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가난이 많아질수록 모두 부자가 된다는 역설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쉽지 않다. 동화 속의 왕처럼 잠깐 동안 '거지 체험‘을 해보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자처해서 가난을 선택할까. 그러나 역사에는 부(富) 대신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이들이 있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서 없는 사람들의 빛이 됐던 예수가 그랬고, 부처는 한없이 낮아진 상태에서 생사의 깨달음을 얻었다. 마더 테레사 같은 성인의 삶도 그렇다.
평범한 보통 사람이 스스로 가난을 자처하기란 쉽지 않다. 살아간다는 일이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란 것을 알수록 더 가지려고 하고, 가진 것을 더 움켜쥐려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 중에도 욕망을 걷어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욕망의 페달을 밟기보다 그 자리에서 내려와 ‘진정한 삶’을 살아보려는 ‘특별한’ 사람들. 그들은 '자발적 가난‘을 택한 이들이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강제윤은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할 때 비로소 세상이 평화로울 것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없는 세상에서 모두 부자가 되려고 함으로써 싸움과 전쟁이 벌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더 가짐으로써 부자가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강제윤은 ‘부자가 되는 것은 죄악이다’라고까지 단적으로 말한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덕담처럼 주고받는 시대에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삶. 부자가 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하지만 ‘부자’의 척도는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 욕망의 끝은 한이 없다. 강제윤은 그러한 것을 내려놓았다. 말로만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발을 땅에 내려놓음으로써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를 ‘그리스인 조르바’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유랑 시인 강제윤의 머무는 즐거움
남들처럼 대학을 나오고 도시에서 발붙이고 살던 그는 어느 날 오랫동안 떠났던 고향 보길도로 들어갔다. ‘동천다려’라고 이름 지은 집에서 그는 뒤꼍 대숲에서 딴 새순으로 차를 끓이고, 메주를 쑤기도 하며, 동치미를 담그고, 뒷산에서 주운 돌배로 술을 담그기도 했다. 염소가 먹는 쑥을 따라 뜯기도 하고, 도시 사람들에게 낯선 김국이 맛있다며 그 김국
끓이는 법까지 일일이 소개하기도 한다. 바로《자발적 가난의 행복》의 내용이다.
진솔한 고백과 해학적인 그의 글에는 감동과 웃음이 있다.
키우는 개 봉순이가 새끼를 낳으면 고깃국을 끓여주며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고, 부실한 흑염소 새끼에게 젖병을 물려주며 살려내기도 하는 강제윤. 개는 보신탕감으로 팔려가고, 흑염소 역시 보신용으로 팔려나가는 세상에서 그것들에 마음을 주는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때때로 눈부시게 아프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보길도에서의 생활이 하나의 풍경처럼 그려지면서도 아름다운 서정시로만 읽혀지지 않는 이유다.
더 이상 머물지 않는 시인의 머물던 시절의 한 기록
그는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유랑자, 떠돌이 시인, 섬 순례자 등으로 불린다. 벌써 몇 년 째 그는 이 땅의 500여 개 유인도를 모두 걸을 생각으로 섬을 떠돌면서 한 일간지에 를 연재하고 있다. 이 책은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며 살았던 고향 보길도에서의 생활과 청도 한옥학교에서 보낸 한철의 산문집이다. 이 책이 값진 이유는 정주의 삶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절의 기록들 속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깊은 사색을 즐겁게 만날 수 있다.
그 시절을 통해 떠도는 삶을 택한 강제윤. CBS PD이자 감각의 독서가인 정혜윤은 어느 날 말했다.
“강제윤은 내가 책을 통해 조금씩 간신히 얻은 것을 염소를 키우면서 이미 다 알아버렸다. 행복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정말 행복한 사람 아닐까?”
그녀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그에겐 세상 만물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한 직관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의 글은 종교적인 동시에 너무나 인간적이다. 성스러운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바보 예수 같은 그의 삶이 실패할 것인가?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행복과 성공, 불행과 실패의 이분법이란 그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의 영화감독 김태용, 저자 정민 교수, CBS PD 정혜윤이 추천하다
몸으로 느낀 것을 마음으로 전하는 강제윤 시인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은 항상 기쁜 일이다. 자발적 가난에 대한 선택은 부에 대한 열등감으로 무엇을 거부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풍요로워져서 자신과 자신의 관계들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일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매일 놓지도 취하지도 못하고 사는 내게 시인은 여전히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일깨워 준다. 김태용(영화감독)
강제윤 시인의 글은 문자로 표현된 밀레의 같다. 밀레가 낫질, 감자 캐기, 밭 일구기, 양치기, 거름주기 등을 그렸던 것처럼 강제윤 시인도 풀 뽑기, 김치 담그기, 개밥 주기, 염소 기르기 등을 쓰고 있다. 을 볼 때 우리는 초가을 들판의 우수와 인간의 노동과 경건한 마음 때문에 향수와 겸허함을 느끼곤 한다. 강제윤 시인의 글 역시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향수를 자극한다. 그 향수는 감상적인 것이나 목가적인 것,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강제윤 시인이 글속에서 빙그레 웃을 때 삶이 쉽거나 편안해서 웃는 것이 아니다. 그에겐 세상 만물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한 직관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의 글은 종교적인 동시에 너무나 인간적이다. 성스러운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바보 예수 같은 그의 삶이 실패할 것인가?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행복과 성공, 불행과 실패의 이분법이란 그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정혜윤 CBS PD)
말이 발등을 찍는 도끼가 된 세상은 슬프다. 먹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동백꽃이 피고 눈발이 날리고 봄날이 오고 낙엽이 구른다. 모두들 그렇게 한 세상을 건너간다. 다만 그때의 내 마음 자리를 내걷는 발걸음을 되돌아보고픈 것뿐이다. 스스로 자처한 가난 속에서 때때로 그는 외롭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태워 우리 모두의 외로움을 따뜻이 밝혀준다. 저희들끼리 부대끼다 둥그러진 바닷가 갯돌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보듬고 살았으면 싶은 것이다.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