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반민족 행위자 김대우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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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3·1운동 학생 대표로 참석했지만, 신문 도중 내용을 온통 뒤집으며 시작된 ‘변절’

일본 규슈제국대학 재학 당시의 김대우. 임경석 제공
김대우(金大羽)는 1919년 3월6일 이른 아침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서울 종로5가에 있는 하숙집에서였다. 반일 학생시위를 주도한 혐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닷새 되는 날, 조선 천지에서 독립운동 열기가 서서히 고조되던 때였다. 자신이 지핀 혁명 불길이 타올랐지만, 그는 투옥되고 말았다.

3·1운동을 기획한 비밀결사 학생단 지도부



김대우는 경성공업전문학교(이하 경성공전) 광산과 2학년이었다. 경성공전은 1916년 설립된 식민지 조선의 최상급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경성전수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와 더불어 3대 관립 전문학교로 병칭됐다.

김대우는 3·1운동 학생단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1월 하순, 중국음식점 대관원 모임에서 발족한 이 비공식 조직에 처음부터 그가 가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건 2월20일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제1회 학생단 간부회의’ 때부터다. 김대우는 경성공전 대표자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 모임은 경성 시내에 있는 6개 관립·사립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로 이뤄졌다. 학생단 지도부는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1운동을 기획한 양대 비밀결사 가운데 하나였다. 학생 대표들은 비밀 회동을 거듭했다. 2월25일, 26일, 28일에 모여 시위운동에 필요한 것을 협의했다.

비밀결사는 신뢰감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법이다. 탄압이 예견되는 반일 독립운동 단체라면 더욱 그랬다. 학생단 지도부 구성원에게는 신뢰감이 형성돼 있었다. 그 감정은 오랜 시일에 걸쳐 상대방의 사람됨을 함께 겪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종교단체와 출신 지역별 향우회가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서북학생친목회, 교남학생친목회, 학교별 학생YMCA 등이 그것이다. 1910년대 무단통치 아래에서도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단체들이다.

그중 서북학생친목회는 주목할 만하다. 김대우가 학생단 지도부 일원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매개체다. 이 단체는 함경남북도·평안남북도·황해도 서북 5개도 출신 경성 유학생들의 친목회였다. 김대우는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나, 1913년 중등학교 진학을 위해 경성에 오기 전까지 자랐다. 김대우는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공전에서 수학하기까지 6년간 경성에서 낯선 객지 생활을 했다. 그동안 자신과 비슷한 말씨와 생활 관습을 가진 친목회 학생들에게서 편의와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서북학생친목회에는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학생들이 즐비했다. 학생단 최초 회합인 대관원 모임 참석자 10명 가운데 서북 출신이 8명이나 되었다. 그중에는 한위건(함남 홍원), 강기덕(함남 덕원), 김원벽(황해 안악) 등 학생단을 이끈 3인 지도자를 비롯해, 모교인 경성공전의 1년 선배 주종의(함남 함흥)도 있었다.

김대우는 용모가 단정하고 키가 컸다. 180cm에 가까워 풍채가 당당했다. 잘생겼을 뿐 아니라 말도 잘했다. 관찰자 의견에 따르면, “회의 같은 데서 말할 때이든가 또는 집회의 의사 진행 같은 것을 할 때에 보면, 명민한 두뇌와 그 달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이런 재능과 활달한 성격이 그가 경성공전 대표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독립 가망이 없으므로 독립 희망하지 않는다”



