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과학자' 장영실이 실록에서 사라진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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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2.28. 오후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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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영화 <천문>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활약을 계기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밤이 길어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잠자리에 좀더 오래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음력으로 세종 16년 6월 24일자(양력 1434년 7월 29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 이전의 물시계는 낮과 저녁에는 천천히 움직이고 밤중에는 빨리 움직였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밤 시간이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새벽 4시 12분에 종각에서 울려야 할 파루 종소리(통행금지 해제)가 실제 시각보다 일찍 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영실은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만든 자격루는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인형이 자동으로 총을 쳐서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였다. 자격루는 밤중에도 정확히 시간을 측정했다. 파루 종소리가 이전보다 늦게, 아니 정확한 시각에 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잠이 많은 사람들과 밤에 담을 넘는 양상군자들한테는 감사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난 26일 개봉한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조선의 밤 시간을 늘려준 장영실의 과학연구를 다룬 작품이다. 배우 최민식이 장영실을 연기하고, 한석규가 세종대왕을 연기한다. 부산 동래현 관노(공노비)였던 장영실이 한양에 발탁돼 과학자 생활을 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세종이 탈 가마의 제작을 책임졌던 장영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천문>이란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과학연구 이외의 측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장영실이 연구하고 제작하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그보다는 정치나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한다. 장영실의 과학연구로 인한 문화적 발전상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것이다. 천(天)의 문제를 다루겠다고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인(人)의 문제에 과도하게 치중한 작품이 된 것이다.
 
제작노트에서도 예고됐듯이 <천문>은 장영실에 관한 실록 기록이 매우 적다는 점에 착안한 영화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4년 뒤인 1442년 장영실이 52세 나이로 곤장 100대를 선고받은 뒤로 더 이상 역사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든 작품이다.
 
당시 장영실은 세종이 탈 가마의 제작을 책임졌다. 직접 만드는 것은 아니고 제작을 감독하는 일이었다. 바로 이 가마가 부서진 일로 인해 불경죄에 저촉돼 관직을 잃고 곤장까지 맞게 됐다.
 
영화는 위대한 과학자가 그런 실수를 했을 리 없으니 뭔가 음해 공작이 있었을 거라는 추론, 그런 인물이 역사 기록에 더는 등장하지 않은 데는 뭔가 은밀한 사연이 있을 거라는 추론 하에 갖가지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추론은 다분히 현대적인 것이다. 오늘날 장영실이 주목을 받는 것은 과학적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세종대왕 시대의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에 대한 현대인들의 존경심이 그에 대한 평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에 대한 당시의 평가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세종이 오늘날과 같은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가 지금 같은 존경을 받게 된 것은 왕조 멸망 직전인 19세기 후반부터 주시경이 한글 운동을 벌이면서부터였다.
 
죽은 뒤 종묘에 모셔질 때 종(宗)보다는 조(祖)라는 묘호를 받아야 더 훌륭한 군주로 평가받던 시절에, 세종의 아들인 수양대군은 세종보다 높은 세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똑같은 세(世)를 쓰면서도 아들이 아버지보다 높은 조(祖)를 받았기 때문에 논란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수양대군이 세조라는 묘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에 대한 평가가 오늘날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진족을 방어하고 문물을 발전시켰다는 이유로 세종을 성군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존경심은 오늘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자를 쓰던 시대인지라, 지금과 같은 존경심은 나올 수 없었다.
 
따라서 장영실에 대한 평가도 오늘날과 같을 수 없었다. 그가 52세 때 관직을 잃고 더 이상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그 당시에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 역사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은 장영실 외에도 수두룩하다. 더군다나 선비가 아니라 기술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선비들이 남기는 실록 기록에 많이 나오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늘날에도 방송이나 신문에 한동안 떠들썩하게 보도되다가 그 뒤 전혀 보도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더 이상 보도되지 않는 것은 어떤 심오한 내막이나 흑막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보도될 만한 행적을 더 이상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장영실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52세 이후로 더 이상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실록에 기록될 만한 발자취를 더는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한 <천문>의 추론은 좀 과도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장영실을 한양으로 스카우트한 사람은 태종 이방원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장영실이 벌을 받고 쫓겨난 데는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위와 같은 추론 하에 <천문>은 세 가지 전제를 깔면서 스토리를 전개한다.
 
영화 초반부에 제시된 3가지 전제는 세종이 '과학 입국(立國)'이란 목표 하에 노비 출신인 장영실을 파격적으로 기용했다는 점(A), 장영실로 인한 조선 과학의 발달을 시기한 명나라가 강대국 지위를 이용해 장영실과 그 발명품들을 견제했을 거라는 점(B), 장영실이 노비 출신이라서 조정 내의 견제가 심했을 뿐 아니라 그를 몰아내려는 음해 공작이 있었을 거라는 점(C)이다. 이 세 가지 전제들이 상호 뒤엉켜지는 가운데 <천문>의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런데 A에는 과장된 부분이 많다. 이 영화뿐 아니라 다른 사극들도 장영실과 세종의 인연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20대 중후반 이전인 장영실을 동래현에서 한양으로 스카우트한 장본인은 세종이 아니라 태종 이방원이었다. 세종의 아버지 때부터 이미 장영실은 조정의 주목을 받고 한양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 15년 9월 16일자(1433년 10월 28일자)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신하들과의 대화 중에 장영실에 관해 언급하면서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그를 아낀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세종보다 태종이 먼저 장영실을 발탁하고 보호했다는 사실이 이 말에서 잘 드러난다.
 
B는 <천문> 서두에서 아주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장영실과 그의 업적을 시기한 명나라가 사신을 보내 발명품들을 훼손하고 장영실의 신병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일이 없었다. 도리어 장영실이 세종의 지원으로 명나라에 가서 견학을 하고 온 적이 있을 정도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에 따르면, 세종은 장영실에게 "중국에 가서 각종 천문기구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히고 돌아와서 신속히 모방해서 만들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명나라 예부(교육부)에 협조 요청문을 보내 장영실이 명나라 과학기술을 견학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영화 속의 명나라 조정이 조선의 과학기술을 시기하고 훼방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조선은 명나라보다는 약했지만 다른 나라들보다는 강했다. 명나라가 동아시아 패권을 행사하던 시기에 조선은 이 지역에서 2위의 국력을 보유했다. 그래서 조선은 전체적으로 보면 강대국에 속했다. 그런 조선을 상대로 명나라가 영화 <천문>에서처럼 패악질을 부릴 수는 없었다.
 
명나라가 조선에 바랐던 최대 희망사항은 조선군이 명나라군과 함께 여진족 토벌에 나서주는 것이었다. 그런 처지에 놓인 명나라가 장영실의 발명품들을 때려부수고 장영실의 신상에 위협을 가할 수는 없었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한편, C는 다소 과장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사실에 상당히 부합한다. 세종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영실을 우대하자 이에 대한 견제 움직임이 심하게 표출된 게 사실이다. 세종은 장영실을 면천시켜주고 단기 중국 유학을 보내줬다. 또 작은 고을 사또보다 높은 정5품 벼슬도 줬다. 그래서 노비-양인(자유인) 신분제에 집착하는 관료들이 장영실을 견제했던 게 사실이다.
 
만약 <천문>이 B는 없애고 A를 보강하며 C를 부각시키는 전제 하에 장영실의 과학연구가 당시 세상에 미친 문화적 영향들을 제대로 묘사했다면, 이 영화는 천문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명품 '문화 사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배우 최민식·한석규의 연기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사 고증의 한계에 대해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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