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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23> [이계홍 작가, 언론인]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바로가기 :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처음부터 보기

제23장 “에미나이 꿰찰 재주가 있니?”

사무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구대구 부단장, 하대칠 조직부장 등 간부들 대여섯 명이 의자에 둘러앉아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데, 사진봉 단장이 책상을 치며 말했다.
아직도 동선을 캐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니? 어드렇게 생겨먹은 조직이길래 이 모냥이야?”
그는 행방불명된 정용팔을 찾고 있었다. 사진봉이 하대칠을 쏘아보며 다그쳤다. 
“조직부장, 대원들 제대로 관리되고 있나?”
하대칠이 멀뚱히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다.
“말해보라우. 개인행동 하지 말구, 반드시 복수로 움직이라고 하지 않았네? 오늘부터 조천 구좌 남원 서귀 성산포 쪽을 뒤지라우. 섭외부장을 꼭 찾아내구, 삐딱한 놈들 골라내 조지라우!”
제주도 동북부 지역을 치는 명분은 이렇게 세워졌다. 그 지역이 유독 폭도들의 준동이 심했다. 청년단은 경찰의 친위대다. 도정(道政) 간부회의를 마친 뒤 이윤배 경찰서장으로부터 지시받은 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휴전이 되면 죽도 밥도 안된다. 너희들 밥줄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무슨 말인지 알갔나?”
경찰서장은 이렇게 그를 닦아세웠다. 청년단의 실적 부족도 지적했다. 
“요즘 기강이 해이해졌단 말이다. 신고되는 민폐를 묵인해주며 뒤를 보아주었더니 벌써 배가 불렀어?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 거야?”
지적을 받았으니 그는 돌아와 청년단 회의를 소집해 간부들을 조지기 시작했다. 쇠뿔은 단 김에 뽑아야 하고, 조직은 조져야 기강이 선다.     
“정 부장 행방을 꼭 찾으라우! 마을마다 뒤져서 밀어붙이라우.”
사진봉은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문제가 되니까 문제가 될 뿐, 조직은 진작부터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인플레이가 일상화되었다. 무엇이든 먹고 튀는 놈이 임자였다. 그것을 지금에 와서 문제를 삼으니 조직부장으로서도 답답한 일이었다. 4.3 이후 응원경찰대와 서청이 증파되고, 그 숫자가 좁은 땅덩어리에 까맣게 깔렸다. 이제는 계보도 따질 수 없고, 각 면 소재지에 누가 왔는지조차 잘 모른다. 그런 중에 누구나 한 몫 잡아 튈 생각만 했다. 덩치가 크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그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감당할만큼만 세를 확보하는 것이 조직 관리의 기본인 것이다. 
“하 부장, 일어서!”
하대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 자, 에미나이하구 튄 것 같습네다. 고 자 머리에 뽀마드 바르구, 양복두 맞춰 입구 나댕겼습네다. 일 낸 것 같습네다.”
“에미나이? 어떤 에미나이? 하두 숫자가 많아서리.” 
“괜찮은 에미나이가 하나 머리에 스치는 게 있습네다.”
“괜찮은 에미나이? 고런 양아치 새끼가 괜찮은 에미나이 꿰찰 재주가 있네? 염소 새끼가 무늬쳐서 호랑이 행세한다는 말은 들었다만서두....”
“굼벵이도 뒹구는 재주가 있으니까요. 현호진이 여편네하구 튄 거 같습네다.”
하대칠이 미심쩍은 눈을 연방 굴렸다.
“현호진이 여편네?”
“네. 고 여편네도, 고 집 애들도 모두 사라졌습네다.”
“에미나이가 사라졌으면 애들 없어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니가?”
말도 안되는 것을 말이라고 씨부린다는 투로 사진봉이 퉁을 주었다.“현호진 집에 가봤더니 모두 사라졌습네다. 아새끼들이 있대시면 꼬랑지가 잡힐 거우다만...”
“고 집 에미나이가 깡패 새끼하구 배맞아 도망갈만큼 정숙치 못하진 않다. 뭔가 간계가 있다.”
그러자 구대구 부단장이 나섰다.
“단장님, 제주 여자들 연애질 잘하는 거 모르십네까. 어지럽게 자유분방합네다.”
“부단장이란 자가 고렇게 사물을 보지 못하네? 이 수많은 수컷들이 모두 발정 나서 돌아당기는데 온전한 여자가 남아나갔네? 순진한 여자 잡아조지구서 정조가 어떻구, 정숙이 어떻구 까발리네? 부녀자가 억울해서 목매 자살한 것도 못보았네? 앞으로 고따우 불미스러운 일 저지르면 절대 용납못한다는 거 알가서?” 
사진봉은 오신애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신애가 싫어하면 그도 싫다. 그녀는 여자들이 욕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으면 진절머리를 쳤다. 그것은 사람의 할 짓이 아니라고 하자, 어느새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 구석 쪽에서 누군가 혼잣소리로 투덜댔다.
“언제부터 체니들 수호대장으로 나섰나? 지 혼자 오만상 찌푸리구 고상한 척해. 지는 안따먹었나?” 
그러나 사진봉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정용팔을 꼭 찾으라우. 고거이 토벌의 명분도 된다. 알갔나?”
하대칠이 새삼 생각난다는 듯이 말했다.
“고 자가 요사이 구름 속에서 노는 듯 떠 있었는데, 아마도 돈을 챙겨서 날른 것 같습네다. 밀선을 타고 육지로 내뺐을지도 모릅네다.”
“왜 고렇게 짐작하네. 물좋은 곳을 버리고 갈 놈 같애?” 
그러나 사진봉의 뇌리에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되짚어보니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정용팔은 오룡환 입항 때 현장반으로 투입되었다. 오룡환은 일본에서 백미와 콩을 가지고 들어오다 적발되었다. 또다른 밀선 진미호는 트랜지스터 라디오, 가죽벨트, 미백크림, 신발, 구구식 총기류까지 가지고 들어오다 적발되자 여수로 튀었다. 일본은 무장해제되었기 때문에 버려진 총포류는 수집상에게서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었다. 총포류는 무장대에 흘러들어간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것으로 단속의 명분은 충분했다. 밀대를 통해 첩보를 입수하고, 사진봉은 정용팔을 현장에 밀파했다. 그리고 ‘쇼부’를 친 그것을 수금하기 위해 보헤미안에서 접선하기로 했는데, 다른 일이 터지고 말았다. 오신애마저 자기 마을 부녀자가 겁탈을 당했다며 방방 뜨는 통에 기분 잡쳐서 당분간 보헤미안 출입을 끊었다. 
“고 자가 돈 개지구 튄 거이 분명합네다.”
눈치를 채고 부단장이 말했지만 사진봉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긍해봐야 그만 입장이 엿되는 것이다.  
“수금하러 나가야 하지 않가습네까?”
사진봉은 경찰서장의 명령대로 대원들을 각 마을로 쏟아넣는 일과, 이권을 챙기는 일 두 가지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로 갈등이 생겼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갔다. 대신 마을로 들어가라우. 오늘 회의는 여기서 종친다. 마을을 휩쓰는 건 보고 안해도 되지만, 정용팔 건에 관해선 반드시 보고하라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간부들이 우루루 밖으로 쏟아져나갔다. 거리로 나오면서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씨발, 강경대응 하라고 지시했다가, 강경 진압한다구 지랄했다가, 또 지금 뭐네? 무슨 짓인지 통 모르갔다.... 

