에서 한통의 전문이 8연대에 답지했다. 전문을 접수한 통신병이 종이쪽지를 들고 급히 연대장실을 찾았다.
“제3대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신속히 출동해달라는 요청입니다.”
“뭐 반란? 3대대라면 강릉 대대 아닌가? 그게 어드메 새끼들이야?”
연대장 원용덕 대령은 앞에 서있는 통신병이 마치 반란 주모자나 된 듯이 그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지금 대구항쟁 이후 태백산맥으로 숨어든 야산대를 울진 지방에서 소탕하고 돌아온 뒤 잠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춘천 8연대는 창설 7개월만에 연대장이 세 사람이나 바뀔만큼 기강이 잡혀있지 않은 부대였다. 배속된 지휘관은 유배지에 온 듯 자고 나면 타 지역으로 떠나려고만 했다. 주둔지 변경이 잦고 지휘관 교체가 빈번하니 연대의 누구도 열정을 가지고 복무하는 지휘관은 없었다.  
미 군사국이 설치된 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가지만 지원이 허술한 것이 각 연대 불만을 고조시켰다. 직할 부대의 반란 사건을 직속 상관인 연대장이 모르고, 경찰이 먼저 정보를 알려주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희한한 일이었다. 연대가 창설되었다고 해도 비상전화 하나 설치되지 않았으니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더욱 분통터지는 일은 경찰에는 면 단위 지서까지 전용 통신망이 갖춰져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 때의 조직체계와 비품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이건 눈에 보이는 차별이었다.  
물론 미군정의 고민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와 그 후속조치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한반도에 정식 군대를 둘 수 없도록 양자가 합의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경찰예비대라는 변칙적 성격으로 연대를 창설했다. 입대한 병사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했다. 군에 들어오면 피복이 제공되고, 삼시 세끼가 주어지고, 월급이 나올 줄 알았다. 
나라의 간성이 될 줄 알고 희망을 걸고 들어왔는데, 딱 거지꼴이었다. 일본군이 버리고 간 낡은 군복을 입고, 총신도 없는 가짜 총을 메고 훈련하고, 먹을 것은 고작 피죽 정도이니 맥이 빠졌다. 멋진 미군용 키빈총에 깨끗한 사지 기지의 제복을 지급받은 경찰에 비해 차별이 분명하고, 경찰은 또 그들을 내놓고 멸시했다. 미군 역시 국방경비대 병사를 군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데려다 놓고 병신 만드는 꼴이었다. 
이런 와중에 강릉 3대대에서 반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강릉 3대대장은 송요찬 대위였다. 일본군 하사관 준위 출신인데 용맹스럽지만 거칠고 포악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별명도 백두산 호랑이였다. 그는 병사든 하사관이든, 소대장이든 삐딱하면 조인트부터 까는 지휘관이었다. 8연대 창설부대 병사는 향토 출신이 아니라 대부분 영남 지방에서 배속된 병력이었다. 부산 5연대 병력 일부를 기간으로 편성했기 때문이다. 
원용덕이 접한 3대대 반란 사건 배경은 다음과 같다. 
부대 소대장 김진위 소위가 결혼식을 올렸다. 장교 임관 전에 그는 부대의  선임하사였다. 하사관에게도 경비대사관학교 입학 기회가 주어져서 하사관 출신 중에서도 상당수가 입교해 장교로 임관되었는데, 그도 그중 하나였다. 김 소위는 옛 동료들인 하사관들을 결혼식 들러리로 세워 시내로 나가 결혼식을 올리고 귀대했는데, 그만 영창에 갇히고 말았다. 대대장 허락없이 외출했다고 해서 영창에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들러리로 간 상사 두 명은 중사로 계급이 강등되고, 그들 역시 구금되었다. 함께 간 동료 장교는 조인트를 까였다. 다분히 감정이 섞인 징치였다.
며칠 후 대대장 이하 하사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말 회식이 있었다. 술은 일인당 청주 세홉씩 배당되었고, 그중에는 술을 하지 못하는 하사관도 있었으니 대신 마셔주느라 혼자서 한되 이상 마신 하사관도 있었다. 술이 취하자 불만이 터져나오면서 술상이 엎어지고, 장교와 하사관 간에 대판 치고 박는 싸움이 벌어졌다. 
