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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문 만들기

제가 국사 숙제로 역사 신문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라서 지식인 여러분들에게 물어봅니다

A4용지로 5장 이상 범위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후기 까지인데여

여러분들이 하신걸 저한테 보여주시면 제가 내공을 많이 드릴께여

매일에 보내주세여 매일은 topjks1018@daum.net/ 보내주세요 그럼 내공은

300을 드릴께요^^ 그럼 부탁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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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topj****
작성일2008.09.23 조회수 7,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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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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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기본 학습】

 

【심화·보충 자료】

1. 조선 전기 편찬 사업

(1) 윤리서 ;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효도와 상속, 활자 인쇄기술

(2) 역사서 ; 조선왕조실록, 사관의 소명의식, 고.순종실록은 제외, 사림파 역사의식

(3) 기타 ; 신증동국여지승람, 간경도감, 동문선

2. 조선전기 과학기술 ; 장영실, 자격루, 칠정산, 활자.인쇄술

3. 성리학의 두 흐름, 이기론

(1) 관학파, 사학파

(2) 성리학 우주관 ; 유학의 역할

(3) 성리학자 ; 서경덕  / 이황  이이  / 조식

(4) 예학, 보학 

4. 조선전기 불교, 민간신앙

(1) 조선초기 억불책 ; 세조와 간경도감, 보우와 말죽거리, 도첩제

(2) 조선초기 도교

(3) 조선초기 민간신앙 ; 토정 이지함

 

       

【기본 학습】

                                                                                                                                                           

▦ 조선 전기 역사학, 편찬사업, 과학발달

▦ 성리학 발달, 불교와 민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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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전기 역사학 발달


(1) 역사서 ; 민족적 자아 발견, 전통 문화 비판적 계승 발전

 1) 건국 초기 : 왕조개창의 정당화, 성리학 통치규범의 정착

   → 정도전 고려국사, 권근의 동국사략(이제현 성리학적 사관 계승)

 2) 15세기 중엽 자주적 사관

  ① 민족적 자각 왕실과 국가 위신 높임.

  ② 고려사(기전체, 김종서, 정인지), 고려사절요(편년체 김종서)

  ③ 동국통감(서거정, 단군 시조, 최초의 통사, 편년체)

  ④ 삼국사 절요

 

(2) 조선왕조실록

 1) 실록의 편찬

 - 태조~철종, 왕 사후 춘추관에서 실록청 임시 개설, 편년체, 사관외 열람 금지

 - 사료 : 사초(사관기록), 승정원 일기, 의정부 등록, 비변사 등록, 시정기.

☞ 사관

o 조선시대 임금과 신하가 면회할 때는 정승 판서라 할지라도 독대할 수 없고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자리를 같이 하여 청탁, 중상모략을 막음.

 2) 실록의 보관

 - 4대사고 ; 세종때, 춘추관, 성주, 전주(왜란때 유일하게 남음), 충주

 - 5대사고 : 광해군때, 춘추관,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정족산(처음은 마니산), 태백산본 정족산본 현존

 3) 국조보감 : 실록중 왕의 모범정치만 발췌

 


(3) 사림의 역사인식

 1) 16~17세기 사림들 존화주의 역사의식, 왕도주의, 소중화주의적

 2) 단군보다 기자 숭상→ 기자지(윤두수), 기자실기(이이)

 3) 동국통감 비판→ 동사찬요(오운), 표제음주동국사략(유희령), 박상의 동국사략

 4) 의의 :

 - 긍정적 ;  문화 민족 자부심→ 주변 민족 침략시 애국심

 - 부정적 ; 국제 정세 변동에 대처 소홀, 국사를 민족사로 인식하는 면 부족



2. 조선 초기 편찬사업

 

(1) 출판문화 발달과 한글 창제 :

  1) 출판문화 배경

  ① 제지술 발달← 종이 원료 20여종

  ② 활자 제작 : 주자소, 계미자(태종 동활자), 갑인자(세종, 정교함)

 2) 한글 창제

 - 1446년 반포, 동기 민족적 자각, 민중에 교화 훈민책,

    전통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재정리

 - 한글 서적, 시가(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 불교 유교 경전 언해, 농서, 병서, 서리시험에 부과 행정 실무에 이용

 


(2) 지리서

 1) 지도,지리서 목적 : 중앙집권과 국방강화

 2) 세계지도 : 역대제왕혼일강리도 : 동양최고 세계지도, 진취적 세계관,

   중국을 세계중심으로 그림

 3) 전국지도

 - 팔도도(동국지도) : 양성지, 과학 기구(인지의), 압록강 이북도 상세히(북방 관심) 

 - 조선방역지도(16세기 현존)

 4) 지리지

 - 팔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성종때 노사신 강희맹,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산물, 교통)→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때 이행)

 5) 읍지 : 16세기 사림의 관심 반영

 

 

 


(3) 법전, 윤리서 편찬

 1) 법전편찬

 - 목적 : 법치주의의 확립으로 효율적인 정치 운영

  ☞ 고려시대는 법전 미비, 조선은 법전 잘 마련됨 (발전한 점)

 - 초기의 법전 : 조선경국전, 경제문감(태조, 정도전)→ 경제육전(태조,조준)

  → 속육전(태종 하윤)→ 육전등록(세종 집현전)→ 경국대전(성종 최항)


 2) 윤리서

  - 목적 : 유교적 질서의 확립

  - 윤리서 ; 삼강행실도, 효행록(세종때 설순, 언해)

  - 국조오례의(성종, 국가 행사, 의식 유교적 기준)



3. 15세기 과학기술 발달

 1) 배경

  ① 부국 강병, 민생 안정 위해 국가가 장려, 유학자도 기술학 학습

  ② 격물치지 경험적 학풍, 전통적 기술 문화 계승, 중국과학 적극 수용

☞ 심화 ; 격물치지(格物致知)

o 대학에 나오는 말, 일과 마음을 바로 잡음으로써, 사람의 마음속에

  실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양심과 지혜를 밝게 할 수 있다.

 2) 과학적 기구 제작

  ① 측우기(1441 이천, 장영실) : 풍흉정도 참작하여 새금부과 위해 만듬,

     호조 관장, 기우 주술용?(세자 문종 고안, 장영실 만듬)

  ② 천체 관측=간의, 혼의 / 시간 측정=해시계(앙부일귀), 물시계(자격루)

  ③ 토지측량기구 ; 인지의 (규형), 양전 사업, 지도 제작 

 ☞ 농업 진흥 위해 천문, 역법, 수학 발달

 

 

 

 

 3) 수학

  ① 천문, 역법에 관심, 토지 조사 조세 수입 계산을 위해서 발달.

  ② 아라비아 영향을 받은 수학서 → 상명산법, 산학계몽

  ☞ 아라비아 과학이 원을 통해 고려에 들어왔으나 국가 편찬 사업으로 정리된 시기는

    15세기 조선 초기 

 4) 역법 ; 칠정산

 - 아라비아 영향을 받은 달력  

 - 한양을 기준, 우리 나라 실정에 맞게 재구성. 이순지, 김담

 ※ 수시력 (고려말 원)→ 칠정산(세종)→ 시헌력(효종, 음력+ 양력)→ 양력(1895년 을미개혁)

 5) 의서

 ① 향약집성방 : 세종때 이사철, 유효통, 우리 풍토에 맞는 약재와 치료법

 ② 의방유취 : 세종때 이사철, 당명, 의학 백과사전

  ☞ 우리 실정에 맞는 것 :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칠정산

  ☞ 16세기 사림 : 기술 천시, 과학 침체

 6) 농서

 ① 농사직설 ; 세종때 정초, 각도 관찰사에 명하여 촌로들 경험 수집,

 - 농부 경험, 우리풍토에 맞는 농서,

 - 씨앗 저장법, 토질 개량법, 모내기법

 ② 강희맹의 농서 : 사시찬요(세조), 금양잡록(시흥 지방, 성종때)

   ☞ 농가집성 : 신속 농사직설, 금양잡록, 사시찬요와 권농문 합본한 농서

 7) 무기와 병서

  ① 무기 ; 화포(고려말 최무선, 개량), 화차(문종때 로케트포 비슷),

            거북선(태종), 비거도선

 

 

  ② 병서

 - 진도 : 태종때 정도전, 요동 수복 운동 목적, 전술부대 편성법

 - 병장도설 : 문종때 군사 훈련지침서

 - 동국병감 : 전쟁사 정리, 한무제~고려말

 

 

 


 

4. 조선 성리학 발달


(1) 성리학의 두 흐름

 1) 관학파(훈구파)

① 고려말 혁명파 사대부→ 관학파⇒ 훈구파

② 정도전 권근 학풍, 왕조 개창 참여

③ 왕권, 중앙 집권 추구

④ 성균관 집현전 출신

⑤ 15세기 문화 창조,실용적 학문 꽃핌

⑥ 민간 신앙에 관대한 사상 정책

⑦ 군사, 기술학 부국강병 추구, 공리주의 중시

⑧ 사장 중시, 문학 발달


 2) 사학파(사림파)

① 고려말 온건파사대부→ 사학파⇒ 사림파

② 정몽주→ 길재 학풍(→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김일손, 정여창 등)

③ 향촌자치, 왕도정치 추구

④ 사학 출신, 16세기 후반 이후 정계 주도

⑤ 존화주의, 화이사상, 기자 숭배

⑥ 성리학 정통적 계승, 배타적 사상 정책, 관념적 이기론 정신 문화 중시

⑦ 경학 중시, 문학 저조

   - 세력 기반 : 중소 지주, 유향소, 사창, 향약, 서원


(2) 이기론 발달

 1) 성리학 발달의 배경 : 훈구파 사림파의 갈등, 사림내부의 분화

   (기성, 신진, 경제 기반 차이), 국제 긴장 완화, 서원의 학문연구 기풍

 2) 이기론의 의의

  - 긍정적 : 붕당 정치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여 정치의 활성화에 기여

  - 부정적 : 성리학의 관념화와 지나친 도덕주의로 부국강병에 소홀

 3) 주리파

① 선구자 이언적→ 대표 이황

② 원리적 문제 중시, 도덕 규범 확립에 기여, 인식과 실천 중시, 신분 질서 유지,

③ 중소지주 안정된 경제기반의 사림들이 발전시킴

④ 위정척사, 의병에 영향 줌.

