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행원(72) 서예가·화가·시인

강행원 작가는… 1947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한때 출가하여 청화 스님 문하에서 수행했다.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며,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개인전 19회를 비롯해 국제전과 그룹 및 초대전 등에 400여 회 참여했다. 故 권일송의 특별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한국문학예술상, 민족정기예술상 등 다수 수상했다. 시집으로 〈금바라꽃 그 고향 그림자 여로〉 등이 이 있으며, 미술이론서 〈문인화론의 미학-그림에 새긴 선비정신 한국문인화사〉 등이 있다. (사)민족미술협회 대표, 한국불교 미술인 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포스트모던 시문학회 회장 등으로 할동하고 있다.

2때 청화 스님 문하서 출가
10년 후 환속, 서예 본격 시작
서예 이루고 인문화로 전환
스승 없어 전국 돌며 자연사생

 

매일 ‘이뭣고’를 들고 좌복 위에 앉았지만 이내 ‘이뭣고’는 멀어지고 머릿속엔 온통 ‘붓’이다. 소식은 없고 번뇌만 인다. 그림과 서예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다시 ‘이뭣고’를 품어보지만 끝내 ‘이뭣고’는 다시 멀어진다. 어느새 마음속에서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때부터가 한소식이다. 그의 ‘이뭣고’는 詩ㆍ書ㆍ畵, 삼절(三絶)이다. 하지만 선방 좌복 위에서 매일 삼절을 꿈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매일 붓 대신 ‘이뭣고’를 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사문의 길을 접고 산문을 나섰다. 그리고 삼절의 꿈을 향해 걸었다. 한국문인화의 새로운 길을 열고, 서예와 시를 함께 이룬 강행원이다. 그렇게 강행원의 삼절은 산문에서 시작됐다.

출가, 스승 청화 스님
“비록 사문의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사바로 돌아왔지만 제가 출가를 하지 않았다면 저는 글과 그림을 이룰 수 없었을 겁니다. 청화 스님의 그늘이 없었다면 저의 삶 자체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겁니다.”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강 작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출가한다. 은사는 청화(1924~2003, 前 성륜사 조실) 스님이다. 강 작가는 청화 스님의 사촌동생이다. 강 작가와 스물네 살 차이인 청화 스님은 강 작가가 어렸을 때 출가했다. 강 작가는 청화 스님을 가까이서 보며 자랐다. 사촌형은 새로운 세계였다. 강 작가는 다른 아이들이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가질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가까워지는 것과 같았다. 물드는 것이었다. 강 작가의 불연은 그렇게 가까워지는 것으로 시작됐다.

중학교 2학년 때 모친을 잃었던 강 작가는 고2 때 다시 부친마저 잃게 된다. 양친을 잃은 열여덟의 고등학생이 이 세상을 여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강 작가는 갑자기 많은 생각을 짊어져야 했다. 우선 학업을 이어가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강 작가는 배움이 반드시 사바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 작가에겐 그동안 가까이서 바라본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그곳에도 배움의 길이 있다는 것을 강 작가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강 작가의 고민은 그 또 다른 세계가 해결했다. 출가를 결심한 강 작가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 청화 스님을 찾아간다.

청화 스님은 해남 대흥사 진불암에 있었다. 청화 스님의 반대가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강 작가는 청화 스님 밑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한다. 얼마 후 강 작가는 청화 스님을 따라 광주 추강사로 자리를 옮기고 그곳에서 청화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는다. 그때 강 작가는 사바에서 마치지 못했던 학업을 다시 이어간다. 조선대부속고등학교(야간)에 복학한다. 낮에는 추강사 사미였고, 밤에는 조선대부고 학생이었다.

다시 사바로, 붓을 들다
강 작가의 불연은 여느 불연과는 조금 달랐다. 정해진 날들을 정해진 바대로 살 수 없었던 출가였다. 강 작가의 출가는 사바로 돌아오기 위한 출가였다. 강 작가의 삶에는 부처님의 글자들과 발자국이 있어야 했던 것일까. 그는 부처님의 그늘을 거쳐 다시 사바로 돌아왔다.

“큰 욕심을 지니고 생사의 문을 부숴버리는 영생의 길을 택했으나 그 큰 욕심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세간의 작은 욕심에 매달려 결국 사문을 떠나는 바보가 됐다.

강 작가는 출가한 지 10년 만에 다시 사바로 돌아온다. 하지만 출가와 마찬가지로 그의 환속 역시 여느 환속과는 달랐다. 그의 환속은 산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산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강 작가가 사바로 돌아와 지금까지 산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그림과 글씨를 이루기 위함이다. 비록 그는 다시 사바로 건너왔지만 그는 이미 불가의 법으로 마음을 정한 불제자였다. 세상을 따지는 이름은 필요 없었다.

