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한 무지렁이의 제주 4·3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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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1.10. 오후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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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계획도 없이 가을 제주에 다녀왔다. 한림 해변 쪽에 3일, 성산 해변 쪽에 3일 숙소를 예약한 6박7일의 일정이었다. 첫날에 한라산을 올랐다. 성판악에서 출발해 백록담을 보고 원점 회귀하는 코스였는데 꼬박 8시간이 걸렸다. 힘들긴 했지만 백록담을 실제로 봤으니 나름 대만족인가. 구렁이처럼 경사면을 넘어온 구름에 거대한 분지가 가려졌다가 맑아졌다가 하는 대자연의 풍광은 비록 많은 등산객의 시끌벅적함 속에서도 충분히 신비로웠다.

다음날엔 좀 쉽게 다니자며 둘레길 걷기에 나섰다. 그렇게 고른 게 둘레길 10번 코스.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제주의 아픈 역사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중국 대륙을 폭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만들어놓은 알뜨르비행장과 비행기 격납고,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죽은 사람들의 위령비를 거치면서 천천히 제주의 역사에 젖어들었다.

제주는 도처가 4·3의 유적이다. 4·3의 역사를 알고는 있었지만 제주도에 와서 생각하는 4·3은 남달랐다. 눈에 보이는 들녘과 산자락은 물론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도, 억새에도 슬픔이 느껴졌다. 무엇에라도 끌린 듯 우리는 4·3의 흔적을 찾아서 다니게 되었다. 길을 달리다 무등이왓 마을 팻말을 만나 한때 평화로운 마을이었던, 지금은 ‘최초 학살터’와 ‘잠복 학살터’ 등의 이름으로만 남은 텅 빈 공터를 잠시 둘러보기도 했다. 대규모 집단학살의 현장인 조천읍 북촌 마을에도 가보았다. 1949년 1월 함덕 주둔 2연대 군인들에 의해 주민 450명이 학살된 곳이다. 경찰과 군인 가족만 제외하고 다 죽였다고 하니 이런 양민 학살이 또 있을까. 넓은 돌밭이란 의미의 ‘너븐숭이 4·3기념관’ 안에는 그날의 일이 사진과 영상 자료로 남아 있었다.

너븐숭이 기념관을 나온 우리의 발길은 본격적으로 4·3평화공원 기념관으로 향했다. 희생자들의 위령비와 기념공원이 넓은 부지에 조성되어 있는 이곳엔 유난히 까마귀가 많았다. 흐린 날씨 속에서 이따금 까악 까악 울어대는 까마귀들은 을씨년스럽기도 했지만 억울하게 죽은 혼들이 뭉쳐진 듯 검었다. 기념관 안에는 4·3 역사의 전모가 시기별로 자세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우린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러야 했다. 스쳐 지나가듯 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제주가 ‘레드 아일랜드’가 되어 빨갱이 소탕작전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는지는 납득할 수 없었다.

다음날엔 다랑쉬오름을 올랐다. 제주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다랑쉬오름은 분화구가 달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 올라 그림 같은 풍경을 잠시 감상하고 있자니 저 멀리 다랑쉬굴이 보인다. 이곳 역시 4·3 때의 학살 현장이다. 다랑쉬굴은 1991년 12월22일 ‘제주4·3연구소’ 조사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토벌대는 수류탄을 굴 속으로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으나 겁에 질린 주민들은 굴 안에서 가족들을 껴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토벌대가 손 들고 나간 일행 한 사람의 다리에 총을 쏘고 나머지를 다 데리고 나오라며 허리에 끈을 묶은 채 들여보냈으니, 그간 무지막지한 횡포를 봐왔던 사람들은 안에서 죽으나 밖에서 죽으나 오직 죽음뿐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들은 결국 토벌대가 잔가지를 모아 피운 연기에 질식되어 모두 숨졌다. 20대가 대부분이었고, 아홉 살의 아이, 50대의 부녀자 등 11명이었다. 그들이 남긴 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기들과 솥, 젓갈독 등이었다.

그날 이후 4·3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4·3평화공원 기념관에서 구입한 재일 소설가 김석범의 단편집 <까마귀의 죽음>을 읽었다. 1957년 일본에서 발표된 단편 ‘까마귀의 죽음’과 함께 ‘간수 박서방’ ‘관덕정’은 4·3의 실체를 외부에 최초로 알린 연작이다. 오직 여자가 많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건너간 머슴 출신 인력거꾼 박서방은 그곳에서 감방의 간수로 거듭난다. 사람들의 고름을 빨아주며 연명해온 허물영감은 4·3 때 시체의 목을 바구니에 매고 다니며 가족을 찾아줬다. 이데올로기의 ‘이’자도 모르는 이들은 시대의 격랑에 휘말려 그 톱니바퀴에 낀 채 열심히 역할을 수행했다. 소설은 흑백사진과 글만으로는 알 수 없는 당시 사람들의 심리와 그들이 느꼈을 고통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어쩌다보니 이번 제주여행은 4·3여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극히 일부만 견문하고 온 것에 불과하지만 4·3의 아픔을 내 가슴에 어느 정도는 품을 수 있었다. 문득 대학 축제 때 학과 주막 뒤편의 잔디밭에서 목청껏 불렀던 안치환의 ‘잠들지 않는 남도’가 떠올랐다. 역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자욱한 정서만으로 무얼 그리 목청껏 불렀는지, 참 무지렁이 같은 청춘이었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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