☞  이황

① 이기 이원론

② 주자서절요, 성학십도,이 학통론

③ 김성일, 유성룡에 계승, 영남학파 형성

④ 예안향약, 도산서원, 동방의 주자

⑤ 일본성리학 발전에 영향

 

 4) 주기파

① 선구자 ; 서경덕→ 대표 이이

② 경험적 현실세계 중시, 동인 북인, 재야 불우한 산림처사

③ 북학파, 개화 사상

☞  이이

① 일원론적 이기이원론

② 사림사상 집대성, 도덕적 세계와 경험적 세계 동시 존중 탄력성 있는 철학 인식

③ 성학집요 ,동호문답, 격몽요결, 경연일기

④ 기호학파(조헌 김장생 등)

⑤ 해주, 서원향약 문회서원,

⑥ 정치 경제 국방 등 현실 개혁 주장

o 동호문답→ 수미법/  o 만언봉사→ 십만양병설

※ 理는 불교 화엄종(주관적 관념론) , 氣는 도교 영향(경험론)

 

(3) 예학, 보학

1) 예학 : 종족 내부의 의례 규제

 ① 배경 : 양반들의 신분질서 안정에 필요한 의례중시

 ② 주자가례→ 김장생(가례집람), 김집(김장생 아들), 정구 등에 의해 발전

 ③ 가족과 동족 상호간의 상장제례(喪葬祭禮) 확립, 형식화

   → 예송논쟁(사림 간에 정쟁의 구실로 이용)

2) 보학(족보)

 ① 문벌 친족공동체 유대 강화, 양반들의 신분적 우위성 유지(예학, 보학)

 ② 기능 : 종족 내부의 결속 강화, 종가와 방계 구분, 위계질서 확립,

           문벌의 과시, 결혼 상대자 선택, 당파의 구별

☞ 양반 문벌 제도 강화, 사림의 지위 강화

① 유향소, 향약→향촌실권, 향촌 자치

② 서원→결집, 중앙정계 진출 도모

③ 예학→상장제례 의례 확립, 예송논쟁 정쟁

④ 보학→종족 종적 횡적 관계 확인 결속

※ 선원록 : 왕실 족보

 


5. 조선 전기 불교와 민간신앙


 (1) 불교 정비

1) 목적 : 유교 주의 확립, 재정 노동력 확보

2) 태조 : 도첩제 실시-승려수 제한, 포 100-200필

3) 태종 : 242사로 사원정리, 토지 노비 몰수,국가재정기반 확보

4) 세종 : 선교 양종으로 통합 각 18사(36본사제)

5) 세조는 호불 ; 간경도감(불경 간행 한글 번역), 원각사 탑

6) 성종 : 도첩제 폐지(출가 금지)

7) 중종 때 승과 폐지, 명종 때 보우 불교 중흥 좌절

8) 불교의 명백 유지 :

 - 종교적 기능(평화 안녕 기원, 민간 신앙으로 굳어짐)

 - 불교철학은 사물을 독립 대립관계로 보지 않고, 포용 융합적,

   사회와 사상통합에 유리

 - 중국 존중 세계관이 없음(유교는 있음).

 

 

 

 (2) 민간 신앙

 1) 유교주의에 입각하여 통합 : 미신요소 규제, 제사 규범을 유교식 개편

 2) 무격신앙, 산신사상, 삼신숭배, 촌락제 등 민간 신앙은 자아의식, 정서에 도움.

 - 국가 신앙으로 흡수, 민족의식 앙양 : 삼신숭배를 국조숭배로,

 - 구월산 삼성사(환인 환웅 단군), 평양 단군 사당,

 3) 풍수도참 : 한양천도 합리화, 산송(山訟)문제

 4) 도교

 - 소격서 : 제천행사 초제 주관, 행사는 축소 절약

 - 마니산 초제(醮祭 ; 별에 대한 제사)

   * 중국 천자가 시행하는 것을 우리도 시행→ 민족주체의식, 유교의 사대 약점 보완

 - 도교는 무존중, 성신(星辰)은 장수를 상징→ 유교문약 보완

 - 은둔 신선 사상, 도교+민간 신앙→ 민족 의식 앙양




 

 

【심화·보충 자료】

1. 조선 전기 편찬 사업

                                                                                                                                                           

(1) 윤리서

◈ 삼강행실도

- 세종 10년 9월 경상도 진주에서 아버지를 시해한 사건이 있었다. 임금은 놀라서 내가 부덕한 탓이라고 한탄하고 신하는 효행록을 널리펴서 백성들에게 일상으로 읽히자고 진언하였다.

- 왕은 이에 따라 삼강행실을 책으로 편찬하라고 집현전에 명령했는데 어리석고 무식한 서민이 쉽게 보고 느끼도록 그림을 먼저 넣어라고 했다.

- 세종 16년 11월 삼강행실도 3권이 간행됨 ; 효자 충신 열녀 330종. 책은 신하의 제안, 그림은 세종 임금의 착안. 이렇게 궁리한 끝에 서민에게 쉬운 문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오륜행실도 (예화 들)

- 맹종읍죽(孟宗泣竹 ; 중국삼국, 오) : 맹종은 그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 겨울 죽순을 먹고 싶어 하므로 눈 내리는 대밭에 가서 빌며 통곡했다. 그러자 죽순 두 줄기가 솟아나므로 그것을 꺾어다 대접했다. 어머니는 이후 회춘하였고, 맹종은 오래도록 정성을 다해 모셨다.

- 민손단의(閔損單衣 ; 중국춘추, 노) : 추운 겨울 아버지가 멀리 출타할 때 가족이 배웅을 하는데 계모 소생 두 아들은 따뜻한 옷을 입었지만 민손은 홑옷을 입고 떨고있었으므로 아버지가 노하여 계모를 쫓아내려 하였다. 민손은 아버지에게 애걸하기를 “어버이가 계시면 한 아들이 춥지만 어머니가 안 계시면 세 아들이 모두 춥습니다. 어머니가 꼭 계셔야 합니다.” 하였다. 가족이 모두 감동하였다.

- 석진단지(石珍斷指 ; 조선) : 부친의 병환에 왼손 명지를 끊어 뼈를 갈아 피와 함께 드려서 부친을 구함

- 자강복총(自强伏塚 ; 조선) : 김자강이 부친 서거 후 다시 모친이 돌아가자 묘막에서 3년을 기거하니 처족이 묘막에 불을 질렀다. 자강이 3일 식음전폐하고 애통해 했다. 다시 묘막을 지어주니 3년을 더 기거하여 모두 6년이 되었다.

- 은보감오(殷保感烏) : 윤은보는 스승을 부모와 같이 섬겼고 스승이 돌아가자 여막을 짓고 받들다가 다시 부모가 돌아가자 여막생활을 하였다. 바람에 스승의 향합이 날아갔으나 까마귀가 물어다 주었고, 부모의 석물이 넘어졌으나 산 짐승이 일으켜 놓았다. 뒷날 높은 벼슬을 하였다.


◈ 효도와 상속

☞ 중앙일보 1997.07.14.

고려 말에 편찬된 '효행록'을 보면 고대 중국의 성군이었던 순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순의 아버지는 아내가 순을 낳고 세상을 떠나자 곧 재취해 둘째 아들 상을 얻는다. 이 때부터 계모는 물론 아버지의 사랑이 온통 상에게만 쏠린다. 순이 장성하자 힘든 일은 모두 순에게만 맡기고, 재산이 순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해 순을 죽이려 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래도 순은 효성을 다해 어버이를 받들고 온종일 농사일에만 전념한다. 몸이 쇠약해져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된 어느 날 참새떼가 몰려오더니 주둥이로 풀을 뽑고 땅을 쪼아 말끔하게 김을 매주는가 하면, 산 속에서 코끼리떼가 몰려와 밭을 모조리 갈아 주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부모와 동생은 그제서야 순의 효성에 감동해 큰아들로 대접을 해 준다는 이야기다. 효도가 미물까지 감동시키는데 하물며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겠느냐는 교훈이 담겨 있다. 순이 아버지의 재산을 염두에 두고 효도하지 않았던 것처럼 '반대 급부'를 기대하는 효도가 진정한 효도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부모의 은혜를 가리켜 "자식을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을 흘리고, 키울 때는 8섬 4말의 혈유를 먹인다."고 했으니 자식의 어떤 효도가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효도의 개념부터 달라졌다. 몇 해 전 한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현대판 고려장'풍조가 그렇다. 멀쩡한 노부모를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간병인에게 맡겨 놓고 장기간 멀리 떠나 있다가 부모를 쓸쓸히 숨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만약 부모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면 부모를 그처럼 방치하는 자식들은 훨씬 줄어들는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모든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의탁해 노년을 보내는 게 공식처럼 되어 있었으나 요즘엔 가급적 죽을 때까지 물려주지 않으려는 부모가 많은 것도 그 까닭이다. 한 경제 연구소의 상속 행태 등에 관한 조사도 그런 풍조가 팽배해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법에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노후를 보살피는 자녀에게 상속하겠다는 응답이 67.8%에 이른 것이다. 재산 가진 부모라야 효도받을 수 있다는 뜻이니 각박한 세태의 한 단면을 드러낸 셈이다.


(2) 역사서 편찬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 기본사료

- 25대 472년간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편년체 사서(編年體史書). 총 1,893권, 888책 일괄해서 국보151호로 지정.

- 태조실록은 태종 13년 1413년 편찬한 것을 시작으로 철종실록을 고종 2년 1865년에 편찬.

- 왕이 승하하면 다음 왕이 즉위하면서 전왕의 실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춘추관 안에 임시로 실록청을 개설.

- 기본자료는 춘추관에서 매일 기록한 시정기(時政記)와 사관의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개인 문집. 일기. 야사류 등도 이용한다.

- 조선시대 임금과 신하가 면회할 때는 정승 판서라 할지라도 독대할 수 없고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자리를 같이함으로써 사사로운 청탁이나 중상모략하는 것을 막도록 하고 있다.  

2) 편찬단계

① 초초(初草) : 사료중 중요한 것을 가려 뽑는 절차.

② 중초(中草) : 초초에서 빠진 것을 보태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절차.

