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카와 에이지의 대표작 《미야모토 무사시》
일본 최고의 검객을 소설로 만난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최고의 검객이다. 그는 스물아홉 살 때까지 60여 차례의 결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쌍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이도류二刀流)의 창시자이자 손자의 《손자병법》,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함께 세계 3대 병법서로 불리는 《오륜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이야기는 그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지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일본인들 사이에 무사시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는 1935년 8월 23일부터 1939년 7월 11일까지 4년에 걸쳐〈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다. 다케조(무사시의 아명)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고 시체들 사이에 누워서 자기의 얼굴 위로 지나가는 수많은 군마의 질주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미야모토 무사시가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기 외의 모든 것을 스승으로 삼아 무사의 길을 깨닫고 참다운 무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울러 기존의 전기물과는 달리 위인이나 위정자가 아닌 민초들의 삶을 민초들의 시각에서 다룸으로써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1600년대 일본 서민들의 삶을 날것 그대로 오롯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 소설이 탄생하게 된 배경 또한 흥미롭다. 일본의 소설가이자 아쿠타가와 상, 나오키 상의 설정자인 기쿠치 칸菊池?과 나오키 산주고直木三十五 사이에 미야모토 무사시의 명인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 그 계기였다.
1932년 나오키가 무사시는 ‘명인(검의 고수)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내놓자 기쿠치가 그에 반대하며 무사시는 ‘명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나오키가 요시카와 에이지에게 어느 쪽 주장을 지지하느냐고 묻자 요시카와는 기쿠치의 주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나오키가 다시 ‘요시카와가 무사시를 명인으로 생각하는 이유를 발표하라’고 촉구했지만, 이 요구에 대해서 요시카와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1935년에 요시카와는 이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나오키의 요구에 대한 답을 내놓았고, 이 작품이 그야말로 신드롬급에 가까운 인기를 모으자 자연스럽게 ‘무사시는 명인’이라는 설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이 작품이 책으로 출간된 것은 물론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만화 등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는 일본에서 단행본으로 총 3종이 출간되었다. 문고판으로는 5종 이상이 출간되어 현재도 판매되고 있고,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20편, 라디오 드라마는 3편, 텔레비전 드라마는 7편, 연극은 두 편, 만화는 《배가본드》가 있다.
이 소설은 17세의 무사시가 친구와 함께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잔병이 되어 시체들 사이에 누워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일반 전기 소설이나 위인전과는 달리 29세 때 무사시 인생의 최대 라이벌인 사사키 고지로와의 후나시마(간류지마) 결투를 끝으로 소설도 끝을 맺는데, 이는 그 후로 무사시가 간혹 대규모 전투에는 참전한 기록이 보이지만 개인적인 결투에 나선 기록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저자가 소설적인 재미를 위해서 과감하게 생략한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