“소대장 결혼식에 다녀온 것이 벌 받을 짓이냐? 결혼식 축하 행사인데, 그 정도는 눈감아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그런데 신랑을 영창에 집어넣고, 우리에겐 계급 강등이라니, 도대체 어느 군대 예법이냐?”
이렇게 불만이 터져나오더니 급기야 군대에서 당한 일들이 하나하나 까발려지면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험한 산을 넘을 수가 없어서 부산, 김해, 포항에서 뱃길로 찾아온 가족들인데 면회도 안시켜주었다. 철망 밖에서 지켜보는 가족들 앞에서 귓방망이까지 때렸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씨발 놈들, 군대가 깡패 집합소냐? 맨날 구타에 기합이고!”
“강훈련을 시키면 상응하는 식사를 제공하고, 입을 것도 갖춰줘야 하는 것 아니야? 쓰러지는 병사가 한 둘이 아니다!”
“하사관은 군대의 근간이라고 해놓고 대접은 거렁뱅이 취급이다!”
그들은 마침내 송요찬 대대장을 집단 폭행했다. 말리는 과정에서 편이 갈리고, 가해 하사관들이 사세가 불리해지자 소속 병사들을 이끌고 무기고를 털어 완전무장을 해버렸다. 
강릉비행장에 주둔해있던 미군 병력이 탱크를 몰고 출동해 병영을 포위한 뒤 50명의 병사를 체포했다. 체포된 병사들은 춘천 연대본부로 이송돼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30명이 집단 탈주했다. 운전병과 호송병도 동조자인지라 이들의 탈주를 막지 않았다.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탈주한 군인들은 태백 준령으로 들어가 일부는 대구의 야산대에 합류하고, 일부는 토착 반군이 되었다. 
이중 박인욱 상사는 산을 타고 월북해버렸다. 이들 중엔 남로당 세포도 끼여있었다. 강릉상업학교 교사 출신인 김태원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병사들은 외출시 시내에서 언변이 좋은 태원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남로당 강원도당부위원장 겸 강릉지구 책임자였다. 부대 내에 쌓인 불평불만분자들이 세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고, 습자지에 물 스미듯 그들은 태원의 언변에 흠뻑 빠져들었다. 
“해방이 되었다고 하지만 일본놈이 미국놈으로 바뀌었을 뿐, 변한 것이 뭐가 있나. 우리가 뒤엎고, 새로 판을 짜야 한다. 내 나라 내 주권을 주인이 행사하지 못하는 게 나라인가...”
감성 풍부한 청년들은 모순의 세상을 뒤엎자는 태원의 선동에 별다른 이의없이 동조했다. 직접 겪고 보니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꿈꾸는 이상주의자지 냉엄한 현실주의자는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것을 스네이크라는 별명을 가진 정보장교 김창동이 한달음에 달려와 주모자를 색출해냈다. 그는 부대원의 결혼식 허가장과 기간병 외출증을 일직 사령인 배태원 중위가 발부한 것을 발견하고, 사태의 근원은 외출증 발부에 있다고 보고 ‘빨갱이 배태원’을 긴급 체포했다. 김창동은 경비사 3기 졸업과 함께 소위 임관해 1연대 정보장교로 배속되어 있었는데, 8연대 3대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강릉으로 달려와 단박에 배태원을 체포, 구속해버린 것이다.
“빨갱이 새끼들은 근본부터 달라.”
그러나 김창동은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태원이라는 남로당 간부를 배태원으로 잘못 알고 엉뚱하게 그를 영창에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엉뚱한 사람이 잡혀들어가 곤욕을 치르자 반발은 더욱 커졌다. 그가 남로당 세포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풀어주는 것도 권위에 상처를 주는 일이어서 이번엔 다른 죄목으로 그를 구속해버렸다. 군사재판장 역시 배태원을 ‘장교로서 이러저러한 직책을 완수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내용을 재판기록에 주기(朱記)해 그를 파면하도록 조치했다. 한번 걸리면 그물망을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가 8연대 상황이었고,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연대에도 해당되었다. 
이처럼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은 것은 구조적으로 좌우 대결 구조가 바탕에 깔려있고, 이를 토대로 군벌의 이해 관계와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 공정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온 폐단이었다. 말하자면 파벌과 비리와 시대 모순이 뒤범벅이 되어 군대에 압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강릉 3대대 대대장 구타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태릉 1연대 1대대 소요사건(46년 5월23일)을 비롯해 광주 4연대 김홍준 중위 배척사건(46년 5월), 이리 3연대장 김백일 대위 배척사건(46년 10월), 태릉 경비대사관학교 생도대장 구타사건(46년 12월), 춘천 8연대 3대대장 구타사건이 연속적으로 터져나왔고, 이런 사고는 갈수록 큰 규모로 일어났다. 
