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경영인 더 윤리적이라지만, 그런 ‘검증 기회’조차 없었다”

입력
수정2019.11.20. 오전 10:07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김영희 논설위원의 직격인터뷰│박정림 KB증권 사장

첫 여성 증권사 대표 “여성의 이피션트 프런티어 끌어올리겠다”
남녀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생각’ 하는 이들만의 조직이 위험

집중력·친화력·멀티태스킹이 여성의 장점…강점 강화가 효과적
‘업무전문성’ 위해 아직도 쇼핑백 가득 자료 담아가 새벽까지 봐

사모펀드는 제도보다 운용이 문제, 고객 ‘선택권 제한’ 없어야
저금리 시대에 배당수익 등 안정적 상품 니즈는 계속 커질 것
증권업계 첫 여성 시이오(CEO)인 박정림 KB 사장은 "여성의 이피션트 프론티어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뉴욕 월가발의 금융위기가 아직 전세계를 흔들던 2011년 초, 당시 프랑스 재무장관이던 크리스틴 라가르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쪽 성이 지배하는 환경은 특히 금융 부문에선 좋지 않다. 남성들은 옆에 앉은 다른 남성보다 얼마나 더 자신이 ‘남성스러운지’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방 안에 너무 많은 테스토스테론이 존재해선 안 된다.”

이 주장에 격하게 공감하든 격렬히 반발하든, 우리 금융계를 포함한 기업의 상층에 테스토스테론이 넘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올해 1분기 기준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상장법인 2072곳의 전체 임원 2만9794명 가운데 여성은 1199명으로 4%에 그친다. 특히 전무 이상 여성은 거의 오너 일가가 차지하는 현실에서, 박정림(56) 케이비(KB)증권 사장의 올해 1월 취임은 화제가 됐다. 김성현 사장과 각자대표 체제로 자기자본 4조원 규모의 케이비증권을 이끌어온 박 사장을 14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나 여성 시이오(CEO)로서의 삶과 업계 현안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강연에서 “죽도록 노력해 사장이 됐는데, 골프장 가면 난 사모님이라 불리고 옆의 상무에게 사장님이라 하더라”고 말했다. 여성 시이오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의 주소를 보여주는 듯했다. 실제로 다른 시선이나 책임감을 느끼는가?

“호의적이든 부정적이든 ‘어, 여자? 어디 잘하나 보겠어’ 이런 시선은 느낀다. 은행에선 이미 5년 전에 첫 여성 행장이 나왔는데, 상대적으로 은행에 비해 증권은 개인 역량 중심에 리스크 테이킹도 큰 조직이다. 영광이면서 부담도 크다. 재무관리에서 이피션트 프런티어(Efficient frontier)라는 게 있다. 정해진 위험하에선 가장 높은 수익을 내는 지점을 찍어 이은 ‘효율적 투자곡선’인데, 이 이피션트 프런티어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나 같은 여성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후배들이 일할 그 곡선 아래 땅이 넓어질 테니.”

―여성들은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내가 잘못하면 여성이 욕먹는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남성들은 절대 안 할 생각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워낙 샘플이 적으니까. 남성은 샘플이 많으니 못해도 개인의 잘못이지만, 여성은 잘못하면 여성이 다 그렇다고 생각해버리지 않나. 그게 책임감도 되지만 일할 때 무리를 하거나 제약이나 족쇄가 될 수 있다.” 

―금융위기 등을 겪으며 금융계의 남성 중심 의사결정 구조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시각에 동의하나?

“금융뿐 아니라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인데, 난 여성·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 조직이 동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게 리스크가 크다고 본다. 지금까진 그 동일한 집단이 남성이었던 거지만, 만약 여성이라면 문제가 없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무든 뭐든 기본은 ‘분산’이다. 생각이 다양한 이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해야 회사가 중간을 찾아가고 리스크를 헤지할 수 있다. ‘그래도 여성들이 좀더 윤리적이지 않나?’라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건 그동안 남성들만 해왔기 때문이지 사실 여성들이 더 윤리적인지 아닌지는 증거도 없다. 너무 적어 그걸 검증해볼 기회조차 없었던 셈이다. 젠더·세대 등 모든 면에서 다양성이 중요하다.”

