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더불어, 시대와 함께 한살림선언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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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0.26. 오후 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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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명의 지평을 바라보면서

[오마이뉴스 임채도 기자]

1989년 10월 29일 장일순과 박재일, 김지하, 김민기, 최혜성 등 생명운동가, 재야 민주인사, 지식인, 청년, 협동조합운동가들이 대전 신협연수원 마당에 모여 <한살림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자리에서 80여 쪽, 5만 자에 달하는 이 문건이 후에 한국 생명운동과 친환경유기농업, 그리고 협동조합의 역사에 미칠 영향을 미리 짐작한 사람은 없었다.
 
1986년 12월 서울 제기동 두어 평 쌀가게로 시작한 '한살림농산'은 한살림선언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며 '전국한살림협의회'(1989년), '사단법인 한살림'(1994), '한살림전국협의회'(1996), '한살림전국모임'(2001), '한살림생협연합회'(2011)으로 발전했다.

한살림에 가입한 조합원은 1995년 1만여 명을 넘었고 2009년 20만 명, 2017년 60만 명을 넘어 2019년 현재 한살림은 조합원 70만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세계적 비영리 생활협동조합법인(이하 생협)으로 성장했다.
 
한살림선언은 지난 30년 한살림생협, 한살림 친환경유기농업운동, 한살림 생활문화운동의 정신적 토대, 실천 지침의 역할을 해왔고 한국 생명운동, 협동운동사에도 귀중한 정신적 자산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9년 10월 29일 대전 신협 연수원에서 열린 한살림모임 창립총회 기념사진
ⓒ 모심과살림연구소

한살림선언은 1970~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통과 유기적 지식인들의 결합이 낳은 시대 성찰이자 생명운동 선언이었다. 한살림선언의 내용을 보면 크게 '문명위기론', '생명론', '한살림운동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살림선언은 먼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산업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징후를 핵 위협과 공포, 자연환경의 파괴, 자원고갈과 인구폭발, 문명병의 만연과 정신분열적 사회현상,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악순환, 중앙집권화된 기술관료체제에 의한 통제와 지배, 그리고 낡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위기 등 일곱 가지로 정리했다.
 
그리고 한살림선언은 인간과 자연이 모두 분리할 수 없는 생명의 부분이자 전체임을 선언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와 사물은 소중한 생명을 품고 있기에 동등하게 존귀하며, 따라서 서로를 모시고 살리지 않으면 조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인간의 지배욕은 결국 인간의 소외와 공동체의 파괴로 귀결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살림의 생명론은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며 얻은 각성이자, 다시 생명으로 돌아가자는 반성이라 할 수 있다.
 
 
 1991년 발행된 ‘한살림 무크지’(좌)와 1992년 처음 책자로 발간된 한살림선언(우)
ⓒ 모심과살림연구소

  
한살림선언의 생명론은 수운과 해월의 동학사상에서 많은 부분 유래되었다.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이천식천(以天食天), 만사지식일완(萬事知 食一碗), 향아설위(向我設位), 후천개벽, 십무천(十毋天), 불연기연(不然其然) 등 이 모든 것이 말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우주 생명이 얼마나 크고 무궁한가를 깨닫게 될 때 모든 생명과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살림선언은 생명존중의 세계관에 기초해 새로운 가치와 생활양식(lifestyle)을 실현해 나가는 실천운동을 제안했다. 한살림운동을 하는 이유는 더 이상 현재와 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농약과 제초제로 처리된 음식으로 살 수 없고, 핵과 화석연료로 생명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고, 자기만 좋은 음식 먹고 건강할 수 없다. 또 자기만 농약, 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유기농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공생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생명사상가 장일순 선생은 한살림운동이 지녀야 할 마음(가치)으로 자애, 검약, 겸손 세 가지를 들었다. "겸손의 토대 위에서 세상을 넉넉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자, 알뜰함으로 세상의 누구도 굶주리지 않게 하고, 자애 속에서 잘못한 사람조차 안식처를 찾도록 하자는 게 한살림 정신"이라면서, 이러한 진리를 타락하고 부패한 도시 속에서 펼쳐 나가고자 하는 것이 한살림의 뜻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살림 초대 회장 박재일 선생 역시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지자"라는 생산자와 소비자 하나운동, 도농직거래운동, 생명을 살리는 친환경 유기농업운동을 제창하고 실천했다.
  