즉 광주 4연대 영암 군경충돌사건(47년 5월2일), 대구 6연대 1차 반란사건(48년 11월2일) 2차반란사건(48년 12월6일) 3차 반란사건(49년 1월), 춘천 8연대 표무원 강태무 중대병력 집단 월북사건(49년 5월)이 연이어 터져나온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상당수는 태백산맥 골짜기로  숨어들어가 게릴라로 변신했다. 숨막히는 내전 상황으로 치닫는 과정이었다. 
춘천8연대, 대구6연대, 부산5연대가 사고가 잦았던 것은 한반도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태백산맥, 소백산맥이 게릴라들의 은신처가 된 지형적 특성도 크게 작용했다.  

박정희는 1947년 1월 소위 임관하자마자 김점곤 중위가 지휘하는 38경비대 제4경비대장으로 배속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합의에 따라 소련군에 이어 미군의 일부가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긴급 편성된 38경비대는 강원도 현리 광원리 송청리 자은리 산간 지역의 38도선을 경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국방경비대는 임무 수행을 위해 현지 답사를 거쳐 초소 위치를 설정했는데 산간지역의 1월은 영하 삼십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었다. 소나무가 쩍쩍 갈라지는 엄동설한에 깊은 산중에서 한 길이 넘게 뒤덮인 눈밭을 헤치며 답사활동을 벌이는데 피복을 제대로 갖춰입어도 손발이 마비되고, 동상에 걸렸다. 여름옷 가을옷까지 두툼하게 끼어 입었지만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부하도 없는 4경비대장 직무를 수행하자니 박정희 소위는 맥이 빠졌다. 멋들어지게 사관생도들을 교육시키고 싶었는데 고작 산간의 38도선을 감시하라고 하니, 생각할수록 불만이 끓어올랐다. 
간첩 침투로를 차단하기 위해 경계 근무를 선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38도선은 긴장 지역이 아니었다. 월남자와 월북자의 비밀통로로 이용되는 경계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월북자나 월남자를 잡아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심문하는 것이 주임무였으나 얻을만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산악지대인지라 월남자·월북자들이 대부분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었다. 총사령부에서도 그 점 인지했는지 두달 정도 지나서 38경비대를 8연대로 통합하고, 중대장 김점곤은 총사령부 정보국으로 전보되고, 박정희는 8연대 작전참모 대리로 배속되었다. 
작전참모 대리라는 보직도 그로서는 불쾌했다. 작전참모면 참모지, 조그만 부대에서 참모 대리라니... 군 편제상 작전참모는 중위나 대위 계급이 수행했는데 그는 갓 임관한 소위였다. 군에 들어가면 전의 계급장을 부여받게 되어있었으나 그는 이상하게 일본군 중위 계급을 받지 못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뚜렷한 차별이었다. 
유능한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각 연대 창설과 그 후의 연대장 인사에서 한번도 고급 지휘관 보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후배들이 다 겪은 중대장 대대장도 그때까지 맡은 적이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주류에서 배제되었다. 
그것은 그가 보잘 것없은 빈궁한 농촌 출신이고, 나이가 월등히 많은데다 권위적인 성격도 영향을 주었다. 비사교적이면서 자존심이 강하니 상급자 누구도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껄끄럽고 부담스럽게 여겼다. 원칙에 투철한 성격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피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박정희는 거기다 좌익으로 몰려 경찰에 사살된 백형(伯兄) 사건도 영향을 주었다. 영남 지역의 대표적 사회주의자로서 10.1 대구 항쟁을 이끈 지도자의 실제(實弟)라는 신분이 알게 모르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의 성격은 강해졌고, 세상에 대한 분노도 커졌다. 
-이 새끼들, 두고 보자. 내가 멍청하게 당하고 살 놈이 아니다. 나의 형님은 누가 뭐래도 애국자야. 형의 사상적 깊이를 접근하지 않고 무턱대고 좌익이니, 빨갱이니 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어리석은 놈들이 지휘부를 장악하고 있으니 군대나 정부나 한심하다. 형의 발끝에도 가닿지 못하는 자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사자를 모욕하고 있어!  