강 작가는 네 살 때부터 붓을 잡았고 천자문을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 붓이 있었고 글이 있었다. 강 작가의 부친은 서당 훈장이었다. 강 작가에게 불연이 숙연이었던 것처럼 강 작가에게 붓은 같은 숙연이었다. 지나칠 수 없는 인연이었다. 강 작가는 조선대부고에 복학하면서부터 다시 붓을 잡기 시작했다. 붓글씨를 쓰고 그림도 그렸다. 그리고 붓을 잡으면 마음속에선 시가 일었다.

“그때 청화 스님이 많이 걱정하셨죠. 너무 치우치지 말라는 충고도 주셨고요. 수행자가 부처님 공부를 우선으로 해야지 다른 것으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사람으로 태어나 한 생이 참으로 짧은 것인데, 부처님법 공부하는 출가자에게는 촌각도 아까운 것이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강 작가는 사바에서의 공부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 서당에서의 공부와 산문에서의 공부만으로는 왠지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강 작가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스승의 생각은 달랐다. 또 한 번 강 작가는 많은 생각 속에 놓인다. 그는 스승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강 작가는 스승을 떠나 화엄사, 만경사, 두방사 등을 거치며 자신의 길을 다시 점검한다. 그리고 갈림길에 선다. 스물여덟 살이었다. 강 작가가 택한 길은 사바였다.

사바로 돌아온 강 작가의 마음속에는 온통 서예와 그림뿐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예학원을 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서예를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이에게 성과는 생각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고2 때 전남도전에서 특선(서예부문)을 경험했던 그의 글씨는 시간의 문제만 남아 있었다.

 

1977강행원 한국화사생전' 
끊어진 사생 전통 다시 이어
새로운 소재 한국문인화 선보여
동양화명칭 버리고 한국화

1988년 전시 민중미술운동 시작
관세음보살의 민중불교 역할도

문인화, 서예 등 작품 1200여 점
금까마귀~등 시집 5권 출간

 

한국문인화의 새 역사
1977년 9월 8일. 강 작가는 한국문인화의 역사에 이름을 올린다. 아니 역사가 그의 이름을 적는다. ‘강행원 한국화사생전’, 강 작가의 첫 문인화 개인전이 열렸다. 역사가 적어야 했던 큰 글씨는 ‘사생전’이라는 것과 ‘강행원’이라는 신진작가의 이름이었다.

‘나의 스승은 자연’이라는 제목으로 쓰인 모 일간지 기사는 그 날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국미술협회 회원도 못되고 74년 국전에서 서예부문 입선 1회뿐 그밖에 화가로서의 공인도 아직 받지 못한 강행원 씨(30)가 9월 8일부터 14일까지 예정인 미술회관에서의 첫 전시회 준비를 위해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다. 〈중략〉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조용한 가운데 정진이 아니라 도전이요 대전이요 응전이다. 5년 전부터 시작한 현장사경(現場寫景)의 작업은 굶주림과 질시 속의 강행군이었다. 스승도 없고 화우(畵友)도 없고 고달픔을 어루만져주는 가족도 없었다. 그 속에서 뙤약볕과 설한풍(雪寒風)의 아픔을 견디며 한 점 한 점의 현장사경을 끝마쳐야 했다. 〈후략〉”

강 작가의 첫 개인전이 주목을 받은 대목은 ‘사생전’과 ‘한국화’였다. 그때까지 우리의 그림(한국문인화)은 동양화라는 애매하고 불분명한 이름 속에 있었고, 일제는 ‘조선화’라는 이름을 낳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그림은 정체 없는 이름과 사라진 시대의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리고 한동안 ‘사생화’를 볼 수 없었다. 강 작가는 끊어졌던 사생의 전통을 다시 불러온 것이다.

강 작가는 자신의 글씨가 시간의 문제를 넘어서자 그 붓끝을 그림으로 돌렸다. 3년여 동안 운영했던 서예학원을 접고 그림을 시작한다. 강 작가는 조선대부고 시절 김용구 화백으로부터 서화(書츐)를 시작했었다. 글씨에서 그림으로 넘어가는 것은 정해진 일이었다. 글씨를 놓고 그림을 시작한 강 작가는 우선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스승들을 찾아내긴 했으나 그 스승들을 모두 스승으로 모실 수가 없었다. 산문에서의 공부와 사바에서의 공부는 그렇게 달랐다. 산문에서의 공부는 마음만 정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사바에서의 공부는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았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강 작가는 시련을 기회로 삼았다. 스승으로 삼고 싶었던 이들의 그림은 모두 관념속의 산수였다는 것을 알았다. 강 작가는 그들과 다른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관념이 만들어 낸 자연이 아닌 생생한 눈앞의 자연을 그리기 위해 전국을 돌기 시작했다. 그는 3년여 동안 전국의 자연을 화가의 눈으로 밟았다. 날이 저물면 절에서 잠을 자고 날이 밝으면 다시 일어나 걸었다. 그야말로 운수납자였다. 강 작가는 산문의 안과 밖 어느 쪽에 있었던 것일까. 그는 전시회 인터뷰에서 “나의 스승은 자연”이라고 했다.

