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지 않은 산들이 많은 저수지를 품고 있는 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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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3.23. 오후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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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고을학교는 <음성고을> [프레시안 알림]
 

*강의 마감됐습니다^^

2020년 새해맞이 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74강은 충북 중북부에 자리 잡은 음성고을로 갑니다. 음성은 동쪽으로 충주, 서쪽으로 안성과 진천, 남쪽으로 괴산과 증평, 북쪽으로 이천과 접해있으며, 마이산, 오갑산, 백운산, 백마산, 가섭산, 부용산, 수정산, 원통산, 보덕산, 함박산 등 400-600m 높이의 산들이 산성과 많은 저수지를 품고 연이어 있습니다. 근래에는 ‘꽃마을’과 ‘반기문 총장의 생가’가 있어 유명해졌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음성고을엔 400-600m의 높지 않은 산들이 연이어 물을 보듬어 많은 저수지를 품고 있다. 사진은 충도지Ⓒ음성군

고을학교 제74강은 2020년 1월 19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4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감곡IC-감곡면(옥산사/김주태가옥/공산정고택)-생극면(권근3대묘소 및 신도비/팔성리고가/지천서원)-음성읍(설성공원/향토자료관/음성향교/미타사)-점심식사 겸 뒤풀이-원남면(태교사)-대소면(성본리토성/어재연·어재소묘역 및 신도비)-삼성면(운곡서원/동리장성)-일죽IC-서울의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음성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4강 답사지인 <음성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마한 54개국의 지침국이 있었던 곳
음성지역은 마한 54개국의 하나인 지침국이었으며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에 속했고 뒤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잉홀현이라 하였으며 신라시대에는 음성현, 고려시대에는 충주부의 음성현, 조선시대에는 충주목 음성현, 1896년 충북 음성군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음성은 읍치구역은 발달하지 못했지만 ‘높지 않은 산성’과 ‘넓지 않은 저수지’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저수지는 금석, 무극, 용계, 용대, 양덕, 통동, 밤계, 원남, 충도, 주봉, 갑산, 용현, 봉전 등이 있고 산성은 수정산성, 망이산성, 사향산성, 성본리토성이 있습니다.

▲수정산 정상부의 수정산성Ⓒ음성군

수정산성은 수정산(396.3m)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의 석축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577m이고 평면 형태는 전체적으로 부정형의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성 내부의 면적은 203,414㎥(6,164평)입니다. 성내에는 동문, 서문, 북문 등 3개의 문과 3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우물이 1개소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축성 시기는 대략 8∼9세기 초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사용되지 않고 폐허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방어용 산성보다는 전략적 거점 확보를 위한 전투용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망이산성은 마이산(472m) 정상에 축조된 성으로 내성은 토성으로 백제한성 시기에 축조되었고, 석축외성은 통일신라 시기에, 그리고 고려 광종 때 대대적인 보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의 남진 기지로 고구려가 한강 이남의 백제 영역, 특히 충북 지역을 공략할 때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산성에서 출토되는 토기 파편과 기와편의 일부가 고구려 계통임이 밝혀졌고 특히 평양지방에서 출토된 적이 있는 관(官), 경(京)자명 기와편의 출토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최근 학술조사결과 철제단갑, 주조철부, 토기류 등 매장 문화재가 출토되었고, 성터와 봉수에 대한 귀중한 가치를 지닌 성으로 내성 토루와 외성 석축 성으로 역사적 중첩성과 고구려 양식의 치성, 특이한 성문 구조, 봉수대 등이 역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향산성(삼생리산성)은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사향산(342.3m)의 정상부에 있는 산성으로 구조로 보아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 산성이며, 축조방법은 능선을 따라 비탈진 경사면을 깎아내려 성벽을 만든 삭토법으로 축조하였습니다. 산성 규모는 둘레가 약 100m 정도이며 높이 100㎝, 폭 150㎝, 경사면 높이 200㎝ 정도입니다. 성벽은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는데 일부만 무너지고 그대로 유지되어 비교적 원형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문은 성벽의 일부를 절단통행로를 낸 개괄식의 성문인데 넓이가 250㎝ 정도이며 서향으로 입구가 열린 삼태기형입니다. 성문지 양쪽으로 7m의 석축을 쌓았으며 석축에 이어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군데군데 자연석이 섞여있습니다.