③ 정초(正草) : 재 수정하고 문장체제를 한결같게 고르는 작업.

④ 세초(洗草) : 실록이 완성된 후 기초자료는 모두 물에 빨았다. 기밀 누설을 막고 종이를 재생하였다. 자하문 밖 차일암 개천에서 했다.

3) 보 존

① 4대사고 ; 춘추관, 성주, 전주, 충주

② 5대사고

- 임진왜란 중 전라도 점령을 위해 남하한 고바야까와군에 대해 의병장 고경명, 조헌, 영규 장군이 금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으나 왜군의 전라도 침입을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 전쟁으로 춘추관, 성주, 충주사고(史庫)가 소실되고 전주사고만 남았다.

- 왜란중 전주사고도 계속 이동을 하였다 ; 정읍 내장산 → 해주 → 강화도 → 1597년 정유재란 때 묘향산 보현사 → 1601 영변부객관 → 1603 강화도

- 1603년(선조 36)~ 1606년까지 전주사고본 실록을 근거로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의 실록을  인쇄하여 5대사고에 보존하도록 하였다.

- 춘추관 실록청 ; 이괄의 난 때 소실

- 마니산 본 : 병자호란 때 대부분적 파손 후 보수 → 1678년(숙종 4)에 정족산(鼎足山)사고로 옮김.

- 묘향산 본 : 후금과 관계가 악화되자 1633년 무주 적상산(赤裳山)으로 이동 → 6.25 소실

- 오대산 본 : 일제시대 동경제대로 이관, 관동대 지진 때 불탐

- 태백산 본 : 정족산 본과 함께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③ 조선왕조실록 열람

- 실록은 선왕 및 신하들의 행적과 정책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제례나 사신 접대 등 주요 행사가 있을 때 전례(前例)를 참고하기 위해 사관이 내용 일부를 확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열람도 허용되지 않았다.

- 세조 때 실록을 간추려 <국조보감>을 편찬.

④ 조선왕조실록의 의의

- 조선왕조실록은 왕실 중심의 서술방식과 명분론적 시각, 당론(黨論)에 의한 곡필(曲筆)의 문제 등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임은 물론,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다.

⑤ 번역작업

- 북한에서는 1980년대에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완료하였다. 남한에서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2년부터 분담하여 국역작업을 시작하여 1994년 4월에 마무리지었다.

- 1997년 10월 훈민정음(국보 제70호)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사관의 소명의식(召命意識)

- 조선시대 사관은 8명인데 번을 나누어 궁중에서 숙직하면서 조회나 경연은 물론 각종 회의에도 참석하여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사관의 사초와 시정기는 있는 그대로를 직필한 극비 문서로서 사관이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사초는 사관이 개인적으로 보관하였다가 실록 편찬시에 모아 기본자료로 이용하였다. 

- 태종이 노사관(老史官)을 따돌리려고 근정전에서 정사를 보지 않고 대신들을 침전으로 불러 정사를 보았더니 사관이 붓과 종이를 들고 따라와서 밖에서 엿듣고 기록하였다. 태종이 노하여 파면시키고, 젊은 사관을 등용하였다.  그런데 그 젊은 사관은 아예 침전안으로 들어왔다. 태종은 진노하였으나 신하들이 극구 말리는 바람에 다시는 사관을 바꿀 생각을 못했다.

- 중종 때 조광조 등 신진 정치 세력에 대한 보수반동의 쿠데타인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밤의 일이었다. 사화의 주모자들이 조정에 모여 신진세력을 모함하기 위한 죄안을 논의하고 있는 자리에서 사관 채세영(蔡世英)은 "불의 불법의 죄안을 이 붓으로 쓸 수 없다" 하고 사필(史筆)을 입에 물고 저항하였다.

- 비록 사관의 품계는 7품에 불과하나 直筆이 생명이기에 사관을 추천하는 정승이 단을 모아 향을 피우고 적임자를 추천하되, 만약 적임자가 아닌자를 추천하면 천벌을 받기를 천지 신명에게 맹세를 하고 뽑았다.


◈ 일조관여 이유로 고.순종실록은 왕조실록에서 제외

☞ 서울신문 1994.03.24.

-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8년, 조선왕조 태조 원년(1392년)에서부터 철종 말년(1863년)까지 4백 71년 동안의 '조선왕조실록'을 국역하는 작업에 들어가 지난해(1993) 말 완간했다.

- 그러나 모두 4백 13책에 이르는 번역본에는 고종과 순종 부분이 빠져 있다. 조선 왕조를 말살한 일제의 식민지 관료가 주도해 위작임이 분명한 '고종 태황제 실록'과 '순종 황제 실록'은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실록은 국왕이 죽고 새 국왕이 즉위하면 즉시 실록청을 설치해 죽은 국왕 재위 기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기본적인 관찬 사서이다. 실록 편찬의 가장 중요한 근거 자료는 사관의 사초였다. 사관은 그들이 듣고 본 그대로를 적어야 했다. 또 사관의 사초에 대해서는 시비를 가릴 수 없었고 수정을 가하지도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실록은 한마디로 공정성과 정확성이 생명이었다.

- 그러나 이른바 고.순종실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순종 실록은 1926년 순종이 죽자 다음해 4월 조선 왕조의 궁내부를 축소.격하시킨 이왕직 산하에 준비실이 설치된 뒤 1930년 4월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1934년 6월에 끝났다. 편찬의 총책임자인 편찬 위원장은 물론, 33명의 편찬 위원 가운데 11명이 일본인이었다. 여기에 조선 총독부 경시를 편찬 보조 위원으로 모든 부서에 참여시켜 한국인들을 감시케 했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 서술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니 '조선 왕조 실록' 국역 작업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설명이다.


◈ 사림파의 역사의식

1) 사림파들은 도학과 의리존중, 유교이외의 불, 도, 민간신앙 배척, 유교문화의 기원은 중국의 삼대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중국의 문화를 매우 높이 숭상.

2) 사림파들의 기자관 ; 고대사에 있어서 기자의 위치를 가장 중요시하였다. 기자는 은의 현인으로서 주 무왕께 홍범을 가르치고 5천명의 중국인을 이끌고 조선에 건너와 8조법을 베풀고 정전제 실시. 여러 문물보급. 이 땅의 문화를 중국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3) 단군조선의 문화는 이적(夷狄)의 문화단계에 머물렀다고 보아 낮게 평가하였다.

4) 위만조선은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음. 주의 제후국가인 연인(연나라 사람)이 마음대로 왕위를 찬탈하고 중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나라라고 보았다.

5) 삼한 중 마한을 고대의 정통국가로 인식.(위만에게 쫓겨 남하한 기자조선의 후예가 세웠다는 것.)

- 기자 조선과 연결이 닿지 않는 그 밖의 여러 국가들은 아주 작은 비중으로 서술.

6) 고려 초기와 조선 초기의 부국강병책이나 이단 문화에 대한 포용정책을 비난하고 이 시기의 북진정책이나 사대정책도 공리적이고 타산적인 것으로 비판하였다.

7) 긍정적인 점 ; 애국무장의 활동이나 충신열사의 행적은 높이 평가하여 유교문화를 선양하면서 나라를 지켜온 전통은  매우 중요시하였다.

- 높은 수준의 유교문화 국가로서 사대관계를 맺으면서 나라를 지켜온 역사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렬하였다. 이런 자부심에 바탕을 둔 애국심이 왜란 호란을 당하여 의병운동이나 북벌운동으로 전개되는 정신적 바탕이 됨.

8) 부정적인 점 ; 사림의 역사인식은 우리나라가 중국과 혈통과 문화가 뚜렷이 다르다는 민족적 자각이 약하고 또 중국과 대결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하겠다는 진취적 자세도 미약하였다.


♣ 권세가의 역사 의식

조선 지배층이나 지식인들이 국사(國史)를 멸시한 예들을 들어 본다.

- 세조 때 쿠데타 공신으로 안하무인이던 홍윤성(洪允成)이 그의 죄악이 사초에 씌어 있음을 보고  "중국의 역사도 즐겨 보지 않는데 하물며 동국통감이랴, 너희 마음대로 써라."

- 명종 때 정승 이기(李芑)는 을사사화로 많은 선비를 모함하여 죽인 원흉이다. 이기의 기세가 등등했을 때 어느 한 친지가 넌지시 말했다. "史筆이 두렵지 않은 가?"

이기 ; " 이 사람아 동국통감을 누가 본다던가?"


(3) 기타 편찬서


◈ 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1)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 ; 세종의 명에 따라 맹사성(孟思誠).신색(申檣) 등이 1432년(세종 14) 를 찬진(撰進)

2)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 ; 

- 양성지(梁誠之).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서거정(徐居正) 등 성종 명으로 1481년(성종 12) 완성.

- 《신찬팔도지리지》와 명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참고함.

3) 신증동국여지승람

- 1530년(중종 25)에 이행(李荇).홍언필(洪彦弼)의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것.

-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 목판본. 55권 25책.


◈ 간경도감 (刊經都監)

- 불경의 보급과 국역을 위해 1457년(세조 3) 궁중에 설치한 기관.

- 세조는 신미(信眉).수미(守眉) 양 대사를 실무진으로 기용하고, 한계희(韓繼禧).윤사로(尹師路).황수신(黃守身).노사신(蘆思愼).강희맹(姜希孟).강희안(姜希顔) 등 에게 불경을 번역 간행시켰다.

- 《수능엄경언해》(10권)를 필두로 하여 《묘법연화경언해》(7권) 《원각경언해》(10권) 《금강경언해》(2권) 《불설아미타경언해》(1권) 등이 간행되어 불교문화 융성에 이바지하였다.

- 세조 이후 부진하여 1471년(성종 2) 폐쇄되었다.


◈ 동문선 (東文選)

-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詩文)을 모은 책. 고활자본과 목판본이 있다

- 154권 45책. 서거정(徐居正) 등의 편저. 목록 3권, 정편(正篇) 130권, 속편(續編) 21권

- 정편은 1478년(성종 9)에 성종이 서거정 등에게 명, 신라~조선 전기까지 시문 정리.

- 속편은 1518년(중종 13)에 신용개(申用漑). 김전(金詮) 등이 편찬한 것을 1713년(숙종 39)에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 등이 개편한 것.