―어렸을 때 꿈이 사장이었다고 들었다. 1982년에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는데, 여성이 그런 꿈을 갖기 쉽지 않았을 때다.

“엄마가 전문직이었는데 엄마 인생을 보니 ‘사’ 자 직업에 로망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자신의 일도 힘든데 집안 형편상 경제적 부담 등을 짊어질 때가 많았고. 그때 알고 있던 번듯한 직업이란 게 변호사·의사 말곤 그냥 사장이었던 거다.(웃음) 대학교 때 공부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다만 살다 보니 ‘스쿨 스마트’한 사람이 있고 ‘스트리트 스마트’한 사람이 있는 것 같더라. 난 후자다. 친구들 사이를 조율하고 조직을 짜고 이런 건 좋아했다. 조직생활에선 그런 사람들이 경쟁력이 있는 것 같다.”

―여성이라 부딪힌 장벽은 없었나?

“우리 과 동기 325명 중 여성이 3명이었다. 여성이 너무 적어 여성이란 생각을 못 하고 학교를 다녔다.(웃음) 서울대에 여성 화장실이 한층 건너 있을 때고, 엠티(MT) 가서 여학생들이라고 따로 방을 잡는 일도 없었을 때니. 사회로 나와 남성들로 구성된 주류 카르텔에 편입되기 어려운 건 나뿐 아니라 어느 여성이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러다 보니 기회에서 탈락한 적도 적잖았다. 그런데 대부분 여성을 안 시키며 대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일을 안 해봤기 때문’인 반면, 남성을 시킬 땐 ‘조직관리만 잘하면 되지, 꼭 그 일을 해봤어야 하나’라고 하더라. 모순된 논리 아닌가. 경영진의 의지가 중요하다. 내가 은행 출신이고 여자인데도 발탁된 데는, 조직 내 다양성을 중시하는 윤종규 케이비금융지주 회장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04년 국민은행으로 오기 전까지 여러 직장을 거쳤다. 외부인이며 소수자였을 텐데.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 성격이 긍정적인 편이다. 상사에게 깨지면 깨진 팩트는 인정하되 마음에 안 담으려 했다. 자꾸 마음에 담으면 다른 일을 할 때 판단에 오류가 생기거나 무리수를 두게 되더라. 내 나름의 ‘마음의 반창고’를 붙이는 방법이다. 그리고 일하기 전 친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외국계 기업에선 이해 못 하겠지만, 우리는 역시 관계 중심적이더라. 그래서 술도 많이 마셨다. 은행 와서 마신 술을 병으로 이으면 경부고속도로 세번은 왔다 갔다 할 거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또 하나, 업무 전문성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외부에서 전문가라고 데려왔는데 전문성이 없으면 영이 서겠나. 지금도 가끔씩은 쇼핑백에 한가득 자료를 가져가 새벽 2시까지 본다.”

―흡연실까지 쫓아다녔다고 들었다.

“처음엔 회의에서 모든 게 결정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회의 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들을 나누더라.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될 수 있겠다 싶어 흡연실도, 저녁 자리도 빠지지 않았다. 정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다. 이젠 흡연실도 회사에 없거니와(웃음) 관계중심적에서 업무중심적 문화로 바뀌었다. 특히 주 52시간 근무제 영향이 크다. 일하는 여성들이 힘든 게 야근과 술문화였는데, 여성뿐 아니라 젊은 남성들에게도 일하기 좋은 환경이 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친화력·집중력·멀티태스킹 능력을 자주 강조하더라. 이런 자질이 지금 정당하게 인정된다고 보나?