자리에서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사진봉이 읍내 전화 교환수를 불러 보헤미안을 연결하도록 부탁했다. 곧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당신 안올 거예요?”
오신애가 먼저 목소리를 알아보고 물었다.
“알아서. 김철배 사장, 다섯시쯤 보잔다구 해.”
김철배는 오룡환의 선장이었다.
“배재정 사장은요?”
그녀가 미리 알고 진미호 선주까지 들이댔다. 그녀는 벌써 그의 비서 이상이었다. 그러나 진미호는 벌써 끝난 일이다.
“김철배만 불러.” 
“알았어요. 빨랑 오셔요. 얼굴 잊어버리겠네요.”
보헤미안은 봄날 하오의 적요에 늘어지듯 잠겨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실내 먼지의 입자들이 무수히 떠있었다. 창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김철배 사장은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매번 이게 뭔가. 삥 뜯기는 것이 순서처럼 되었다. 그러나 저지른 일이 있었기 때문에 목을 한껏 움츠렸다. 백미 일이백 가마니는 큰 돈이었다. 정부의 식량정책이 실패한지라 전국적으로 쌀이 절대 부족했고, 쌀값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쌀이 몇 달 전부터 동이 나서 서울, 부산, 대구, 인천에서 시민을 중심으로 연이어 폭동이 터졌다. 다른 지역에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때 백미는 큰 사업이었다. 그런데 대마도를 거쳐 성산포로 들어왔을 때 불쑥 나타난 군용선이 항로를 막았다. 군용선은 경찰의 순시선으로 활용되고 있었는데, 정용팔도 검속반의 일원이었다. 그의 배는 순시선에 예인돼 예정된 성산항이 아닌 허름한 어촌으로 끌려가 정박했다. 사진봉이 해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배에 뛰어들었다. 
그는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반을 넘기라우.”
“오십가마니를 드리겠소.” 
물론 그 값은 현물 대신 읍내에서 현금으로 받으면 되었다. 
“좋소. 콩도 좀 내놓으라우.”
밑천 한푼 안들이고 완력 하나로 가만히 앉아서 먹는 것이었으니 누가 봐도 대동강물을 팔아먹는 봉이 김선달이었다. 약탈도 그런 약탈이 없었다. 그런데 이미 청산해주었는데 오늘 또 만나자고 한다. 냄새를 맡고 더 받아내려고 협박할 모양이다. 사실 김철배는 별도로 귀금속을 들여왔던 것이다. 그것까지 냄새를 맡았나? 험한 파도 헤치고 목숨 걸고 일을 벌이는데, 저 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배를 불린다. 밀무역이긴 하지만 식량이 부족한 나라에 들여오는 건 민생고 해결의 유일한 수단 아닌가. 나라가 제대로 서지 않아서 세관이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굳이 법 위반이랄 것도 없었다. 다들 알아서 하는 일들이었다. 폭리를 취하자는 것도 아니고, 운임과 노임 정도를 얹어 챙기자는 것 뿐이다. 그렇게 해도 이익이었으니 해볼만한 사업이었다. 그런데 또 뜯으려고? 김철배 사장은 휴- 한숨을 내쉬며 다방 안을 둘러보았다. 손님들이 꽤 들어찼고, 실내는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사진봉이 보헤미안으로 들어섰다. 
“왜 차일피일 하십니까.”
자리에 앉자 그가 따졌다. 그는 복잡하지 않고 사설이 길지 않았다. 
김철배가 놀란 듯이 눈을 똥그랗게 떴다.
“저번 내가 일이 바빠서 나중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약조를 잊은 건 아니겠지요?”
“무슨 말씀을... 제가 어긴 일이라도 있나요?” 
“약조한 것 말이우다.”
“이미 지급했잖습니까. 정용팔 부장이 수금해갔습니다.”
불길한 것은 대개는 적중한다. 대신 행운은 빗나가기 십상이다. 그것이 인간사다. 그 자가 결국 장난을 쳤다. 먼저 가로챈 자가 임자란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기강이고 뭐고 질서라는 것이 없어졌다. 하긴 모두가 이권 때문에 모여든 집단 아닌가. 사진봉이 체면이 구겨진 쌍통을 하는데, 그것이 불안했던지 김철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 단장님이 심부름 보내지 않았나요?”
사진봉은 침묵을 지켰다. 
“단장님이 보헤미안에 나오시지 않고, 연락도 없었는데, 바빠서 섭외부장을 보낸 줄 알았지요. 청년단 행사 비용과 단원 활동비가 급하다고 얘기했습니다. 현찰이 부족해서 일수 돈을 내서까지 만들어주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이미 끝난 일, 시시콜콜 얘기해본대야 조직의 약점만 드러난다. 자신의 권위도 엿 돼버린다.
“됐습니다. 경찰 손이 뻗치진 않았지요?”
“왜요? 죽을 지경입니다.”
사진봉이 그럴 것이라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 단장님이 좀 해결해주셔야겠습니다. 사 단장님은 그래도 이치에 닿는 분 아닙니까. 우리 세계에선 아싸리하다고 인기가 있습니다. 경찰 문제도 사 단장님 선에서 커버해주면 더 개비해드리겠습니다. 이쪽 저쪽에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사진봉의 뇌리에 정용팔이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잡히면 죽여버릴 거다...
그들은 헤어졌다. 밖으로 나왔지만 사진봉은 한동안 보헤미안 앞에서 서성거렸다. 
“요즘 왜 그래요?” 쪼르르 문밖으로 달려나온 오신애가 다가서더니 물었다. “문용철 사장, 오민균 소령이 만나자고 했어요. 꼭 만나야 한다고요.”
”알가서. 연락하자구.“
그는 구름이 잔뜩 내린 거리를 황망히 걸었다. 제주도는 날씨가 화창했다가도 금방 구름이 내려앉는 따위로 변덕이 심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청년단 본부로 향했다. 부하의 짓을 지금에 와서 추적한들 조직의 허점만 노출하는 것일 뿐, 쓸모없는 짓이다. 통솔력과 지휘력 부족이란 낙인만 찍힌다. 그보다 현호진을 캐는 일이 더 실익이 될 것 같았다. 사무실에는 구대구 부단장과 행동대원 두세 명이 둘러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다. 구대구 부단장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무슨 대단한 기밀이나 되는 듯이 귓속말로 보고했다.
“고 자 알아냈습네다. 현호진이 말입네다. 그의 처자도 우리 레이더망에 잡혔습네다.”
사진봉은 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에 그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한쪽에 앉아있는 다른 행동대원들을 살폈다. 그들은 어설픈 표정으로 앉아있었으나 일을 해냈다는 어떤 자신감으로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알았어. 당신은 나가 봐.”
그가 명령하자 구대구가 시쿤둥한 표정으로 서있다가 밖으로 사라졌다.
“너희들 가까이 와라.”
두 행동대원이 쪼르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현호진 행방을 알아냈다구?”