김대우는 경찰에게 체포된 직후에도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야마자와 사이치로 검사와 주고받은 3월13일치 신문 기록을 보면, 김대우가 어떤 진술 전략을 구사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혐의 사실을 시인했다. 시위에 참여한 것과 경성공전 대표임을 인정했다.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공감해 경성에서도 ‘소요’를 일으키기로 사전에 협의했노라고 시인했다. 설사 유죄판결을 받을지언정 조선 독립을 요구한 행위는 정당하다는 생각을 계속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가담 시점과 인지 범위는 되도록 줄이려 노력했다. 자신의 혐의 내용을 가볍게 할 수 있고 동료들의 행위에 관한 발언 범위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호리 나오키 총독부 예심판사의 4월9일치 신문조서에서 진술 기조가 바뀌었다.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경성공전 학생 대표자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사전에 동료 학생들과 시위를 모의하지도 않았으며, 경성공전 학생들을 시위 현장에 동원한 것도 부인했다. 3월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한 시위에 우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외에는 검사 신문조서 내용을 온통 뒤집었다. 조선 독립을 희망하냐는 예심판사의 질의에는 “독립이 될 가망이 없으므로 지금은 독립을 희망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궁금하다. 도대체 김대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의 급격한 심경 변화는 왜 일어났고, 진술 기조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진술 번복의 의미는 자기 신념을 버리고 그에 배치되는 이념을 받아들인 점에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유행한 사회현상에 빗대어 말하면 일종의 사상전향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 수감 중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단순 시위 가담자조차 날마다 밤새 계속되는 구타와 고문에 실신했다. 김대우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수감자들처럼 좁고 불결한 시설에 갇혀 옆 사람과 살을 맞대고 다리도 뻗지 못한 채 쪼그린 자세로 날밤을 지새우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방법만 있다면 이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그뿐인가. 미래에 대한 불안도 그를 압박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공학 분야 전문교육을 이수한 그에게 안락한 직업과 세속적 출세가 보장된 터였다. 그 가능성을 송두리째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심경이 변화한 결정적 계기는 가족이었다. 뒷날 전향 정책이 본격화되던 1933년 즈음 경성형무소 수감자 사상전향 동기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부모나 기타 친족에 대한 정서적 반성’이 38%였다.

참사가 된 대지주 아버지



김대우의 아버지 김상준이 사상전향의 촉매가 됐다. 김상준은 강동군의 손꼽히는 큰 부자였다. 소유 농지 규모가 150정보(1정보는 약 9917.4㎡)를 헤아리는 천석꾼이었다. 김상준에게서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인만도 80여 명이나 됐다.

단지 부유할 뿐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통치기구에도 다방면으로 연결된 관변 유력자였다. 일본의 한국 병합 직후인 1911년 군 참사(參事)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 김상준은 강동군 초대 참사로 임명됐다. ‘참사’란 관내에 거주하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자’로서 도장관(도지사)이 임명하는 명예직 지방관이었다. 군수의 자문에 응하며, 수당을 받았다. 지방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인 유력자 상층부를 포섭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였다.

김상준은 일본인 관료들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민하게 역량을 발휘했다. 군내 각지를 찾아다니며 민심 안정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부했다. “이번의 지방 소요에 있어서는 본인은 몸소 향당을 설복하여 민중의 향방을 밝혀 경거망동의 억제에 전력을 경주”했노라고. 그 결과 강동군에는 시위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노라고 주장했다. “사방 인근에서는 다 소요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본군에서만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과장된 주장이었다. 3월5일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 시위, 3월7일 고읍면 시위, 같은 날 원탄면 송오리 시위가 일어났다. 다만 주위 여러 지역에 비해 시위 규모도 작고, 시위 횟수가 적었다.

김상준의 관변 네트워크는 그에 머물지 않았다. 총독부가 출자한 각종 공공기관에도 임원으로 진출했다. 강동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강동군 지주회 부회장, 강동군 금융조합 조합장, 강동군 잠사업조합 부조합장 등이 그가 겸하던 직책이었다.

김대우의 아버지 김상준이 상신한 탄원서(위).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식에서 우등졸업장을 받은 학생들. 맨 오른쪽이 김대우. 1921년 3월. 임경석 제공


체포된 지 11일 만에 작성한 공문



바로 그 아버지가 아들의 사상전향에 나섰다. 김대우는 5형제 가운데 맏이로서, 자신이 누리는 재산과 지위를 상속할 아들이었다. 아들의 경솔한 행동 탓에 자신의 성공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김상준은 여러 방면으로 줄을 댔다. 식민지 통치기구의 각급 관료들에게 접근했다.

