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죽었을 때, 홍콩 시민은 이한열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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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1.12. 오전 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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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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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한국 찾은 얀호라이 홍콩 민간인권전선 부의장 강연 [최용락 기자]
 

송환법 반대로 시작된 홍콩 시위가 8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다. 홍콩 시민은 이제 송환법 반대에 더해 행정장관 직선제 등 민주주의, 경찰폭력 조사 등 5대 요구안을 내걸고 싸우고 있다.

13억 거대 중국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1일 폐막한 19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 결과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선춘야오 전국인민대회 법제공작위원회 주임은 "우리는 중앙이 헌법과 기본법에 따라 특별행정구에 전면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완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에게 "법률에 근거한 폭력 활동의 제지와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장샤오밍 중국 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 주임도 9일 홍콩 정부에 홍콩기본법 23조에 따라 "국가를 배반하고 분열시키며, 반동을 선동하고 중앙 인민정부를 전복하며, 국가기밀을 절취하는 행위" 등을 금하는 '국가안전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같은 날 송환법에 반대하던 홍콩의 야당 의원 3명이 체포됐다.

11일에는 홍콩 시위 참가자 중 세 번째 실탄 피격자가 나왔다. 최루탄을 피하려다 건물에서 떨어져 숨진 홍콩 시위 첫 사망자 차우츠록 추모 시위가 3일째 이어지던 날이었다. 당일 행정장관 직선제 등 홍콩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홍콩 시민은 총파업, 동맹휴학, 철시 등 3파(罷) 투쟁을 진행했다.




홍콩 시민 역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아직 물러설 생각이 없다.

이런 가운데 얀호라이 홍콩민간인권전선 부의장이 한국 정부와 정치권, 시민의 지지와 협력을 구하기 위해 지난 8일부터 12일까지 한국을 찾았다. 홍콩민주주의를지지하는시민모임은 11일 서울 종로 라 카페 갤러리에서 얀 부의장에게 '홍콩의 민주주의'에 대해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얀 부의장은 먼저 한국 민주화 운동과 홍콩 민주화 운동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며, 한국 시민사회에 각별한 우의(友誼)를 전했다. 이어 홍콩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2003년 국가안전법 반대시위로부터 2012년까지 서서히 성장하는 1단계, 2012년 국민교육 반대운동에서 시작해 우산운동에서 정점에 이르러 2019년까지 하강곡선을 그리는 2단계, 2019년 반송중 시위 이후의 3단계로 나눠 설명했다.

얀 부의장은 홍콩 시위가 8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유를 민주와 자유에 대한 열망뿐 아니라 경찰 폭력 반대에서도 찾았다. 강연 말미 얀 부의장은 번역 활성화, 전문가 교류 활성화, 시민 교류 활성화 등 한국의 시민사회가 홍콩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아래는 얀 부의장의 강연 전문.

"한국의 80년대 운동과 홍콩의 이번 시위는 비슷한 점이 많다"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린다.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 번째로 저의 사회 운동 경험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두 번째로 이번 반송중 운동이 홍콩 민주화 운동에서 어떤 단계에 있는지 말씀드리겠다. 세 번째로 제가 생각하는 한국 시민사회가 홍콩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드리겠다.

홍콩에서는 지금의 운동을 역권(逆權), 즉 권력을 거스르고자 하는 운동으로 이름 붙였다. 한국의 80년대 민주화 항쟁과 관련된 영화 세 편, 즉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이 홍콩에서 역권 영화라고 번역됐다. 홍콩의 이번 시위는 한국의 80년대 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전 1988년 출생이라 안타깝게도 어릴 때는 한국사회의 거대한 운동에 대해 잘 몰랐다. 저희 세대에 깊은 인상을 준 운동은 사실 1989년 중국에서 일어난 천안문 사건이다. 우리는 천안문 사건을 통해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싸우다 죽는다는 것, 그리고 자유와 민주의 소중함을 알았다.

