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알고 싶은 울진의 가을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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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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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목욕하던 덕구온천·신선이 노닐던 주천대
번접한 인파를 벗어나 나홀로 즐기는 ‘비밀 정원’
덕구계곡을 흐르는 샛물이 가을빛에 반짝거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 곳 바로 윗부분에 덕구온천의 원천이 되는 천연 용천수가 있다. 신동우 기자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정말 알려주기 싫은 곳들이 있다.

막걸리 한 병 들고 올라가는 호숫가나, 부부싸움 끝에 찾아가는 혼술하기 좋은 대포집같은 것들 말이다.

유명 관광지와 달리 그 곳은 오로지 나를 위한 장소같다.

프랜시스 버넷의 동화처럼, 세상의 각박함에 혼이 난 어린 마음이 달려가는 나만의 '비밀 정원'이다.

당연히 누구나 가슴 속에 비밀정원 하나씩은 품고 산다. 정치가든 장사꾼이든 다르지 않다.

조르고 졸라서 듣는, 경북 울진 토박이들이 털어놓는 그들만의 비밀정원을 살짝 엿보자.

◆알몸으로 뛰어놀던 내 어린시절 '덕구계곡'

울진에는 계절마다 색깔도 다르고 느낌도 다른 여러 명소가 있다.

그중에서도 덕구온천(경북 울진군 북면)은 특히 유명한 관광지다. 비밀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조금 민망하다.

그렇지만 덕구온천에서 이어지는 계곡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여기에 '추억'이라는 단어까지 덧씌우면 왠지 의미가 달라진다.

전찬걸 울진군수에게 덕구계곡은 어린시절 뛰어놀던 공짜 물놀이장과 개구장이 친구들이 지금도 오라고 손짓하는 장소이다.

옛날 울진 북부지역에서 나고자란 아이들에게 덕구계곡은 1년에 2번은 꼭 가야만 하는 필수코스였다. 바로 설날과 추석을 앞두고 목욕을 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온천 리조트가 있지만 1960, 70년대만 해도 덕구계곡에는 노천목욕탕이 있었다.

따뜻한 물이 흐르는 계곡 중간에 겨우 나무판자로 남녀를 구분했다. 당연히 천장은 뚫려있는 반 개방형 온천이다. 목욕비는 10원이었다.

전 군수는 "어릴 적에는 부모님과 함께 갔지만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동네 형들과 함께 다니고는 했다. 가끔 형들이 목마를 태워 벽 넘어 여탕을 몰래 훔쳐보라는 곤욕스러운 특명을 내리고는 했다"고 귀뜸했다.

물론, 꼬마의 수작질이라고 해봐야 어른들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임무를 수행하러 목마를 타고 오르면 보기도 전에 이미 어른들에게 물세례를 받아 무너지기 일쑤였다.

전 군수 역시 가끔은 공짜 목욕을 하기 위해 돈 받는 아저씨가 나오기 전에 새벽같이 목욕을 가기도 했다.

목욕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내려오는 길이 문제다. 주인아저씨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재빠른 사람은 도망가고 잡히는 사람은 목욕비를 홀딱 뒤집어 써야 한다.

1982년 8월에 찍혀진 울진 덕구계곡 야외 온천장 모습. 천막에 가려진 목욕탕 옆에 남탕이라는 팻말이 세워진 모습이 재미있게 다가 온다. 울진군 제공


1984년 홍수로 노천 온천탕이 쓸려나가고 온천수를 끌어 오는 대중목욕탕이 생기면서 목욕하러 덕구계곡까지 올라가야 하는 수고로움은 덜어졌다.

"하지만 요즘도 덕구계곡을 오를 때면 그 시절 따뜻한 물이 흐르던 덕구계곡과 계곡사이에 자리 잡은 온천탕이 그리워진다"고 전 군수는 추억했다.

지금은 정비가 이뤄져 옛 어설픈 추억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용소폭포, 선녀탕, 옥류대 등 기암괴석과 계곡의 물이 어우러진 절경을 따라 4km의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덕구계곡 산행길은 대부분 현재 덕구온천리조트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주로 이용하는데 전 군수만이 추천하는 코스가 있다.

