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퀴어 서사·장르문학…시대의 아픔과 함께하다 [경향신문 선정 ‘2010년대의 책’-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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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2.23. 오후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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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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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한국 문학은 사회와 함께 뜨겁게 호흡했다. 시대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 속에서 아파하는 사람들 모습을 깊이 있게 담아낸 작품들이 많았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해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 등 여성서사가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박민정의 <아내들의 학교>, 윤이형의 <러브 레플리카>도 복수의 추천을 받았다. 퀴어서사 또한 대두했다.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경합을 벌였지만, 대중과의 접점을 넓힌 <대도시의 사랑법>에 좀 더 많은 표가 몰렸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오른 한강은 1980년 광주의 슬픈 역사를 다룬 <소년이 온다>로 다시 한번 저력을 보여줬다. 황정은의 소설은 황정은 소설과 경쟁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디디의 우산> 등 10년 동안 출간된 작품들이 거의 모두 추천 목록에 올랐다. 장르문학도 도약했다. 정유정의 <7년의 밤>은 해외에서도 ‘K스릴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SF작가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다수의 추천을 받았다. 스릴러적 요소를 도입해 미국에서 셜리잭슨상을 수상한 편혜영의 <홀>도 다수가 꼽았다. <미생>은 비정규 노동의 실태와 애환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감당 못할 고통을 그림자가 분리되는 환상으로 묘사



백의 그림자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


황정은의 경쟁자는 황정은이다. 2010년대 출간된 그의 소설 총 6권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백의 그림자>는 “환상성을 보여주는 초기의 황정은과 사회적 문맥을 다루는 지금의 황정은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작품”(이광호), “황정은 문학의 근원 같은 풍경”(노태훈)이라는 이유로 추천을 받았다.

2009년 용산참사의 절망 아래서 탄생한 <백의 그림자>는 철거에 들어간 도심 속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감당할 수 없을 때 그림자가 분리되는 사람들 이야기다. 이를 통해 밀려나는 사람들의 고통을 환상적으로 묘사했다. 철거를 앞둔 상가의 세부 풍경과 현실의 폭력을 생생하게 짚어냈다. 이후 황정은은 세월호 참사로 인한 사회적·개인적 고통을 그려내며 평단과 독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

■‘K스릴러’ 돌풍…장르문학의 경계를 허물다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


‘K스릴러’ 돌풍에 앞장선 작품으로 한국에서도 ‘웰메이드 스릴러’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주변부에 위치했던 장르문학을 탁월한 완성도로 써내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정은숙), “한국어를 ‘스릴’에 적합하도록 진화시켰다”(장은수)는 평을 받았다. 소설은 7년 전 우발적으로 어린 소녀를 살해한 뒤 죄책감으로 미쳐가는 사내와 딸을 죽인 범인의 아들에게 ‘복수’하려는 피해자의 숨막히는 대결을 다루면서, ‘살인마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가던 아들이 아버지 죽음과 맞닥뜨리는 이야기를 액자소설 형식으로 그린다. 탄탄한 필력을 바탕으로 치밀한 이야기를 큰 스케일에 담아냈다. 선과 악, 진실에 대한 탐구, 가족의 결핍이라는 사회적 문제 등을 깊이 있게 다뤄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린 작품이다.

■동세대 여성들의 감수성과 사회적 시선을 그리다



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


김애란의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인생>과 세번째 소설집 <비행운>이 경합을 벌였다. 항상 ‘젊은 작가’였던 김애란은 <달려라 아비>부터 <바깥은 여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속한 세대의 감수성을 잘 보여주면서도 사회적 시선을 놓치지 않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김애란이 30대 초반에 펴낸 <비행운>은 20대 후반~30대 초반 여성들이 갖고 있는 감수성과 사회적 위치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큐티클’이 사회초년생 여성들이 처한 불안한 풍경을 담았다면 ‘물속의 골리앗’은 고립된 철거민들, ‘하루의 축’은 인천공항에서 일하는 50대 청소노동자 기옥씨의 추석 전날 하루를 따라가면서 사회체제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애를 담았다. 동세대를 넘어 사회의 다른 계층과 세대로 시선을 넓힌 작품이란 평가를 받았다.

■불안정한 직장인들 폭발적 공감…만화 추천 유일



미생

윤태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


윤태호의 만화 <미생>은 만화 중 유일하게 추천 목록에 포함됐다. 많은 직장인들의 폭발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미생>은 “불안정 노동의 상징과도 같은 책”(장은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바둑 프로기사만을 목표로 살아가던 청년 장그래가 프로 입단에 실패하고 고졸 계약직으로 회사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면서 겪는 이야기를 통해 대기업과 하청기업, 대기업 정규직 상사와 부하직원, 비정규직 직원까지 다양한 층위의 노동자들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불안정 노동이 일상화된 현실의 모습과 청년들의 감수성을 잘 녹여냈다는 평을 받았다. 2012~2013년 웹툰으로 연재돼 큰 호응을 받았던 <미생>은 2014년 드라마로도 제작돼 다시 한번 큰 인기를 얻으며 원작의 힘을 보여줬다.