성본리토성은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 최성미마을 동남쪽의 낮은 구릉지에 있는 토성으로 옛 기록에는 없고 일제시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土築周圍 600間 福高 10間 高 1間’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신미양요 때 지휘관이었던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이 전사하자 이곳에 성을 쌓고 안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안에서 고려시대의 토기편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전설과는 그 축조 연대가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성의 규모는 둘레 800m, 폭 1.8m, 높이 3.6m이며 성안에는 어재연, 어재순의 묘와 석물 석비 쌍충제가 있습니다.

유교문화 유산-향교, 서원, 고택들
음성에는 향교, 서원, 고택 등의 유교문화 유산이 남아 있습니다.

음성향교는 1560년(명종 15) 음성현 석인동에 창건하였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뒤 1647년(인조 25)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으며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가 남아 있습니다. 건물 구조는 전학후묘식이며 대성전, 명륜당, 동서양재,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27위의 성현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음성향교는 소설위로 교생 30명, 훈도 1명이 있었습니다.

▲충주목사 정구의 운곡서원Ⓒ음성군

운곡서원은 1602년(선조 35) 충주목사 정구가 이미 있던 백운서당에 주자를 모시고 백운서원이라 하였는데 1661년(현종 2) 정구를 배향하면서 운곡서원이라 하였습니다. 1676년(숙종 2)에 사액을 받을 때 주자의 영정과 화상찬을 함께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2년(고종 29)에 지방유림에 의해 설단정사하고 1894년(고종 31)에 서원을 재건하면서 구 영정을 가져와 봉안하였습니다. 서원은 전학후묘 식으로 배치되었는데 강학공간에는 현재 주춧돌만 남아있고 사당공간에는 운곡서원이란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습니다.

지천서원은 생극평야를 바라보며 부마팔현지(扶馬八賢址)라 지칭되는 곳에 있습니다. 조선 중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십청헌 김세필이 벼슬에서 물러나 팔성산 아래 초옥을 짓고 산수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며 후학을 교육하였는데 이것이 지천서원의 시초입니다. 서원은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 단을 만들고 1906년 재건되었으며 1963년 중수하였습니다. 서원은 산중턱의 높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단에는 강당인 공자당(工字堂), 그 좌측으로 둘째 단에는 솟을삼문을 배치하였습니다. 삼문을 지나면 높게 축조된 기단에 사당을 배치하고 사당을 중심으로 강당이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좌묘우당식의 배치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삼문 옆에는 ‘지천당묘정비(知川堂廟庭碑)‘가 있고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으며 홍살문 서쪽에는 1621년(광해군 13)에 세운 ‘현감김공의청백선정비(縣監金公疑淸白善政碑)’가 있습니다.

▲잿말마을의 김주태가옥Ⓒ음성군

김주태가옥은 감곡면 영산리 잿말마을에 있는 전통가옥으로 약 300년 전에 이익이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사랑채의 상량문에 ‘光武 五年 辛丑 二月初 七日 辰時上樑’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사랑채는 1901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때 충주목사를 역임한 박규희(朴圭熙) 가문이 장기간 거주하여 박참판댁으로도 불렸습니다. 건물의 구성을 보면 외부에 개방된 바깥마당에 사랑채가 위치하며 일각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랑채 뒤편에 조그만 새 마당을 설정하고 안담을 축조하였으며 안마당 서쪽에는 헛간채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T자형을 이루며 전면으로 뻗은 부분은 부엌, 안방, 윗방으로 사용하고 좌측면 3칸에는 2칸의 대청과 1칸의 건넌방을 두었으며 우측면 3칸에는 1칸의 툇마루와 2칸의 뒷방을 배치하였습니다. 이 가옥의 특징은 안채 뒷마당의 출입을 윗방이나 부엌을 통해서만 할 수 있도록 하여 여성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 점과, 사랑채를 가리는 시설 없이 높은 축대 위에 당당하게 세운 점입니다.