“그렇다. 주 52시간이 되면서 집중력이 가장 중요해졌다. 정해진 시간에 아웃풋을 내야 하는데, 여성들이 강점이 있다. 친화력은 곧 커뮤니케이션 능력인데, 요즘은 수평적 문화가 강조되지 않나. 누구는 ‘수다’라 하지만, 처음 봐도 몇시간이든 대화를 이어나가는 여성들의 친화력은 강점이다. 그리고 워낙 멀티태스킹에도 익숙하다. 윗사람들은 하나 끝난 다음 다른 일을 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성공하려면 남성처럼 되어야 하나?’ 같은 생각은 버렸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흔히 약점 보완을 중시하는데, 살다 보니 약점 보완은 너무 어렵더라. 되레 강점을 강화하는 게 효과적이다.”

―최근 조사에서 증권업계 남녀 임금 격차가 더 벌어졌다. 맡은 직무가 다른 탓이라지만, 그런 구조 자체도 문제다.

“증권사에서 성과급을 많이 받는 조직이 아무래도 프런트 업무로 불리는 기업 인수·합병 등 아이비(IB)나 채권운용 쪽인데, 이런 쪽에 여성 인력이 적다. 여성을 발굴하거나 신입을 뽑아 키우라는 푸시를 끊임없이 한다. 본점 관리 부서도 여자 부장이 될 만한 사람을 계속 모니터링하고 육성하라고 말한다. 여성들이 그런 부문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경영진이 의지를 갖고 만들어줘야 한다. 그래도 우리 회사는 여성의 근속 연수가 동종 업계보다 4.5년 길어 14.6년이다. 리더급인 여성 부·점장 비율은 현재 13.2%인데 내년 초 15%, 2022년 20%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여성 진출이 확대되며 일부에선 ‘역차별’ 주장도 제기한다. <82년생 김지영> 논란도 그렇고.

“파이가 점점 커지던 고성장 시대와 달리 저성장이 되면서 크지 않은 파이를 서로 나눠 먹어야 하는 구조가 된 게, 세대갈등이나 젠더갈등이 심해지는 이유 중 하나 같다. 답은 모르지만 여성에겐 아들 생각 하라, 남성에겐 딸 생각 하라는 말은 많이 한다. 크지 않은 파이 내에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조금씩 양보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금융계 이야기를 해보자. 올해 국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와 라임자산운용 사태로 사모펀드 시장의 위험성이 다시 논란이 됐다. 급격한 규제 완화가 원인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사모펀드 제도 자체보다 운용의 문제라고 본다. 사모펀드에 어떤 상품을 담았고 고객들에게 정확히 안내·판매했는지 여부가 문제였다. 금융권 책임이 크지만, 뭉뚱그려 다 문제가 있다며 되돌아가기보다 운용사가 더 좋은 상품을 담고, 판매사는 상품 소싱과 판매 절차를 좀더 깐깐하게 하고, 판매 뒤에도 상품들이 제대로 운용되는지 선관의무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방향이 필요하다. 은행 지점 평가지표에 고객 수익률을 강화한다든지 직원의 완전판매 교육을 강화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페널티를 주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현재 고난도 사모펀드의 은행 판매를 제한하기로 하고 범위를 살펴본다고 했는데, 은행 고객들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일은 피했으면 한다.”

―KB증권이 최근 1조5천억원대 환매연기사태를 일으켰던 라임자산운용과 총수익스와프(TRS) 거래를 해 금감원 검사를 받았다. 또 올해 개인·기관 합해 3천억원 넘게 판매한 호주 부동산 투자 대출상품이 논란이 됐는데.

“라임 관련해선 금감원의 검사가 진행중인 상황이라 말씀드리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결과가 나오면 이를 반영해 좀더 발전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개선해야한다는 생각이다. 호주 부동산의 경우는 계약대로라면 장애인 아파트로 개조해 운용을 해야 하는데, 현지업체가 다른 식으로 운용하려는 걸 발견해서 회수조치에 들어간 거다. 여러 기관 고객들과 개인 고객들이 투자한 상품이며, 앞으로 법류적 이슈가 될 가능성도 있어 현재로서는 말씀드리기 조심스럽다. 지금까지 85% 정도 회수했고 계속 진행중이며 고객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회사 차원에선 이를 계기로 심사를 강화하고 상품위원회에서 소비자보호 파트 등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지만, 대표로서 죄송함과 안타까움이 크다.”