“그렇습니다.” 체격이 단단해 보이는 작달막한 대원이 말했다. “개월오름을 지나 교래리 쪽에서 근거지를 찾아냈습니다. 빈 초등학교가 있구, 거게 급사로 가있는 다른 대원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근거지를 알아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시간을 이용해서 접선하려 했는데 누군가 따라 나와서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거게가 본부처럼 보인단 말입니다. 그들은 몇 개의 산골학교를 번갈아 사용하고 있었는데, 거게도 본부 중의 하나인 것이 분명해보였습니다.”
“잦은 이동이라... 그 위치를 파악했다 이 말이디?”
“그렇습니다. 무슨 마을, 무슨 학교인 줄은 모르겠습네다. 거게서 나무하러 온 아이를 붙잡았댔으니까요. 중학 일이학년생쯤 돼보였습네다. 멱살 쥐어잡고 숲속으로 끌고 가 몇 대 갈기고 심문하니까 조천중학원 생도였습니다. 현호진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흔아홉골에 계시기도 하구, 개미목에 계시기도 하구, 인근 진지 동굴에 계시기도 하다구 했습네다.
그는 평안도 사투리와 서울 말을 번갈아 사용하며 정탐해온 사실을 조목조목 보고했다.
“부단장에게 보고했네?”
“아닙니다. 보고하려는데 단장님께서 들어오셨습네다.” 
“좋다. 중요한 기밀사항이니까니 입 꼭 다물라. 그 사안은 직접 나한테만 보고하라우. 필요하면 읍내 보헤미안을 찾으라우.”
“단장님 애인이 운영하는 업소 말입네까?”
“이 새끼가! 그 자는 밀대야!”
“알갔습네다.”
대상이 씩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현호진은 우리만이 직접 생포하는 기다. 그러면 너희들 순경으로 발령내겠다.”
그는 그들에게 과도할만큼 두둑히 활동비를 지급했다. 영웅이 된 것처럼 그들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밖으로 사라졌다. 사진봉은 이 건 하나만은 똑부러지게 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말단들의 장난 같은 일도 때로는 힘이 되는 경우가 있다. 
사진봉은 건어물회사를 차릴 생각이었다. 제주도 해역은 어획량이 풍부했다. 해안선이 봉쇄되고 출어가 금지되니 바다에는 물 반 고기 반이었다. 잡힌 물고기는 저장이 안돼 썩는 경우가 많았다. 저장시설은 없고, 날씨는 더워지고, 판로는 막혀서 많은 어획량에도 불구하고 잡은 물고기들이 길거리에 내다버려졌다. 길을 가다 보면 여기 저기 생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밭에 퇴비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을 거둬들여 건조해 거래선을 확보해 육지에 공급한다. 산지의 버려지는 생물을 거둬들여 말리기만 하면 된다. 따지고 보면 쉬운 사업이다. 이제는 바른 길로 가야 한다. 언제까지 민폐의 종양이 되어 빈축을 살 것인가.
그가 보헤미안을 찾자 오신애가 엉뚱한 말을 했다.
“신성리 해변횟집이요.”
“신성리?”
“거기 해변횟집이라니까요. 글루 가보세요. 문사장이 신신당부했어요.”
“누구를 오라 가라 명령이가?” 
“저기 차도 대기시켜 놓았어요.”
보헤미안 건물 건너편에 스리코터가 한 대 서있었다. 그가 얼굴을 찌푸리자 오신애가 거듭 말했다.
“오민균 소령은 좋은 사람이에요. 집안이기도 하구요.”
“집안 친척이 하루아침에 생기니?”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게 얼마나 좋아요?”
그녀가 흘기듯이 눈웃음을 짓자 그도 웃는 듯 마는 듯하며 밖으로 나와 운전병이 대기하고 있는 스리쿼터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모시고 와야 하는데 눈도 있고 해서 먼저 왔습니다.” 
문용철 사장이 양해를 구했다. 예의가 바른 것이 사업가다운 풍모였다. 그의 앞에 백지가 깔린 교자상을 마주하고 오민균이 단정하게 앉아있었다. 의젓한 자세가 어떻게 완성된 사람으로 보였다.  
한라산의 서편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가는 일몰이 아름다웠다. 그들은 잘 빚은 밀주를 마시다가 잠시 후 소주로 바꾸었다.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뭔 줄 아십니까?”
문용철이 오민균과 사진봉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싱싱한 해산물이 상에 가득 올라와 있었다.
“그야 똥돼지, 흑돼지, 말고기 아닌가요? 성게국, 다금바리도 맛이 있지요.”
사진봉이 받았다.
“그래도 히라스요. 힘이 넘치는 방어 말이오. 화산암반수로 만든 소주 한잔 꺾으면서 히라스를 한점 입에 넣으면 세상이 시시해보일 정도요.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니까요.” 
그가 상추에 히라스 뱃살 조각을 올리고 된장과 마늘을 그 위에 듬뿍 올려놓고 싸더니 한 입 가득 입에 넣어 씹었다. 상추 씹는 소리가 아삭아삭하니 경쾌했다.  
“바로 이 맛이요.”
문용철이 상추쌈을 삼키는 듯 마는 듯하며 하얀색의 병에 담긴 한라산 소주를 잔에 따라 한 입에 털어넣었다. 먹고 나서 다시 문어회를 집어들고 일장 연설했다.
“문어라고 해서 다 문어가 아니올시다. 제주도 맑은 바닷물과 돌 밑에서 살고 있는 돌문어라야 갑이지요. 육지에서는 통발이로 문어를 잡지만, 제주산 돌문어는 해녀들이 잠수해서 직접 잡아올리지요. 붉으스름한 색깔부터 달라 보이지 않소? 문어는 타우린이 풍부하여 간의 해독작용을 도와주는데, 여러분들 입산자 토벌작전에 지친 몸의 피로회복에 최고지요. 이걸 한 접시만 먹으면 좆이 막대기가 돼뿌리요, 하하하. 그리고 요것은 돔 껍질입니다. 몸값이 제주도사 몸값과 동급이오. 그래도 제주도에선 강아지도 물고 다닙니다. 이 껍질요리, 육지에서는 어림도 없지요. 이건 뿔소라. 누이가 물질을 하는 해녀라 어릴 적부터 맛보았는데 고소하고 쫄깃쫄깃하니 잘 익은 여자 씹맛 그대로요, 하하하. 생각만 해도 발딱 서네. 그런데 말이오, 왜놈들이 이걸 다 가져갔습니다. 제주 해녀들이 잡으면 왜놈들이 당연한 듯이 거둬갔지요. 육지에서도 가져갔고요. 제주노동조합이 왜 발달한지 알겠지요? 다 뺏어가니까 못살겠다고 조직한 거요. 성산포 해녀들이 들고 일어났을 적에는 국문을 가르쳐준 야학 선생들이 적극 지원했소.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맨날맨날 당하니 글 깨우쳐서 저항했던 것이오. 우리 해녀들이 쓰시마, 후쿠오카, 고베로도 나갔지만 홋카이도, 사할린, 조선반도의 끝머리 함흥 청진 나진으로도 진출했소. 우리가 단정단선을 반대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소이다. 38선이 막히면 우리 누부들 어떻게 고향에 오겠습니까. 그리고 분단보다는 통일이 역사적 소명 아니오? 왜 갈라서서 싸우려고만 하요? 간단명료한 것을 왜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지요? 국토를 두동강내면 무슨 이익이 있지요? 외세가 이용할 거고, 그런데도 우리는 뭣도 모르고 서로 이간질하면서 으르렁거린단 말입니다. 제주의 양심이 훨씬 순정하고 순수하지 않습니까?”