■‘80년의 광주’를 통해 정면으로 바라본 국가폭력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한강은 <채식주의자>의 작가로 호명됐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의 충격 직후에 출간된 <소년이 온다>의 슬픔과 감동을 많은 사람들이 잊지 못한다.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에 남아 있다가 죽은 16세 소년 동호의 사연과 그 죽음이 남긴 파장을 다각도에서 조망하는 이 소설은 국가폭력을 다시 한번 정면으로 응시한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화자의 입을 빌려 2009년 1월 용산참사와 광주의 유사성을 다시 강조한다.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한다. “80년 광주에 대한 소설이지만 2014년 세월호와 함께 읽지 않을 수 없었기에 ‘오래된 미래로서의 애도’를 느꼈다”(강지희)

■20대 후반 여성의 입담으로 생생하게 그린 ‘헬조선’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


장강명은 <표백> <댓글부대> 등 작품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무엇이 첨예한 문제인지 읽어내는 독보적 현실인식을 선보여왔다.

이런 그의 작품 중 <한국이 싫어서>가 선정됐다. 뜨거웠던 ‘헬조선’ ‘탈조선’ 담론을 청년의 시점에서 반 발짝 앞서 짚어낸 작품으로 호응을 받았다. 20대 후반 종합금융회사 신용카드팀에서 일하는 계나는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사표를 제출한다.

‘외국병’이라는 비난을 뒤로하고 호주로 떠난 계나는 그곳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찾는다.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듯하지만, 계나는 다시 ‘행복을 찾아’ 한국을 떠난다.

20대 후반 여성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듯 생생하고 경쾌한 입담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절망의 바닥을 견뎌내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초상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


이상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숱한 문학상을 타온 중견 소설가 권여선이 자신의 진가를 보여준 소설집이다. ‘주류(酒類) 문학’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책’이란 수식을 받은 소설집 속엔 온통 술에 취한 사람들, 삶의 전망도 희망도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혼 후 아이를 빼앗기고 술을 마시다 알코올중독에 빠져버린 ‘봄밤’의 영경, 식사 후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역광’의 신예 소설가 등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시는 인물들은 바닥에 맞닥뜨린 자들의 절망을 보여준다.

박근혜 정권의 막바지쯤 출간된 이 소설은 “인간 존재가 감당하는 삶의 고약함, 가련한 인간들, 그런 가운데도 고유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초상을 적확하게 묘파해냈다”(양경언)는 평을 받았다.

■여성들의 다양한 관계를 그려낸 새로운 ‘여성서사’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


<쇼코의 미소>는 2010년대 한국 소설이 보여준 새로운 ‘미소’가 됐다. <82년생 김지영>이 경력단절 여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면, <쇼코의 미소>는 여성과 여성 사이 발생하는 다양한 관계를 그려내며 새로운 ‘여성서사’를 선보였다. ‘감성적인 것의 귀환’(박혜진)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맑고 순한 이야기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다.

20대 후반~30대 초반 독자들의 새로운 감성을 잘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다. 서로 국적이 다른 두 인물이 성장의 문턱을 통과해가는 과정을 그린 표제작부터 베트남전으로 가까운 이를 잃은 이웃 응웬 아줌마와 나의 가족 이야기를 다룬 ‘씬짜오 씬짜오’까지 사회적 문제와 함께 ‘타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경력단절 여성’의 현실로 본 한국 사회 성차별 구조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페미니즘 리부트’가 시작되던 해 <82년생 김지영>이 출간돼 한국 소설로는 9년 만에 100만부가 넘게 팔리며 대중의 폭발적 사랑을 받았다. 아이를 낳고 경력단절이 된 30대 여성의 평범한 이야기가 사실은 한국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의 산물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한 인물의 삶과 통계적 수치, 기사 등을 동원해 적확하게 그려냈다. 소설을 읽은 여성들이 차별과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더 크고 풍부한 이야기를 이끌어냈다. 올해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면서 여전히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뜨거운 책’이다. 일본·중국 등 동아시아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영미권 등 19개국에 번역 수출됐다.

■절망 대신 웃음으로…퀴어서사의 대미를 장식하다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


2010년대 퀴어서사의 대미를 장식한 소설이다. 2018년 김봉곤이 <여름, 스피드>를 통해 ‘커밍아웃’ 하며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면, 박상영은 독자와의 접점을 넓히며 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첫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서 능청스러운 이야기와 유머 속에 슬픔을 담아냈던 그는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더 농밀해진 퀴어서사를 선보인다.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은 세대도, 신념도 다른 두 연인을 중심으로 사랑과 증오, 보수와 진보, 종교와 세대 등의 문제를 두루 다룬다. 20대의 삶과 사랑은 불안정하다. 성소수자일 경우 더욱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박상영은 비관과 절망 대신 특유의 웃음으로 젊은 세대와 소수자의 불안과 아픔을 그려낸다.

■‘2010년대의 책’ 선정에 도움주신 분들

강지희 문학평론가, 권희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노태훈 문학평론가, 박혜진 문학평론가,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양경언 문학평론가, 오혜진 문학평론가, 이광호 문학과 지성사 대표, 이현우 서평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표정훈 출판평론가, 한기호 출판마케팅 연구소장, 황예인 문학평론가(이상 가나다순)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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