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폭력’ 논란…문제는 시선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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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1.06. 오전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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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24)
<증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두 영화의 장애를 향한 시선
시선에 관한 논의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파놉티콘, 원형 감옥. 사진은 파놉티콘 구조를 모형으로 하여 쿠바에서 건설했던 프레시지오 모델로(Presidio Modelo) 감옥이다. 중앙에서 간수는 죄수들을 모두 관찰할 수 있으며, 죄수는 시선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이는 조지 오웰의 ‘1984’가 개념을 제시했던 현대 감시 사회의 현실적 구현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최근 한 연예인이 세상을 등져 많은 사람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겼습니다. 그에게 고통을 준 것은 ‘악플’이라고 하지요. 비방을 넘어 혐오에 가득 찬 댓글, 이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더 나와선 안 될 텐데요. 이를 위해 지난 10월30일, 사이버폭력예방교육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습니다.[1] 이것은 말로 가하는 폭력이지만, 우리가 상대방을 어떤 눈으로 보는가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악플이란 결국 그가 우리와 달라 보인다는 이유로 수많은 말이 오고 가는 와중, 삐죽한 송곳이 마음에 날아와 콕 박히는 사태일 거니까요. 그렇다면 상대방을 보는 눈, 즉 시선에 관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을 거예요.



시선에 관한 논의를 들어 보신 적이 있을까요? 영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로라 멀비라는 영화비평가가 주장한 남성적 시선(male gaze)이라는 개념을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어요.[2] 영화는 관찰의 쾌락과 동일시의 쾌락을 동시에 제공하는데, 그것이 보통 남성의 욕망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관음증적으로 응시하여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죠.

또,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권력론에 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가 파놉티콘을 통해 설명한 현대 통제 권력의 작동 방식을 알고 계실 텐데요. 영국 철학자, 정치가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은 원형 감옥입니다. 중앙에 있는 탑에 간수가 있고, 죄수들은 탑을 둘러싼 원형의 방 안에 갇혀 있지요. 죄수들의 방은 유리로 되어 있어서 간수는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지만, 간수가 있는 곳은 죄수의 방에서 들여다보이지 않아요. 죄수는 처음에 간수가 있을 때만 자기 행동을 조심하지만, 곧 간수가 없을 때도 행동을 조심하게 됩니다. 죄수 입장에선 간수가 없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이 원형 감옥이라는 구조가 만들어 내는 가상의 시선, 24시간 죄수를 따라다니며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시선이 푸코가 간파해 낸 현대 사회의 감시 권력이었어요. 멀비와 푸코의 논의에서 시선이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이죠.

그래서 그럴까요? 일상에서 우린 시선 폭력이라는 표현을 쓸 때가 가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길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때, 심지어 고통스럽게 만들 때가 있지요. 여성이 느끼는 불편에 대한 설명과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관한 훈수도 여럿 찾아볼 수 있습니다.[3]

하지만 시선 폭력에 먼저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장애인이었죠. 왜 그럴까요? 우리는 특이한 것에 쉽게 관심을 주게 됩니다. 심리학에선 두드러져 보이는 자극을 현저성(salience)이라고 부르는데,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장애는 이런 현저성이 높다고 합니다.[4] 인종이나 성별보다 장애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죠. 그렇다 보니, 장애는 쉽게 주목의 대상이 되고 그 시선은 때로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지적이나 힐난을 넘어 시선이 나와 너를 경계 지을 때, 그리하여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거나 어딘가로 가지 못하게 만들 때 작동하는 시선이란 폭력이자 권력의 행사입니다.

여기에선 장애를 다룬 영화 두 편을 소개하려 합니다. 하나는 2019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증인’이에요. 정우성씨가 변호사로 나와 자폐 스펙트럼인 고등학생 증인과 인간적 유대를 쌓아가는 영화죠. 다른 하나는 2003년에 개봉한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입니다. 하루하루 소일하며 보내던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가 하반신 마비인 조제(이케와키 치즈루 분)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서로를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영화는 장애를 어떻게 시각화하고 있는지, 그 시선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알려 주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영화 ‘증인’에서 보여준 ‘선택하는 시선’

과거 정의를 위해 뛰어다니던 변호사 양순호(정우성 분)는 생활을 위해 대형 법무법인에 취직해 잡다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그는 이제 사회를 위해 나서기엔 생활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이러던 참에 법무법인 대표변호사가 순호를 잘 보고 있다면서 일을 하나 맡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국선변호사로 80대 노인을 살해한 혐의로 붙잡힌 가정부를 도우라는 것이었어요. 검찰은 가정부가 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나, 가정부는 노인이 자살하려던 것을 자신이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있네요. 문제는 사건의 증인입니다. 길 건너편 집에 살고 있던 자폐 스펙트럼 장애 고등학생 임지우(김향기 분)가 그 광경을 보았다고 합니다. 순호는 지우를 만나 그를 법정에 세워, 그가 증거 능력이 없음을 인정받으려 합니다. 국민 참여 재판으로 진행되고 있기에 자폐 환자가 증인으로 서면 전문가적 판단(중간에 나오는 의사는 지우가 증언 능력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해요)보다 겉보기를 우선할 것이며, 따라서 지우 발언이 힘을 상실할 거로 생각합니다. 순호는 지우를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갑니다.