-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68~70년 12책으로 번역, 발간하였다.



2. 조선 전기 과학 기술

                                                                                                                                                           

 

◈ 장영실 (蔣英實)

1) 조선초 세종 때 사람이나 그가 어디서 누구의 아들인지? 생몰 연대 미상.

세종실록에는 관노였으며 부는 원나라 때 귀화한 중국인. 어머니는 동래 기생. 아산장씨 족보에는 고려말 전서(典書)를 지낸 5형제 가운데 세번째인 장성휘의 외아들이라고 하였다.

2) 세종의 배려로 중국 유학후 상의원(尙依院 ; 의복, 금은, 보화 관리)별좌로 시작해서 상호군까지 승진.

- 갖가지 천문기구를 만들었고 경상도 채방별감으로 구리와 철의 채광과 제련을 맡기도함.

3) 1442년 세종 24년 뛰어난 공헌에도 불고하고 그가 만든 임금의 수레가 부서지는 바람에 장 80대를 맞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4) 장영실의 업적

① 자격루(自擊漏 ; 물시계) ; 경회루 부근에서 한밤중 3경에 자격루가 자동으로 북을 세 번치면 그 소리를 듣고 광화문의 북을 세 번치고 종각의 북이 세 번 울렸다.

- 화폐 1만원권의 물시계 모습은 중중떄 것 물통만 5개 남은 것 뿐(국보 229호)

② 측우기 : 1441년 세자(문종)가 고안 장영실이 제작. 통설은 그 용도가 기우제 주술적 샤머니즘적.

* 이태진 교수 주장 ; 강우량을 측정, 풍흉정도를 참작하여 세금부과를 위한 것이다. 만약 주술적이라면 제사의례를 주관하는 예조에서 관장했을 것, 그러나 호조에서 담당했다.


◈ 자격루

- 1434년 세종대왕이 이천, 장영실에게 지시해 만든 물시계 '자격루'는 원래 경회루 남쪽에 있었다. 자격루는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명실공히 세계 최첨단 물시계였다. 자격루는 2시간마다 한번씩, 하루에 12번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린다. 그리고 밤에는 종소리와 별도로 북과 징을 쳐서 시간을 알려준다. 12시마다 종을 치고 밤에는 북과 징을 치는 것은 서로 혼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12번의 종소리는 자(밤11~1시.쥐), 축(오전1~3시.소), 인(오전3~5시.호랑이), 묘(오전5~7시.토끼), 진(오전7~9시.용), 사(오전9~11시.뱀), 오(오전11시~낮1시.말), 미(오후1~3시.양), 신(오후3~5시.원숭이), 유(오후5~7시.닭), 술(오후7~9시.개), 해(오후9~11시.돼지)시에 울린다.

- 그런데 종이 한번씩만 울리니 그게 자시인지 축시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 그래서 자시에는 쥐인형, 축시에는 소인형, 인시에는 호랑이 인형이 자격루 시보장치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만들어 놓았다.

- 밤시간은 더욱 세밀하고 정확하다. 5등분하여 초경(初更.대략 오후7시) 2경(오후9시) 3경(오후11시) 4경(새벽1시) 5경(새벽3시)마다 경의 수에 따라 북을 치도록 만들어 놓았다. 즉 초경엔 한번, 2경엔 두번. 또한 각각의 경을 5등분(5점), 그때마다 징을 울려 알리도록 했다.

- 해가 졌으니 한양 도성의 성문을 닫겠다는 인정(人定 .통행금지. 1경 3점)이나 해 뜨기 전에 성문을 연다는 파루(罷漏.5경 3점)도 자격루의 시보에 의해 이뤄졌다.

- 자격루의 원리를 기록한 '세종실록'의 한대목. "숨었다가 때를 맞춰 번갈라 올라오는 인형들…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 귀신이 하는 것 같았다."

- 이러한 정확성은 물시계의 기본인 물의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이를 통해 제 때에 인형을 쳐올리는 완벽한 자동제어장치에서 비롯한다. (남문현 건국대 교수, 13년동안 연구하여 자격루의 작동 원리를 밝혀냄)

"커다란 물항아리에 담겨 있던 물이 우선수관을 거쳐 또 다른 물항아리로 떨어진다. 물은 서서히 위로 차오르고 미리 준비된 잣대가 함께 따라 오른다. 그 과정에서 항아리벽에 대기하고 있는 작은 구리구슬을 2시간마다 움직여 시보장치기구 안으로 밀어넣고 그것은 다시 더 큰 쇠구슬을 움직인다. 그리고 이것이 쥐인형 소인형을 강하게 내리치면 인형이 밖으로 튀어 나온다."

- 세종 당시의 자격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지금 덕수궁에 전시 중인 것은 16세기에 다시 만든 자격루 중 물항아리 몇 개(국보229호). 그것이 바로 1만원권에 들어있는 물시계의 모습이다.

 


◈ 칠정산

① 七政算內篇

- 세종의 명을 받아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이 중심이 되어, 조선 초 1442(세종 24)년 완성되어 44년 3권으로 간행된 역서(曆書).

-  중국 원나라 때의 수시력(授時曆)을 서울의 실정에 맞게 수정 개편한 것이다.

- 칠정 ; 해, 달 + 목, 화, 토, 금, 수 다섯 행성의 운동을 계산할 수 있는 수학적 방법을 완성해놓은 것,

- 서울에서 일어날 일식 등의 천문현상을 정확하게 예보했다.

② 七政算外篇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의 속편으로, 1444년(세종 26년)에 간행

-《회회력경통경(回回曆經通經)》과 《가령력서(假令曆書)》를 개정.증보하여 만든 것이다. 원나라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명나라의 《통궤력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조선의 지리적 조건에 알맞게 작성되어 있다.

- 원주를 오늘날처럼 360 °로 하는 60진법을 사용하며, 1 태양년을 365.242188일(현재는 365.242196일, 수시력에서는 365.2425일)로 하고 있다.

- 전통적으로 동지(冬至)를 1년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춘분(春分)을 그 기준으로 하고 있다.

- 태양(太陽).태음(太陰).교식(交食).오성(五星).태음오성능범(太陰五星凌犯)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으며, 수시력을 해설한 칠정산내편과는 차이가 있다.


◈ 활자 인쇄기술

1) 13세기 초 금속활자가 발명되었으나 기술상의 문제, 정치 사회적 혼란으로 발전이 없었다.

2) 태종 때 계미자 ; 청동활자, 자형이 고르지 못함. 밀랍이 깔린 동판 위에 활자를 꽂아 넣고 다시 그 위에 밀랍을 녹여 붓는 방식. 글자의 행간이 고르지 못함. 글자가 흔들리기 쉬워 하루의 인쇄량도 대단히 적었던 단점.

3) 세종의 활자 개량

1. 경자자(1420) ; 활자의 크기를 모두 같게 만듬. 활자와 활판이 서로 맞아 틈이 생기지 않아 조판이 매우 쉬워졌다. 인쇄속도가 빨라졌을 뿐만 아니라 인쇄가 선명.

2. 갑인자(1434, 세종 16년) 글자체를 개량하여 아름다운 자체, 크고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 활판인쇄 기술이 일단 완성되어 가장 오랫동안 사용됨.

- 밀랍을 쓰지 않고 판에 대나무쪽과 종이를 끼워 활자가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판을 짤 수 있게 함으로써 인쇄 능률이 전보다 배나 높아졌다.

3. 병진자 ; 세종 18년 1436, 눈이 어두운 노인들이 읽기 쉽도록 보통 활자보다 배 가까이 크게 만든 것이다. 글자본은 당대의 명필 진양대군(수양대군. 세조)이 썼다.

4. 세종의 인쇄술 장려

-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기고 왕의 직속 기관으로 바꿔서 챙기고, 장인을 우대함.

- 종이 조달을 위한 조지서를 두고 종이의 질 개량에도 관심을 쏟았다.

- 중국어 교본인 '노걸대'와 '박통사'를 번역해서 찍게 하고 대왕이 직접 배웠다.

“명나라 사신을 대할 때 통역이 있긴 하지만 그 말을 미리 알면 대답을 빨리 생각하여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성리학의 두 흐름, 이기론


                                                                                                                                                           

(1) 관학파와 훈구파

1) 관학파(훈구파 勳舊派)

① 학풍 형성 기본 이념 ;

-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내세워 성리학을 정치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이러한 문화정책은 특히 세종.세조에 의해 주도되어 개성이 강한 관학의 학풍을 이룩하였다.

② 배출 ; 관학과 집현전을 통해서 학문을 닦고, 군주 비호하에 양성된 관료들이다.

③ 학파 특징

- 지방적 붕당성이 약한 반면, 국가나 민족에 대한 자각이 강하였다.

-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위신을 높이는 문제에 관심, 부국강병 추구, 실용적 학문 숭상

④ 인맥

- 국가창업 과정에 기여한 정도전.하륜(河崙).권근(權近) 등과 그의 제자들로서, 집현전. 홍문관을 중심으로 관찬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학문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특히 사장(詞章)에 능하였다.

-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양성지(梁誠之), 서거정 등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2) 사학파(사림파)

① 학풍형성 기본 이념 

- 조선의 개창을 둘러싸고 길재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왕조 교체가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역성혁명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향촌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김종직에 이르러 그 수가 크게 늘어 영남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파를 형성하였다.

② 배출

- 사학을 통해서 지방적 붕당을 형성, 일종의 야당적 입장.

③ 학파 특징

- 사림을 주체로 하여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체제 희구,

- 고시제도보다 천거제도,  국가에서 진휼하는 의창보다 향촌에서 자치적으로 진대하는 사창제 선호.

- 수령 통제하의 오가작통제 보다 자치적 공동체로서의 향약실시 주장.

-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경학의 기본 정신을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고 생각. 인간의 심성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였다.

④ 학파의 한계

- 사림의 민주 이념은 어디까지나 사림을 주체로 하는 것이며, 사림 외의 무인, 기술직인, 농공상 등을 사림의 지배하에 종속시키려는 신분적 편협성, 신분제를 더욱 경직시킴.

- 사림은 성리학을 철저히 신봉, 그 밖의 학문, 사상 철저히 배격. 성리학에 세련된 만큼 민족 신앙에 대한 거부 반응이 컸고 중국과의 의리적 사대관계 희구.

