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y >선 넘고 틀 깨는 ‘B급 펭귄’ 펭수 일갈에 ‘직딩’들 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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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1.28. 오전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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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0의 직통령’ 펭수 신드롬

EBS 어린이 프로그램 통해 첫 등장… 유튜브 공략하며 교육용 캐릭터 벗어나 ‘재미’에 초점

상사에게 던지는 ‘촌철살인’에 대리만족… 자존감 높여주는 위로의 말엔 공감 100배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펭수’를 검색해봤다. 지난 4월 1일 ‘펭수’라는 키워드가 포함된 기사가 처음 등장한 후 9월까지 63개의 관련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10월부터 불과 2개월 사이, 2600개가 넘는 펭수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를 모으고 방송사뿐만 아니라 광고업계도 ‘펭수 모시기’에 한창이다. 12월 개봉을 앞둔 영화 ‘백두산’의 주인공인 배우 하정우는 펭수를 통한 홍보 프로모션에 대해 “펭수 님의 인기에 ‘백두산’ 팀이 숟가락을 얹어서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고, 펭수를 사칭하는 사기꾼까지 등장해 EBS ‘자이언트 펭TV’ 측이 “공식 홈페이지, 유튜브 채널, SNS 등을 통한 공지와 정당한 절차 없이 절대 여러분의 소중한 개인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므로 사칭에 주의하시기 바란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렇듯 뜨거운 열기에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반응이 올 때, 우리는 ‘대세’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직통령’ 펭수, 왜 그에게 열광하나?

펭수는 ‘남극에서 온 펭귄’ 콘셉트를 내세운 캐릭터다. 같은 펭귄 캐릭터인 뽀로로가 초등학생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초통령’이라 불린 것에 빗대 펭수는 ‘직통령’이라 부른다. ‘직장인들의 대통령’이라는 의미다. 이렇듯 펭수는 20∼30대 직장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왜일까?

펭수의 태생은 EBS, 즉 교육방송이다. EBS 인기 어린이 프로그램인 ‘생방송 톡! 톡! 보니하니’ 내 짧은 코너인 ‘자이언트 펭TV’를 통해 등장했다. 기존 대표 펭귄 캐릭터인 뽀로로가 주로 유아기 및 초등학생 저학년들에게 소구되는 것을 고려해 그 나이대를 벗어난 어린이들을 공략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런 의도 아래 탄생한 펭수는 뽀로로보다 어른스럽다. 말투와 행동은 장난스럽지만 너스레를 떨며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촌철살인이다. 바로 이 지점에 2030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사회 초년병에 해당되는 그들이 가슴속에 품고 있으나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대리만족을 주는 셈이다.

펭수가 EBS 김명중 사장의 이름을 수시로 언급하며 “사장님이 친구 같아야 회사도 잘된다”고 말하는 모습은, 직장인들이 술자리에서 상사와 ‘야자 타임’을 하며 은근히 속내를 드러내며 응어리를 푸는 모습과 흡사하다. 또한 EBS 선배 캐릭터인 뚝딱이를 향해 펭수가 “잔소리하지 말라”고 내뱉는 한마디는, 이 시대를 사는 대다수 직장인이 손윗선배를 향해 던지고 싶은 일갈이라 할 만하다. “EBS에서 잘리면 KBS 가겠다”는 펭수의 선언 역시 “더러워서 때려치운다. 내가 이 회사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줄 알아”라는 직장인들의 케케묵은 다짐과 다르지 않다.

현재 2030은 수직적인 문화와 수평적인 문화의 변곡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접하는 상명하복식 문화는 단군 이래 가장 평등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그들이 또래들과 공유해온 문화와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펭수는 이런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효자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펭수가 이르되”…공감 100배 어록

‘펭수, 하이’의 준말로 펭수가 건네는 ‘펭하’라는 인사말은 그를 좋아하는 2030세대들의 유행어로 자리매김했다.


펭수의 한마디 한마디는 ‘어록’이라 불리며 SNS상에서 회자되고 있다. 일단 펭수는 자존감을 높여준다.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들에게 “다 잘할 순 없다. 잘하는 게 분명 있을 거고, 그걸 더 잘하면 된다”고 충고하고, 피로에 찌든 이들에게 “잘 쉬는 게 혁신”이라고 외친다. “나는 나를 가장 존경한다”는 펭수가 “내가 나일 때 제일 좋은 거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는 댓글이 붙는다.

특히 펭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통찰력 있는 목소리를 냈다. 눈치 보느라 고생한다는 이들에게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아라. 눈치 챙겨!”라고 격려하고, “힘든데 ‘힘내’라고 하면 힘이 납니까? 저는 ‘사랑해’라고 해주고 싶습니다”라고 권한다. 사이가 틀어진 상대방과 관계 맺는 법에 대한 펭수의 한마디는 통렬하다. “화해했어요. 그래도 보기 싫은 건 똑같습니다.” 찢어진 종이를 다시 붙여봐도 찢어진 자국까지 없어지지는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펭수의 조언은 새롭지 않다. 다만 우리가 세상을 살며 쉽게 잊는 진리다. 심지어 이런 조언을 전하는 주체가 인간이 아닌 펭귄이다. 그의 팬들이 ‘펭귄도 아는 걸 내가 잊고 살았다니…’라는 댓글을 남기는 이유다.

◇어른이, 키덜트를 공략하다

펭수는 어른이(어른+어린이)의 마음을 움직였다. 몸은 자랐지만 아직 어린 시절의 취향을 간직한 키덜트(kid+adult)들의 친구인 셈이다. 최근 피규어를 모으는 취미를 가진 어른이 늘듯, 캐릭터를 좋아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시장에서 펭수는 맞춤형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대한민국은 영화 ‘어벤져스’에 열광했다. 그 주인공은 아이언맨, 헐크, 스파이더맨 등 어린 시절 읽었던 마블 코믹스의 등장 인물이다. 마블 코믹스의 대항마인 DC코믹스의 대표 캐릭터인 배트맨, 슈퍼맨, 원더우먼 등도 매한가지다. 과거 만화책으로 접하던 이들을 실사 영화로 재탄생시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그 안에 세계관을 담는 진일보한 스토리로 이제는 어른이 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펭수의 인기 역시 이와 같은 궤를 갖는다. 교육방송에서 교육적 목적을 두고 빚었지만 기존 아동용 캐릭터와는 사뭇 다르다. 귀여운 인형 같다기보다는 수위 높은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편한 친구 같다. 조악한 랩과 노래로 B급 정서를 뿜다가도 돌연 수준급 댄스를 선보이며 박수를 이끌어낸다. 하나의 키워드로 규정되지 않는 펭수의 좌충우돌 행보는 기존 질서에 편입해야 하는 동시에 반기를 드는 2030의 정서와 맞아떨어진다.

펭수의 인기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해야 한다. ‘EBS’라는 틀 안에서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EBS를 벗어나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적극 공략하고, 그 자유분방한 플랫폼에 맞는 성격을 띤 캐릭터를 구축하며 대중과의 접점이 넓어졌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펭수는 EBS 특유의 교육적인 성향을 넘어 ‘펀’(fun)에 초점을 맞추고 재미와 공감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특히 유튜브를 통해 저변을 확대하며 ‘EBS 캐릭터’라는 색이 희석됐기 때문에 타 방송사에도 자유롭게 출연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실제로 EBS를 소비하던 어린이들도 조금 더 성장하면 유튜브를 보게 되는데, 펭수는 그런 확장성을 잘 활용해 어른들의 공감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캐릭터”라고 분석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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