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어둠 속에 묻힌 문화재들 보고싶다 [도재기의 천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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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2.27. 오후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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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보고 싶은 문화재들

지금 이 순간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박물관·미술관 전시장에서는 문화재들이 조명을 받으며 빛나고 있다. 저 멀리 수십만년 전 구석기시대 주먹도끼부터 신석기와 청동기·철기시대를 거쳐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 이어 고려·조선시대 유물 등 유구하게 이어진 역사와 문화의 소중한 자료들이다. 이들 문화유산으로 비로소 우리는 역사를 서술하고, 문화의 풍성함을 이야기한다. 당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힘을 가진 문화재를 통해 과거를 되새기고 현재를 둘러보며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를 구할 수도 있다. 한 민족, 한 나라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자긍심을 상징하는 게 문화유산이다. 그래서 국내외 여행객들은 박물관을 찾는다.

고구려 고분벽화(북한 덕화리 1호분 남쪽 천장)


은은한 조명 아래 자신의 가치를 한껏 드러내는 문화재들과 달리 지금도 어둠 속에 갇힌 문화재들이 많다. 항온항습이 유지되는 수장고도 없고, 보존과학 전문가들의 관리도 받지 못한다. 무엇보다 학술적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문화재가 품고 있는 가치와 의미, 풍성한 이야기들마저 어둠과 함께 묻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해도 보기 힘든, 연구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 바로 공개되지 않는 문화재들이다.

학술적 연구 이뤄지지 않아

가치와 의미, 이야기마저 묻힌

만나기 힘든 문화재들


2001년 사라진 안평대군의 서첩

해외로 유출된 직지심체요절

미래 기약하며 수장고에 잠긴 유물

분단이 낳은 ‘이산 문화재’들


언젠가 이 모든 유물을

빛 속에 다시 볼 수 있기를


도난·도굴로 안평대군의 ‘소원화개첩’(국보 238호)


우선 도난·도굴 문화재들이 있다. 문화재청의 ‘도난 문화재 정보’ 통계에 따르면 12월 현재 도난·도굴 문화재는 592건이다. 소장자 집에서, 산중의 사찰에서, 사당과 전시관 등 곳곳에서 범죄가 저질러졌다. 옛 무덤의 석조물을 통째로 갖고 가거나, 고분을 도굴하고, 석탑 속 문화재를 훔쳐갔다. 도굴은 CCTV 설치 확대, 문화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급감하고 있으나 도난은 여전하다. ‘한탕’하면 꽤나 큰돈을 만질 수 있어서다. 이런 도난·도굴 문화재는 수십년 동안 숨겨지거나 은밀하게 장물아비를 통해 거래된다. 사적 욕망으로 문화재 고유의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사라지거나 훼손되는 것이다.

592건의 도난 문화재의 절대다수는 국보나 보물 등으로 지정된 국가지정문화재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관리가 부실한 시·도지정문화재이거나 비지정문화재들이다. 물론 도난당한 국보, 보물들도 있다. 심지어 청와대에 있던 보물도 행방불명된 상태다.

보존기술 부족 때문에 글리세린 용액 속의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가리개’


도난당해 지금은 볼 수 없는 국보는 1점인데, 바로 ‘소원화개첩’이다. 1987년 국보 238호로 지정된 ‘소원화개첩’은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시서화에 뛰어나 조선 초기 대표적 예술가로 손꼽히는 안평대군 이용(1418~53)의 서첩이다. 가로 16.5㎝, 세로 26.5㎝ 크기 비단 위에 행서체로 모두 56자가 쓰였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의 시를 쓴 것으로 안평대군의 낙관·도장도 찍혔다. 비록 소품이지만 안평대군의 서풍을 보여주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귀중하다. 안평대군은 형 수양대군에게 희생당한 것은 물론 그의 예술작품마저 당시 모두 파괴됐다. 지금 남아 있는 안평대군의 작품이라 할 만한 것은 일본에 있는 ‘몽유도원도’의 발문이 유일하다. 활달하고 웅장한 조선 초기 서예작품인 ‘소원화개첩’은 2001년 1월 6~8일 사이 소유자이던 서모씨의 서울 제기동 아파트에서 도난당한 후 인터폴 수배까지 내려졌지만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다.

보물로 지정됐지만 도난당한 문화재는 10여건에 이른다. 전남 순천 송광사 국사전에 있던 16조사 진영(보물 1043호) 중 청진 국사 등 13조사의 진영, 경주 기림사 비로자나불 복장유물 가운데 고려시대 전적들(보물 959호), 고려시대 부도탑이자 보물 7호인 ‘여주 상교리 원종대사혜진탑’의 상륜부(보륜·보주) 등이다. 또 조선시대 교지와 완문 각 1점인 ‘황진가 고문서’(보물 942호), 조선 중기 문신인 유근의 초상화 ‘유근 영정’(보물 566호)도 있다.

