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 수도고지... 한국전쟁에 '고지전'이 많았던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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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기자의 NARA 앨범 36] 1952년 3, 4월의 전란 현장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치열했던 고지전 정상의 교통호로 언저리에는 총포 화염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고 있다.
ⓒ NARA

고지쟁탈전
 
1951년 7월 10일 이후, 정전협상이 시작되면서 유엔군 공산군 양측은 협상을 파국으로 빠뜨리지 않기 위해 전면적인 공격은 자제했다. 그 대신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제한공격'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전쟁은 대규모의 전면전 형국이 아니었다.

유엔군 측은 협상과정에서 주요 쟁점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또는 공산군 측에 정전조건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고지쟁탈전을 택했다.
 
공산군 측에서도 정전회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빼앗긴 일부 진지를 탈환함으로써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고지쟁탈전을 전개했다. 결국 양측 모두 정전협정 후 생길 군사분계선을 조금이라도 자신 쪽으로 유리하게 확보하고자 고지쟁탈전에 전투력을 집중했다.
 
그래서 중동부전선은 고지쟁탈전의 격전지로 351고지, 펀치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수도고지, 저격능선, 백마고지 등에서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연일 벌어졌다.이는 마치 어린이들 땅따먹기놀이와 같은 이전투구로 진흙탕에서 개떼들의 싸움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번 회는 1952년 3, 4월 촬영의 한국전쟁 NARA 소장 사진 중심으로 엮었다.
  
 판문점 부근, 농부들이 수로에서 물을 퍼 올리고 있다(1952. 3. 25.).
ⓒ NARA

  
 판문점, 정전회담장 부근에서 한 병사가 수로에서 배터리로 물고기를 잡고 있다(1952. 3. 18..).
ⓒ NARA

   
 1952. 4. 1. 판문점 부근 들판에서 농부들이 감자를 심고 있다(1952. 4. 1.).
ⓒ NARA

   
  1952. 4. 1. 판문점 부근 들판에서 농부가 논을 갈고 있다(1952. 4. 1.).
ⓒ NARA

   
 1952. 4. 2. 부산, 부두에서 긴급 원조 양곡을 가마니로 포장하고 있다(1952. 4. 1.).
ⓒ NARA

   
 대전, 전화로 텅 빈 공장지대(1952. 4. 15.).
ⓒ NARA

   
 LST(수송선)에서 전차가 나오고 있다(1952. 4. 16.).
ⓒ NARA

   
 부산,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하고 있다(1952. 4. 25.).
ⓒ NARA

   
 중앙청을 보수하고 있다(1952. 4. 29.).
ⓒ NARA

   
 유엔 한국임시부흥단 한국 측 임병직 대표(오른쪽)가 미국 시카고에서 부화용 계란을 원조 받고 있다(1952. 4.).
ⓒ NARA

   
 초기의 판문점 정전회담장(왼쪽 흰색이 공산 측 막사, 오른쪽 검은 색이 유엔군 측 막사.1952. 4.). 원래 판문점은 초가 세 채만의 주막마을이었다고 함.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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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영복 지음 <6.25전쟁사>를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이 연재(박도 기자의 NARA 앨범)는 45회로 끝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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