여러 리뷰는 영화가 인간관계에서 따뜻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 장애에 관한 접근이 세심하다는 점 등 장점도, 진행이 상투적이고 주인공인 순호 역이 너무 일면적이라는 점 등의 단점도 지니고 있다고 다양하게 적고 있어요. 하지만 모두 ‘착한’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카메라가 장애인과 가족을 대하는 방식 또한 기존 영화처럼 장애인을 그저 불쌍한 사람들로만 그리거나 내 인식 지평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전시하지 않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우가 순호에게 던지는 질문,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는 한때 좋은 사람이었지만 세파에 휩쓸려 ‘타락’했던 주인공이 여러 계기로 인해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상징하면서도, 관객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지향하고 있는 바는 명확해 보여요.

좋은 영화, 착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장애를 다루는 방식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영화는 분명 선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고 장애를 희화화하거나 그저 사회 문제로만 그리는 것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지만, 작품이 사로잡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모습은 여전히 너무 이상적이에요. 예컨대 영화는 지우가 유일한 증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증인으로 문제가 없는 이유를 ‘자폐성 장애인은 거짓말을 못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폐성 장애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대인관계에서 별다른 계산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지요. 자폐성 장애 아동을 돌보는 부모가 흔히 “아이는 거짓말을 안 해요”라고 말하는 점, 마음 이론(Theory of Mind)에서 타인이 거짓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며 이는 상당한 정신 기능의 발달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자폐성 장애인은 거짓말을 못 한다’라고 생각할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5]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속하는 아동도 반사회적 거짓말(antisocial lies, 실수를 숨기기 위한 거짓말)과 흰 거짓말(white lies, 예의를 차리거나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거짓말)은 정상 대조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말할 수 있었다고 해요.[6] 물론 이 실험을 통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아동이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화가 법적 증거로 자폐성 장애인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지요. 더구나 지우의 경우 지적 능력에 문제가 없습니다. 이 경우에도 아이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장애 환자에 관한 영화의 시선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증인’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고등학생 지우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순수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전 순수를 담당하던 것이 시골의 순박함이었다면 이제 그 역할은 장애인에게 옮겨졌다. 꼭 순수의 상징이 있어야 하는 걸까. 출처: 네이버 영화


왜 지우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인물로 제시될까요? 그것은 그가 “착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7] 또는 순수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장애인은 사회적 차원에서 발달이 늦고, 따라서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모습은 순호가 한때 정의감에 찬 인물이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점차 때가 묻고, 이제는 제도 안에 편입되어 가는 것과는 대조를 이루지요. 아니, 이루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요. 그래야만 순호는 지우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잃어버렸던 순수를 깨달을 테니까요.

안타까운 것은, 영화가 제시하는 시각에선 순수하지 않은 장애인 또는 거짓말을 하는 장애인은 서 있을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문제는 정상 집단이 집단으로 포섭될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한다는 거예요. 정상 집단이 결여하거나 상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순수’나 ‘선’ 등을 지닌 외부 대상을 선별하여 집단에 포함하고, 이를 그 집단의 표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죠.

이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대표성(representativeness) 논의로도 이어볼 수 있어요. 장애인을, 또는 특정 장애 환자를 대표하는 것은 누구일까요? 이 문제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같이 그 성원이 지닌 특성이 다양한 경우 두드러집니다. 예컨대, 미국에서 자폐 권리 운동(autism rights movement)이 진행되고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이 회자하면서 “자폐는 장애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8] 신경다양성 개념은 현대 사회가 신경 발달의 특정한 상태만을 정상으로 용인하지만 사실 신경은 다양한 형태로 발달할 수 있으며, 오히려 다른 형태로 신경이 발달한 경우 ‘특별’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인데요. 주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의 권리를 말할 때 제시되는 개념이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동물 사육 공간이 눈앞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볼’ 수 있다는 템플 그랜딘의 사례가 같이 언급되곤 합니다.

하지만, 자폐는 장애가 아니라는 주장은 고기능(high-functioning)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어요. 말을 할 수 없고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저기능(low-functioning)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은 자폐를 장애로 인정받아야 지원을 받아 생활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사회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여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죠.