그의 전시와 그림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모두 한국문인화의 새로운 역사였다. 그의 전시와 그림이 역사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문에 밝았던 그는 중국문인화에 대한 서적을 섭렵했고, 한국화와 닿아있는 모든 그림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그림을 찾아낸 것이다. 그의 그림은 당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한국문인화였다. 그의 그림은 시대의 흐름이 됐다. 많은 주요 매체들이 강 작가의 그림을 찾았다. 삽화가 필요한 곳엔 그의 그림이 있었다. 강 작가의 작품은 산수, 인물, 문인화, 서예, 전각, 석고문인 비석글씨까지 1200여 점에 이른다.

강행원이 그리는 정토
1980년 10월 한국화를 전공하는 젊은 작가들이 모 일간지 회의실에 모여 ‘전통과 형상’ 그룹을 결성하고 매달 정기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당시 강 작가는 간사였다. 모임은 제도미술의 허위의식과 시대정신의 부재를 일깨우고 일제잔재의 틀에 갇힌 미술을 해방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민중미술운동의 시발이었다. 하지만 전통과 형상 그룹에서 민중미술운동에 뛰어든 작가는 강 작가가 유일했다. 그가 민중그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1987년 신세계 화랑에서 개최한 개인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개인전에서 선보인 ‘관세음보살의 민중불교 역할도’가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구열 평론가는 “불교와 민중의 관계사회의 시각 관세음보살과 난지도 서민의 모습을 담은 새로운 시각의 변환, ‘역원근법 시각의 묘사’ 등을 통해 잠재적 역량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그림은 당시 불교종단이 하화중생의 보리심을 갖지 못한 세태를 풍자하고 힐난하고 있다. 당시까지 한국화뿐만 아니라 어떤 공모전에서도 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강 작가의 그림은 의미가 컸다.

그렇게 강 작가 그림의 중심엔 ‘민중’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불교가 그 내용의 한 축을 이루었다. 새로운 한국화였고, 새로운 한국문인화였다.

그의 그림의 소재는 폭넓고 다양했다. 그의 만리행이 보여주듯이 국내 산천은 돌아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고 일본, 중국, 유럽 등 해외의 풍경도 그의 그림 속에 있었다. 무안 갯벌을 여행하면서 갯벌에서 일하는 여인상을 그리고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한 만경강을 탐사하면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든 전봉준 화상그림’을 남긴다. 묘길상과 삼선암이 등장하기도 하고 선화 ‘차 한 잔 하고 가시게’에서는 차 한 잔으로 품을 수 있는 삼라만상의 묘법을 화두로 던지기도 했다. 그가 그려낸 그림들은 강행원이 그리는 정토였다. 그리고 그 정토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세계 서방정토와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의 선지식이었던 청화 스님의 그늘은 그의 말대로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자양분이었던 것이다.

“그림에 몰두하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번뇌 사라질 때 ‘그림’이 만들어집니다.”

강 작가는 1977년의 첫 전시를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개인전과 국내외 그룹 및 초대전을 가졌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향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삼절을 이루다
2019년 10월, 강 작가의 시집 〈금까마귀 들락날락〉이 출간됐다.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그의 첫 시집은 1989년에 나왔다. 그는 고등학교 때 어느 문학의 밤에 다녀온 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이 그려온 그림들과 함께 선적인 시어로 그려낸 시화집 〈금까마귀 들락날락〉에서는 출가를 경험하고 민중미술을 이끌며 한국문인화의 새로운 길을 열었던 자신의 삶을 진하게 드러냈다. 존재의 이치에 다가간 불교적 메시지를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풀어냈으며, 폭넓고 깊은 불교사상과 사유에 바탕을 둔 그림도 눈길을 끈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왜 종교를 찾고 시를 읽는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하게 된다. 무위한 자연으로부터 오는 감성을 느끼고 더 나아가 마음수행을 강조한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기게 한다.

강 작가는 인터뷰 내내, 그리고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자신의 이름을 ‘삼절’ 앞에 놓지 않았다. “태어나보니 붓과 글이 가까이 있었고, 붓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좋아 평생 붓과 함께 살다보니 글씨를 쓰고 그림도 그렸고, 또 글씨와 그림을 그리다보니 시를 쓰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속에 ‘나’를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그늘을 지나온 덕분”이라고 했다.

강 작가는 인터뷰가 끝나자 기자에게 자신의 시집을 전하기 위해 펜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책표지를 넘겨 자신의 이름과 기자의 이름을 적었다. 그에게 모든 글씨는 서예였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짧은 글에서도 그는 분명 서예가였다. 강 작가는 한 자 한 자 온 마음을 다해 글씨를 썼다. ‘삼절’이란 그림이나 글씨의 모습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붓을 잡는 마음의 모습으로 따지는 것이 아닐까. 얼마나 그림과 글을 사랑하는가. 그것이 삼절의 기준이 아닐까.

청화 스님(왼쪽)과 강행원.
강행원 作, 선운사, 가공캔버스 수묵혼합채색 60.6×50.0
강행원 作, 산명곡응(전서 45×35) 화선지 먹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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