해외에 있어서 고려시대의 ‘은제 금도금 주전자’(미국 보스턴박물관 소장)


청와대에서 사라진 보물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인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다.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과는 더불어 (도를) 논할 수 없다’는 뜻의 유묵은 1910년 3월 쓰여진 작품으로 가로 31㎝·세로 130.5㎝의 족자 형태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체포돼 1910년 3월26일 순국하기 전까지 뤼순감옥에서 휘호한 유묵 중 하나다. 당시 다른 유묵들처럼 안 의사의 손바닥 도장(장인)이 선명하다. 1972년 8월 보물 569-4호로 지정된 이 유묵은 1976년 3월 이도영 당시 홍익대 이사장이 청와대에 기증했다. 하지만 청와대에 걸려 있던 유묵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역사적 격동기에 해외로 유출돼 만나기 힘든 문화재들도 많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요절·직지)이 유명하다.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는 ‘직지’는 연구자들이 현지에 가더라도 보기 힘든 것은 물론 숱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단 한번의 전시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청와대에서 행방불명된 안중근의 유묵(보물 569-4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집계한 ‘국외 문화재 현황’(4월 현재)에 따르면 모두 21개국에 18만2080점이 흩어져 있다. 도쿄국립박물관 등 일본에 7만6000여점이 있어 가장 많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 미국에 5만여점, 쾰른동아시아박물관 등 독일에 1만2000여점 등이 있다. 물론 이 숫자는 공식 확인된 것으로 소재 자체를 공개하지 않은 개인소장품 등을 포함하면 적어도 2~3배의 유물이 해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화재는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도 있지만 구입이나 기증, 선물 등 합법적으로 해외에 나가기도 했다. 흔히 해외 유출 문화재 모두가 환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물론 불법유출이 확인되는 경우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의 끈질긴 환수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환수하기 힘든 유물의 경우 대여 등을 통해 국내 전시를 추진하거나, 해외 현지에서 일반에 공개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우리 문화재가 조명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다.

갈 수 없는 땅에 있어서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중심으로 봉황·용 등을 조각해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고구려시대의 ‘해뚫음무늬 금동장식’(북한 평양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


그 무엇보다 보고 싶지만 보기 힘든 문화재는 북한의 유물, 유적들이다. 남북 분단은 이산가족뿐 아니라 ‘이산 문화재’도 낳았고, 반만년 역사와 문화도 분단돼 그 연구가 절반에 그치고 있다. 정치·군사적 환경에 따라 남북의 문화재 교류마저 수시로 중단되면서 안타까움은 더 깊어진다. ‘삼국시대의 타임캡슐’이라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고구려 고분벽화가 먼저 떠오른다. 여기에 고구려 금속공예품이자 삼족오를 중심으로 봉황과 용이 조각돼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맞뚫음금동장식’(해뚫음무늬 금동장식), 기원전 2000년 후반 만들어져 한반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악기인 ‘뼈 피리’ 등 선사시대 이래 수많은 문화재들이 평양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평양의 ‘대동문’, 고려시대 석탑의 걸작인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 개성의 ‘선죽교’ 등도 있다.

현대의 첨단 과학기술로도 보존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어 전시장에서 공개되지 못하는 유물들도 있다. 1973년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굴된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가리개’가 대표적이다. 황금빛 금동판 조각에 오색영롱한 비단벌레(옥충) 날개를 장식한 유물은 발굴 이래 지금까지 단 3일 동안만 일반에 공개됐다. 아직 보존기술이 국내외적으로 개발되지 않아서다. 현재 이 유물은 항온항습, 빛을 차단한 고순도의 글리세린 용액에 잠겨 국립경주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관리된다. 비단벌레 날개는 산소와 접하거나 빛에 노출되고 건조해질 경우 검게 변한다. 실제 비단벌레 날개를 장식한 유물들이 한국·중국·일본에서 발굴됐으나 신중하지 않게 공개하면서 날개의 색깔이 모두 훼손됐다.

보존기술이 개발돼 하루빨리 그 찬란하고 신비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실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전시된 유물을 보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 가능하다. 훼손된 문화재를 수리·보수하고 복원하는 보존과학 전문가들의 세심한 손길, 학예사들의 연구가 있어 비로소 문화재의 온전한 가치와 의미가 밝혀진다.

도재기 선임기자
보기 힘든 문화재들을 언급하다 보니 수집한 문화재를 기증하거나, 사립 박물관·미술관을 세워 일반에 공개하는 소장가들이 새삼 고마워진다. 혼자만이 아니라 다 함께 누리고, 또 연구를 가능케 함으로써 우리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고 빛을 보게 하는 귀한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10여년째 숨겨놓고 논란을 일으키는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 소장자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씁쓸하기 그지없다.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뿐 아니라 지금도 어둠 속에 갇힌 수많은 문화재들이 보다 많이 공개되고 전시돼 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함께 누리고, 그 가치를 되새겼으면 좋겠다.

그동안 기획시리즈 ‘도재기의 천년 향기’가 2018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를 가보니-38만점 문화유산이 사는 집…여기선 숨도 마음대로 못 쉰다’를 시작으로 2년에 걸쳐 33회(‘매향비-먼 미래의 더 나은 세상 위해 오늘의 고단함 묻고 미륵 기다리는 마음’)를 이어왔다. 30여점의 문화유산을 엄선해 그 가치와 의미, 나아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살펴봤다. 역사와 문화, 문화재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기대하며 이제 ‘참 보고 싶은 문화재들’로 ‘도재기의 천년 향기’의 막을 내린다.

<사진제공 | 문화재청·국립중앙·경주박물관>

<시리즈 끝>

도재기 문화부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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