문용철은 재미있게 분위기를 이끌다가 결국 고향 현실로 끝을 맺었다. 이들은 이런 식으로 의식화되어 있었다.
“문사장, 취했습네까.” 
사진봉이 까칠하니 물었다. 
“아, 그렇군. 히라스 얘기하다가 만장굴로 빠져버렸군.”
그리고 다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아까 히라스라고 했지요? 방어와 같은 어류지만 맛이 완전 다른 부시리라는 것이 있소. 부시리라고 하는 히라스는 급수가 한 단계 더 높지요. 왜냐. 힘이 세기 때문이며, 그것들 입이 고급이어서 주로 영양가 높은 새우 따위를 잡아먹기 때문이오. 이것들 뱃살은 처녀 혀맛보다 달콤해요. 입맛이 없을 때 입맛을 돋아주는 부시리 히라스. 요것 보시오. 통통한 살점이 맛깔스러워 보이지 않소? 맑은 소주 한잔에 이 히라스 한 점. 입안에 탁 털어넣으면 그냥 녹지. 이건 산란기 직전인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지금도 달착지근합니다. 지방이 풍부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워서 쪽발이놈들 지 마누라까지 팔아서 사먹는다는 거요. 그리고 여기 전복 보시오. 팔팔한 이거 두 개만 먹으면 정액 생산이 한됫박씩 나온다는 것이요. 정액이 오징어 먹물 쏘듯 쏘면 여자들 자지러진다니까, 하하하. 그리고 이것 군침을 삼키게 하는 요거는 뭐겠소?”
그가 다른 회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올렸다.
“뭐죠?” 
오민균이 따라 웃으며 물었다.  
“체색(體色)이 시커먼 감성돔인데, 그중 한자 반 정도 되는 씨알이 좋은 것이라야 제 맛이오. 뱃살이 꼬독꼬독하니 씹을수록 군침이 돌지. 이것은 계절이 따로 없고, 낚는 그날이 최고의 맛이올시다. 낚는 손맛도 좋지만 회 뜬 속살은 쫀득쫀득하니 입안을 호강시키지.”
“제주도 해물은 맛없는 것이 없군요. 대단하십니다.”
그에 대한 반응 대신 문용철이 정색을 했다.
“하지만 오 소령님, 나는 사진봉 단장을 예사로운 분으로 보지 않습니다. 제주군정에서도 사 단장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경찰보다 신뢰한다고 말입니다.”
“무슨 비행기 태울 일 있습니까.”
사진봉이 손을 내저었다. 문용철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조카 좀 빼주시오. 박찬욱이요.”
사진봉은 누구를 말하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으나 잠시 후 알아차렸다.
“그자는 서청과 경찰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왜곡 편파보도로 이간질을 부추겼댔디요. 우리가 폭도보다 못합네까?”
에둘러가지 않고 사진봉이 쌍통을 찌푸리며 받았다. 
“하지만 지금 신문도 나오지 않습니다. 폐간된 신문사 기자가 뭐가 쓸모 있습니까. 팔없는 사람에게 낚싯대 주는 격이요. 오늘 술값 비쌉니데이.” 
사진봉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우리가 신문사 접수합니다.”
“네? 접수를 해요?”
“신문은 나오게 해야 하지 않갔습네까.”
“접수하다니요?” 
신문사를 옥죈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진봉은 서장의 지시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대원들을 풀어 신문사 편집국을 쓸어버렸다. 이때 두둘겨 맞은 기자들이 속출하고, 박찬욱은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우리 잠깐 자리를 바꾸지요.”
오민균도 내킨 김에 할 말 하리라 하고,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진봉이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던지 옆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오민균의 뒤를 따랐다. 둘이 마주서자 오민균이 정면으로 그의 눈을 응시했다.  
“현호진을 연결해주시오.” 
사진봉은 취기에도 술이 확 깼다. 
“현호진? 거 무슨 뜻입네까. 어떻게 알았습네까.”
“알아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고 자 학생들 꼬드겨서 산으로 들어가 유격활동을 벌이는 반동입네다. 고런 자를 어뜨렇게 연결한단 말이우까? 사람 잘못 보았구레.”
그 건은 모처럼 실적을 올릴 수 있는 일이고, 현문선과도 거래를 틀 수 있는 건수가 되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산에 박힌 폭도대에게 경고문을 보내려고 합니다.”
“경고문?”
“네. 제주 군정이 9연대에 특명을 내렸습니다. 그 밀명을 내가 수행합니다. 공적 라인을 작동하면 역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어서 이렇게 사 단장에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쪽이 서청 제주읍 본부라고 공히 알고 있고,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폭도들이 과했디요. 우리 피해가 컸습네다. 그런 것 잊기로 해도 잊혀지지 않는 때가 있디요. 무기를 탈취해개지구 대원을 쏘고, 경찰 가족들을 찔러죽이고, 이게 분이 나서 견딜 수 있갔습네까.”
오민균이 여유를 두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렇지요. 복수심이 생기지요. 그러니까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냉정히 살펴보면, 다들 고통스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당한 그 순간만 생각하면 해결난망이지요. 사물이란 한 면만 가지고 전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저쪽 폭도들도 그들이 당한 것을 가지고 또 그들대로 복수심을 갖습니다. 끝없는 복수전만 반복됩니다. 그렇게 가면 서로가 끝장이지요.”
“우리가 끝장일 수 없습네다. 시간은 우리 편입네다. 하지만 대대장 동지, 지금 당신은 어느 편입네까. 적입네까, 아군입네까. 경찰이 관찰하는대로 군인들이 의심스럽습네다. 아무리 사사로운 관계로 만나두, 분명할 건 분명해야디 않가소?”
“물론 분명해야죠. 하지만 사람이 상하는 일은 금해야죠.”
“군인이 살상을 금한다. 농군이 삽을 안든다는 격이고만요?”
“전쟁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들은 우리의 여동생이고, 오빠고, 삼촌이고, 또 누군가의 아비이고, 누군가의 이웃입니다. 적이 아닙니다. 과도하게 적으로 설정되었을 뿐입니다.”
“좌우지간 현호진은 폭도대장 오른팔이오.”
“그래서 투항을 요구하려는 것입니다. 전시에도 적장과 협상하는 것이 작전의 하나입니다.”
“그런 고상한 말은 내 모른다고 했디요?”
“접선시켜 주시오.”
“고래서요?”
“투항시키겠습니다. 모두 내려와야지요. 권력이 해야 할 일을 군이 대신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쉬운 말을 어렵게 합네까. 하지만 군인은 적을 격멸해야 하지 않소?”
“그들은 적이 아닙니다.”
오민균이 눈에 힘을 주어 재차 강조하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상한 사상을 가졌습네다.”
“오신애 마담과 저는 한 집안입니다. 아시죠?” 
그러자 사진봉이 희미하게 웃었다. 순진한 친구라니, 그것으로 나를 움직이갔다?  