▲ 홍콩 민주주의 간담회에서 강연 중인 얀호라이 민간인권전선 부의장. ⓒ프레시안(최용락)


홍콩 민주화 운동의 시작, 2003년 국가안전법 반대 운동

1999년 홍콩 주권의 중국 반환 후 홍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큰 운동은 2003년 국가안전법 반대 운동이다. 국가안전법은 국가를 전복하거나 하려는 활동에 대해 굉장히 강한 처벌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중국에는 원래부터 있었고, 홍콩에는 없었다.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될 때 홍콩기본법에 국가안전법을 만들 수 있다는 조항이 생겼다. 그걸 근거로 국가안전법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국가안전법은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모든 자유를 침해한다. 이런 자유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 이에 동의하는 노동조합, 변호사들, 기독교, 천주교 등 종교단체가 적극적으로 국가안전법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에 50만 명이 모였다. 결국 친정부 의원도 태도를 바꿔 정부에 국가보안법을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 압력을 가하게 됐다.

굉장히 중요한 민주화 운동의 기억이었다. 많은 사람이 나오면 정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저도 그 때 처음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당시에 저는 중학생이었다. 신부님이나 친구들과 같이 집회에 나갔다. 이번 반송중 시위에 100만 명이 나온 날, "2003년 시위 때 나왔던 사람 손 들어보세요" 하니 굉장히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이렇게 운동이 이어져왔던 것이다.

2003년 국가안전법 시위 투쟁을 조직하는데 앞장섰던 것이 바로 현재의 민간인권전선이다. 2002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민간인권전선은 한 단체가 아니다. 48개 단체의 연합체다. 민간, 인권, 노조, 교회, 성당, 부녀, 풀뿌리, 동성애자 단체 등 굉장히 다양한 단체가 함께 모여 만들었다.

만일 반환 후에 홍콩 운동의 단계를 나눈다면 일단 2003년 국가안전법 반대 운동 때 1단계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왜냐면 홍콩인들이 대형 항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영향력을 알게 되고, 다양한 항쟁의 방식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에 2005년 한국 농민이 홍콩에 와서 WTO 반대 투쟁을 한 것도 홍콩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줬다. 저는 무엇이 평화 시위이고 무엇이 용무(勇武)파(비폭력을 벗어난) 방법인지 당시의 한국 농민을 보며 알게 됐다. 한편으로 한국 농민은 3보 1배, 9보 1배를 하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힘들게 호소하며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다른 한편 덜 평화적인 거센 방법으로 물에 뛰어들어 결심을 보여주기도 하고, 경찰의 최루탄을 몸에 맞기도 했다.

당시 한국 농민 운동은 실제 홍콩 항쟁을 조직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줬다. 2010년 중국이 홍콩에 고속철도를 놓으면서 홍콩 북쪽 마을을 철거할 때 홍콩 청년들은 한국 농민이 했던 걸 떠올리며 3보 1배, 9보 1배를 통해 고통을 보여주고 공감을 얻는 방법을 썼다. 이번 반송중 시위 때는 입법회를 포위하는 센 방법도 썼다.

홍콩 민주화 운동의 두 번째 정점, 2014년 우산운동

2012년부터 바로 올해, 2019년까지를 홍콩 민주화 운동의 2단계로 볼 수 있다. 2단계의 특징은 청년 정치 인물의 등장이다. 조슈아 웡이 대표적이다. 흐름적인 특징을 설명하자면, 1단계에는 운동이 천천히 올라갔다. 2단계에는 아주 높이 올라갔다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저는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2011년에 대학생 신분으로 민간인권전선 소집권자였다.

2012년에 국민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식 애국교육을 시도했는데, 그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다. 조슈아 웡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가 이때 각성했다. 중국은 홍콩 젊은이들이 중국이라는 정체성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2014년에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며 거리로 많이 나왔다. 결국 민주파 시민, 정치인, 청년들이 참여해 직선제를 얻어내려는 우산운동으로 이어졌다.

우산운동 때 저는 이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최전선에서 운동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 학생들은 많이 참여했다. 우산운동은 정말 홍콩에서 전례가 없는 운동이었다. 주요 도심부 도로를 79일간 점령했다. 창의적인 저항 방법도 많이 나왔다. 레논의 벽도 그 때 처음 등장했다.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서로 구해주고 돌봐주는 것도 그 때 시작됐다. 최루탄도 그때 마셔봤다. 그 경험으로 이번에도 경찰에 어떻게 대응할지 더 잘 알 수 있었다.

우산운동은 최후에는 법정에서 점거 금지령을 내린 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끝났다. 중국이 홍콩의 선거를 완전히 통제하려는 것은 막았지만, 진정한 민주화라는 면에서 보면 실패했다. 끝나고 나서 여기에 대한 반성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79일간 도로를 점령했는데도 정부는 반응이 없었다. 홍콩인이 많이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도 반성해야 할 점이었다.