⑤ 인맥

- 사림파는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영남사류의 師宗)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등으로서 훈구파의 일방적 비대를 막으려는 성종의 발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만, 훈구파와 정치적 갈등이 불가피하였고, 그러한 갈등 속에서 사림들은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 훈구파는 민족의 외향적 성장에 기여, 사림파는 민족의 내향적 성장에 공헌.



(2.) 성리학의 이기론

1) 성리학, 종래 유학과 비교

① 종래 유학과 동일한 점

- 최고의 가치 : 仁義禮智

* 인(仁)-사랑 박애정신

* 의(義)-사람이 지켜야할 떳떳한 도리

* 예(禮)-상대방에 대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 지(智)-사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

- 실천규범 : 五倫(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孝悌忠信,

- 정신자세 : 誠(사람의 참된 마음 모습) , 敬(조심 삼가 공경하는 태도)

② 종래 유학과 다른 점 ; 철학적 기초를 리(理)와 기(氣)에 둔다.

- 理  ; 사물= 자연 법칙, 사람 = 본연의 性(인의예지), 태극 = 만물의 근원

- 氣  ; 음양오행, 사물의 형, 기질


2) 주기설과 주리설

① 이념적 차이

- 성리학에서는 우주만물의 본질을 이와 기의 이원적 복합체로 파악함.

-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의 원리, 기는 눈에 보이는 형이하의 물질

- 이는 순수하고 착한 것, 기는 선악 장단 청탁 등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고 본다.

- 이와 기는 나누면 둘이지만 기를 떠나서 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와 기는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라고 본다.

- 이는 기를 주제하므로 이는 체요, 기는 용이다. 이를 일차적으로 중시

② 성립에 영향받은 것 ;

- 이는 불교 화엄종, 기는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

- 불교의 주관적 관념론과 도교의 경험론을 관념론의 입장에서 종합.

③ 사회적 성향

- 주리설은 도덕규범 긍정, 신분질서 옹호,

- 주기설은 현실적 경험적 세계, 반규범적이고 개인적 성향.

④ 선구자 ; 조선 주기론의 선구는 서경덕, 주리파 선구는 이언적.

 

3) 유학의 역할

① 삼국시대 이래 고려말까지 : 불교는 주류, 유교는 보조적

- 불교가 정치 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적 핵심이 되어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반면, 유학은 단지 정치사회를 부수적으로 뒷받침하는데 머물렀다. 불교만큼 심오한 사상체계를 구축하지 못했음.

② 조선 유교 주류 사회로 전환

- 고려말 불교 폐단에 따른 반작용으로서의 유교가 중시됨.

- 조선 건국초부터 숭유정책, 가부장권 군주권 옹호.


4) 이황과 이이

① 이황의 주리론

- 한국적 성리학 사상체계의 완성

- 이(理)는 이성(칸트의 logos) 즉 우주와 인간의 원리적 질서,

- 기(氣 ; pathos)는 우주와 인간의 질서를 파괴하는 요소.

- 국가와 사회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가 기를 제어함으로써 그 파괴작용을 막아야 한다.

② 이이의 주기론

- 한국적 성리학의 실천 방향 제시 : 이이

- 이와 기는 구별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는 아니 된다. 이와 기의 관계는 말을 탄 무사와 말과의 관계로 설명.(이승기발론 ; 理乘 氣發論)


◈ 유학적 가치관의 재 조명

1) 긍정적 측면

- 호국의지 : 임진왜란 때와 한말의 의병장은 유학자, 위정척사상.

- 경천애인(敬天愛人)사상

- 문화를 숭상하는 숭문(崇文)정신

- 선비道 형성에 영향을 줌 : 선비도는 경리숭의(輕利崇義), 청빈, 선공후사(先公後私)정신

- 충효(忠孝)는 물론 인간관계의 신의(信義) 중시 

-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역사의식

2) 부정적 측면

- 모화사상(慕華思想)

- 가치관의 경직성, 폐쇄성

- 지배, 피지배의 양극화 현상 : 상호토론 의견수렴보다 양반계층중심 계급주의적.

-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개인 차원의 윤리강조, 사회적 차원의 윤리는 미흡.

- 가족중심주의에 따른 가족구성원 상호간의 문제점 : 가부장에 대한 맹목적 순종

- 인간의 욕망을 윤리적 규범에 의해 절제, 억압.

3) 산업사회와 유학

- 긍정적 가치는 이어 발전시키고, 부정적 측면은 극복한다. 유학사상을 배제한 서구식 근대화가 우리에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주지 않았다.

- 공자는 정치 요체를 족식, 족병, 족신(足食, 足兵, 足信)이라 하고 이중 가장 중요시 한 것으로 족신을 강조. 정부와 국민, 기업주와 피고용인 간의 믿음이 절실함

- 서구문화는 경제질서와 도덕질서가 별개(부유해져도 윤리는 타락)

유학은 둘이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즉 도덕과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경향. 물질문명의 탈출구.

- 조선 몰락은 유학사상 떄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유학에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유학 자체의 문제점과 당시의 지도층의 문제로 나눠 불 수 있다. 일본에서는 유학이 개화에 한 몫 했다는 사실로 반박될 수 있다. 유학으로 훈련된 성실과 근면성, 원만한 노사관계 등 서구보다 생산성이 높다.

- 현대의 인간소외 해결 : 현대 산업사회를 일으킨 것은 합리주의 정신(피도 안통하는 냉정함)이다. 그러나 유학적 특성- 어짐(仁), 아름다움, 자각적 자율 등의 인간애 위에 합리주의 정신을 세운다면 현대의 인간 소외 문제도 해결될 것.

- 항산과 항심

* 공자 ; “먼저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先富後敎), 그러나 공자는 『논어』에서 “도의(道義)가 행하여지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도의가 행하여지지 않는 세상에서 부귀한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 맹자 :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


(3) 성리학자


◈ 화담 서 경 덕

☞ 참고 ; 월간중앙, 2000.4.1,이 달의 문화인물(줄임)

                                                                                                                                                           

-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년 성종~1546년 명종 원년)의 사상은 조선의 주류 철학계와는 단절된 독작적 체계였으므로, 중화사상에 찌든 조선 철학계에서 철저히 외면받았다.

- 항상 생각에 잠겨 골몰했다. 계란을 삶겠다며 탁상시계를 냄비에 넣던 서구의 한 발명가의 일화가 연상될 만큼 사물의 관찰과 탐구에 열중했다. 그가 열살 전후 때 나물을 캐러 갔다가 어린 종달새가 날마다 조금씩 발전하여 나는 것을 관찰하느라고 빈 바구니로 돌아왔다는 일화가 있다.  또 14세 경에 "서경(書經)을 배우면서 ‘기삼백유육순육일(朞三百有六旬六日) 이윤월(以閏月) 정사시성세(定四時成歲)’ 라는 이려운 구절을 스스로 풀어서 ‘1년은 365일이며 윤달로써 사시(四時)를 정해야 한 해를 이룬다’ 라는 내용을 스스로 터득하여 해석하였다.

- 선조 8년 화담에게 우의정 직을 추증하자는 제안에 대해 선조는 “경덕이 지은 책을 읽어 보니 기(氣)와 수(數)에 대한 것이 많고 몸가짐에 대한 내용은 적다. 그러니 그의 공부는 결국 수학이 아니냐? 그가 공부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많다.”라고 한말에서 엿볼 수있듯이, 성리학의 대표적 경전 대학(大學)에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에 대해 스스로 연구해야 깊이 있게 사물을 알 수 있다’ 의미와 같이 사물에 대한 탐구심이 컸다.

- 화담에 대한 이해는 그저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철인(哲人)'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사방 벽에 온갖 사물의 이름을 적고 3년여 동안이나 방에 처박혀 깊은 사유에 잠긴적도 있다. 몇날 며칠을 잘 자지도 먹지도 못하며 사유한 결과 건강은 심하게 훼손됐다. 일단 사색을 끝내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회복했다. 이렇게 스스로 터득하며 공부한 탓에 화담에게는 스승이 없었다.

- 그의 철학의 핵심인 이기론(理氣論)에서 '기'(氣)란 한마디로 감각적인 경험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이 보고 만지고 느끼고 듣는 모든 것들의 총칭이며 서구 철학용어로 풀이한다면 형이하학(形而下學)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理)란, 당연한 얘기겠지만, '기'의 반대. 들을 수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어떤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다. 서구 철학용어를 빌자면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세계다. 이기론이란 결국 이같은 경험세계와 비경험세계의 내용, 구성원리, 상호관계에 대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잡한 철학 이야기가 고려말 이후 중국이나 조선의 모든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 화담은 모든 일과 만물은 '기'로 이뤄졌다는 이른 바 유기(唯氣)철학이다. 그러나 '기'의 근원은 어디인가라는 의문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화담은 그것을 태허(太虛)로 불렀으며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고 봤다. 무(無)이면서 동시에 유(有)인 것이다.

- 그는 또 '이'에 대한 관점을 크게 바꿔 버렸다. '이'는 각각의 사물에 작용하는 것도 아니요, 모든 사물에 동시에 적용되는 법칙도 아니다. 또 전혀 별개의 것도 아니다. 화담이 보기에 '이'는 '기'의 창출에만 작용하는 것이고, 일단 '기'가 창출된 이상 '기'는 스스로를 이끌어가는 것일 뿐이다.

- 퇴계의 화담 평가에는 심지어 "망령스럽다"는 표현까지 있다. 화담에 대한 퇴계의 생각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해 준다. 율곡은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들인 이항복(李恒福)과 이식(李植)은 화담을 높이 평가했다.

- 당시 주역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로 꼽혔다. 주역(周易)의 괘(卦)는 본래 음과 양의 숫자로 이뤄졌기에 수학에 능했던 화담이 접근하기 쉬웠던 학문이었다. 화담의 주역 연구와 해석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나 학설이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제자를 키우지도 못했으니 은밀히 그의 역학을 물려받은 사람도 없다.