“오누이 관계를 이용한다? 천리 타향에서 내가 처남을 만난다? 야, 고거 그럴싸 합네다. 재미있습네다, 하하하.”
결국 그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사진봉은 타향에서 이런 인연을 맺는다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피차에 외롭고, 가족이 없어 마음이 아린데, 이런 때 친구도 되고 동지도 되고, 처남매부도 되는 사람을 만난다. 어차피 친구란 사회가 만들어주는 가족 아닌가. 그러나 그는 정작 달리 말했다.
“고건 안들은 걸루 하가소. 처남 매부간이라 하니 내 그 의리로 비밀 지켜주갔수다. 하지만 입을 무겁게 가지시오. 자, 자리로 돌아갑시다.” 
그가 앞서 술상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오민균이 뒤따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 문용철이 엉뚱하게 소리쳤다. 
“일본군대에서 적지 아니하게 전우들끼리 연애한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두 사람 그런 사이인 줄 내 몰랐습니다? 하하하...”
그는 꼬투리만 잡으면 음담패설과 연결시켰다. 각자 자리를 잡고, 문용철이 소주를 각자의 잔에 가득 따랐다. 사진봉이 잔을 들더니 벌컥벌컥 단숨에 마셨다. 
“한잔 더 따르시라요.”
그리고 빈 잔을 오민균 앞에 내밀었다. 오민균이 그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사진봉은 그것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주면서 그도 두 차례 연거푸 술을 부었다. 모두들 취기가 돌았다.
“오 소령, 대단하십네다. 나 같은 사람한테 술을 다 따르고... 나도 한이 많습네다. 아바이, 어마이가 일본놈한테 쫓겨서 만주로 도망을 가고, 나는 외가에서 외롭게 자라다가 평양역에서 돌멩이처럼 굴러댕겼디오.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네다. 어떤 누구도 내 벗이 되어주디 못했디요. 가는 곳마다 험한 꼴이었습네다. 모든 것을 때려부숴도 시원치 않았습네다. 더 마음속 분노가 쌓이고 쌓였습네다. 어느날 단원이 애월쪽 마을에 들어가 거짓말한다고 한 아바이를 때릴 때 내 아바이를 생각했습네다. 아바이도 저렇게 당해서 돌아가셨을지 모르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네다. 고래서 귀대한 뒤 그놈을 개패듯이 패서 쫓아버렸습네다. 고래두 시원치가 않았습네다. 해결되는 것이 없었습네다. 인생사가 쓸쓸했습네다.”
그는 취해 있었다.
“그러니 오늘 한껏 취해버립시다.”
문용철도 혀가 꼬부라져서 맞장구쳤다.  
“고향생각, 부모님 생각을 하면 신세가 한탄해집네다. 그리운 사람이 그리울 때는 눈물이 난단 말입네다. 나도 인간이니까니 피가 없갔습네까, 눈물이 없갔습네까. 나는 오 소령과 의리의 처남매부로 지내고 싶습네다.” 
사진봉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바람 드센 분지, 비밀접촉 

오민균이 대대장실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그의 대대는 정뜨르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는 대정 연대본부와 대대를 내왕하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오 마담이에요. 잠깐 만나요.”
보헤미안의 오신애가 그에게 직접 전화할 일은 없었다.
“지금 연대본부로 가야 합니다.” 
“오후 다섯시까지 보헤미안으로 와주세요.”
그녀는 일방적으로 이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당연한 듯이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오민균은 다소 불쾌감을 가졌으나 그녀 스스로 누이라고 했으니 허물없이 대하는 것이리라. 그만큼 가깝다는 뜻이리라. 연대장을 찾아 출장 보고한 뒤 오민균이 말했다.
“각하, 읍내로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임무는 빈틈없이 수행하게. 기밀을 철저히 유지하고 말이야.”
그는 부랴부랴 제주읍으로 나갔다.
“개미목 아흔아홉골이래요.”
보헤미안에 들어서자 오신애가 그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가 어디죠?”
“사 단장님이 그렇게 전하라고만 했어요.”
그는 그의 부탁을 말없이 행동으로 옮겨준 것이었다. 그의 속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이십삼시 개미목 아흔아홉골. 곽일도를 찾으라.”
사진봉은 오신애에게 이렇게 한마디 던지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런 때의 사진봉은 꼭 남과 같았다.
“대대장님, 아니, 오라버니는 이씨예요.”
그의 암호명은 이씨라는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나중 찾아 인사하겠습니다.”
그는 보헤미안을 물러나왔다. 밤이 깊자 오민균은 움직였다. 토박이 병사의 안내를 받아 드리코터를 몰고 가서, 어느 지점부터서는 그것을 구렁창에 박아두고 홀로 비탈을 타고 올랐다. 숲이 우거진 사위는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했다. 바람소리만이 검은 골짜기를 메웠다. 개미목의 지형은 험준했다. 그곳을 빠져나오자 잡초가 우거진 분지가 나타났다. 
“이씨!”
등 뒤에서 짧고 낮은 단음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한 사람이 이삼 보 앞서고 두 장정이 그 뒤를 따라 풀을 헤치고 걸어오고 있었다. 
“곽일도?” 
오민균이 물었다.
대답 대신 사내가 뒤따르는 두 장정을 향해 가볍게 손짓을 했다. 두 장정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매복한 채 경비를 설 것이다. 두 사람만이 남아 마주 섰다. 어둠속에 그의 얼굴은 분명치 않았지만 마른 몸에 키가 훌쩍 컸다. 그가 말했다.
“본래 귀순공작의 책임자로 지명된 사람은 제주지사였소. 그는 우리와 교섭 회담을 갖기로 하고 시간과 장소를 약속했으나 나오지 않았소. 급병을 구실로 병원에 입원했다더군. 그 다음의 회담 책임자는 경찰토벌사령관이었소. 그자 역시 겁을 먹고 회담하기로 한 날 출장을 이유로 선박을 징발해 육지로 나가버렸소. 세 번째는 경찰감찰청장이었는데 그자도 개인 용무로 회피했소. 민족청년단장이 네 번째 책임자로 지명돼 수 명의 청년단원들과 함께 깃발을 앞세우고 약속된 장소로 왔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피했소. 우린 깃발 들고 승리자처럼 오는 그들의 공명심을 치켜세워줄 얼간이들이 아니오. 이씨, 재량권이 있소?”
그들이 간절하게 협상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오민균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여러 곡절을 겪었기 때문에 이쪽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현호진 선생이 재량권이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나는 곽일도요. 혹시 잘못 온 것 아니오?” 
말로만 듣던 공산당은 변복과 가명을 수시로 바꿔 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보다 그가 인민무장대의 대표성을 띠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조직의 갈래가 여럿이고 대장이란 자도 수 명이었다. 혼선을 빚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퍼뜨린 것인지, 실제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호영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적 인연을 사업과 연결시키지 마시오.” 그가 잘랐다. “휴전 제의 신뢰할만 합니까?”
“맨스필드 군정장관은 협상자로 9연대를 지목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요.”
“9연대가 무장폭도대와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본 것입니다. 경찰과는 다르니까요.” 
“무장폭도대라니, 무장자위대라고 용어를 고쳐 부르시오. 우린 폭도대가 아니오.”