불만이 큰 만큼 강릉 3대대장 구타사건도 내심으로는 수긍했다. 명색이 미군이 창설하는 군대라면 민주 군대가 되어야 하고, 민주 군대는 공평무사해야 한다. 3대대장이 기합 기술부터 배운다는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라고 해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장병들을 다루면 누군들 반발하지 않겠는가. 
박정희는 중대장이든 대대장이든 직무가 맡겨지면 멋있게 이끌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사관학교 교관을 지망했는데 얍삽한 상관이 무슨 사감이 있다고 하필이면 험한 강원도 산골짜기로 쫓아버린 것이다. 
여름이 가까워오던 어느날 박정희는 연대장실을 찾았다. 원용덕 대령은 대번에 피곤한 기색으로 그를 맞았다. 그가 나타나면 짜증부터 나는 것이다. 같은 관동군 군적의 동질감이 있었지만 그는 까칠한 박정희가 싫었고, 그래서 그에 관한 한 사사로운 인연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박정희가 경비대사관학교 생도 재학중에는 원용덕은 교장이었다. 그때도 그는 박정희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 수석 졸업에 일본 육사 출신, 그리고 해박한 군사지식을 갖고 있는 군인정신이 투철한 생도여서 같은 생도들로부터도 신망을 받고 있었는데 원용덕은 그를 철저히 외면해버렸다. 군인으로서 자신을 뛰어넘는 자가 있다면 인정하기보다 밟는 성격이었다. 원용덕은 좀 복잡한 사람이었다. 군의관 출신으로서 영어에 능통해 미국통이었는데, 미군 장교들처럼 구름의 층위에서만 놀았다. 한국군이지만 그는 거의 미군처럼 행세했다. 정일권 이주일 이한림 최주종 등이 속한 만주군 인맥에서 가장 연장자이며 상급자였으나 그들을 특별히 보호하지도 않았다. 군부 내의 ‘도꼬다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원용덕은 일본제국주의자 못지 않은 극우 성향을 갖고 있었다. 만군 시절 그는 봉천의 흥아협회에 가담했는데, 그 단체는 조선인들의 사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군 육군 특무기관이 조직한 단체였다. 항일 조선인을 때려잡는 일을 주로 했다. 먼 후일 그는 각종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여 김창동과 함께 대표적인 정치군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흥아협회 출신이란 인연의 연장이었던 셈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는 1954년 5월 이승만 암살음모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이승만 반대파 김성주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살해한 이승만의 맹신주의자였다. 당시 그는 헌병사령관이었다. 그해 12월에는 야당의원들 집에 불온문서를 투입하여 사건을 조작하려다가 발각되었으나 이승만의 비호로 유야무야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김성주 살해사건과 불온문서 투입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인 1963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두산백과 인용). 박정희와 노선상의 차이는 있었으나 만군 시절과 춘천 8연대의 이러저러한 인연이 고려되었을 것이라는 세평이 있었다. 그는 박정희를 돌보지 않았는데 박정희는 그를 은밀하게 보살펴준 셈이다.

“박 소위를 작전참모 대리로 배속시킨 것은 어쩔 수 없었어. 그게 서운해서 찾은 건가?”  
박정희보다 아홉 살이 많아 벌써 사십대 초입에 서있는 원용덕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아닙니다. 섭섭하기야 하지만 각하의 인사명령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임무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대신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서 찾았습니다.”
“뭔가.”
원용덕이 짧게 물었다. 그는 귀찮게 이것저것 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보시다시피 연대가 어수선합니다. 이렇게 나가다간 기강이 형편없이 망가집니다. 이럴수록 병사들을 질서있게 독려해야 하는데, 어느 상급자처럼 마구잡이 기합으로 몰아붙이면 안됩니다. 현지 전술 숙지와 야외 전투 기동훈련을 실시해 군인답게 합리적 체계적으로 통솔해야 합니다. 저는 그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원용덕이 눈을 크게 뜨고 관심을 보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투 기동훈련은 안돼. 국방경비대는 경찰예비대 아닌가. 미 군정이 용납하지 않아.”
그는 미 군정이 거부하는 것을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국방경비대는 미소공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경찰의 보조기관으로 창설되었기 때문에 전투부대 설치나 전투훈련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치안 유지를 위한 시위진압 정도의 훈련만 수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시위 진압 훈련을 한다고 해놓고 전투 기동훈련을 실시하면 되는 것입니다.”
