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의 햇살 덕분에 ‘카미노’는 끝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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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2.13. 오전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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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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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5일간 115㎞ 걸어 순례 인증 받아
성서에서 기원한 기독교 성지
작년 한국인 5665명 순례 마쳐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11월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일 비가 내렸다. 이따금 하늘이 열리기도 했다. 기껏해야 두 시간? 그 두 시간의 햇살 덕분에 끝까지 걸을 수 있었다. 문득 우리네 사는 꼴이 생각났다. 내내 힘들다가도 잠깐 웃음 지어 행복한 삶 말이다.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왔다. 11월 하순, 닷새에 걸쳐 모두 115㎞를 걸었다. 800㎞나 된다는 전체 코스를 다 걷지는 못했지만, 의미 없는 걸음은 아니었다. ‘콤포스텔라’라 불리는 순례 증명서를 받았다. 산티아고 순례길 사무국은 걸어서 100㎞ 이상, 자전거로 200㎞ 이상 순례길을 경험하면 증명서를 발급한다. 스페인을 향하며 궁금한 건 하나였다. 사람들은 왜 이 길을 걸을까. 속도의 시대, 한 달 넘게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저마다의 카미노

순례길은 전 세계 언어의 낙서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이다. 길의 역사가 궁금하면 먼저 한 인물을 알아야 한다. 누천년 세월을 걸치며 쟁인 이야기다.

St. James, Saint-Jacques, Santiago, Santo Jacobo.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킨다. 성 야고보. 예수의 십이사도 중 하나로 사도 요한의 형이다. 생전의 야고보가 지금의 스페인 지역에서 복음 활동을 했다고 한다. 야고보는 서기 44년 예루살렘에서 처형된다. 성서에서 그는 십이사도 최초의 순교자로 등장한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유해를 수습해 갈리시아로 보냈다고 전해진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스로 아름다운 길이었다. 종교적 동기나 절박한 사정이 없어도 일부러 걸을 만한 길이었다. 내내 흐렸던 하늘이 반짝 열리자 그림 같은 풍광이 눈 앞에 펼쳐졌다.
서기 813년. 한 수도사가 갈리시아의 들판 위에서 신비로이 빛나는 별을 목격한다. 이후 들판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교회는 이 자리에 성당을 짓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도시 이름은 이 신화에서 비롯된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어 표기고, 콤포스텔라는 ‘들판(Campus)’과 ‘별(Stellae)’을 합친 말이다. 별이 쏟아지는 들판의 사도 야고보. 이 긴 이름의 도시가 품은 뜻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중세 교회가 종교적 목적으로 설계한 계획 도시다.

도시가 건설되자 순례가 시작된다. 유럽 곳곳에서 스페인 서북쪽의 도시를 찾아 길고도 험한 여행을 시작한다. 중세 교회는 성지 순례를 제도화한다. 범죄자가 순례를 하면 죄를 용서한다. 순례 증명서 콤포스텔라는 그 시절의 면죄부였던 셈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스로 아름다운 길이었다. 종교적 동기나 절박한 사정이 없어도 일부러 걸을 만한 길이었다. 내내 흐렸던 하늘이 반짝 열리자 그림 같은 풍광이 눈 앞에 펼쳐졌다.
교회는 순례자에게 먹을 것과 잘 곳도 대줬다. 이 전통은 순례자 전용 숙소 알베르게(Albergue)로 남아 있다. 크리덴시알(Credencial)이라 불리는 순례자 여권을 제시해야 이용할 수 있다. 시설은 조악해도 싼값에 먹고 잘 수 있다. 공립 알베르게는 여전히 기독교 기관과 단체에서 운영한다.

길은 애초부터 신화에 의지했다. 예루살렘에서 죽은 야고보의 유해가 1000년이 지나 스페인의 후미진 들판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교회는 물론이고 순례자도 이 기적 같은 발견을 철석같이 믿는다. 스페인을 침략한 무어인을 몰아내기 위해 순례길이 영적·군사적으로 역할을 한 사실은 순례자와 무관한 역사일 따름이다. 순례길에서 야고보는 흔히 모자 쓰고 지팡이 든 순례자로 표현되지만, 칼을 차고 말을 탄 군인의 형상으로도 남아 있다.

가리비 껍데기 기념품.
하여 가리비가 야고보의 유해를 실은 배를 감싸줘 무사히 상륙했다는 신화도 마땅히 믿어야 한다. 그래야 오늘날 가리비 껍데기가 순례길의 상징으로 쓰이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순례길을 걷는 건 신화를 따르는 일이며, 상징을 받드는 의식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성 야고보 상이 모셔져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코스가 많다. 저마다 제집에서 길을 나섰기 때문이다. 개중에서 ‘프랑스 길’을 제일 많이 걷는다.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길이 시작해 프랑스 길이다. 보통 32일 동안 약 800㎞를 걸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다다른다. 『순례자』의 작가 파울루 코엘류도, 제주올레를 만든 서명숙 이사장도 이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인생이 바뀌었다. 어쩌면 세상도 바뀌었다.

