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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불가능한 배역 소화·해석력… 21세기 한국영화의 얼굴

[전찬일 강유정의 한국영화 100년의 얼굴] (22) 송강호 (1967∼)
일찍이 밝혔듯, 100명의 문화계 응답자가 참여한 문화잡지 ‘쿨투라’의 10월호 특집 테마 ‘한국영화 100년’에서 선정된 20세기 한국영화 최고 남자 배우는 신성일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 최고 남배우는? 송강호였다. 공개되진 않았으나 종합 최다 득표 또한 그의 차지였다. 예상은 했어도, 어느 모로는 의외였다. ‘택시운전사’(감독 장훈·2017) 이후 2년여간 주연한 세 작품에서 송강호의 존재감과 행보가 다소 불안한 탓이었다. ‘마약왕’(우민호·2017), ‘기생충’(봉준호·2019), ‘나랏말싸미’(조철현·2019)다.

‘마약왕’ ‘나랏말싸미’의 이변

‘마약왕’과 ‘나랏말싸미’는 100억원 전후의 순제작비가 투하됐건만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는 데서부터 일종의 재앙이었다. 다름 아닌 송강호 주연작이 아닌가. ‘나랏말싸미’의 참패는 특히 더 충격적이었다. 송강호와 박해일 주연에,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우리 역사의 으뜸 영웅인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스토리. 이준익 감독의 단짝으로 그동안 기획·제작·각본 등에서 맹활약을 펼쳐온 조철현의 차분한 연출도 주목할 만했다. 한데도 관객 100만조차 넘질 못했다. 하긴 송강호의 세종 해석도 특유의 생동감에 미치지 못하긴 했다. 감독의 의도에 아랑곳없이 영화의 무게중심도 박해일과, 그가 분한 승려 신미 캐릭터로 기울어졌다. “역사 왜곡” 등 설득력 없는 비난이 쏟아졌던 것도 그래서였을 듯하다.

제목이나 제재 등에서부터 비호감이었던 영화의 수준에 대해선 논하지 말자. ‘마약왕’에서의 송강호는 그간 보아온, 예의 송강호가 아니었다. 배역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마구 흔들렸다. 위기의 ‘쉬리’(강제규·1999)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연기 지존’ 송강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물론 ‘마약왕’과 ‘나랏말싸미’ 사이 선보인 ‘기생충’에서의 송강호는, 역시 그다웠다. ‘마약왕’의 그 ‘무슨 일’을 만회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아는가? 송강호가 ‘기생충’으로는 단 하나의 트로피도 거머쥐지 못했다는 것을. 아들 기우 역의 최우식에게 양보라도 하는 양, 부일영화상에서는 후보에조차 들지 못했다. ‘택시운전사’로 제26회 부일영화상, 38회 청룡영화상, 4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남우주연상 등을 휩쓸었기에 ‘기생충’의 무관은 의외를 넘어 이변으로 다가선다. 그렇다고 연기를 못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그럼에도 송강호는 100명의 문화계 전문가가 뽑은 최고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송강호의 여전한 절대적 위상을 천명하는 증거로 손색없다. 송강호가 영화에 몸담게 된 것은, 연극 공연을 하던 중 선배 소개로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 아르바이트 삼아 출연하면서였다. 주인공 효섭(김의성)의 친구 동석 역이었다. 잘나가는 화가가 애인인, 나름 비중 있는 단역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눈길을 끌진 못했다. 여러 단역 중 한 명일 따름이었다. 더욱이 영화를 계속할 마음도 없었다. 그를 영화에 빠지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는 이창동의 데뷔작 ‘초록물고기’(1997)였다. 연극 ‘비언소’를 공연하고 있을 때 이 감독이 공연을 보러 와 캐스팅하면서 애정을 품고 영화에 뛰어들게 된 것. 폭력 조직의 일원인 조연 판수 역이었다.

그 문제적 걸작에서 한석규가 분한 막동을 상대로 “이리 와봐 인마~ 너 나 알어, 몰라?” 등 튀는 대사를 날리며 그를 괴롭히고 또 역공을 당하기도 하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초록물고기’는 한석규의, 한석규에 의한, 한석규를 위한 영화였으니까. 다시 꼼꼼히 보면 그러나, 판수는 송강호의 출세작 ‘넘버3’(송능한·1997)의 조필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넘버3’ ‘반칙왕’ 없었더라면