예컨대, 영화에서 지우는 한 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패턴을 인지하는 능력이 엄청나며(영화 초반, 순호의 무늬 넥타이를 보고 넥타이에 그려져 있는 물방울무늬가 몇 개인지 순식간에 맞춥니다)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미세한 소리도 잘 듣습니다. 물론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중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모두를 대표할 수 있을까요? 최근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 ‘굿 닥터’가 있었죠. 자폐 스펙트럼 장애 중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주인공은 엄청난 암기력과 공간 지각 능력을 지닌 것으로 나옵니다. 2005년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윤초원(조승우 분) 또한 웬만한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마라톤 대회 전 구간 3시간 내 완주를 해낸 인물이죠.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이들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장애인만 받아들이려는 건 아닐까요. 이전 장애를 완전히 배제하던 사회에서, 그들 중 일부만을 선별하여 포함하게 된 것을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이 아닌, 두 청춘의 사랑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두 청춘의 사랑을 담은 영화입니다. 둘은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끌리고, 함께 하고, 헤어집니다. 여느 사랑 노래처럼요. 모든 사랑 이야기가 특이하겠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한쪽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두 사람 모두에게 장애가 있다고 말해야겠죠. 한쪽에겐 신체적 장애가, 다른 한쪽에겐 정서적 장애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장애를 극복하려는 두 사람의 노력을 그리는 대신, 둘이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조용히 담아냅니다.

대학교에 다니며 심심한 매일을 보내는 츠네오는 우연히 조제를 만나게 됩니다. 츠네오는 누군가와 정서적 유대를 만들지 못하고, 그 삶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처럼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기에 츠네오 자신 또한 현실감 없이 살아가고 있지요. 조제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합니다. 츠네오를 만나게 된 것도 할머니가 밀고 다니는 유모차 속에 숨어 산책하러 나갔다가 할머니가 유모차를 놓치고, 할머니를 도우려던 츠네오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죠.

츠네오는 조제와 할머니의 귀가를 돕게 되고 식사를 대접받습니다. 그 덕에 조제의 삶에 조금씩 걸어 들어가게 되죠. 조제와 친해져서 같이 외출도 나가는 츠네오이지만 할머니는 더 관계를 진전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조제에겐 “주제를 알아야 한다”며 책망하고, 츠네오에겐 “주변에서 알면 어떻게 할 거냐”며 따지고 드는 할머니. 츠네오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그렇게 둘 사이는 끝나는 듯합니다.

졸업이 가까워지고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츠네오는 조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제의 집을 찾아갑니다. 둘 사이를 가로막던 벽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둘은 연인이 되어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죠. 그렇게 계속될 것 같던 둘의 시간은 전구가 꺼지듯, 어느날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츠네오는 말해요. 헤어지게 된 것은 자신이 도망쳤기 때문이라고.

연애를 통해 두 사람은 성장했다는 말은 진부하지만, 이 영화에 이만큼 어울리는 표현도 없는 것 같아요. 츠네오는 다른 사람과 맺는 정서적 유대의 소중함을 배우게 되지요. 조제를 떠난 뒤 츠네오가 흘리는 눈물은 조제를 통해 배운 것이죠. 한편, 조제는 츠네오를 통해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장을 보러 나가는 조제의 모습은 비록 츠네오가 도와주었을망정, 이전 할머니의 유모차 속에서 세상을 훔쳐보던 조제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알려주지요.

츠네오와 조제는 서로의 관계를 통해 성장하며, 이는 둘 모두에게 결여가 있기 때문이다. 츠네오는 관계의 안정성을, 조제는 보행의 자유를 모른다. 둘은 서로에게 없던 것을 주었고, 비록 관계가 계속되진 못했다 해도 두 사람은 만남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출처: 아이엠디비


이런 영화를 두고 누군가는 츠네오의 성장은 기만이라고 말합니다.[9] 영화는 츠네오의 시선을 통해 조제의 장애를 편리한 방식으로 전시하고, 그 과정을 통해 쉬운 성장을 이루는 모습을 보일 뿐이라고. 조제의 좌절과 고통이 그려지지 않은 영화의 시선은 너무도 미성숙하다는 것이죠. 맞아요. 조제의 불편은 영화에 전면으로 배치되지 않습니다. 그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저는 츠네오의 시선에 비친 조제의 삶이 꼭 고통스러운 것이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조제의 불편을 다 그려내야 그의 장애가 완성되는 걸까요? 영화의 시선, 그리고 우리의 시선은 꼭 장애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끌어안아야만 온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요? 그것은 오히려 관음증의 시선은 아닌지요. 다 보아야만, 내 눈으로 다 담아내야만 알았다고 말하는 장악의 시선.

