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와 김우중은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을 말해주는 상징과 같다. 숨가쁘게 달려온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경제’와 ‘대우’는 언제나 동일시됐다.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은 맨손으로 대우를 재계 서열 2위까지 올려놓은 ‘샐러리맨의 신화’로 그려졌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대우는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는 말’처럼 급추락했다. 동시에 김우중 전 회장도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으로 전락했다. 그로부터 김 전 회장의 뒤에는 ‘실패한 경영자’, ‘정경유착의 화신’ 등 오명(汚名)이 뒤따르고 있다. 그가 애지중지 키웠던 옛 대우 계열사들이 정상화의 길을 걷는 것과 달리, 김 전 회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월 말 김 전 회장과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의 대담집 <김우중과의 대화>가 출간돼 화제다. 책에서 김 전 회장은 “당시 DJ정부가 대우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고 무리하게 돈줄을 죄여 결국 해체됐다”고 주장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대우그룹 사태를 짚어봤다.

 대담집 출간하며 재평가 공식 요구
‘김우중법’ 대비, 여론몰이용 시각도

최근 언론에 비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모습은 ‘눈물의 남자’다. 지난 8월26일 대우특별포럼에서 “이제 시간이 충분히 지났으니 적어도 잘못된 사실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눈물을 보이더니, 9월16일 자신이 세운 아주대 학생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강연 도중 눈물을 흘렸다. ‘세계경영’을 슬로건으로 내걸며 세계를 호령하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다. 그만큼 회한(悔恨)이 많다는 뜻이다.돌이켜보면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김 전 회장은 외부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그랬던 그가 재평가를 요구하며 다시 전면에 나서면서, 대우그룹 처리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겁다.

대우·김우중, 한국 고도성장의 신화 대우그룹 처리는 우리 산업계의 뜨거운 감자다. 1967년 대우실업에서 출발한 대우는 1970년대 고도성장기를 맞으면서 각각 대우전자(1974년), 대우조선공업(1978년)을 세우는 등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전신)를 인수한 대우..

이코노미조선 멤버십 기사입니다
커버스토리를 제외한 모든 이코노미조선 기사는
발행일자 기준 차주 월요일 낮 12시에
무료로 공개됩니다.
멤버십 회원이신가요?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