‘넘버3’는 그야말로 송강호의 발견을 알린 문제작이었다. 애당초 영화는 한 폭력 조직의 넘버3 깡패 태주 한석규와, 깡패보다 더 깡패 같은 검사 마동팔 최민식 두 주연을 위한 기획이었다. 의도 여부를 떠나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직이라 할 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건달패거리 우두머리 조필이 두 주역을 압도해버린 것이다. “내 말에, 토토토토토토…다는 새끼는 배반형이야 배반형, 배신 배신형…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앞으로 직사시켜버리겠어, 직사” 등의 튀는 대사와 튀는 연기를 무기 삼아서였다. 배우 송강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튀는 연기로 계속 갈 수는 없는 법. 그간의 한국영화에서 체험한 적 없었던 범죄 잔혹 코미디 ‘조용한 가족’(김지운·1998)에서 송강호는 전작 ‘초록물고기’와 ‘넘버3’의 캐릭터와 연기를 답습했다. 영화는 인상적이었으나 송강호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튀는 코믹 캐릭터에서의 탈피를 원했을까, ‘쉬리’에서 송강호는 그간의 배역과는 판이하게 다른 진지한 캐릭터에 도전했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국가 비밀정보기관 정예 특수 비밀요원이라는 캐릭터치고는 적잖이 어정쩡했다. 미스 캐스팅이라 할 만했다. 본인도 영화 내내 어색해하는 게 역력했다. 영화는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전국 600만에 육박하는 기념비적 흥행 성공을 일궈냈으나 송강호에게는 아니었다.

기회는 또다시 김지운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반칙왕’(2000)으로 주어졌다. 배우 명조련사 김지운은 ‘달콤한 인생’(2005)으로 이병헌을 재탄생시켰듯, 위기의 송강호를 재탄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레슬링이라는 파격적 선택으로 삶의 대변신을 시도하는 어눌하고 소심한 은행원 임대호 캐릭터를 통해. 레슬링 교관 민영 역의 장진영과 투톱이었으나 송강호의 단독 주연작이나 다름없었다. 송강호는 보란 듯 비상했다. 한국영화 100년사의 최고 코믹 휴먼 드라마 ‘반칙왕’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송강호는 존재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2000) ‘살인의 추억’(2003) ‘괴물’(이상 봉준호·2006) ‘밀양’(이창동·2007) ‘의형제’(장훈·2009) ‘설국열차’(봉준호·2013) ‘사도’(이준익·2015) 등 일련의 대표작들을 굳이 특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반칙왕’ 이후 20년 가까이 그는 한국영화계의 ‘절대 강자’이자 ‘우리 시대 최고 배우’의 위상을 지키고 있다. 일말의 부침과 더불어.

송강호는 대선배 신영균처럼 남성적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선 굵은 배우는 아니다. 대표작들의 면면이나 연기의 디테일 등에서 ‘김진규의 적자’에 가깝다. 그에게는 그러나 김진규의 지적 이미지나 부드러운 멜로 분위기가 충만한 건 아니다. 김진규의 적자로서도 몇 퍼센트쯤은 부족하다. 그렇다고 장동휘나 박노식처럼 액션 배우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다. 꽃미남과는 거리가 먼 외모도 그렇거니와 능청맞은 연기 등에서 한국영화사의 가장 독특한 캐릭터 배우였던 허장강을 닮았다.

전무후무한 ‘연기 지존’

송강호는 이렇듯,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만의 장점들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는 배우는 아니다. 배역의 스펙트럼 또한 광범위하다고 할 수 없다. 신성일 김진규 신영균 안성기 등 선배들은 물론 최민식 김윤석 황정민 설경구 이병헌 장동건 정우성 강동원 조인성 등 다른 동료, 선후배들과 비교해도 캐릭터가 다채롭다고 주장하기는 주저된다. ‘괴물’ ‘변호인’(양우석·2013) ‘택시운전사’ ‘기생충’에 이르는 네 편의 1000만 영화 때문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최강 캐릭터 배우요, 막강 문화 자본으로서의 스타-연기자였다. 안성기에 이은 ‘국민 배우’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인 연기력, 달리 말해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걸출한 캐릭터 소화·해석력에서만큼은 한국영화사의 그 어떤 배우라도 압도한다. 송강호 없는 한국영화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송강호가 아니라면 어찌 ‘변호인’이나 ‘택시운전사’처럼 위험했을 역사적 도전작들이 그 공고하고 높은 투자의 벽을 넘어 ‘1000만 고지’를 돌파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아는 한 송강호 같은 입체적·복합적 배우는 한국영화 100년사에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있기 쉽지 않을 게다. 그는 이병헌 등과 함께 ‘우아한 세계’와 ‘관상’의 한재림 감독 차기작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과연 최근의 부진을 떨쳐내고 예의 ‘송강호다움’을 회복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전찬일 영화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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