- 화담은 관직에는 뜻이 없어서 20대 중반 이후에도 그는 그 흔한 초시(初試) 한번 본 적이 없다. 그러던 그에게 관직 진출의 길이 열린 적이 있었다.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였다. 중앙 정계에는 개혁 정치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중용됐고, 현량과(賢良科)라는 과거제도를 도입했던 것이다. 이때 그는 당연히 천거받았다. 주변의 권유가 강했으나 고심 끝에 이를 거절했다. 사실 현량과는 전국에서 추천된 120명의 인물들 중 엄격한 시험을 거쳐 등용된 28명 대부분이 관직 등용 직후 화(禍)를 면치 못했다. 조광조를 비롯해 그가 뽑은 현량과 출신 인사들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는 과연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까?

- 그는 또 한차례 관직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는 자진해서 과거를 봤고 성균관에도 입학했다. 그의 나이 43세 때 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어머니의 간곡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직을 갖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소과에라도 응시해 하다못해 생원 벼슬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어머니의 뜻이었다고 한다. 화담은 마지못해 시험에 응했고 당연히 합격해 뒤늦은 나이에 서생원(徐生員)이 됐다. 그리고 대과(大科) 응시를 위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중도하차하고 자퇴한 후 곧장 고향으로 돌아와버려 생원은 그에게 붙었던 최고의, 또 유일한 벼슬이었다.

- 귀향한 화담은 교육자에만 전념하여, 조정에서 수차례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1540년 그의 나이 52세 때 김안국의 천거를 받았으나 사양했다. 그러자 4년 후인 1544년 김안국은 일방적으로 그에게 관직을 하사했다. 조선조 2대 왕이었던 정종의 후릉(厚陵)을 돌보는 참봉직이었다. 그러나 화담은 끝내 이마저 거절한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乙巳士禍)로 많은 관료들이 희생당했다.

- 후릉 참봉직을 사양했던 56세 되던 해 그에게는 심한 병마가 찾아들었다. 그에게는 글을 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말년의 명저들, "원이기"(原理氣) "원리설"(原理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은 제자 허 엽이 죽어가는 스승의 구술을 받아 적은 것이다.


◈ 퇴계 이황 (李滉 )

                                                                                                                                                           

 

 

-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진보(眞寶).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예안(禮安) 출생.

- 12세 때 숙부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 대사성,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 등을 두루 지내고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 완락재라는 한평정도의 좁은 방에서 연구하고 가르쳐 정승 10여명 판서 30여명을 배출했다.

- 선생은 생후 7개월에 아버지를 여위었으나 "세상에는 과부의 자식은 무식하다고 비웃기 십상인데 너희들은 백배로 힘을 써라"라고 가르쳤던 현명하고 덕성스러운 어머니의 감화를 받으며 자랐다.

- 과거를 세 번 보아 다 낙방한 후 34세 때 대과에 급제함. 49세 때 풍기군수를 끝으로 관에서 물러날 결심을 하여 호가 退溪인데 이는 물러나서 시냈가에 거쳐한다는 뜻

- 한성부 우윤을 지낸 형이 윤원형에게 죽음을 당해 허무하였다.(50세) 그러나 70세로 별세 할 때까지 20년간 왕명으로 네 번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의 좌찬성 등을 5년정도 억지벼슬을 하였다.

- 권철(영의정)이 찾아와 퇴계와 의기투합하여 대화하였으나 도무지 식사를 할 수 없어 예정을 앞당겨 떠나면서 한 말씀을 부탁했다.  "촌부가 대감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또 융숭한 대접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식시는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하면 진수성찬이올시다. 이것을 잡숫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라의 앞날이 은근히 걱정됩니다. 관과 민의 생활이 이처럼 동떨어져서야 어찌 백성들이 진심으로 복종하겠습니까?" 권철은 퇴계를 본받아 검소한 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 남북의 환란이 눈앞에 닥쳐왔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믿을 것은 하나도 없다.  ...나라의 방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걱정하였고, 선조가 여러번 부르자 68세의 늙은 신하는 16세의 어린 왕을 대면하여 글로 올린 것이 성학십도(聖學十圖)였다.

-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 : 修正天命圖說. 聖學十圖. 自省錄. 朱書記疑. 心經釋疑. 宋季之明理學通錄. 古鏡重磨方. 朱子書節要. 理學通錄. 啓蒙傳疑. 經書釋義. 喪禮問答. 戊辰封事. 退溪書節要. 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 율곡 이이(李珥)

                                                                                                                                                           

 

 

- 1536~1584,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 파주군 천현면 동문리의 선생의 묘소에는 부인 노씨의 봉분이 그 뒤에 있다. 왜란 중 부인이 왜병에 항거하다 시녀와 함께 칼에 맞아 죽었다. 일년후 시신을 거두니 누가 누구인지 몰라서 였다.

- 중종 31년 1536년 강릉 외가 오죽현에서 태어나 6세 때까지 외가에서 살았고, 서울에서 1년을 보낸 후 임진강가 화석정이 있는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로 옮겼다.

-16세 때 부 이원수가 수운판관이 되어 공무로 평안도 출장 갈 때 따라갔는데, 어머니 신사임당이 갑자기 병이 들어 임종도 못하고 여의고 말았다. 18세 때 봉은사 금강산 유점사 등에서 승려가 되고자 했으나 맞지 않아 환속함.

- 율곡은 13세에 진사가 되었고, 과거시험 아홉번에 모두 장원하였고 한꺼번에 겨우 열 줄밖에 못 읽는다고 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하였다.

- 23세 때 이퇴계를 뵈었다.(퇴계는 59세)퇴계는 율곡에 대하여 “두뇌가 명석하여 많이보고 기억하니 후배란 두려운 것(後生可畏)” 율곡이 하직할 때 퇴계에게 청하니 퇴계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주었다.  ‘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어서 귀한 것은 속이지 않는데 있고 벼슬하여 조정에 나가면 공을 세우려고 쓸데없는 일을 만들기를 좋아해서는 안된다.)

- 29세 때 벼슬이래 여러 판서를 역임. 왜란 10년전 경연에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왜란이 일어난 후에야 선견지명을 감탄하고 성인으로 우러러보았다. 어찌 자기편만 다 옳고 저편은 다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며 당파싸움을 말리고 타일렀다.

- 깊고 넓은 안목을 가진 정치가이며, 봄바람같은 온화한 성품을  가진 위대한 德人으로 한번 우러러보아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계모가 신경질적이고 술을 잘 마셨으면 율곡의 봉급도 제멋대로 쓰고 율곡은 손도 못되게 하였다. 마침내 율곡의 정성에 감동되어 사람이 달라졌다.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3년상복을 입었다. 1584년 49세로 시상을 하직하자 수의 만들 천조차 없었다. 영구가 서울을 떠나자 횃불을 들고 따르는 시민이 수십리.

* [성학집요] : 보편적 규범 중시. 성인들의 방법은 다르나 백성들의 마음을 중히 여기고 하늘의 참뜻을 존종.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다. 성인이 죽으면 또 다른 성인이 각 시대에 맞는 내용과 방법으로 백성을  가르침. 전통적 가치는 변함이 없으나 시대적 특수상황 중시. 가치가 시대에 알맞게 구현되어야 한다.


◈ 현실개혁의 선비 조식 (曺植)


                                                                                                                                                           

 

 

1) 탄생과 생애

- 1501~157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건중(楗仲).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學記類編)》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 남명은  퇴계와 같은 해 1501년에 삼가현(三嘉縣 :지금의 합천)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이윤이 뜻한 바를 뜻으로 삼고 안연이 배운 바를 배워, 나아가 벼슬하면 공업을 이루고, 초야에 있으면 도를 지킨다. 그래야만 장부라 할 수 있다."는 중국 송나라 허로재의 글에 크게 감명 받아 학문에 정진.

-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짖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 만년(1561년)에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德山洞 :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별세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그의 사후인 1576년 그의 제자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천서원을 건립하였고, 고향 삼가현에 회현서원(晦峴書院→ 龍巖書院)을, 1578년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대에 대북(大北) 세력이 집권하자 그를 봉사하는 서원들이 모두 사액되었고 조식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2) 벼슬을 사양하고 처사로서 살다.

- 1538년 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45세 때 고향 삼가현에 돌아온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살면서 제자 교육에 힘썼다. 그는 성년기에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 그가 명종에게 올린 상소에서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명종과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 덕망으로 유일(遺逸) 등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보다는 기개와 절조로 이름이 높았다. 자신의 시에서 “천석들이 큰 종을 보라! 큰 방망이로 치지 않으면 소리나지 않는다” 라고한 것을 보면 드러내지 않은 그의 자부심이 대단하였음을 엿볼 수있다. 그는 너무 높고 큰 곳에 뜻을 두었기에 새상에 직접 쓰이지 못하고 사표로서만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오건(吳健), 정인홍(鄭仁弘), 하항(河沆), 김우옹, 최영경(崔永慶), 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 1567년 즉위한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3) 학문과 사상

- 그의 사상은 노장적(老莊的)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하였다. 성성자(惺惺子) 라는 금방울을 늘 차고 행동거지를 스스로 경계하였다. 칼에 새기기를 “안으로 밝은 것은 敬이요 밖으로 날카로운 것은 義이다. 문닫고 들어 앉아 있음이 오래니 온갖 욕심을 말끔히 씻어 내었네” “敬과 義, 이 두 글자는 해와 달 같아서 한가지도 버려서는 안된다” 고하였다. 여기서 경은 마음을 통일하고 가지런하게 함이요, 의는 행동의 올바름을 뜻하는 것이다. 학문하는 태도는 실용, 실천을 우선으로 삼았다.

- 그는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영향으로 제자들은 임진왜란에 의병을 창의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실천.실용적인 학문사상으로 선조(宣祖) 말년과 광해군 시대 개혁정치를 주도하였다. 이처럼 조식과 그 제자들이 견지했던 실천적 학문사상은 바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연원이 되었고 서양철학으로 보면 프래그머티즘이다.

- 「유학」은 「사람에게 필요한 학문(人+需)으로서 실학을 뜻하기도 한다. 학문이란 무릇 그것이 이론적인 사상체계일지라도 사람을 실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사상인 실학일 때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문사상은 보다 실질. 실용적인 것에 중점을 두어야 된다는 의미 한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조식의 연결고리는 조식의 제자인 정구(鄭逑)로, 정구의 제자인 허목(許穆)에게로 이어졌다. 정구는 조식과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았고, 허목은 이러한 정구의 학통을 상속했다. 그뿐 아니라 조식의 실학적 학풍을 근기지방으로 가져와 조선 후기 근기 실학파를 형성시켰다. 실학파의 거두인 이익(李瀷)과 그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은 허목을 통해 조식의 경세사상에서 실학적 요소를 이어받았다.