―사모펀드 사태가 아니더라도 주식이 ‘투기’라는 사회적 시각은 늘 있다. 엉뚱한 질문이지만 주식은 사람들에게 뭔가?

“가격 변동성이 워낙 크다 보니 리스크가 큰 상품인 건 맞다. 하지만 흔히 주식이 ‘자본시장의 꽃’이라 불리는 건,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소액으로도 자본시장에 참여할 수 있고 성장하는 기업의 주주가 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자본차익도 얻을 수 있고. 요즘엔 주식뿐 아니라 상장지수펀드(ETF)라든지 상장리츠도 주식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커피 한잔 값을 모아서 자본시장에 투자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저금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건 배당수익이라고 본다. 예전엔 은퇴 노후 세대들이 이자로 살아왔지만 금리가 1%대인 상황에서 자본차익과 더불어 배당수익이 가능한 종목에 대한 수요는 점점 커질 거다. 최근 정부가 활성화 방안을 발표한 공모형 리츠 시장 또한 커질 걸로 본다. 그래도 역시 위험성이 큰 상품이기 때문에, 공부를 할 필요도 있고 어떤 게 좋은지 추천을 받을 필요가 있다.” dora@hani.co.kr



집에 가면 30분은 정리 버릇 “이걸 놓아야 하는데”

박정림 사장은 누구

1986년 체이스맨해튼 은행 서울지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학부 때 너무 공부를 안 했다고 느껴” 대학원에 진학했고, 재학 중 결혼과 임신을 했다. 졸업할 즈음 첫 아이를 출산한 그는 ‘1년간’ 경력단절여성 시기를 보냈다. 애널리스트가 되고 싶어 여기저기 원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1992년 우연히 정몽준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들어갔다. 당시 ‘국회 여성보좌관 증가’를 다룬 한 신문기사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후 조흥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을 거쳐 삼성화재, 그리고 2004년 국민은행으로 옮겨 2014년 리스크관리본부 부행장에 올랐다. 일찍부터 업계에서 자산관리(WM) 전문가로 통해왔다. 올 1월부터 KB증권 사장에 취임해 자산관리, 세일즈앤드트레이딩, 경영관리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투자금융, 홀세일, 글로벌사업부문과 리서치센터를 맡는 김성현 사장과 각자대표 체제다.

박정림 KB 사장


큰아이가 2살 때부터 22살이 될 때까지 입주해 키워주던 할머니는 지금 돌아가셨지만, 가족처럼 여겼다고 한다. “여성이 성공하려면 또 다른 여성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은 진리다.” 에너지 넘치고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유명하기에, 사무실에 진열된 귀여운 캐릭터 인형이나 예쁜 잡지 장식은 좀 ‘의외’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가면 30분간 모든 물건의 줄을 맞춰야 직성이 풀린다. 집안일해주는 분이 청소한 티를 내려고 일부러 줄을 좀 비뚤게 해놓은 걸 다시 맞추는 거다. 사무실 책상 위에도 뭘 쌓아두지 않는다. 내가 그 시간에 아이들 붙잡고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가르쳤던 게 나았을까 가끔 후회도 드는데, 참 바꾸기 어려운 평생 버릇이다.” 그런 그가 여성 후배들에겐 자주 ‘집안일을 적당히 하라’고 말한다. “사실 내게 하는 다짐이다. 중요한 걸 선택해서 하라고 말하는데, 뭐가 중요한지 판단하는 게 참 어려운 것 같다.”




▶페북에서 한겨레와 만나요~
▶신문 보는 당신은 핵인싸!▶7분이면 뉴스 끝! 7분컷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경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