지난 세기말에 발표한 한살림선언의 전환의 논리는 30년이 흐른 지금도 의연하다. 20세기 말 위기의 징후들은 21세기에 들어 지구인의 일상을 위협하는 극단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최근 연구들은 2030년에서 2052년 사이 지구의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C 이상 상승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의 예측치보다 훨씬 빠르게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2050년 무렵 지구 육지의 35%, 지구 인구의 55%가 생존의 문턱을 넘어서는 치명적인 조건에 노출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문명의 위기 앞에서 인간의 욕망은 20세기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의 관성과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0년 한살림선언은 70만 조합원과 2천여 생산자들의 자유선언이자 생명살림의 실천강령이었다. 한살림은 농약과 화학비료로 황폐해진 땅 위에 생명농업의 싹을 틔우고, 각박한 도시 소비자들에게 나눔과 환대의 공동체를 제안하였다. 도시와 농촌, 생산자와 소비자가 둘이 아님을 선언하고,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지키고, 소비자는 생산의 생활을 책임지는 연대와 공생을 실천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서 농민, 농업, 농촌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조금씩 일어나고, 친환경유기농업과 도농직거래,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지금 전국 118개 한살림 생산자 공동체와 87개 가공산지에서 친환경유기농산물과 우리 농업의 미래가 만들어지고 있다. 226개의 도시 한살림매장에는 매일 생산자들의 땀이 밴 농산물과 가공품이 공급되고 하루에만 수만 명이 이를 이용하고 있다. 전국 400여 마을 모임과 500여 개의 조합원 소모임에서 옷 되살리기, 병 재사용, 자원순환, 기후변화 비상행동, 농지살림, 햇빛발전, 유전자조작식품(GMO)반대운동, 탈핵 운동, 푸드플랜, 친환경 공공급식운동, 먹을거리 나눔운동, 국제민중연대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지진 피해를 본 네팔 주민을 지원하고 최근 강원도 산불피해 주민에게 한살림의 유기농 쌀 5t을 강릉시에 기부하기도 했다.
    
 한살림선언 일본어판 소개기사
ⓒ 모심과살림연구소

 
 
한살림선언은 그동안 일본과 중국, 태국 등지로 번역, 소개되었다. 최근에는 한살림운동에 관한 외국의 관심도 크다. 독일 경제월간지 2019년 2월호는 "한살림은 유기농 먹을거리를 취급하는 전세계 협동조합 중 가장 큰 규모를 지닌 곳 중 하나"로 소개하며 한살림 생산지와 생산자들의 활동을 보도했다. 일본, 대만의 생협과도 꾸준한 국제민중연대 활동을 하고 있다.
 
한살림선언 30년 맞아 한살림연합은 오는 29일 오후 2시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생명과 더불어, 시대와 함께 ? 한살림선언 30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생명, 평화, 생태운동의 오랜 벗들과 전국 한살림 생산자, 조합원들이 모여 한살림선언의 생명존중 정신을 다시 돌아보고, 한살림이 더 낮은 곳에서 더 넓게 우리 사회를 밝혀나갈 것을 다짐할 예정이다.
 
1989년 10월 29일 대전 신협연수원 마당에서 경향각지 생명의 마음들이 모여 "온 지축을 울리고 대지를 뒤흔드는 뭇 중생의 아우성 소리"를 담아 한살림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로부터 30년, 생명의 세계관을 바로 세우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개척하는 한살림이 키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죽임의 기계소리, 허기를 채우지 못한 미움과 증오가 가득 찬 세상에 다시 한살림이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 올립니다.
 
"일신이 꽃이 되니 온 집안이 다 봄이요, 집집마다 대문을 활짝 여니 온천지에 봄기운이 가득하다."
 
 한살림 소식지
ⓒ 한살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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