김상준의 대응은 주효했다. 가장 먼저 강동군수가 움직였다. 유진혁 군수는 강동군 관내 치안을 맡은 책임자 헌병분견소장에게 ‘특별한 배려’를 요청하는 3월17일치 공문을 작성했다. 김대우가 체포된 지 11일 만의 일이었다. 아버지 김상준이 얼마나 신속하게 움직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강동군 헌병분견소장도 김상준의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강동군수의 공문을 받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김대우를 구금한 경성종로경찰서 앞으로 공문을 보냈다. “가급적으로 선처 계시옵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뿐인가. 구금된 학생의 아버지를 파견할 테니, 회답을 주기 바란다는 청탁도 덧붙였다. 아들의 석방을 위해 김상준이 직접 경성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김상준의 로비는 지방관료만이 아니라 경성의 중앙관료들에게도 통했다. 종로경찰서장은 3월27일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오늘날 검사장)에게 보내는 공문을 발송했다. 김상준이 강동군에서 통치체제 안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의 일족이 지방사회에서 얼마나 명문인지, 붙잡힌 김대우가 얼마나 품행이 바르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는지를 밝히는 별지를 첨부했다. 별지 중에는 강동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 다카시마 요시오의 확인서도 있었다.

피고인 김대우의 진술 태도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해졌다. 독립운동에 참여하던 자아를 버리고 관변 유력자인 아버지의 삶과 사고방식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앞으로 조선 독립이나 만세시위 등과 같은 행위는 하지 않고, 권력관계에 순응해 오직 사적 이익 증진에만 노력하겠다는 맹세나 다름없었다.

김대우의 변신은 효과가 있었다. 1919년 11월16일 3·1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에 게 판결이 내려졌다. 대부분 징역 7개월∼1년에 해당하는 유죄판결을 받은 데 비해, 김대우는 징역 7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그는 즉시 석방됐다. 집행유예는 김대우의 변절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후 김대우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경성공전에 복학해 1921년 3월 졸업했다. 졸업식 때는 우등생으로 선정돼 표창장까지 받았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해 규슈제국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했다. 총독부 관료사회에 진출한 그는 군수, 도 과장, 총독부 본청 과장, 도 부장 직을 거쳐, 마침내 도지사(경북·전북) 자리에까지 올랐다.

규슈제국대 거쳐 도지사까지



저명한 반민족 행위자 김대우의 탄생은 바로 3·1운동이 한창이던 4월9일 예심판사와의 신문 중에 이뤄졌다. 조선 독립을 더는 희망하지 않는다는 고백 속에, 현존 권력관계에 순응해 공동체의 안위와는 관계없이 일신의 이익만을 도모하겠다는 결심 속에 태어났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문헌

1. 豫審掛職務代理 朝鮮總督府判事 堀直喜, ‘金大羽 신문조서’, 대정 8년 4월9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5 (삼일운동 V), 국사편찬위원회, 1991.

2. 장규식, ‘학생단 독립운동과 3월5일 시위’,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휴머니스트, 141쪽, 2019.

3. 松花學人, ‘總督府 及 各道 高官 人物評’, <삼천리>, 59쪽, 1938년 5월호.

4. 朝鮮總督府 검사 山澤佐一郞, ‘金大羽 신문조서’, , 大正 8년 3월13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4, (삼일운동 IV), 국사편찬위원회, 1991.

5. 장신,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상전향 정책 연구’, 미발표 논문, 32쪽, 2019.

6. 宮嶋博史, ‘植民地下朝鮮人大地主の存在形態に關する試論’, <朝鮮史叢> 5·6合倂號, 1982.

7. ‘조선총독부지방관 관제’, 제23조, 제24조,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9월30일.

8.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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