우산운동 이후 민주화 운동은 저조해졌다. 그 뒤 몇 년은 시위를 열어도 몇 만 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시기를 틈타 의원 자격 박탈, 정당 취소, 언론 취재 금지, 민주화 운동 세력 수감 등이 일어났다. 정말로 운동의 전망이 없어 보였다. 분노하기는 하는데 뭘 어떻게 할지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 홍콩 입법회 건물 외벽에는 송환법 철회를 요구하는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상현

홍콩 민주화 운동의 세 번째 계기, 반송중 시위

그러던 중 2019년 송환법 제정 시도가 일어나며, 홍콩 민주화 운동도 3단계로 접어들었다.

홍콩인은 중국으로 보내진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크다. 중국에서는 잘못하면 의견 표현만으로도 수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송환법이 제정되면, 홍콩의 사법 방어 체계가 무너지고 중국에 가서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는 우려가 있다. 일례로, 송환법이 통과되면 홍콩에서 중국 인권을 위해 일하는 단체나 개인도 중국에서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진다. 그 뒤에는 어떤 처벌을 받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6월 12일 홍콩 시민이 입법회를 점거해 송환법 제정을 막은 것이다.

정부는 2월부터 송환법을 추진했다. 민간인권전선은 3월부터 시위를 전개했다. 민주화 운동이 저조한 상황에서 1만여 명이 나왔다. 4월부터 상황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4월에 거행한 민간인권전선 2차 시위에는 13만 명이 나왔다. 그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우산운동을 이끌었던 지도부 9명이 전원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특히 베니 타이 교수 등 나이 많은 사람 3명에 대한 유죄 판결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홍콩 시민들은 ‘불복종 운동을 하면 이렇게 대가를 치르고 수감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올해 5월부터 6월 9일 103만 명이 나올 때까지 중·고등학생을 포함해 천주교, 기독교 등 종교단체, 시민단체들이 열심히 노력했다. 6월 9일에는 다 나와야 한다고 온라인에서 연대서명도 했다. 그래서 정말 놀랍게도 6월 9일 103만 명이 나왔다. 홍콩 주권의 중국 반환 이후 최대 기록이었다.

정부는 "많이 나온 건 알겠는데 송환법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평화적인 방법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6월 12일 많은 사람이 총파업, 동맹휴학, 소상공인 철시 3파 투쟁을 벌이며, 의회를 포위하고 송환법 통과를 방해했다. 결국 그날 송환법을 막아냈다. 그날부터 경찰도 최루탄, 고무탄을 쏘며 시민을 폭력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6월 12일 이후에는 송환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킬 방법이 없어졌다. 16일에 잠시 송환법을 연기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그러고 나서도 사람이 계속 나왔다. 그리고 23주가 지났다.

젊은이들은 이제 여러 계층의 사람이 여러 방식으로 민주화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노래, 종이학, 기도회 같은 평화적 방법을 쓰는 사람도 있고, 급진적 방법을 쓰는 사람도 있다. 대신 우산운동의 경험에 바탕해 "분열하지 말고 단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하다. 그래야 정부가 양보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정부가 일부 사람만 데려다 대화하는 방법으로 분열을 시도했지만, 시민이 응하지 않았다.

홍콩 시민이 원하는 것은 자유와 민주, 그리고 경찰 폭력 반대

홍콩 시위가 이렇게 오래 온 건 경찰 폭력 때문이다. 민주주의 쟁취를 막는 경찰의 탄압을 반대하게 됐기 때문이다. 지금 멈추면 경찰의 폭력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광복홍콩 시대혁명을 외친다. 이는 경찰이 질서를 지키고 시민을 때리지 않고 문명적이던, 자유롭고 민주적인 홍콩을 되찾는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경찰 폭력은 오늘(11일) 실탄 발사에서도 보셨겠지만 점점 상승해왔다.

경찰폭력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무력 사용이다. 최루탄, 고무탄, 실탄, 물대포를 쓰는 것이다. 경찰이 시위자를 적으로 본다. 예를 들면, 경찰은 곤봉으로 머리를 때리지 않아야 한다. 원래 때릴 필요 없다. 진압하려면 다른 데 때리면 된다. 그런데 다들 머리를 때린다.

