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의제설정이론(agenda-setting theory)이라는 용어가 있다. 1972년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도널드 쇼(Donald Shaw)와 맥스웰 맥콤(Maxwell McCombs)이 주장한 개념이며, 미디어 의제(media agenda)와 공중 의제(public agenda)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미디어의 의제설정 기능이 공중의 의제를 상회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쉽게 말하면 신문 등으로 대표되는 미디어의 의제설정능력이 공중의 의제보다 상위의 개념에 있으며, 이러한 방법론은 곧 공중의 사고를 구조화하는 능력으로 발현된다는 뜻이다. 더 쉽게 말하면 특정 이슈에 대해 미디어가 작정하고 판을 깔면, 그것이 곧 대세가 된다는 이론이다.

국내 사정도 비슷하다.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디어가 가장 집중하는 분야는 어디일까? 아니, 질문을 바꿔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유료 판매부수의 감소? 디지털 전략의 부재? 일정부분 맞는 말이지만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의제설정능력의 상실이다. 판매부수가 뚝뚝 떨어져도, 시청률이 애국가 시청률에 그친다고 해도 의제설정능력만 가지고 있으면 분명 활로는 있다.

어쩌면 OO일보 1면 헤드라인 기사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았든, OO방송의 저녁뉴스 시청률이 얼마나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1면에 나왔다, 저녁뉴스에 나왔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집중하고 환호하며 따라가고, 의제는 그렇게 설정된다. 비록 미디어 다변화 분위기가 고조되며 나름의 변화도 생겼지만, 아직 의제설정능력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은 탄탄한 편이다.

▲ 출처=애플

담뱃값 올라 짜증나는데..에어팟은 또 뭐야?
애플의 무선 헤드폰 에어팟이 여러가지 의미로 눈길을 끈다. 일단 3.5mm 헤드폰 잭을 제거하며 그 자리에 에어팟을 출시한 애플은 이를 통해 나름의 의제설정능력을 시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업계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3.5mm 헤드폰 잭을 무시했다! 애플의 법을 따르라!

의도는 제대로 먹혔을까? 초반은 '아니요'가 답이다. 에어팟이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 많은 전문가들과 미디어들은 에어팟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웃기게 생긴 디자인에 달리면 귀에서 쑥 빠질 것 같은 성능. '왜 에어팟을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없었으며 철저한 조롱만 이어졌다. 이제 현재의 애플을 규정하는 가장 확실한 수식어로 자리잡은 '팀 쿡의 애플, 혁신은 없다'는 지적도 줄을 이었다.

에어팟 공개 초기 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비웃었을까? 아니, 왜 실패에 무게를 두었을까?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에어팟 자체가 너무 급진적이었다. 3.5mm 단자를 부정한 것 자체가 위험했다는 뜻이다. 현재 3.5mm 단자는 스마트폰 이어폰과 더불어 보이스 레코더, MP3플레이어, 무선마이크 송신기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플랫폼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애플은 이를 거부했다.

이러한 전제는 애플의 오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아니, 아이폰 판매량이 떨어진다면서 무슨 배짱으로 3.5mm 단자를 차용하지 않은 거야? 애플이 하면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 줄 알았나?" 이런 비판이다. 현재 여기에 대한 답은 조금씩 나오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겠다. 단지 이러한 비판의 기저에 "강력한 애플의 의제설정능력에 대한 공포"가 넘실거렸다는 점만 알아두자. 다른 사업자들은 어떻게 하라고? 애플, 너무하는 것 아니야?

마지막으로는 '좋다, 에어팟 시도는 좋다고 치자. 그런데 그거 기능은 어때?'라는 반응이다.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디자인이다. 마치 담배 한 개피를 귀에 꽂은 분위기가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에어팟을 착용하고 달리면 하나는 반드시 잃어버린다'와 '에어팟 한쪽만 팔아요라는 문구가 중고나라 사이트에 자주 올라오겠네'라는 악담이 붙는다. 이런 상황에서 에어팟 출시가 늦어지자 사람들은 더 시니컬해졌다. 에어팟. 망하는 일만 남았다.

