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분방 모네와 고집불통 아데나워가 손잡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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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1.01. 오전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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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등 유럽 전공 학자들이 분석한 유럽 화해와 지역 협력
“가해자 독일과 피해자 프랑스 등 각자 이해 따른 공동체 창설”


유럽의 역사 화해와 지역 협력-동아시아 평화 공동체 수립에 대한 함의

김남국 김유정 박선희 등 지음/이학사·2만2000원

유럽통합의 두 주역인 프랑스의 장 모네와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는 상반된 성향과 인생을 살아왔다.

모네는 청소년 시절부터 해외 생활을 했고, 자유분방한 인생을 즐겼다. 그는 20살 연하인 부하의 아내와 바람이 나서 아이를 낳았다. 1930년대 당시 유럽 국가들에서 이혼이 허락되지 않자, 대담한 ‘실용적’인 접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소련까지 가서 그녀에게 소련 국적을 얻게 하고는 이혼을 시켜서 결혼을 했다. 아데나워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도덕주의자였고, 그래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기독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는 고집불통의 반공주의자이자, 독일 민족주의자였다. 동독을 점령한 소련과의 타협을 거부해 독일 분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네는 평생 선출직에 나서지 않았고, 아데나워는 젊은 시절부터 선거에 나선 전형적 정치인이었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19세기말에 태어난 그들이 겪은 전쟁 경험과 그 전쟁들로 파괴된 자신들의 조국 재건에 대한 절박함이었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그들은 유럽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유럽 전체가 영구히 몰락할 것임을 알았다. 관건은 유럽 전쟁의 주역인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였다.

모네의 프랑스는 인구와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우월한 국력을 가진 독일이 다시는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반면, 아데나워의 독일은 자신의 전쟁능력을 영구히 제거하려는 연합국들이 의도하는 독일 해체를 막아야 했다. 미국의 모겐소 플랜은 독일을 4개 국가로 분할해, 비스마르크의 통일 이전으로 돌리려 했다.

1차대전 이전부터 유럽의 협력만이 유럽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한 모네는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독일의 경제능력을 되살리지 않고는 유럽의 부흥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네나워는 동독을 점령한 소련의 위협, 프랑스가 앞장선 연합국의 독일 해체 시도를 막으려면, 동독을 포기해서라도 나머지 독일의 철저한 서방화만이 해결책임을 간파했다.

독일의 전쟁 및 경제 능력의 중추인 독-프 접경지대의 석탄과 철광 자원을 양국의 공동관리로 하는 ‘유럽석탄철광공동체’(ECSC) 창설이라는 모네의 아이디어를 공식화한 ‘쉬망 플랜’이 나온 배경이다. 독일의 전쟁 능력을 통제하면서도, 독일 경제를 부흥시키자는 것이었다. 아데나워도 ‘독일의 서방화’를 위해서는 독일의 위협을 가장 크게 느끼는 프랑스의 우려를 잠재우는 것이 출발이어서, 기꺼이 모네의 생각을 지지했다. 유럽의 화해와 통합의 출발이었다.

독일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오른쪽)와 ‘유럽 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가 1952년 열린 유럽 석탄철강공동체의 첫번째 회의에 참석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유럽의회 누리집


김남국 고려대 교수 등 유럽을 전공한 학자들이 쓴 <유럽의 역사 화해와 지역 협력>을 관통하는 주제는 가해자 독일과 피해자 프랑스 등의 화해와 협력을 이룬 공통분모다. 독일의 경제 부흥이 주변국에도 이롭다는 실용적 사고였다. “유럽 통합의 주요 발전 동인은 초국가성을 내포하는 연방주의 사상이 아니라 ‘국가의 이해’ 또는 ‘전략’이었다.”(김유정) 이는 프랑스 역사가 제라르 보쉬아와 영국의 알렌 밀워드의 주장처럼 “자기 구제를 위한 유럽의 자구책”이었다.

그래서, 독일과 프랑스는 분쟁의 땅인 알사스-로렌 및 라인강 상류 지역을 두 나라뿐만 아니라 스위스까지 참가하는 ‘초국경지역’으로 만들 수 있었다.(박선희) 네덜란드도 국내에서 여론이 비등하던 독일로부터의 영토할양이라는 배상보다는 독일과의 경제협력을 주도적으로 선택했다.(고주현) 덴마크 역시 독일과의 고질적인 영토분쟁 지역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 기존의 국경선을 존치시키고, 각자의 소수민족 문제를 상호적으로 처리하게 됐다.(윤성원)

유럽의 통합으로 가는 화해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 ‘영국-아일랜드 역사 갈등과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김남국), ‘러시아-핀란드 국제 관계와 핀란드 외교정책의 변화’(안상욱)는 남북대립과 한일갈등이 여전한 우리에게 더 시사적이다. 북아일랜드의 신·구교도간 공존과 평화, 영국과 아일랜드의 화해를 가져온 1998년 ‘성금요일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 체결되기까지는 “평화를 위해서는 오랜 기간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대화와 타협”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전후 핀란드의 중립화 노선은 약소국이 강대국에 먹히는 상징어인 ‘핀란드화’라는 말도 나오게 했으나, 강대국 사이에서 약소국이 취할 수 있었던 유례없이 현명한 접근이었음을 지금의 현실이 웅변하고 있다. 소련 역시 동유럽 국가들을 위성국가화하지 않고 핀란드처럼 중립국가화시켰다면, 자신들의 안보와 체제 유지에 더 유리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문제와 독일-폴란드의 화해가 포함된 8개의 유럽 사례는 대표 저자 김남국 교수의 지적처럼 “한일 관계 정상화 및 동북아 평화 공동체 구상에 많은 함의를 준다.” 이런 유럽의 사례와 연구에도 우리에게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질문이 여전히 있다. 독일은 반성하는데, 일본은 왜 그러지 못하는가이다.

역사와 현실 인식에 대한 독일의 역량도 있겠지만, 독일로서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뿐만 아니라 주변 열강들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대가로 분단되기까지 한 독일에 비해 일본은 천황제까지 존속되는 ‘행복한 전후’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럽의 역사 화해 과정에서 프랑스가 독일을 전쟁의 원인을 추궁하는 대상이 아닌 새로운 유럽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설득해 할 상대로 여겼다”는 김 교수의 지적은 한일관계와 남북관계에서 상대가 어떤 입장을 취하든간에 한국이 견지해야 할 입장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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