훈련에 있어선 과욕을 부리는 직업군인다운 면모였다. 장애물이 있다면 그런 변칙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미군정 법령 요지 몰라? 국방경비대는 조선 주권의 안전에 필요한 민간 경찰기관의 보조를 위해 존재한다고 돼있잖아.”
“그건 아니지요. 건국하면 군대가 서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에 대비해야 합니다. 오합지졸들을 모아 정예군대로 만드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속인은 한가하면 범죄를 만들잖습니까. 일이 없으니 병사들이 잡념에 빠져서 사고를 칩니다. 이것을 방지하려면 체계적인 군사훈련이 필요합니다.”
원용덕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군. 우후죽순처럼 난립한 사설 군사단체들을 파악해서 군 경험자를 폭넓게 접촉하여 기간 요원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지. 지금 군사단체들이 얼마나 되나?”
“아마도 50개 단체가 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숫자입니다. 금방 세워진 단체가 며칠 후에는 해산되거나 다른 이름으로 바뀐 경우도 있으니까요. 각 단체에서 주장하는 대원 숫자를 헤아리면 조선 인구의 두 배는 된다고 합니다.”
“허허, 다행이군. 해산해선 안돼. 군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설 군사단체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으니까. 군 인맥을 찾아내는 데 좋고, 이들을 서로 견제하고 대립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국가 관리에 도움이 되고, 옥석을 가려서 좋고 말이야.”
박정희는 침묵을 지켰다. 
“군 기간요원 확보와 모병에서도 군사단체들을 활용할 가치가 있는 거지. 안그런가?”
박정희는 그가 조금은 생뚱맞다고 느껴졌다. 사안을 순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계략의 수단으로 보는 것같다. 지혜나 꾀로 사물을 보면 사악으로 흘러갈 수 있다. 머리로는 그에게 당할 것같지 않은데, 원용덕 연대장은 머리를 써도 나쁜 방향으로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침묵을 지키자 그제서야 연대장이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로 왔다구?”
“장교와 하사관들에게 정신교육과 기동훈련을 교습해야 한다는 보고를 드리고자 왔습니다. 끊임없이 병사들을 독려하고 훈련시켜야 합니다. 매뉴얼을 짜서 절도있게 실시해야 합니다. 장교와 하사관들의 품성을 도야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야비한 언어와 저속한 행동은 지휘자의 위신을 깎고, 병사들로부터 불신을 받는 원인이 됩니다. 지금 장교들은 실병 지휘능력과 전술능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건군의 정열에 불타고 있지만 출신이 각기 다르고, 준비없이 들어온 자들이 많아서 혼란스럽습니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능력을 배양하고, 자질 향상을 꾀해야 합니다. 부대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도 장교 교육이 선결 문제입니다. 장교 능력이 부족하면 병사가 따르지 않습니다. 병사들이 벌써부터 ‘엉터리 해방 소위’라고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굿, 훈련 계획을 말해보게.”
“총연습지도관은 내가 맡겠습니다. 연습중대장은 강태무 소위 표무원 소위, 기동 연습지도관은 송요찬 대위로 하여 숲이 우거질 무렵 중대 대항 실병 연습을 실시하고, 전투 기동연습은 보병조전(步兵操典)을 참고하여 조우전, 진지공방, 시가지 전투를 전개하겠습니다. 훈련참가 부대의 흥미와 진지성을 고려해 상금을 걸어놓고 실시하면 좋겠습니다.”
“좋아. 다만 표무원 소위는 연습중대장에서 제외하게.”
박정희는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나머지는 모두 흔쾌히 받아들였으므로 “알겠습니다. 곧 실시하겠습니다” 하고 연대장실을 나왔다. 
박정희 주도로 실시된 기동훈련은 한국군 최초의 전투훈련이었다. 

“왜 이렇게 얼굴이 새까맣게 탔나?”
“본래 얼굴이 그렇습니다.”
예고도 없이 이재복이 불쑥 나타났다. 박정희는 평소 다니던 춘천 외곽의 막걸리집으로 그를 안내했다. 비밀 아지트처럼 깊은 골방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을 탄식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마침 이재복이 나타났으니 막힘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복잡하게 되었네.”
이재복이 벽에 기대고 앉아 넉두리처럼 말했다.
“복잡하다뇨?”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지고 있고, 운동 세력들이 하나같이 체포되고 있네. 그 가족들이 더 곤욕을 치르고 있어. 매를 맞고, 고문당하고, 죽고 있네. 그러면 도망자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나타날 것으로 보는 거야.”
