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발 빼려는 미국... 휴전은 안 된다는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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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기자의 NARA 앨범 37] 1952년 5~8월의 전란 현장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시카고 일리노이 주, 한국전쟁 정전을 대통령 선거 공약에 내세운 아이젠하워 후보가 대통령 선거전에 앞서고 있다(1952. 7. 9.).
ⓒ NARA

 
미국의 대통령 선거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민주당 정권에서 이뤄진 일이라 공화당 후보인 아이젠하워는 한국전 휴전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자 그 공약은 유세전에서 단숨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게다가 들려오는 전황도 좋지 않았다. 1952년까지 미군 내에서 한국전선으로 배치되는 도중에 도망친 미군 병사의 숫자가 전쟁 초에 비해 5배나 증가했다. 많은 병사들은 심지어 자해를 하면서까지 현역에서 빠져 나가고 있었다.

국내외 여론도 악화돼 미국으로서는 한국전쟁을 더 이상 수행키가 어려웠다. 미국 내에서는 반전 분위기가 조성됐다. 캐나다에서는 격렬한 한국전쟁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유럽 지역에서도 미국을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곧장 한국에 다녀오겠다고 공약했다. 이와 더불어 "아시아인으로 하여금, 아시아인을 대항케 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자 유권자들은 폭발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 무렵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발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만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만은 휴전을 반대했다. 그는 어린 여학생들까지도 관제데모에 내세웠다.
 
이번 회는 1952년 5~8월의 한국전쟁 NARA 소장 사진으로 엮었다.
    
 개성 북한 측과 미군 측 정전회담 대표가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1952. 5. 14.).
ⓒ NARA

        
 Robert E. Kiser 하사가 찍은 사진으로 세 명의 국군 연예단원들이 NCO 해병 1사단 장교 클럽의 개업 축하파티에서 열연하고 있다(1952. 5. 17.).
ⓒ NARA

   
 서울, 영등포시장(1952. 8. 3.).
ⓒ NARA

   
 한국의 한 농부가 군부대의 인분을 비료로 쓰고자 수레에 싣고 있다(1952. 8. 5.).
ⓒ NARA

   
 경북 포항, 한 고아원의 어린이들(1952. 8. 10.).
ⓒ NARA

   
 임진강 철교 복구공사(1952. 8. 26.).
ⓒ NARA

   
 경기 문산, 한국전쟁 기간 중의 문산리 일대경기 문산, 한국전쟁 기간 중의 문산리 일대 미군 부대전경(1952. 8. 27.). (1952. 8. 27.).
ⓒ NARA

   
 고지전으로 초목도 자라지 못한 전투 현장
ⓒ 박도

  
  개성, 정전회담장의 북측 종군기자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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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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