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相利共生하는 共命鳥가 될 수는 없는가

입력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교수신문이 2019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비극의 새 공명지조(共命之鳥)를 꼽았다. 교수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지식인들의 집단지성은 누구보다 현실을 정확히 짚어낸다. 그해의 사자성어는 언제나 촌철살인이었다.

2016년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군주민수(君舟民水)’는 그 다음해 결과로 나타났다. 2017년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으로 희망을 담았지만 지난해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먼 임중도원(任重道遠)의 한탄을 거쳐 올해엔 공명조의 비극까지 와버렸다.

공명조는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인 상상의 새다. 공동운명체임에도 두 머리는 밤낮을 달리 살만큼 성질이 달랐다. 두 머리의 미움과 다툼은 슬프고 속상한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다치고 병드는 수준도 넘어선다. 목숨을 건다. ‘두 머리’ 중 한 머리가 몸에 좋은 열매를 챙겨 먹자 다른 한 머리가 질투를 느껴 독과를 먹어버리고 결국 모두 죽는다. 목숨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상대를 공격할만큼 무모하고 어리석은 게 공명조다.

영남대 최재목 교수는 “우리 사회는 대단히 심각한 이념의 분열 증세를 겪고 있다. 양극단의 진영을 토대로 다들 이분법적 원리주의자, 맹목적 이념 기계가 돼 가고 있다”면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공명지조를 추천한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우리사회엔 공명조와 다름없는 곳은 한둘이 아니다. 여당과 야당이 그렇고 진보와 보수가 그렇다. 경찰과 검찰도 마찬가지다. 노동자와 사용자도 다를 게 없고 대기업과 중소기업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대방이 입게 될 타격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 든다. 조국 사태로 갈라진 서초동과 광화문의 광장에서 우리는 공명조를 봤다. 심지어 공명조 속에 또 다른 공명조가 산다.

불교에서 공명조를 통해 전하고픈 교훈이 비극의 눈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극복하는 깨달음이 목적이다. 상리공생(相利共生)으로 가라는 뜻이다. 마주보는 곳은 옆을 봐야 하는 곳까지도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자연에선 한낱 미물들도 하는 일이다. 악어와 악어새가 그렇고, 개미와 진딧물이 그렇다. 콩과 뿌리혹박테리아도 서로 돕고 산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 불가능할 리 없다. 유일한 길은 타협과 대화다. 그에 앞서 욕심을 버려야 함은 물론이다.

가장 먼저 보여줘야 할 곳이 국회다. 여야가 공리공생하는 공명조의 반전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네이버에서 헤럴드경제 채널 구독하기

▶겨울시즌 전 상품 추가 5%할인! 헤럴드 리얼라이프 ▶헤럴드경제 사이트 바로가기



-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