여기까지가 일반의 평가였다. 그런데 막상 에어팟 출시가 시작되자 상황이 미묘하게 변했다. 시작은 증산 소식. 폰아레나는 1일(현지시각) 에어팟 생산업체 인벤텍이 에어팟 증산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소매 매장에도 일정정도 물량이 풀렸으나 금방 동이 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11일(현지시각) 맥루머스가 시장조사기관 슬라이스 인텔리전스의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한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다. 지난달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된 전체 이어폰 중 75%가 무선 이어폰인 상황에서 에어팟이 무선 이어폰 점유율 1위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12월 13일부터 13월 31일까지 판매 비중은 26%에 달했고 기존 최강자 비츠는 15.4%로 크게 내려갔다고 한다.

덩달아 그동안 에어팟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보이던 애플의 공동창업자이자 고문인 스티브 워즈니악은 "에어팟은 무선 이어폰 시장에서 자극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물론 최근 말 바꾸기를 자주 목격한 헬조선의 국민들에게는 덤덤한 일이지만.

▲ 출처=슬라이스 인텔리전스

애플의 의제설정능력
물론 해당 보고서는 소위 에어팟 '오픈빨'의 영향도 있으며, 애플이라는 브랜드 가치에 충성하는 팬덤의 문화도 일정부분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단기간의 성적만 보면서 '에어팟이 무선 이어폰 시장을 석권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

하지만 에어팟 출시 과정에서 보여준 애플의 의제설정능력에는 집중할 필요가 있다.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미 변하고 있는 시장의 변화를 간파해 빠르게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보여준 대목. 시장조사기관 NPD에 따르면 미국에서 올해 판매된 무선 이어폰 제품은 전체 매출기준 54%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도 비슷하다. 2013년만 해도 무선 이어폰 점유율은 17%, 유선 이어폰은 40%였으나 2016년 무선 이어폰은 39%로 성장한 반면 유선 이어폰은 22%로 떨어졌다. 결국 시장의 흐름을 유심히 살피다가 결정적 순간을 잡아 빠르게 변신을 시도한 셈이다.

두 번째는 앞으로의 시장 변화를 주도하겠다는 의지. 아이폰 판매량 추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아이폰의 점유율이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의 대세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저가 등 기타 경쟁 프리미엄 라인업의 존재감이 뚜렷해지며 포스트 스마트폰에 대한 니즈가 다시 달아오르는 순간, 애플은 아이폰에 에어팟을 넣어 '자신들이 판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에어팟의 성능적 측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에어팟은 인공지능 시리가 탑재된, 일종의 웨어러블의 초기 버전으로 봐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기 확보된 아이폰 점유율을 일종의 플랫폼이자 디딤돌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무엇을 못할까. 아이폰 점유율을 이용하면 에어팟에 대한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나름의 '판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최근 무선 이어폰 시장 점유율로 보여주지 않았나. 여기에 포스트 스마트폰에 대한 고민을 스마트워치나 스마트밴드를 넘어 스마트폰과 직접 연결되는 에어팟으로 잡아가는 대목은 안정적인 상황판단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는 3.5mm 이어폰 제작자들 입장에서 '횡포'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의 '판을 바꿀 수 있다'는 애플의 자신감이 강하게 깃들어 있다.

애플은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로 구현한 특별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해 판매한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팟, 아이폰 등 특유의 브랜드 가치를 살린 제품들을 대거 출시해 기존 시장의 판을 바꾸는 장면을 자주 보여줬다. 에어팟도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으며, 나아가 앞으로의 애플 전략에도 비슷한 방식이 많이 사용될 것이라는 합리적 추측을 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애플의 혁신이 예전보다 크게 빛바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팀 쿡의 애플이 반짝반짝 빛나던 천재적 폭군의 시대와 다른 절묘한 균형과 치밀한 전략의 시대를 맞이했다는 점은, 애플의 절묘한 의제설정능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천천히 곱씹어 볼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