그가 낮으나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아버지가 말하는 것과 똑같았다. 오민균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맨스필드 군정장관은 우리에게 ‘당신들도 회담 날에 도망을 가는 것 아니냐’고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9연대 당신들은 귀순 작전이 실패하면 입산자들에게, 반대로 성공하면 경찰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 아시지요? 그래서 모두들 회피한 거요. 화평작전이 실패하여 무력 토벌이 시작되면 입산자들로부터 배반자로 낙인찍히고, 반면에 경찰로부터는 폭도들의 협조자로 낙인이 찍힐 거요. 성공해도 경찰의 오해를 살 거란 말이오. 외통수에 걸린 거요. 내 말 뜻 알겠소?”
화평 공작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경찰은 화평 공작을 싫어하므로 배신자로 몰 것이고, 실패하면 무장자위대로부터 역시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어쩌자는 것인가. 
“힘은 경찰에게 있소. 그들은 폭동의 발생 원인이 밝혀지고, 자신들의 죄상이 폭로될까봐 전전긍긍한 나머지 어떻게든 무력진압을 강행하려고 하는데, 그런 상황인데 그걸 뛰어넘을 자신이 있소? 9연대 당신들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지 않겠소?”
“걱정 마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자신있다고 과신해선 안되오. 힘이 있어야 어떤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소. 9연대는 오합지졸일 뿐, 힘이 없잖소.”
무시하는 말이었지만 현실적인 진단이었다. 연대의 힘으로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값싼 동포애로 나선다는 한계가 있다는 것.... 허무적이고 패배주의적이지만 그것은 정확한 현실진단이다. 
“어떤 오해를 사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무장자위대가 문제입니다.”
“내 생각은 이렇소. 군이 직접 나서기보다 중재자가 필요해요. 그래야 우리도 안심할 수 있소. 중립적인 민간인 인사를 내세우시오.”
오민균은 그가 중립적인 인사를 이유로 그들에게 유리한 사람을 협상자로 내세우려 한다는 속셈을 알아차렸다. 제주 지도층은 토박이이고, 그들은 산사람들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유리한 협상테이블에 앉겠다는 태도 아니겠는가. 연대는 힘이 없고, 실체도 불분명하니 신임할 수 없다. 그러니 중립적인 인사를 권한을 주어 협상테이블로 내보내라.... 현호진이 말했다.
“그들도 신변의 위협 때문에 협상자로 나서길 꺼린 자들도 있지만, 몇몇 뜻있는 유지들이 있소. 제주신문 사주를 비롯한 박달훈, 부달성, 김사용 같은 분들이오. 신부님 등 종교인도 포함됩니다.”
오민균은 어둠 속에서 메모지를 꺼내 하나하나 이름을 적었다. 가용 인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반면에, 역으로 무장자위대의 인력 풀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시간은 무장자위대 편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단히 토벌전에 나서라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군이 작전에 돌입하면 경찰의 화력과는 상상이 안될 것입니다. 군은 무서운 화력을 갖고 있습니다. 작전명이 떨어지기 전에 9연대장 각하의 소신으로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선한 의자가 발동될 때 빨리 받으세요. 안그러면 큰일 납니다.”
“나는 생사를 넘었소. 병중인 어머니, 아내와 어린 두 자식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가슴이 쓰리고 아프지요. 나라고 따뜻한 밥상, 아이들의 재잘거림, 아내와의 저녁 산보가 간절하지 않겠소? 하지만 나에겐 더많은 가족이 있소. 험한 세상이 만들어준 가족이오.”
바람소리가 골짜기를 휩쓸고 지나갔다. 스쳐지나온 지난날의 잔상들이 바람소리 속에 하나하나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리운 사람들, 가족들, 따뜻한 밥상, 마을 굴뚝의 평화로운 연기들, 우록리의 시냇가, 자애스런 어머니, 육사 생도 동기생들.... 다시 바람이 분지의 풀밭을 흔들고 골짜기의 숲을 흔들며 지나갔다. 그 소리가 슬프고 처연했다.  
“사진봉 단장에게 단단히 일러주시오.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하신 걸 내가 알고 있다고.”
그는 산속에 있었지만 가족의 피해 상황을 알고 있었다. 밀대의 제보로 알았거나 염탐하여 알아냈을 것이다. 그도 천상 남편이요, 아빠요, 아비의 자식이었다. 오민균은 사진봉의 주선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내력을 설명하진 않았다. 그런 설명이 부질없어 보였다. 
“귀순 유도 전단문을 한라산 일원에 살포하겠습니다. 경찰의 오해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귀순하도록 전단을 뿌리고, 무장자위대는 그에 응하는 수순으로 밟아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협상 창구를 단일화하시오. 여러 갈래라서 혼선이 생깁니다.” 
“내가 부탁할 말입니다. 자위대 라인도 단일화해주시오. 9연대 이외의 창구는 믿지 마십시오.” 
그들은 굳게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자넨 이 길이 아니어도 출세할 수 있지 않나”

김익창 연대장은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오민균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연대장이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있다가 한참만에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오 소령, 왜 이 일에 매달리는가.”
뚱딴지같은 질문이었다. 대답하려니 막상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문해보았다. 내가 왜 이 일에 매달리지? 어떤 확신이 있다는 것이지? 
“그 어렵다는 일본 육사 출신에 스물한두 살의 젊은 장교. 영광의 길이 펼쳐지는 청춘이 아닌가. 좋은 집안에 늠름한 외모. 명석한 두뇌. 그런 사람이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가려고 하니이상하단 말일세. 그게 새삼스럽게 궁금했네.”
오민균은 연대장을 바라보았다. 
“연대장 각하, 큰 의미를 두고 나서는 길은 아닙니다. 연대장 각하께서 저를 신임하시니 용기있게 따를 뿐입니다.”
“나쁜 명령도 따르는 게 부하의 임무 아닌가.”
“연대장 각하께서 그릇된 명령을 내리실 분이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해.”
오민균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제가 여기 있으니까요.” 
“어떤 누구도 여기 있잖나.”
“다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정보장교들을 주의하게. 상부 지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애. 그래서 나 역시도 때로 오 소령을 달리 볼 때가 있지. 저 사람은 과연 누군가. 도대체 어떤 신념이 있길래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가. 나도 때로 두려운데, 오 소령은 두려움 없이 간단 말일세. 나는 오해를 사면 쫄아버리는데...”
순간 오민균은 도쿄 시내에서 만난 이시하라 겐조 상이 떠올랐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죄목으로 세 차례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자 자국민들도 그를 증오했다. 질서파괴분자, 국가에 반역하는 비애국자, 극좌분자... 군국주의의 일방적 언론환경에 따라 국민은 세뇌되기 마련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증오했다. 그러나 그는 굽힘이 없었다. 오민균은 그런 그가 상상하던 것 이상의 높고 깊은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조선 병탄을 일본 패권의 확장이라고 열광하지만, 그는 야만이고, 광기라고 몰아붙였다. 조선 사람보다 더 일본을 비난했다. 그런 그를 만났을 때의 전율은 컸다. 가슴의 파동이 컸다. 그런 어느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세치 혀로 천황의 목을 벨 수가 있소.”