“세가 지리멸렬해지고 있습니까? 만만치 않을 텐데요?”
박정희는 전개되는 사태를 알고 있는 것처럼 응수했다. 그는 자작으로 연거푸 막걸리 석잔을 들이켰다. 가슴 속 불덩이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재복을 만나면 형님 생각이 나고, 형님을 생각하면 분노부터 치솟았다. 형의 길은 옳았고, 세상을 밝게 열어줄 선구자로 받아들였다. 지역민들이 한결같이 추앙하는 것도 형의 길이 옳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형님께서 형님상을 치러주시고, 집안 일도 돌봐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좋은 세상이 아니니 어쩌겠나. 그를 잃으니 내 팔이 한쪽 잘려나간 것같으이. 나 역시도 쫓기고 있으니 서울로 올라갈 참이네.”
“잘 됐군요. 가까이서 뵐 수 있으니까요. 좋은 세상 오도록 해야지요.”
말이 없던 박정희는 술기운이 돌자 말이 많아졌다. 
“연대장은 잘 있나?”
“누구 말씀입니까.”
“원 대령 후임으로 최남근 중령이 왔지 않나?”
“네, 잘 있습니다.”
박정희는 최남근과의 관계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험한 세상인지라 서로를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재복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아쉬울 때 요긴하게 쓰게. 연대 사람들은 물론이고 타부대 군인들도 만나야 할 것이야. 내 사람을 하나씩 만들어가야 하네. 자네는 신망이 높으니 잘 따를 거로 알지만 그래도 대접하는 처지는 되어야지. 그것이 운동의 기본이야. 만주 독립군이 실패한 것도 베풀기보다 민폐를 끼쳤기 때문이야.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당하는 사람은 피해로 알게 되지. 상희 형님의 정신을 잇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좋은 세상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니야. 노력하는 만큼 오는 것이야.”
박정희는 봉투를 받아 군복 안쪽 호주머니에 찔러넣고 단추로 잠근 뒤 술잔을 기울였다. 이재복이 수첩 안에서 쪽지를 꺼내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명단을 살펴보고 성분을 분석하기 바라네. 이 명단이 불안한 증거물이 될 수도 있으니 불리하면 씹어먹어도 좋네.”
“그까짓거야 다 외워버리죠.”
박정희는 만주군 시절, 중대병력의 병사 이름을 며칠만에 다 외워버린 경험이 있었다. 다른 장교들은 일년이 가도 소속 구대원 이름을 외지 못하는데, 그는 며칠만에 구대원 뒷모습을 보고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불러세웠다.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 그것은 상급자에게 복종심과 존경심을 보내는 증표였다. 군복의 그늘 아래 모든 것이 익명으로 처리되고, 군번으로 신분이 확인되는 병영생활에서 먼 발치에서 상관이 친절하게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의 따뜻한 친밀감과 소속감은 비길 데 없이 큰 것이었다. 이름 하나 불러주는 게 무슨 큰 대수일까만, 돌멩이처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병사들에게 그것은 세상에 나온 실존의 가치를 부여하는 훈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남한 내부는 혁명의 기치가 높아가네.”
박정희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백씨의 죽음의 무게를 엄중하게 받아들이게. 대구 연대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게. 맹원들이 들어가 있네. 저번 문상을 온 오민균 교관과는 연락을 주고 받나?”
“나를 따릅니다. 똑똑한 친구죠.”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문상온 것은 보통 성의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가장 나를 닮은 일본 육사 후배입니다. 그는 얼마전 나에게 다녀갔습니다. 연대에서 실적을 쌓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투기동훈련을 실시해 잘 마무리했습니다. 본부에서도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경비대사관학교로 배속될 것 같습니다. 후배에게도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군요.”
그러면서 그는 웃었다.
“잘 되었네. 산속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가야지. 대의를 도모하려면 넓은 곳으로 가야 해. 다시 말하지만 좋은 동무들을 확보하게. 외출 나갈 때는 깔끔하게 다녀야 하니 사복도 한 벌 갖춰 입게. 부하나 동료들 술값은 언제나 먼저 내고. 돈이 필요하면 연락하게.”
“고맙습니다. 고향 가는 길에 대구 연대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그쪽도 부단히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밖으로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계속>


이계홍 작가,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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