오히려 불편함이 영화 바깥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 이야기가 아닐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장애인의 고통을 전시해서 관객의 눈물을 자극하거나 장애인을 구원하는 비장애인의 서사를 완성해 나가는 방식을 통해 관객에게 윤리적 해결을 제시하는 방식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조제를 불쌍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예속 관계를 놓아둔 상태에서 정서에 호소하는 것일 뿐이에요. 물론, 장애인의 필요를 채우고 우리 사회에서 불편하게 여겨지는 지점들, 또는 사회가 장애를 만들어 내는 역학을 찾아내 고쳐 나가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무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시혜적 시선을 통해 나타날 필요는 없지요.

장애를 똑같은 권리를 지닌 다른 삶일 뿐으로 바라보는 것은 평등함의 시선이 어떻게 정치적·윤리적 주장이 될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각자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대담한 주장이지요. 예컨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교육에 관해 묘한 주장을 해요.[10] 교육자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자라고 전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얼핏 보기에 이 말은 현실과 부딪히지요.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운동을 잘하는 학생이 있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모두는 동등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일정한 배움을 강요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가능성이 억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단지 사회에 필요치 않다는 이유로 우리는 누군가의 학습 역량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장애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장애가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폭력과 대응’이라는 쳇바퀴를 벗어나자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내가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말할 겁니다. 두 영화를 통해서 그 시선의 유형을 그려보았어요. 하나의 시선은 장애를 배척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특정 유형의 장애만을 사회에 포함하는 시선이었어요. 다른 하나의 시선은 비록 장애를 조금은 쉬운 것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은 있지만 하나의 삶으로, 그저 다른 존재하는 방식으로 바라보는 시선이었지요. 우리가 세상을,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가지로 얽히고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그 작용을 펼쳐갑니다. 어떤 때는 주체를 권력의 그물에 싸매는 역할을, 어떤 때는 욕망의 규정을, 어떤 때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일을 하지요. 그렇다면 시선의 윤리를 말하는 일이란 이런 시선의 작용을 세심하게 살피고, 때로는 그 부작용을 폭로하고 때로는 그 근거를 허물며 때로는 그 권리를 옹호하는 일일 겁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언급할 때 해리엇 맥브라이드 존슨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변호사이자 장애인권운동가였던 그는 유명한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를 상대로 장애아 안락사를 반대하는 칼럼을 2003년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기고했다. 글에서 그는 말한다. “내가 못생긴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통 나를 보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거예요.” 출처: 뉴욕 타임스


맨 처음에 소개했던 것처럼, 시선에 관한 논의는 흔히 시선 폭력으로 흐르곤 합니다. 여성이나 장애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시선은 인정받을 수 없겠지요. 시선 폭력을 포함하여 특정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폭력과 그 대응만을 이야기하면 논의는 계속 쳇바퀴를 돌릴 수밖에 없을 거예요. 누군가가 저지르는 폭력, 그를 해결하기 위한 제재, 금지, 복수의 논리는 순환하니까요. 과감히 이 순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폭력적인 나쁜 시선을 설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두는 대신, 시선 자체의 기능을 문제 삼고 같이 그 기능과 역할, 힘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시선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습니까?

김준혁/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1. 이원율. “혐오 악플 이제 그만”…’설리법’ 나온다. 헤럴드경제. 2019년 10월 30일 [cited 2019년 10월 31일]. Retrieved from: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91030000532.

2. Mulvey L.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Screen. 1975;16(3):6-18.

3. 고재학. 시선 폭력. 한국일보 [Internet]. 2017년 5월 17일 [cited 2019년 10월 25일]. Retrieved from: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05171689298406.

4. Rohmer O, Louvet E. Describing persons with disability: salience of disability, gender, and ethnicity. Rehabil Psychol. 2009;54(1):76-82.

5. Wellman HM, Peterson CC. Chapter 4. Theory of Mind, Development, and Deafness. Baron-Cohen S, Tager-Flusberg H, and Lombardo MV eds. Understanding Other Minds: Perspectives from Developmental Social Neuroscien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6. Li AS, Kelley EA, Evans AD, Lee K. Exploring the Ability to Deceive in Children with Autism Spectrum Disorders. J Autism Dev Disord. 2011;42(2):185-195.

7. 류승연. 착한 영화 ‘증인’의 오류… 자폐성 장애인도 거짓말하는 ‘보통 사람’. 한국일보 [Internet]. 2019년 3월 5일 [cited 2019년 10월 25일]. Retrieved from: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3031173353368.

8. 스티브 실버만. 강병철, 옮김. 뉴로트라이브: 자폐증의 잃어버린 역사와 신경다양성의 미래. 알마; 2018.

9. 한지은. 편리한 성장의 불편함에 대하여. ㅍㅍㅅㅅ [Internet]. 2017년 10월 22일 [cited at 2019년 10월 16일]. Retrieved from: https://ppss.kr/archives/58687.

10.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무지한 스승. 궁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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