공산정고택은 감곡면 영산리 공산정 마을에 있는 전통한옥으로 건축연대가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안채의 상량문에 ‘檀君紀元後四二五七年 甲子年 七月’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924년에 중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사랑채는 안채가 중수될 당시에 건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건물의 구성은 (一)자형 사랑채의 우측 끝부분에 행랑채를 덧대어 (ㄱ)자형을 이루고 이곳에 대문을 설치하였으며 안마당에 면해서 (ㄱ)자형 안채가 배치되어 있어 전체 구성은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가옥의 특징은 부엌 위로 함각을 만들어 그곳으로 연기가 빠지도록 까치구멍으로 한 점과 대문간을 사랑채 뒤의 측면으로 낸 것입니다.

팔성리고가는 1930년대 지은 건물로 원래는 넓은 대지에 사랑채 등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만이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구성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평면은 2줄의 겹집으로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의 온돌 마루를 놓았으며 앞쪽으로도 바닥을 높인 툇마루 1칸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고가는 비록 건립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1930년대의 전통적인 주거양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입니다.

경호정은 군수 권종원이 1934년 창건하여 연풍정이라 하였는데, 그 뒤 군수 민찬식이 경호정이라 이름을 고치고 제액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약 1500여 평의 연못으로 둘러싸인 200여 평의 섬 가운데 위치하며 섬으로 출입을 하도록 좌, 우 중앙에 폭 1.35m의 화강석 교각을 설치하였습니다. 전면에는 음성읍 평곡리사지에서 옮겨다 세운 삼층석탑과 독립기념비가 있습니다.

▲경호정과 삼층석탑Ⓒ음성군

성현들을 배행한 사당과 묘소들
음성에는 성현들을 배향한 사당과 묘소들이 남아 있습니다.

태교사는 1744년(영조 20)에 주응동이 안성에 거주하는 김문웅으로부터 주자의 영정을 기증 받아 문곡영당이라는 사당을 짓고 서원을 개원하였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 재건되어 사당 명칭도 태교사라 하였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로 사당 안에는 주자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옥산사(玉山祠)는 주자와 우암 송시열, 직재 이기홍의 위폐를 모시고 향사하기 위해 세운 사우입니다. 괴산군 연풍면에 있던 문산서원이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자 1908년에 완산이씨 문중에서 감곡면 문촌리에 옥산사를 재건했습니다. 이기홍은 숙종조의 학자로 송시열의 문인인데 스승 우암이 제주도로 유배되자 동문 40여 명과 함께 이를 변론하다가 회령에 유배되어 5년 동안 그곳에서 후진을 교육하였습니다. 그 후 청풍부사를 지내고 장려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연풍에 내려와 수암 권상하와 함께 경사를 강론하고 사문의 유적을 찾아다니며 소일했습니다.

양촌 권근 3대 묘소는 권근과 그 아들 권제, 손자 권람의 묘가 위부터 차례로 조성되어 있어 3대 묘소라고 합니다. 권근의 묘소는 본래 경기도 광주에 있었던 것을 1444년(세종 26)에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며 묘소의 우측 계곡에는 차례로 권근, 권제, 권람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권근, 권제의 묘소는 봉분을 화강암 장대석으로 8각의 호석을 두르고 있고, 권람의 묘소는 원형분으로 각 묘소 앞에는 거대한 문인석과 장명등이 있습니다. 양촌 권근 묘표는 대석과 개석은 유실된 채 표석만 보존되고 있습니다. 초상 때 영의정 하륜이 비문을 썼다는 기록으로 보아 묘 앞에 세운 조선초기의 묘비를 겸한 묘표일 것으로 추측되며 팔각형 석주의 묘표석으로 8면 중 1면씩 띄워 비문을 조각한 특이한 형태의 묘표입니다. 부인 경주이씨 묘표는 1444년(세종 26)에 양촌 권근과 경주이씨 묘소를 이장할 때 별도로 보관하다가 1999년 4월에 현 위치인 권근 사당 내에 세웠습니다.