엄혹한 체제 아래서 군국주의가 망하기를 바라는 일본 지식인. 겁먹지 않은 확신에 찬 인생관. 그의 방 벽엔 박박 머리를 깎은 죄수복 차림의 그의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짙은 눈썹과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이 현실을 초월한 사람처럼 보였다. 무엇이 그에게 현실을 거부하는 비타협적 인생관을 심어주었을까. 
어느날 이시하라는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내 친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안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소. 가뭄이 계속되니 땅은 사막화되고, 사람들은 물이 없어서 손발을 씻을 생각을 못하고 축생처럼 살고, 그래서 모두 피부병과 눈병에 걸렸소. 그런 곳에서 친구는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었지. 눈병 환자가 많으니 안과의사에게는 그 이상 좋은 물좋은 곳이 없었던 것이지. 그런데 눈병은 시신경을 자극하니 앞을 못보는 장님이 늘어나고, 시신경이 뇌신경을 자극하니 정신착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았소. 거리마다 골목마다 이상하게 웃거나 중얼거리는 장님과 미치광이가 많은데, 그런데도 비관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에 그는 감격했다는 거요. 친구는 어느날 돈을 번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소. 저들을 상대로 돈 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남의 고통과 약점을 노려서 돈을 번다? 그래서 생각한 나머지 무료진료에 나섰소. 내가 친구에게 물었소. 돈벌러 갔다는데, 비싼 돈 들여서 배운 의술을 풍요롭게 삶을 사는 데 사용해야지, 왜 엉뚱한 데 열정을 쏟냐고. 그랬더니 친구가 반대로 묻더군. 비싼 돈 들여서 배운 것을 단순히 돈버는 데 사용하며 사는 인생이 얼마나 쓸쓸하냐고, 이웃이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사는 삶이 무슨 재미냐고... 자신의 의술은 저들의 삶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일깨워준 스승이자 친구라고. 그런 친구의 슬픔을 대신 등에 지고 가는 것은 배운 자의 의무라고...”
“그렇군요” 
오민균은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시하라가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 그런 사람이 지구상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도 우리의 행복 아니겠소? 그렇게 해서 인류는 이성사회로 조금씩 진화하는 것이고... 사실 세계는 우리의 절망을 딛고 일어서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안락을 반납한 사람들의 역사요. 그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황량하겠소. 그래서 나는 그 친구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오 생도, 일본 육사는 긴 인생 도정에서 작은 길에 지나지 않소. 어느 민족이든 자국의 아이덴티티로 평화롭게 살아갈 자격이 있소. 그건 당연한 권리요. 그걸 되찾아야 하오. 일본 패망이 임박했으니 그 이후를 대비하시오. 오 생도는 갓 스무살의 빛나는 청춘이자 무지개 꿈을 꾸는 조국의 등불이요. 그날을 대비하시오. 잘 사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오. 그러나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사는 것처럼 무의미한 생이 어디 있나.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란 것 명심하고, 반대로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란 것 잊지 마시오. 옆방에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고 어떻게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있소? 이것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모르고 있소. 제국주의자들은 너의 불행을 즐기는 광기의 집단이오. 약한 자를 더 짓밟는 몰상식의 전범국가요. 그러니 지구상에서 영원히 박멸해도 좋은 나라요. 그것은 이성이 요구하는 지상명령이기도 하오.”
일본의 패망, 조국해방, 조국에의 헌신, 빛나는 청춘, 무지개 꿈...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오민균이 이시하라 상에게 물었다.
“일본 패망이 정말 현실화되겠습니까.”
일본군 관병식을 보고 그는 조국독립의 꿈을 아예 접었었다. 그 어마어마한 군사무기와 무쇠같은 병사들의 한 치 오차없는 열병식을 보고 그는 세상의 어느 군대도 일본을 넘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답했다.
“일본은 러일전쟁, 청일전쟁, 조선 병탄, 모두 꽃길이었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패배를 모르는 불패제국이라는 자만심이 자멸을 자초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오. 모든 만물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밟는 것, 거기엔 오만을 경계하라는 우주적 질서, 순응을 따르라는 세기적 교훈이 있소. 그런데 일본 군국주의는 그 도를 넘어도 한창 넘었소. 야만과 광기의 집합체요.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집단이오. 그러니 무너질 것이오.”
“선생님께서는 아나키즘 운동을 펴신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그런 신념이 생긴 것입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나를 잡아가두기 위해 그런 프레임을 짜서 체포한 것일 뿐, 굳이 말하자면 난 자유주의자요. ‘Let it be’란 말이 있지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말 그대로 인간은 있는 그대로 살자는 주의요. 추한 탐욕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야만이라는 거요. 개인이든 집단이든, 혹은 국가든간에... 그가 설사 사회주의자면 어떻고, 무정부주의자면 어떻소. 인류가 지켜야 할 가치를 취하는 방법이 다를 뿐인데, 정치적 폭력자들이 이익을 편취하기 위해 사람을 가두고 죽이는 기제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 아니오. 강자의 강제없이 공동체가 평화롭게 사는 것.... 내 처가인 제주도 사람들의 생활방식이오. 그것이 아나키즘이란 철학적 담론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는 것이오. 그들이 평화롭게 살겠다는데 왜 그것을 파괴하오? 왜 죽여야 하지요? 서로 인정하면서 발전의 방법이 있으면 진화시켜 나가는 게 정치가 할 일이고, 문명이 할 일인데...”
오민균이 그의 말을 새기자 이시하라 상이 덧붙였다. 
“아나키즘을 봅시다. 중앙정부의 혜택은 없고 착취만 있으니 우리끼리 자립해 평화롭게 살아간다... 물론 자구(自救)수단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지만 본래의 취지는 그것과 다르지. 일본군국주의가 인간양심을 파괴하는데, 그래서 수탈과 억압을 경험한 조선지식인들이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아나키즘을 활용하는데, 그 본성은 어디까지나 평화라는 거요. 그 사상이 지금 제주도에 그 원형이 있소. 그것이 파괴되어서야 쓰나?”
일본의 일극주의만을 생각하고 있던 오민균은 그를 통해 눈을 떴다. 그리고 지금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이시하라 상으로부터 빠져나온 오민균이 김익창 연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각하,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이 세계질서를 잡아가는데 제주도가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무슨 말이야?” 
“미국이 냉전 질서를 구축해 패권을 유지하고, 그러면서 세계경찰국가로 나서겠다는 것, 그것이 제주 땅에서 실험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데도 국내의 제 정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이전투구만 벌이고, 그중 친일세력이 세상의 주류로 나섰습니다. 주류는 자기 손금만 열심히 들여다보는 자들일 뿐 영혼도, 조국도 없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나?”
“미국이 세계관리 제물로 한반도 분단을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친일세력을 등용시켜서요.”
“그렇다면 북쪽의 소련은?”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잘 모르겠습니만, 그들도 미국이란 강대국을 레버리지 삼아 세계질서를 재편해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북쪽 우호세력을 전면에 내세워서요. 그러나 미국에 비하면 소련은 상대적 도덕적 우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지배자가 아니라 조력자로 나선 소련의 힘을 배경으로 북한의 국내 세력이 기반을 잡아나가니까요. 남한과는 구분됩니다.”
