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에세이] 히아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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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류지혜 기자 birdy@

젊었을 때는 나이를 먹으면 지혜로워지고 현명해져서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 왔다. 삶이 참으로 단순해지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감정의 흔들림과 후회를 부르는 실수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에는 얼른 나이를 먹고 늙어 버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는 것이 더 어렵다. 세월이 가져다주는 노하우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서, 나에게도 약간의 지혜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살아가는 일이 버겁다. 무엇보다 하루를 사는 데에도 위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졌다.

따뜻한 커피 한 잔, 잠깐 동안의 포근한 낮잠, 길게 드러누운 채 보내는 게으른 휴식, 걸어가는 길가 낮은 꽃길에 켜 둔 키 작은 등불, 해가 넘어가고 나면 청람색으로 가라앉는 바다색, 이맘때쯤 숲길 어디에나 가득 들어차 있는 연두색 나뭇잎들, 차이콥스키 비창의 제2악장…. 그러나 이런 위안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때때로 고독하고 쓸쓸하다.

엘리엇 '빛 핵심 들여다본 푸른 꽃'
죽은 줄 여겼는데 새 생명 틔워 경탄


올봄에는 그래도 나를 특별하게 감동시키고 위안을 준 것이 있었다. 지난해 봄에 시장을 지나가다가 자잘한 꽃이 주먹만 한 덩어리로 뭉쳐서 피어 있는 작은 화분을 하나 샀었다. 히아신스였다. 그런 이국적 이름의 꽃이 시장에서 싼 값에 팔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대학 때 영시강독 시간에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한 학기 동안 공부했었다. 잘 알려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제1장 '죽은 자의 매장'부터 5장까지 계속되는 난해한 장시인데 1장의 앞에 서장이 있었다. "마녀야, 마녀야, 네 소원은 뭐니?" "내 소원은 죽는 것이야."-서장의 전문이다. 마녀는 죽지 않게 해 달라고 신에게 청탁을 해서 그녀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지만 입이 좁은 항아리에 거꾸로 매달려 있기 때문에 삶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워 죽기만을 소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 시의 1장인가 2장의 어딘가에 '히아신스 소녀'라는 구절이 있었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채 빛의 핵심을 들여다보았다.' 그 비슷한 구절이었는데 이상하게 감동적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향기와 꽃의 신비한 푸른색에 끌려 화분을 샀다. 열흘쯤 지나 피어 있던 꽃이 졌기 때문에 잎을 잘라 버리고 양파 비슷하게 생긴 뿌리만 남겼다. 화분째 쓰레기로 버리려다가 상자에 담아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이른바 여름잠을 자고 나면 겨울부터 새로 살아난다는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지난겨울이 끝날 무렵, 창고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화분을 들어내 보니 이게 뭔가! 놀랍게도 녹색의 싹이 뾰족하게 올라와 있었다. 그때부터 물을 주기 시작했더니 꽃대가 쑥 올라와서 처음 보았던 푸른색의 꽃이 피었다. 온 집안에 향기를 가득 채우고…. 꽃이 피어 있는 동안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았다. 썩어서 죽은 것처럼 보이던 구근 속에 그렇게나 기가 막힌 향기와 신비한 푸른 꽃이 들어 있었다는 것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식물 에너지같이 강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저 깊은 땅 속에서 물을 길어 올려 높다란 가지 끝까지 잎을 피우는 키 큰 나무들이나, 조그만 구근 속에 숨어 있다가 때가 되면 피어나는 향기 가득한 꽃이나 모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사람이 그런 에너지의 만분의 일이라도 지닐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끝없이 하게 되는 봄날이었다.


김일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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