즉 조식과 조선 후기 실학의 내용상 유사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사회경제 문제에서 공물의 폐해와 이에 관련된 조식과 정인홍의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과 이익의 「장리론」(贓吏論) 그리고 정약용의 「향리론」(鄕吏論)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모두 법도 오래 가면 폐해가 생기기 때문에 개정해야 한다는 일종의 ‘변법사상’ 이었다.

-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초학자에게 《심경(心經)》 《태극도설》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心性)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李滉)의 교육방법을 비판하고 《소학》 《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우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 당시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다.

4) 선비 정신과 계승

- 조식은 “정치가는 나라가 망해가는 데도 태평세월이라 하고, 학자란 나라가 태평세월일지라도 걱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이라고 했다.

-‘출처’란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물러나 재야에 머물면서도 정신적 지조를 지키고 후학을 가르쳐 올바른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실천론이다.

- 선비란  제왕으로도 신하 삼을 수 없고 제후로도 벗을 삼을 수 없다.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그 지조를 뺏을 수는 없다는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준 선비로 이러한 사상은 임진왜란 때  趙宗道 곽재우(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 정인홍 등의 의병정신으로 뻗어났고, 근세엔 단재 신채호 선생 등으로 맥락이 이어졌다.

-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경상우도 특징적인 학풍은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다.

- 그러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조식계)과 남인(이황계)의 정파로 대립되고, 남명의 문인들은 정인홍 등(북인)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몰락한 뒤 남명에 대한 폄하(貶下)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南冥學)은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5) 선생에 대한 평가

- 정인홍 : “선생께서는 구차하게 복종하지도, 구차하게 잠잠히 침묵하지도 않았다”

(* 정인홍 ;  단재 신채호(申采浩) “우리의 역사 인물 가운데 「세명의 걸출한 인물」(三傑)로 육군의 을지문덕, 해군의 이순신, 정치에서 정인홍이다”)

- 이익 ; “천길 벽이 우뚝하게 서 있는 기상은 탐욕한 자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니 이른바 백세의 스승이라 하겠다”


 

(4) 예학, 보학


                                                                                                                                                           

1) 예학 (禮學)

-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는 유학(儒學)의 한 분야. 본래 중국 고대의 종교적 제사의식(祭祀儀式)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예는 주대(周代)에 와서 인간행위의 규범이자 사회질서의 근간으로 정형화되면서 고대문화 전반을 의미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유학을 창시한 공자(孔子)는 바로 이러한 예에 정통했던 인물로 예치(禮治)를 강조하였다.

- 공자에 의해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고, 순자(荀子)에 의해 적극적으로 계승, 한대(漢代)에 이르러 삼례(三禮), 즉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를 편찬하였는데, 주로 순자가 예에 관하여 내린 해석을 바탕으로 그때까지 전승되어 온 예에 관한 이론과 시행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 고려 말에 《주자가례》가 도입되고 조선전기에는 제도적 성격이 강한 《주례》와 왕실의 예인 오례가 강조되었으며, 성종대(成宗代)에 이를 집대성한 《국조오례(國朝五禮)》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사림(士林)이 등장하는 중기에 국조오례의파(國朝五禮儀派)와 고례파(古禮派)의 대립, 여러 차례의 전례논쟁(典禮論爭). 그 결과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정구(鄭逑)의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저술.

- 17세기 예송(禮訟)에서 《주자가례》 《의례》 등을 중시하며 왕례(王禮)와 사례(士禮)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왕사동례(王士同禮)와 《예기》 《주례》 등을 중시하며 왕례와 사례의 차이를 강조하는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로 나타났다.


2) 보학 (譜學)

- 여러 가문(家門)의 보계(譜系 : 系圖)에 관한 학문.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당시는 이를 위한 전관(專官)이 있었다.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 사마 천(司馬遷)은 3대세표(三代世表)를 만들어 씨족의 연원을 밝혔으나 반고(班固 : 後漢의 史學者) 이후의 보계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한의 등씨(鄧氏)가 지은 관보(官譜), 응소(應邵)가 지은 씨족(氏族) 1편, 왕부(王符)가 지은 《잠부론(潛夫論)》에 성씨(姓氏) 1편 등이 뒤를 이었으며, 위(魏).진(晋) 육조연간에는 가보(家譜 : 족보)를 만드는 일이 성행하였다.

- 한국의 보학은 송.원대에 그곳의 족보를 모방하기 시작한 것이 효시로 보이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에 의하면 1562년(명종17)에 간행된 《문화류보(文化柳譜)》가 최초라 하였으나 이보다 앞선 고려시대에도 거가귀족(巨家貴族)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보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씨족.벌족별로 많은 족보가 만들어졌으며 이들 족보 전반에 걸친 계보서로 《청구씨보(靑丘氏譜)》 《잠영보(簪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 있으며, 또 국가.사회의 현달(顯達).귀현(貴賢)의 세계(世系)를 명백히 하려고 한 보서(譜書)로 《문보(文譜)》 《삼반십세보(三班十世譜)》 《진신오세보(縉紳五世譜)》 《호보(號譜)》 등이 있다.



4. 조선전기 불교, 민간신앙

                                                                                                                                                           

 (1) 조선 초기 억불책

- 억불책은 불교를 근본적으로 소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난립된 종단을 통합하고, 사원 경제를 약화시키고, 재정을 늘리며 피역자를 감소시키고, 사상적 분열을 지양하려는데 목적을 듬. 불교는 이미 호국적인 민족신앙의 하나를 이루어 왔고, 여말의 성리학도 불교를 매체로 수용되었기 때문에 유불을 조화 일치 시키려는 노력은 여말선초 사상계의 지배적 경향.

따라서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등 초기 역대 군주는 모두 불교를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는 억제하면서도 사상적으로는 비호하는 정책을 썼으며, 정도전 권근과 같은 저명한 성리학자들도 불교를 사상적으로 공격했지만, 그 본심은 불교사상 그 자체보다 사원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 태조 : 무학(임제종) 왕사, 조구(천태종)국사 .흥천사세워 지눌의 선풍 부흥.

­ 태종 : 11종의 불교종단을  7종으로 묶고 320 여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찰의 토지 노비 몰수

­ 세종 :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묶고 각각 18사만 공인 사찰로 남김.

­ 세조 : 법화경을 비롯한 불서 간행. 법화경이 특히 중요한 것은 會三歸一과 삼체 원융철학이 중앙 집권 강화에 유리하였으므로.


◈ 세조와 상원사 (해인사 벽화설명)

- 세조의 꿈에 단종모후가 나타나서 힐책하고 침을 뱉았는데 세조는 온몸에 등창이 나서 참회하고자 오대산 상원사에 가서 백일 기도를 올렸다. 백일째 날 몸이 가려워 개울에 가서 목욕을 하는데 누가 등좀 밀어줬으면 하는데 마침 지나가는 동자가 있어 부탁했다.

세조는 동자에게 "네가 나가서 상감옥체의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  

동자왈 "상감께서는 오대산에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요."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세조의 종기는 깨끗이 나았고, 문수동자 상을 조각하여 상원사에 모셨다.

- 한번은 세조가 법당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하는데 문득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세조의 곤용포 자락을 잡아끌면서 절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자객을 발견하고 화를 면했다. 그런 연유로 상원사에 양묘전(養猫田)을 하사하여 고양이를 기르게 하였다.


◈ 普雨 와 말죽거리

- 12세의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수행과 학덕이 높으며 도량이 넓은 큰 스님을 구함. 재상 정만중의 천거로 설악산 백담사의 보우스님을 선종판사겸 봉은사 주지로 삼았다. 명종6년(1551) 유생들의 빗발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산군 때 폐지된 도첩제와 선교양종제 승과 부활했다.

- 스님들의 도성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법령관계로 왕후가 3일에 한번씩 봉은사로 스님을 찾아 뵙고 나라의 대소사를 의논하였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는 명종 20년(1565)까지 불교 중흥에 노력함. 이때 설치된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 사명당 등이 배출되었다.

- 탄핵상소 400여회. 보우는 "오직 삼베옷에 솔잎을 먹으면 그만일 뿐 일생의 나머지 일은 나도 모를레라" (唯此布衣松飯樂 一生無始亦無終)라며 묵묵히 불법중흥에 노력함

- 문정왕후 사후 제주도 귀양중 목사 변협에게 杖殺당함.

목사 변협은 임금께 바칠 말을 고르다 벌대충이란 말의 뒤발질에 채여 죽었다. 관원은 그래도 휘귀한 명마라 벌대충을 한양으로 보냄. 벌대충은 보우의 化現이었다. 명종 꿈에 보우가 나타나 임금의 은혜를 많이 입었으므로 3년간 말이 되어 모시겠습니다 하였고. 보우는 제자들에게도 현몽하여 내가 말이되어 아무 때 아무 곳을 지날테니 거기서 만나자고 하였다. 제자들은 좋은 말 먹이를 준비해서 만났다.(말죽거리)

- 왕과 약속한 3년이 지나자 한 신하가 벌대충이 죽었습니다. 하고 아뢰니 명종은 노여워하며 다시 아뢰라고 하자 "숨을 쉬지 않는 지가 사흘째이며 먹이를 먹지 않는지도 사흘째이며.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지도 사흘이 되었습니다." 유집은 < 虛應堂集>


◈ 도첩 (度牒)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관청에서 발행한 출가(出家)의 공인장(公認狀). 도패(度牌)라고도 한다. 예조(禮曹)에서 발급한 중의 신분증명서로서, 중이 죽거나 환속(還俗)하게 되면 국가에 반납하게 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납세의무(納稅義務)를 버리는 일과 장정(壯丁)이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막아 군정(軍丁)을 비롯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 중국 당(唐)나라에서 전래되어 고려시대부터 시행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억불책(抑佛策)으로 더욱 강화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포(布) 50필(疋)을 바치면 발급하여 주었다.

