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택

揀擇

1 원래의 의미

여러 가지 가운데 골라냄.
고양이가 주인을 선택하는거라 카더라.

2 1에서 파생된 조선 시대의 제도

조선 왕실에서 임금, 왕자, 왕녀의 배우자를 고르는 행사. 여러 후보자들을 대궐에 불러모아놓고 왕실의 웃어른들이 뽑았다. 왕과 왕세자의 정식 배우자를 고르는 간택은 여러 후보자들을 놓고 크게 3단계(초간, 재간, 삼간)로 추슬러 골라내는 신중한 작업이었다. 이보다 격이 떨어지는 후궁 간택이나, 기타 왕자, 혹은 공주/옹주의 배우자를 고르는 간택은 간단히 초간과 재간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간택에서 떨어져도 일단 한 번 궐문을 밟았기 때문에 다른 데로 시집갈 수 없었고 그래서 후궁을 간택으로 뽑지 않는다면 떨어진 사람들은 모두 평생 처녀로 살아야 했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수십 명 여자들이 모두 궐문 밟았다고 처녀로 늙지는 않았고 모두 시집가서 가정 꾸리고 살았다. 삼간택에 든 여자들은 정절 지켜 처녀로 늙어죽어야 한다는 규범이 있다거나 제 발 저려 청혼을 안 할 뿐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속설. 족보 등으로 추적조사를 해보니 삼간까지 갈 정도면 어지간히 명문가 규수라 웬만하면 다 시집을 갔다고. 다만 후궁 간택은 새로 후보자들을 뽑기도 했지만 왕후 간택에서 떨어진 여성들도 후보에 들어갔다고는 한다. 단종의 예를 보면 삼간택에 든 3명의 처녀 중 1명(정순왕후 송씨)은 왕비로 하고 남은 둘은 후궁으로 삼은 것을 보아 왕비 간택 한 번에 후궁까지 뽑는 사례도 있던 모양.

정화당 김씨가 명성황후 사후 중전으로 간택되었으나 춘생문 사건으로 입궁이 무마되어 처녀로 수절하다 1917년에야 겨우 일본의 트집으로 입궁한 사례가 있다. 일부 책에서는 그녀가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될 때 간택에서 떨어진 처녀라 쓰고 있으나 1917년 입궁 당시 47세였다면 1871년생으로 명성황후가 책봉된 1866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또 영친왕의 태자비로 고종황제의 낙점을 받았던 민갑완이 끝내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늙어죽은 사례가 있으나 이건 간택에서 떨어진 경우가 아니라 이미 간택 확정, 거의 약혼한 상황에서 예기치 않게 혼인을 못 한 것이라 상황이 다르다. 일각에서는 민갑완의 수절을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제는 민갑완이 영친왕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는지 그녀를 강제로 시집 보내려고 하기까지 했었다고.

왕실 간택은 인기가 정말 없어서 왕실에서도 고생했다고 한다. 당장 왕실의 배필을 찾기 위해 금혼령을 내리는데도 다들 꺼려서 아예 참여한 규수들에게 비단이나 패물 등의 후한 선물을 내리기도 했다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듯. 의외로 당대의 시각으로는 왕실에 시집간다는 것을 곧 구중궁궐에 평생 갇혀 사는 것으로 여겼던 듯하다. 게다가 역사에서 외척으로 호의호식하는 듯했다가 순식간에 정치놀음에 휘말려 갖은 수모를 당하는 사례들을 생각해보자. 조선 태종처럼 외척을 싹쓸이한 사례 말고도 이렇게 희생당한 외척은 결코 적지 않다. 이런 꼴을 보느니 그냥 평범한 집안에 시집 보내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게 부모나 딸 모두에게 좋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공주/옹주의 남편인 부마도 결혼하면 사대부로서의 제대로 된 입신양명은 끝, 그냥 평생 명예직에만 머물러야 했고[1] 말 그대로 왕녀를 떠받들여서 모셔야(...) 했기에 부마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집안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자기 가문에 왕녀를 맞아들였다는 건 일단 1등급 명문가 도장을 찍었다는 뜻이라 부마 본인은 거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해도 부마의 친척이 빨리 출세하는 등 가문에 확실히 도움이 되었고, 왕녀와 부마의 자손은 흔히 높은 벼슬에 올랐다.

간택 심사에 참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간택단자 내는 것 자체를 꺼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단옷에 패물, 드나들 때 사용하는 가마, 처녀에게 붙는 몸종 등을 생각하면 가난한 사람은 참여 자체가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규수에게 선물을 내리는 것도 그걸로 비용을 충당하라는 배려의 의미인데, 그나마 이것도 조선 후기에 와서야 생긴 것이다. 그 전에는 비용을 알아서 충당해야 했다. 혜경궁 홍씨는 집안이 가난하여[2] 도저히 새 옷을 장만할 수가 없어 속에 입는 옷은 오래된 것을 입고 치마는 어려서 죽은 언니의 혼수감으로 준비해놨던 것을 썼다고 한다.

원칙상으로는 양인 집안의 딸이면 누구든 간택 대상자가 되었다고는 하나 왕비나 세자빈을 아무나 뽑을 수는 없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였던지라 결국 다들 라인을 타고 각 정파가 미는 후보들 간의 경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기에 이르면 아예 간택은 형식적인 요식절차에 불과해지고 세도가의 적당한 딸을 왕후로 간택하는 지경에 이른다. 순원왕후철종비를 간택하려 할 때 노론, 소론 규수들 가릴 거 없이 뽑자고 했지만 결국 안동 김씨 가문의 여식이 중전으로 간택된 사례가 대표적.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혜경궁 홍씨[3] 집이 좋지 않던 명성황후의 경우엔[4] 이런 정파간의 경쟁을 없애기 위해 영조/흥선대원군이 일부러 고른 것.

간택이 진행되는 시기 동안에는 어떤 집안도 혼인을 할 수 없는 금혼령이 내려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왕실의 혼사가 앞선다는 원칙에 따른 것. 때때로 명나라 사신들은 이런 때를 절묘하게 이용해 공녀를 뽑아가는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현재에도 뭔가를 고른다는 뜻으로 간택이란 말이 가끔씩 사용되는 것 같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간택처럼 자기가 사귀고 싶거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고를 때도 쓰이는 듯.
  1. 원칙적으로 부마는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으며, 명예직 외엔 사신으로 외국에 간다거나 왕실 행사에 관여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2.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 홍봉한이 정계의 거물로 떠오른 것은 어디까지나 사도세자의 장인이란 신분 때문이었고, 혜경궁 홍씨가 간택되기 전에는 음서로 겨우 정9품 말직에 오른 상태였다.
  3. 그러나 아버지인 홍봉한이 음직으로 벼슬했던걸 감안하면 가문은 명문가였을듯 그게 몇대때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4. 왕비가 될 때 당시 아버지인 민치록은 죽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