둘째, 비인간화다. 시위대를 바퀴벌레라고 부른다. 르완다 학살 때 군인들에게 상대를 인간으로 보지 않게 하기 위해 쓰던 방식이다.

셋째, 성폭력이다. 남녀를 불문한다. 홍콩 북쪽에 구치소가 있는데, 거기는 CCTV가 없다. 거기에서 성폭력이 심하다는 이야기가 돌고, 강간 이야기도 나온다. 아직까지는 주장이다. 사실 확인이 어려운 부분이 있다. 영상이 없다. 이외에도 그저께 한 여자가 복면을 쓴 4명의 괴한에게 윤간 당하고, 낙태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반대 집회에 참석한 남자 중에도 성적 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시위에 참석한 여자를 창녀라고 부르는 일도 있다.

넷째는 제도적 폭력이다. 현재 홍콩은 경찰에 무제한적 권력을 주고 있다. 그 예 중 하나가 공안 조례다. 영국 식민지 때 만들어졌는데, 3명 이상이 모였을 때, 경찰이 이들이 공중질서를 파괴한다고 판단하면 불법집회로 규정할 수 있다. 때로는 노래를 불렀다고 불법집회로 규정된다. 선거 때 사람들이 모였다가 불법집회로 규정되기도 한다. 또 다른 예는 얼마 전 통과된 복면금지법이다. 시위대는 복면을 쓰면 안 되는데 경찰은 복면을 써도 된다.

이런 일에 대해 경찰에 불만을 제기해도 소용이 없다. 자기들이 자기를 조사한다. 제대로 조사 안 된다. 그래서 현재 독립적인 조사위원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경찰 폭력 문제를 미국이나 영국에 가서 이야기하면 "이건 경찰권 문제지 민주주의 문제는 아닌데"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을 겪어본 한국은 이해할 것이다. 경찰이, 무기를 쥔 이들이 권력 남용할 때 이 게 어떻게 민주주의 쟁취를 방해하고 저해하는지 한국은 알 것이다.

홍콩이 현재 하고 있는 운동은 하나는 민주와 자유의 쟁취, 또 다른 하나는 경찰 폭력 반대다. 경찰 폭력에 제한이 없으면 진짜 민주와 자유는 쟁취할 수 없다. 그래서 홍콩시위대의 5대 요구 중 세 가지도 경찰 폭력과 관련된다.

▲ 간담회가 끝난 뒤 얀호라이 부의장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참가자들. ⓒ프레시안(최용락)

"홍콩과 한국 교류 늘리고 서로 지지해나가자"

마지막으로 한국과 홍콩의 교류와 연대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다.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생각이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한국정부보다는 민간사회 교류를 희망한다. 한국은 사회운동의 경험과 자원이 많다.

한국과 홍콩이 왜 이렇게 교류가 적은가 생각하면, 홍콩에도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적고, 한국에도 중국어나 광둥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 것 같다. 또, 한국에서 영어가 보편적이지도 않다. 제가 석사 논문을 쓸 때 영어로 된 한국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번역으로 교류를 높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둘째는 홍콩의 민주화 운동에 의사와 변호사 같은 전문가나 전문 단체가 많이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 수가 부족하다. 인권에 관심이 있는 한국의 변호사나, 의사, 기자가 홍콩의 변호사, 의사, 기자와 연대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셋째는 한국인이 여러 이유로 홍콩에 많이 오면 좋겠다. 홍콩에 계엄령이 내린 것이 아니다. 공항도 움직인다. 최루탄이 있을 뿐인데 한국인들은 습관이 되어 있으니 어렵지 않으실 거다(웃음). 한국인이 오신다면 많이 격려가 될 거다. 오셔서 중국자본도 많으니, 큰 프랜차이즈에 가시기보다는 작은 가게에 많이 오시면 격려가 될 것이다.

내일 홍콩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마음이 무겁다. 제가 오던 날 홍콩 시민 한 명이 죽었다. 오늘 또 한 명이 실탄에 맞았다. 홍콩 시위가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경찰의 진압도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테니 지지하시고 힘도 주시고. 학생이 죽은 사건 때에도 많은 홍콩 시민이 이한열을 떠올렸다. 홍콩과 한국은 비슷하고 역사가 발전하는 단계에 있는 것일 테니 서로 지지해나가면 좋겠다. 감사하다.

최용락 기자 (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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