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아등바등할 필요 없는 인생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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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1.23. 오후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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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규│입사 20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직장인 일기를 연재 중

'결국 꼰대' 19편: 아등바등할 필요 없는 인생의 순간들

뿌연 안개는 전방을 캄캄하게 가렸고 근심스러운 구름은 도로를 어둡게 뒤덮었다. 사방에 먹을 뿌려놓은 듯 쪽물 들인 듯 온통 흐릿했다. 운전하면서 앞을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답답함, 조바심, 긴장감을 고조 시켜 결국 사람을 아등바등하게 한다. 어쨌든 이런 날씨에도 당연히 회사에 출근은 해야 했다.

조심조심 서행 운전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늘 회사에서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났다. 오늘 일정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최종적으로 C사의 사장을 만나서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이다. 사전 보고에 의하면 상대방 실무자들은 우리와의 거래에 긍정적인데 사장이 아직 우리와 거래를 할지 말지에 대한 최종 결정을 못 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오늘 미팅 시 말을 잘해서 그 회사 사장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올해 부족한 실적이 만회가 된다.

반드시 이것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니 사방의 뿌연 안개와 어두운 공기 속에 있어서 느꼈던 답답함, 조바심, 긴장감을 동반한 불안감이 더 크게 나를 덮쳤다. 눈이 셋 있으면 눈 셋을 모두 크게 뜨고 앞일을 봐서 지금의 이 불확실성에서 벗어나고 싶다.

안개가 더 짙어졌다. 차가 거의 기어가듯 가니 나는 지루하기도 해서 라디오를 켰다. 주파수를 돌리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상황과 딱 맞는 얘기, 불확실성에 대해서 라디오 DJ가 말하고 있다.

<당황스럽지만 사실 앞의 일을 먼저 알았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맥베스도 마녀를 통해 미리 앞일을 알아냈지만 결국 비극을 막지 못했고,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도 자신의 아들이 자기를 죽이고 어머니를 데리고 산다는 것을 미리 알고 조치를 취하였지만 결국 신탁의 예언대로 되었죠. 우리나라 영화 '관상'에서도 조선 최고의 관상가가 역모를 꾀하는 수양대군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잠자는 수양대군의 얼굴에 점을 찍었으나(조선판 '관상성형')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도 같은 사례라 하겠습니다. … 크게 보면 미리 안다고 해서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죠. 톰 행크스 주연 영화 '스파이 브리지'에서 소련 스파이로 잡힌 루돌프 아벨은 간첩죄로 사형을 당할 상황에서도 무표정하게 '걱정하면 뭐 달라지나'라는 말을 했습니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면서 기억해 둘 만한 대사인 것 같네요.>

말의 핵심은 미래를 아무리 걱정해도, 설사 그것을 알아냈다 해도 장래의 일은 내 의지대로 되지 않다는 거다. 그런데 왜 쓸데없이 걱정하나? 영화 "스파이 브리지" 주인공 말대로 걱정해도 앞의 일은 바뀌지 않을 텐데… 그래, 이 불안한 마음을 날려버리자. 상대편 사장과 만나 어떻게 대화를 할지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는가. 일단 맞닥뜨려 보자.

<중요한 것은 이것일세. 알겠는가? 불확실성! 도처에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네. 그 불확실성을 공기처럼 들이마시면서 신변에 사납게 불어오는,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는 절박한 불확실성을 호흡한다네. … 그리고 폭풍의 한가운데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있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파멸이라는 절박함… 이것과 견줄 수 있는 감정은 오직… 자동차 경주를 하고 있는 레이서의 심정이라고 할까? 그러나 자동차 경주는 하루면 끝나지만, 나의 경주는 평생 계속될 걸세.>

추리소설의 주인공 괴도 아르센 뤼팡이 한 말이다. 내가 <위험>이라는 단어를 <불확실성>으로 바꾸었지만 어쨌든 아무리 생각해도 멋있는 문구다.

나는 이 문구를 되새기면서 순간 마음의 안정을 찾았지만 이내 또 반드시 이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현실적 압박감으로 진정된 마음이 또 심히 어지러워졌다. 일이 잘못되면? 엉망진창 상태인 판매실적은 당분간 만회되지 않을 것이니 그로 인한 나의 스트레스는 하늘만큼 쌓일 것이다. 자칫하면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몸이 옹송그려지고 털끝이 쭈뼛해졌다. 역시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불확실성에서 파생된 불안한 심정 혹은 위험에 대한 노출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그 회사 사장도 우리와의 거래 여부를 아직까지 결정 못 했을 거다. 번뜩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이라는 책의 마지막 단락이 떠올랐다.

<페널티킥이 선언되었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하고 불로흐가 말했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키커가 맹렬히 달려왔다. 환한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골키퍼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페널티 키커는 그의 두 손을 향해 공을 찼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페널티선 상에서 키커가 실수하지 않고 제대로 공을 차면 골키퍼는 도저히 막을 재간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모를 리 없는 키커가 어째서 하고 많은 곳 중에서 잡힐 가능성이 많은 골키퍼 정면으로 공을 찼을까? 전략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불안"해서다. 반드시 넣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크게 작용했을 거다. 자신이 100% 유리한 상황에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 불확실성에 기인한 불안감, 위기감은 상황의 유불리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계약을 따야 하는 사람도, 계약을 해야 하는 사람도 말이다. 그러니 지레 걱정할 필요도 겁먹을 필요가 없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뿌연 안개는 엷어져 전방은 밝은 빛으로 가득 찼고 어두운 구름도 흩어져서 드디어 시야가 확 트였다. 다시 정상 속도를 냈다. 아등바등할 필요 없다. 결국 필요한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불확실성은 해소가 된다. 그럼 그때 그 상황에 맞게 준비한 대로 적절하게 대응하면 된다.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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