주인리 맞덕구 길을 지나 응봉산 등산로 입구에서 시작하는 코스이다. 모랫재에서 등산로 분기점 방향으로 간 후 원탕 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이 코스가 바로 어린 시절 전 군수가 목욕을 하러 다니던 길이다.

기존 산행길보다 조금 난이도가 있지만 버스비 10원 대신 1원에 2개짜리 카라멜 20개를 들고 하나씩 까먹으며 오르던 달달한 기억이 있다.

축소판으로 재현된 세계의 유명 다리를 걸으며 잠깐이나마 세계여행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어머님의 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의 효자샘 한 모금은 산행의 갈증을 풀어준다.

따뜻한 물이 하늘로 솟구치는 온천 원탕의 신기한 광경을 보며, 그 옆 족탕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일상에 지친 마음의 피로까지 풀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산행 한번으로 이렇게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으니 그야말로 1석 3조의 여행인 셈이다.

울진군 근남면에 위치한 주천대. 술 '주'가 들어간 이름답게 풍류를 즐기기 그만인 곳이다. 울진군 제공


◆막걸리 한잔으로 맞이하는 '주천대'

교통이 불편하고, 그 탓인지 관광객도 적었던 덕분에 울진지역에는 구석구석 신비로움이 감도는 장소가 많다.

김성준 울진문화원장이 추천하는 주천대(경북 울진군 근남면)는 특히 그런 의미에서 무척 낯이 익다.

중국영화의 장면처럼 나뭇잎 하나를 밟고 하늘을 오르는 신선이라도 나타나면 딱 어울릴 듯 하다.

김 원장은 "가끔 한가하거나 울적할 때 막걸리 한병 허리에차고 주천대를 찾는다. 강 바람과 노송 그늘에서 한시 한줄을 읊으면 어느새 시름이 가신다"고 한다.

주천대는 특이하게 술 '주(酒)'를 이름으로 쓴다. '술이 샘솟는 무대'라는 뜻쯤으로 풀이하면 되겠다.

원래 수천대(水穿臺)라는 이름이었다고 하나 이후 선비들이 이곳 경치를 사랑해 술을 마시면서 시국을 논했다고 해서 주천대로 개명했다.

정말 선조들의 탁월한 혜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물 소리와 소나무 향기를 안주삼아 술상을 차리면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강제 개명한 장본인은 조선 인조 시기 문신인 임유후이다. 1628년(인조 6) 정쟁을 피해 여기에 와 있었을 때 이름을 고쳐 지었다.

그가 남긴 '주천대기'를 보면 '험한 타향살이를 하며 이 대에 올라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잊었는데 하물며 지금 술이 샘처럼 있음에야 청컨데 주천대로 부르고자 한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또 주천대 주위에 기암괴석과 계곡, 절벽, 정자 등 8곳을 정해 팔경이라 불렀는데 명확한 기록이 없어 어디인지는 찾기 어렵다.

"대신 그 시절 선비의 마음으로 돌아가 직접 팔경을 손꼽아보는 재미"가 바로 김 원장이 풀어놓는 주천대의 매력이다.

학창시절 한번쯤은 들어봤을 금오신화의 저자 매월당 김시습 또한 여름철 주천대를 거닐며 피서를 즐겼다는 문헌이 있다.

때문에 주천대 아래쪽에는 김시습의 유허비가 세워져 매년 4월 2일에 유림들에 의해 제가 지내진다.

주천대의 전망대라고 할 수 있는 꼭대기에서 호숫가를 바라보면 신비로운 모습에 왠지 금방이라도 깨달음을 얻어 하늘에 오를 것만 같다. 신동우 기자


호숫가를 마주하고 펼쳐진 대나무숲에서 주천대를 바라보면 물 위에 펼쳐진 너른 그림자와 물안개가 뭔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막걸리 한 잔과 함께라면 속세를 떠나 깨달음을 얻고 금새라도 하늘을 날아오를 듯 하다.

36번 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길에는 엑스포공원과 민물고기박물관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홀로 고즈넉함을 느끼며 들었을,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은 갚을 수 있다.

신동우 기자 sdw@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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