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달이고 시 쓰는 즐거움
차 달이고 시 쓰는 즐거움
  • 이창숙
  • 승인 2019.12.29 16: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67>
김홍도, 「전다한화(煎茶閒話)」, 간송미술관 소장. 선비들이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 1330~?)은 고려말의 인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22세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시를 지었으며 정도전·이숭인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을 하는 등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문장가로서 소질을 지녔다. 고려말은 이념적 갈등이 심한 시기였다. 학자들 대부분은 그들의 학식이 쓰이기를 바라며 정계에 진출하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은거하였다. 운곡 또한 일찍이 치악산에 거처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쪽을 택하였으니 그의 나이 24세였다. 후에 진사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단지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 시험을 치른 것이라 하였다. 38세에 아내를 잃은 뒤에도 재혼하지 않고 자식과 함께 살았다. 그 스스로 단출한 삶을 위해 노력하였던 것 같다.

 이방원의 스승이기도 한 운곡은 처음부터 출세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태종 1년(1401년)에 치악산으로 그를 찾아갔으나 만나주지 않고 동굴에 숨었다는 일화가 있다. 태종은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산속을 향해 절을 하고 돌아갔다. 이때 붙여진 이름이 배향산(拜向山)이며, 고개를 넘을 때 도포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스승을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후 태종은 운곡의 아들 원동(元洞)을 현감에 임명하는 등 운곡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다. 운곡 또한 그의 지식이 세상에 쓰이기보다는 후학을 위해 어린 학동을 가르치고 고향에서 농사짓는 일에 전념했다.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 준 뒤 운곡을 불러 자신의 손자들을 앞에 두고 물으니, 운곡은 한 아이를 가리키며 ‘이 아이가 조부를 닮았으니 모름지기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였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수양대군이다. 태종은 운곡의 성품과 학덕을 높이 평가했기에 그의 마음을 빌어 손자들의 성품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산속을 향해 절을 하며 도포를 걸어 놓고 스승을 생각한 태종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혼란기에 은둔의 삶을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현실 세계와 미래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누구보다도 예리했다. 40년간의 기행과 은거에서 보고 들은 것을 시로 남겼다. 일부는 소각되고 1800년에 이르러서야 『운곡시사』라는 문집으로 간행되었다. 후에 개인의 행적을 기록한 시 ‘행록’과 역사를 기록한 시 ‘시사’로 구분되었다. 다음은 『운곡 행록』에 기록된 차와 관련된 시로 ‘아우 이시백이 차를 보내주어 감사하다’는 시이다.

 

  그리운 서울 소식이 산림에 도착하니,

  가는 풀로 새롭게 봉한 작설차도 함께 왔네.

  식사 후 한 잔의 차도 그 맛이 뛰어나고

  취한 뒤 마시는 석 잔의 차는 최고로 자랑할만하네.

  마른 창자 씻어주니 욕심이 없어지고,

  침침한 눈 밝아지니 어른거림이 없구나.

  이 신통한 공덕 헤아릴 수 없으니,

  수마가 달아난 뒤 시상이 떠오르네.

 

서울에서 온 작설차를 받고 기뻐하며 감사의 뜻으로 지은 시이다. 식사 후나 취한 뒤에 마시는 차를 최고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에게 차는 몸과 마음을 넉넉하게하는 에너지였던 것 같다. 또한 그의 시중 “나에게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차 달이고 시 짓는 것이라네” 라는 구절도 있다. 차는 이렇듯 지식인에게 청빈한 삶과 정신을 맑게 해주는 묘약이었던 듯하다.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왔다. 말을 빌려 소통하기보다는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잠시 내 안의 나를 살핀다면 내일은 한층 가벼울 것 같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