“그렇다면 북한이 옳다는 말인가?”
“표면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남한사회보다 국가 정체를 세워나가는 데 있어서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친일세력 청산을 나라 기강을 잡는 기본 틀로 짜놓고 있으니까요. 그런 시대모순이 극복되니 백성들이 열광하죠. 압제의 식민지시대는 가고, 내 나라 내 조국을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서서 판을 짠다. 가슴 벅찬 일이죠. 거기에 친일세력과 지주계급, 기독교 세력이 못견디고 월남하니 그들은 권력을 단순화해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이지요. 하지만 종교를 탄압한 것이 국가정체 확립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이념을 따라 월남한 것이야.”
“그럴 수 있지만, 크게 보아서 이익 따라 이동하는 것이지요. 현재 북이나 남이나 이념상의 큰 차이는 없습니다. 또 이념에 관한 한 다 무지하고요. 파워 엘리트들이 판을 짜는 데 이용될 뿐입니다. 지배 논리에 따른 이념이라는 관념이 수용과 배제의 기준이 되는 것이죠. 자기 이익과 결부시켜서요.”
“자네, 조심하게. 자넨 반역으로 몰릴 수 있네. 지금도 감시당하고 있잖나.” 
“양심의 소리를 숨기고 살아야 합니까? 저는 누구와도 관련을 맺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 북과 연관돼 있다고 보십니까.”
“연관이 안되었더라도 그렇게 묶어버릴 거야. 세상은 간단치가 않아. 음험한 공작들이 너무 쉽게 작동하고 있어.”
“저는 때때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언제까지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요. 일제 36년, 아니, 정확히 말하면 1850년대부터니까 한 세기 동안의 암흑기입니다. 이 정도 고통을 주었으면 이제는 보살펴주거나 놓아주어야죠.”
“하느님은 실체가 없어. 우리 스스로 믿을 뿐이야. 우리 의지가 없을 때는 한갓 미신에 지나지 않네. 안그러나? 어쨌거나 맨스필드 군정장관 동향을 살피게. 그것이 실존의 이유야.”
“저는 맨스필드 군정장관의 감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그의 인격 하나에 제주도 운명을 맡긴다는 것이 정당한가요?”
“오 소령, 자넨 현실감이 떨어지는군. 맨스필드의 품성 하나가 제주도 정책을 좌우한다고 걱정하는데, 그런 것이라도 붙잡는 것이 다행 아닌가. 우리가 붙잡을 게 지금 뭐가 있나. 그러니 미군정을 따르게. 그러면 미래가 확실히 보장될 것이야. 내 솔직한 말인데, 자넨 이 길이 아니어도 출세가 훤히 보장돼있지 않나? 일본 육사 선배들이 주류로 나서고 있으니 앞길이 더 창창하지.”
“세속적 야망이 그렇게 좋습니까?”
“오 소령의 이상주의를 높이 사네. 그러나 안타까워서 그래. 그러니 지금 손을 떼도 탓하지 않겠네. 나 역시도 좌절하고 있네.”
“지금 이 마당에 회군한다는 겁니까?”
김익창이 담배를 찾아 물더니 말했다. 그의 눈에 어떤 절망의 빛이 어렸다.
“비밀 미팅 건, 보고하게.”
오민균은 현호진과 밀담을 나눈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귀순 선무문(宣撫文)을 제시했다. 작성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국토를 방위하고 외적과 전투하는 것이 주 임무인 군은 동족상쟁을 원치 않는다. 제주도민을 적으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②주의‧사상과 일체의 불만은 정치적으로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 해결하여야지 무력수단에 호소하는 것은 무고한 도민의 유혈만 조장시킬 뿐 해결방법이 되지 않는다. 
③즉시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면 군이 책임지고 안전을 보장하겠으며, 일체의 전과(前科)를 불문에 부치고 귀가시키겠다. 이에 대한 요구가 있으면 그 요구조건을 다룰 별도 회담을 한다. 
④이상과 같은 관대한 처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앞세우고 무력을 사용한다면 민족분열을 조장하고 조국독립을 방해하는 민족의 공적(共敵)으로 규정하고 군은 철저히 무력 징벌할 것이다. 
④이상과 같은 각종 전단을 연락기로 제주 각지 부락에 살포한다.

김익창 연대장이 두 번 세 번 눈으로 훑을 때, 오민균이 입을 열었다. 
“삐라 살포 때 지형 정찰도 겸하여 제가 직접 연락기에 탑승하려고 합니다. 추후를 대비해 폭도들의 지형지물을 확실하게 숙지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목적용인가?”
“물론입니다. 회담이 결렬될 때를 대비해야죠. 그동안 여러 가지 정보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들 근거지와 지휘부 위치를 잘 몰랐지 않습니까. 확실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일세, 맨스필드 군정장관이 긴급전화를 걸어왔네.”
“네?”
“협상을 취소하라는 거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민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대장이 한동안 번민에 빠졌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엉뚱한 얘기를 했던 것도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회군이란 있을 수 없다. 더 많은 희생자가 나고, 중산간 마을은 대대적으로 불 타 없어지고 있다. 쫓고 쫓기는 공포의 무질서는 제주 하늘을 짓누르고 있다.
“크로스 체크하기 위해 맨스필드 군정장관은 경찰감찰청장을 불러 나의 도민 소개 계획과 화평 계획을 타진했어. 그랬더니 연대장의 보고가 경찰과 국방경비대간에 악의에 찬 이간질이며, 모략이라고 응수했네. 다른 정보팀도 우리 계획을 반대했다는군. 맨스필드는 나더러 경찰을 자극하지 말라고 경고했네. 연대는 화평전략에 관심을 갖지 말고 본래의 병사훈련이나 하라는 거였어.”
“폭도대에게 약속을 어긴다면 국가조직이 무슨 명분이 서겠습니까.”
“폭도대와의 협상은 강도 집단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추궁하네.”
“저들이 강도입니까?”
대답 대신 김익창이 한숨을 쉬었다. 
“연대장 각하, 맨스필드 군정장관의 전화 메시지는 분명 잘못 들은 것입니다. 통역이 배석하지 않았으니 잘못 들으신 것입니다. 주민 수 만의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김익창이 쓸쓸하게 웃었다. 
“양민의 머리가 하찮은 솔방울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네.”
“맨스필드 군정장관을 만나시죠.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뤄낸 협상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더큰 문제가 생깁니다. 연대의 입장이 뭐가 됩니까.”
“우린 폭도들로부터도 오해를 받고 있어. 그들은 자기들의 근거지에 대한 정보를 탐지하고, 지휘부를 타격하기 위한 작전 전개의 하나로 화평회담을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네. 군경이 기만전술을 펴고 있다는 거지.”
“기밀이 누설됐습니까.”
“빤하지 않은가. 삐라 원고를 인쇄소에 넘겼으면 경찰과 군 정보요원들에게 당연히 노출되는 것이지. 기밀을 빼내서 선수를 친 거야. 맨스필드나 나나 고약하게 됐어. 금명간 중앙에서 파견단이 내려올 거야. 나의 이런 행동을 중대 사태로 보는 모양이야.”
오민균은 급히 연대장실을 나왔다. 서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계속> 



이계홍 작가, 언론인 (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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