- 조선 태조 때부터 실시,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송경시험(誦經試驗)에 합격한 자는 정포(正布) 20필, 양반 자제는 100필, 서인(庶人)은 150필, 천인(賤人)은 200필을 바쳐야 발급해 주었다.

- 세조는 완화하여 교종이나 선종의 본산에서 시험에 합격한 후 포 30필을 바치도록 함. 그러나 상당수 무도첩 승려가 있어서 그들을 강제로 군적에 편입시키는 강권 발동.

- 성종 때는 도첩제 자체를 폐지하여 국가에서 승려가 되는 것을 막았다.

- 중종 때  승인호패법을 실시, 도첩제가 다시 실시되는 명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 도첩제는 시행과 폐지를 거듭하면서 엄격하게 실시되지 못하여 관리들과 결탁한 승려들은 쉽게 도첩을 얻어낼 수가 있었다.


(2) 조선초기 도교

- 조선 초기에 난립된 도관(道觀)을 정비하여 소격서(昭格署)로 하여금 제천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마리산의 초제(醮祭)가 가장 유명하다.

- 소격서에서는 도학(道學)을 잡학의 하나로 가르치고, 도류(道流)라는 관리를 두어 도교행사를 집행하게 하였는데, 세조는 특히 도교를 숭상하였다.

-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서 사림에 의해 도교 배척운동이 일어나 소격서가 폐지되고 조정으로부터 소외되어 갔는데, 다만 왜란을 전후하여 일부 재야 지식층은 도교를 신봉하면서 사대(事大)와 문약에 빠진 성리학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 도인(道人)들은 환인(桓因).단군을 한국 도교의 시조로, 김시습(金時習)을 중조로 각각 내세우면서 점차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여 일반 서민들에게 큰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 도교와 관련된 예언사상은 각종의 비기(記).참서(讖書)에 반영되어 《정감록(鄭鑑錄)》 《토정비결(土亭訣)》 등이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3) 조선초기 민간 신앙

- 부락과 국가 또는 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주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동시 지나친 신앙활동이 경제적 낭비, 신분질서 문란. 합리적 생활을 저해하는 역기능도 있다.

민간 신앙은 순수한 형태를 간직하는 경우도 있지만 불교나 도교와 혼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에서 佛 道 민간신앙을 억제하면서 일면보호 민족신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한다는 사상정책의 소산.

- 무격신앙(巫覡信仰)은 유교의 합리정신 때문에 크게 위축되었으나, 그 민족자각적인 측면과 의술적인 측면은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 예컨대, 환인.환웅.단군은 옛날부터 조물주이자 인간 길흉화복의 주재자로서 민간에 널리 신앙되어 왔고, 황해도 구월산에는 이른바 삼신(三神)을 제사하는 삼성사(三聖祠)가 전부터 있었는데, 고려 말 조선 초에 단군이 국조(國祖)로 인식되면서 조선 초기에는 삼성사에 대한 제사를 국가에서 주관하였다.

- 무당에 의한 질병치료는 민간에 많은 폐단을 일으켜, 조선 초기에는 미신이 억제되면서 보다 과학적인 치료법이 개발되었으나, 무당 치료가 지닌 긍정적 요소를 흡수하여 이를 국가의 각종 제사와 질병치료에 부분적으로 원용하였으며, 이들을 국무당(國巫堂)이라고 불렀다.

- 사림의 집권으로 미신으로 배척되어 민간신앙으로서만 전승되었다. 진료수단이 거의 없고 문맹이 극심한 서민사회에서는 무당이 곧 길흉화복의 주재자로서 맹신되었다.


◈ 토정 이지함 

☞ 참고 ; 원종성 <향싼 종이 향내난다> / 고세훈, 월간중앙 1999.1


                                                                                                                                                           

- 1517 중종 12년~1578 선조 11년,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한산(韓山). 이지함은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서 아버지 이치(李穉)와 어머니 광주 김씨 사이에 출생했다.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土亭)이라는 호가 붙었다. (서울 마포구 토정동 소재 한강삼성아파트 입구 쪽이 토정이 토담집을 짓고 살던 자리다. 그곳에 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 형 지번 밑에서 글을 배우고 화담 서경덕의 제자가 되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도학과 문장이 탁월하여 천문지리 의약 복서 병서 음양술수 등 제가(諸家)잡술(雜術)에 통한 이인(異人)이었다.

- 패랭이 대신 쇠 갓을 쓰고 팔도 유람을 한 자유인으로 그의 쇠 갓은 밥을 지어먹는 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세속적 욕망에 얽매이지 않고 몸과 마음의 평화를 추구한 자유인이었다.

- 박순(朴淳).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교유했으며, 당대의 일사(逸士) 조식(曺植)은 마포로 그를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고, 율곡 이이는 그를 가리켜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하였다. 중봉 조헌은 그의 제자이다.

- 이지함은 정4품 이정랑의 딸과 결혼한 후 처가인 광릉 농장에서 1년 동안 학문에 매진하였다. 하인에게 밤에 쓸 등유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장인이 그의 건강을 염려해 등유를 보내지 않자 직접 산에 가서 관솔을 따다가 불을 밝히며 공부를 했다.

- 스승 서경덕의 영향이었을까. 이지함은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마지못해 과거에 나갔지만 답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왜 과거를 보지 않느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제각기 좋아하는 바가 있소, 나는 내 좋은 대로 살 것이오" 라고 대답했다.

- 안명세(安名世) 사건과 청홍도 사건은 이지함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안명세 사건이란 이지함의 나이 33세 때 죽마고우였던 안명세가 사형 당하는 사건이다. 유능한 사관이었던 안명세는 사관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을사사화(1545) 때 윤원형. 이기 같은 소윤 일파가 윤임 등 대윤을 모함해 죽였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윤원형 일파가 절대 볼 수 없는 사초를 보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 안명세를 처형한 것이다.

이홍남의 고변사건(청홍도 사건) ; 형제인 이홍남과 이홍윤의 감정대립이 불러온 역모 고변사건이었다. 이홍남은 동생 이홍윤이 왕에게 불충했다고 고변하게 되는데, 이 역모사건의 괴수로 이지함의 장인인 이정랑이 걸려들게 됐다. 이로 인해 이지함의 처가는 풍비박산 났고, 이지함도 연좌법에 의해 양반 신분에서 천민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처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양반이었지만 손수 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팔아 수년만에 수천 섬의 양곡을 모을 수 있었고, 그 양곡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험이 실학적인 무역과 상업론의 바탕이 되었다.

- 서경덕이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쳤듯 제자인 이지함도 여자에게는 조신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제주도에 세번이나 다녀왔다. 제주의 관원이 그의 이름을 익히 듣고 기생으로 하여금 수청들게 했다. 그리고 기생에게는 이지함의 사랑을 얻는다면 창고의 양식을 모두 상으로 주겠다고 제의했다. 온갖 아양을 떨었지만 기생은 끝내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 51세 되던 해 선조가 등극하면서 정국이 쇄신되면서 53세이던 1570년에 이홍남 고변사건의 연좌에서 풀려났다. 이이. 성혼. 조식 등의 학자들을 만나 가난한 백성 구제방도를 토론했다.

- 1573년(선조 6년) 58세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종6품직을 제수 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다. 그가 현감으로 부임하자 아전들이 도임상이란 걸 차렸는데, 그것은 갖은 진미를 두루 갖춘 음식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저도 들지 않은 채, 상을 물리도록 하였다. 놀란 아전들이 차린 것이 부족하여 그런 것으로 알고 다시 엄청난 상을 차려서 올렸으나 역시 그대로 치우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이 고을에는 잡곡밥이 없느냐? 나는 아직 이와 같은 진수성찬을 먹어 본 일이 없어 겁이 나서 물렸다." 하며 분수에 없이 사치하고 낭비하는 풍조를 크게 나무랐다. 그는 현감으로 있는 동안 잡곡밥에 시래깃국을 빼지 않도록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는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조사해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바로 미련 없이 관직을 사직하였다.

-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유리걸식하는 민중의 구제를 최대 목표로 생각하던 이지함은 3대창고론을 주장했다. 3대창고론은 이지함의 사상이 집약된 '국부론'이라 할 수 있다.

첫째가 도덕의 창고인 인심을 계발해 화평한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 사대부들이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수기치인하며 도덕을 지키면 백성은 경제활동에 힘을 쏟을 수 있다. 따라서 재물은 풍족해지고 그 재물이 균분돼 민생은 윤택해지고 이상적인 대동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재창고론이다. 어느 때에도 인재가 없었던 적이 없는데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가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셋째는 재용창고론이다. 육지와 바다는 1백가지로 소용되는 물산을 저장한 창고다. 이 창고에서 나는 물산을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 누구나 생산하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당시는 모든 산물을 다만 그 고을에서만 취하여 쓰고 다른 고을에 있는 것은 항상 금지해 취용하지 못하게 하니 잘못된 일이라는 지적이었다.

- 1578년 4월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아산현감이 되었다.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을 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늙은 아전하나가 어찌나 백성들에게 횡포가 심한지 여러 차례 시정하도록 일렀으나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다. "너 같은 놈은 비록 몸은 늙었으나 마음은 아직 어려서 벌을 받아야 깨우치리라."하고 갓을 벗기어 흰머리를 총각머리로 땋아 놓고, 벼루를 들리어서 종이 곁에 세워 놓았다. 늙은 아전은 제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제가 당한 수모에만 앙심을 품어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토정이 늘 지네(蜈蚣 ,오공)의 생즙을 내어 먹는 즉시 그 자리에서 지네의 독(毒)을 없애기 위해 날밤을 먹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밤 대신에 버드나무로 깎은 가짜 날밤을 준비해 놓았다. 이것을 모른 토정은 늘 하던 대로 지네즙을 마시고 날밤을 찾았으나 날밤이 있을 리 없어, 미처 제독하지 못한 탓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해 7월 그의 나이 62세였다.

-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묘는 충남 보령시 주포면 고정리 국수봉 기슭에 소재 토정 일가의 선영에 있다.

 

사진 뺴거나 약간 제가 잘 못한 요약만 좀 하시면 5장은 충분히 되실듯?? ㅎㅎ 채택 부탁드립니다!! 300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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