▲권근 3대묘소와 신도비Ⓒ음성군

권근(1352~1409년)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이며 학자로 자는 가원, 호는 양촌이며, 본관은 안동입니다. 1369년(공민왕 1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01년(태종 1)에 1등 좌명공신으로 길창부원군에 봉해지고, 의정부찬성사를 지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충입니다.

권제(1387~1445년)는 조신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이며 권근의 둘째 아들로 자는 중의, 호는 지재입니다. 1414년(태종 14)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초에 집현전 부제학을 거쳐 우찬성에 이르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경입니다.

권람(1416~1465)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권근의 손자이며 권제의 둘째 아들로 자는 정경, 호는 소한당입니다. 1450년(문종 1)에 문과에 급제하고, 1453년(단종 1)에 1등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으며, 1462년(세조 7)에 좌의정이 되었고 시호는 익평입니다.

어재연신도비는 어재연의 묘소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어재연은 조선 후기의 무장으로 1866년(고종 3)에 충청도 병마절도사, 회령부사를 지내고, 같은 해에 병인양요가 나자 우선봉장으로 강화도 광성진을 수비하여 적을 격퇴시켰습니다. 1871년(고종 8)에 신미양요가 나자 순무중군으로 다시 광성진을 수비하여 미국군과 교전하다가 전사하였습니다. 뒤에 호조판서 겸 지삼군부사에 증직되고 충장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석탑, 마애불, 고찰 등 불교 유적지
음성에는 석탑, 마애불, 고찰 등 불교 유적지도 있습니다.

오층모전석탑은 본래 음성향교 앞 옛 절터에 있었던 것을 1946년 수봉초등학교로 옮겨놓았다가 1995년 향토민속자료전시관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가 있는데 현재 2층과 5층의 탑신석이 결실되었고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습니다. 기단은 단층기단이며 1층 탑신에는 직경 9cm, 깊이 10cm 의 사리공이 있고 각 옥개석의 전각에는 풍경이 달렸던 소공이 있습니다. 이 석탑은 전탑 형태를 석탑으로 나타낸 것으로 우리나라의 석탑변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한국의 전탑이나 모전탑은 신라 말기 이후로 안동과 의성 등지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는데, 이 탑도 그 지역적 영향을 받아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삼층석탑은 음성읍 평곡리 사지에 있었던 것을 1934년 연풍정(지금의 경호정)을 창건하고 옮겨 놓았으며 달리 ‘경호정삼층석탑’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탑은 기단부의 양식화, 탑신 괴임의 양식, 우동의 경사, 전각의 반전 등 각부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석탑으로 보입니다. 기단은 단층기단이고 각 층의 탑신석은 1석으로 조성되었으며 각 면 좌우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습니다. 상륜부는 부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노반부에 둥근 형태의 연화대석이 놓여 있는데 이것은 석탑을 옮길 때 함께 가지고와 정상부에 올려놓은 석등의 상대석으로 추측됩니다.

미타사는 630년(진덕여왕 8) 창건되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중창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의병 3천 명을 모집했던 호국도량으로 중수되었으나 1723년 영조 때 화재로 전소되어 터만 남아 있다가 1965년 중창불사로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습니다. 도량에는 극락전, 삼성각, 약사전, 요사채 등의 전각과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삼층석탑에는 대광명세존진신 사리가 보전되어 있습니다. 또한 동양최대 높이 41m의 지장보살상과 마애여래입상이 있습니다. 마애여래입상은 미타사 입구의 화강암 자연석에 동쪽으로 향하여 새겨져 있는데 머리 부분과 어깨부분은 도드라지게 양각하였으며 양손과 허리, 양발 부분은 낮게 부조하거나 음각 선으로 처리하였습니다. 머리는 소발이고 상호는 원만하게 표현하였으며 수인은 통인이고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도식화한 느낌을 주며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 후반기로 추정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따뜻하고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장갑, 선글라스, 스틱, 식수, 버프(얼굴가리개),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실손보험 미가입자는 반드시 여행자보험에 가입해 만일에 대비하세요.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1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도자재단 대표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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