나는 프랑스 길의 막바지 115㎞ 구간을 걸었다. 전체 코스의 7분의 1 남짓 걸은 셈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동쪽 사리아에서 출발해 하루 평균 23㎞씩 걸었다. 5만 보 넘게 걸은 날도 있었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차피 저마다 제 길을 걷는다.

순례 그리고 여행

순례 인증서 콤포스텔라. 양피지로 돼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사무국에 따르면 2018년 순례길을 걸을 사람(순례 인증서를 받은 사람)은 모두 32만7378명이다. 도보 순례자는 30만6064명이고, 자전거 순례자는 2만787명이다. 휠체어 순례자도 79명이나 있었다. 국적으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52.28%). 한국인은 모두 5665명으로 전체의 1.73%를 차지했다. 전 세계 9위로 비유럽 국가 중에서 1위다.

비틀즈의 ‘애비 로드’ 앨범 재킷을 흉내 내는 순례길 여행자들.
요즘에는 종교와 무관하게 순례길을 방문하는 여행자도 많다. 전체 코스를 완주하는 순례자도 여전히 있다지만, 최근에는 구간별로 순례길을 체험하는 여행자가 훨씬 많다. 버스나 오토바이로 주요 도시를 찍고 다니는 여행자도 있고, 순례자를 겨냥한 사설 알베르게와 호텔도 즐비하다.

국내에 패키지여행 상품도 나와 있다. 트레킹 전문 여행사나 성지순례 전문 여행사가 판매하는 보름 여정의 상품이 주를 이룬다. 보통 200㎞를 걷는다.

유럽 패키지여행 상품 중에 하루 이틀 순례길을 경험하는 여정도 있고, 프랑스 길 풀코스 상품을 운용하는 여행사도 있다. 나는 7박9일 인천~산티아고 직항 여행상품을 이용했다.

나에게는 이 여정이 적당했다. 직장인의 경우 1주일만 휴가를 내면 순례자 인증을 받을 수 있어서다. 최소 32일 걸린다는 800㎞ 순례는 아무에게나(또는 아무 때나) 허락된 도전이 아니다. 인솔자가 일행 42명 중 8명이 개인 참가자라고 귀띔했다. 패키지여행치고는 매우 높은 비율이다.

우리 일행의 60% 정도가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신앙의 힘으로 걸었다. 한 중년 여성은 이틀째 되는 날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상태가 심했는데 끝까지 걸었다. 콤포스텔라를 받고서 그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말씀을 받았어요. ‘일어나 걸어라.’ 그래서 기쁘게 걸었어요.” ‘일어나 걸어라’는 성경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함이니라’는 성경 구절을 암송하며 걸은 신자도 있었다. 힘들 때마다 되뇌는 말씀이라고 했다. 42명 모두 콤포스텔라를 받았다.

순례길의 십자가 이정표. 빛바랜 가족사진이 눈에 밟힌다.
길 곳곳에 순례자가 놓고 간 물건이 널려 있었다. 신발이 제일 많았지만, 아직도 눈에 밟히는 건 빛바랜 사진이다.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십자가 아래에는 꼭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나는 종점 10㎞ 이정표에 돌멩이를 얹었고, 순례를 마치고 찾은 땅끝마을 피니스테레의 해안 절벽에 헌 손수건을 놓아두었다.

피니스테레 해안 바위의 신발상.
산티아고 순례길은 여태 걸었던 길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종교적 동기나 문화적 호기심이 없어도, 이전의 일상과 결별해야 하는 절박한 사정이 없어도 이 길은 일부러 찾아와 걸을 만한, 아니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높이 50m는 될 법한 거대한 유칼립투스 숲에서는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그늘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원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11월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건 우리네 사는 꼴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종일 비가 내리는데 하루에 두어 시간은 꼭 볕이 들었다. 우비 뒤집어쓰고 터덜터덜 걷다가도 하늘이 열리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걸음이 가벼워졌다. 그 두어 시간 덕분에 순례는 끝내 행복했다.

‘당신의 진실한 사랑을 다른 사랑과 어떻게 구별하나. 가리비 껍데기, 모자, 순례자 지팡이, 그리고 샌들을 통해.’

『햄릿』에 나오는 대사다. ‘사랑’ 대신에 ‘여행’을 넣어봤다. 더 어울려 보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스페인)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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