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물결,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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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출애굽기 32장 15-20절


인생 가운데는 풍년보다 흉년이 많다

tvn 채널에서 하는 방송 중에 ‘유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일반 시민들을 길거리에서 만나 퀴즈를 내서 맞추면 100만원의 상금을 그 자리에서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진행자들은 추석특집으로 인삼의 고장 풍기에 가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참기름 집을 운영하는 부부가 잔잔한 감동을 사람들에게 안겨다 주었습니다.

결혼한 지 37년이 된 부부는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20년 동안 기름집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인 기향 씨에게 “내 인생의 풍년, 흉년은 언제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기향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풍년은 뭐 거의 없는 것 같아요. 한 3년 너무 힘들었어요. 죽고 싶어가지고…. 큰 아이가 조금 아팠어요. 희귀성이라고 해서…. 열다섯 살부터 진행이 됐대요. 그것도 몰랐어요. 엄마 아빠가 너무 바쁘게 살아가지고. 그 죄책감으로 견딜 수 없었어요. 초등학교가 저긴데 운동장 한복판에 가서 밤에 수건으로 입을 막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나님, 하나님, 울다가 돌아오곤 했어요.” 오죽했으면 한밤중에 학교 운동장 한복판에서 수건으로 입을 막고 오열을 했겠습니까?

기향 씨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서 괜찮아졌고 중한 병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지금은 ‘건강하세요’가 인사예요. 부자도 필요 없고 예쁜 것도 필요 없고 다 필요 없어요. 우리는 어차피 한 번 태어나면 한 번 죽어요. 그러니까 그 사는 날 동안 그냥 건강하게, 정직하게 그냥 욕심 부리지 말고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는 거예요.”

기름집을 운영하는 두 부부의 삶이 서민들의 삶을 잘 대변해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서민들의 삶만 그렇겠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 가운데는 풍년보다 흉년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 흉년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마다 많은 흉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흉년들 가운데는, 고난들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시기 위한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깨뜨리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블록 쌓기다

아이들 놀이 중에 블록 쌓기라는 놀이가 있습니다. 하나하나 블록을 높이 쌓은 사람이 이기게 되는 놀이입니다. 블록을 높이 쌓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밑에서부터 중심을 제대로 잡고 블록을 쌓아 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밑에서 조금이라도 중심이 안 잡힌 상태에서 블록을 쌓으면 어느 정도는 쌓을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높이 쌓을 수가 없습니다.

블록을 쌓아가는 가운데 중심이 바로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다시 블록을 무너뜨리고 중심이 흐트러진 부분부터 다시 쌓아야 합니다. 그것이 블록을 높이 쌓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우리 인생도 어쩌면 블록 쌓기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인생은 밑에서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입니다. 쌓아가다 보면 제대로 쌓이는 것이 아니라 비딱하게 쌓여갈 때가 있습니다. 삐딱하게 쌓여 가면 다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발견하고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쌓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중심이 흔들린 채로 비딱하게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어느 시점에 가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초청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그 때까지 두고 보시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아예 높이 쌓아서 무너지기 전에 밀어서 무너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경험을 해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분 주위 그런 분들을 보신 적도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런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그동안 쌓아 놓았던 것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는데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참 비참해집니다. 자존감이 다 무너집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밑바닥에 내려가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이 저를 다시 회복시키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초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초청에 임하였을 때 정말 하나님께서 저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있게 됩니다. 공동체를 이끌어 가야 하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가 40일 동안 부재중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불안감이 계속해서 감돌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몰려와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내라고 합니다.

아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내와 자녀의 귀에 걸고 있는 금고리를 빼어서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금고리를 녹여 송아지 형상을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금송아지를 보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면서 환호성을 지릅니다.

아론은 그 금송아지 신상 앞에서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다음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뛰놉니다. 여기서 뛰논다는 것은 성적으로 타락했음을 의미합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이방사람들이 행한 의식을 그대로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에게 솔깃한 제한을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너무 화가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불과 얼마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겠다고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난리를 치고 있으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얼마나 기가 막히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산을 내려가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뻣뻣한 백성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너는 말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노하여 다 진멸해 버리고, 너를 통해 큰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제안은 어떻게 보면 모세에게 귀가 솔깃한 제안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후손을 통해 큰 나라를 만들면 오히려 속 시원할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까지 데리고 오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모세를 찾아와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한두 번 화가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진노를 돌이켜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의분을 일으키는 모세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모세는 서둘러 시내산을 내려가게 됩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추고 뛰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너무 너무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드릴 때는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직접 산에서 내려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된 모습을 보니 모세는 그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분노는 자신의 감정에 의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분노는 의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분을 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의분을 발하면서 두 가지 행동을 취합니다.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이 쓰인 두 돌판을 던져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둘째,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 형상을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으로 마시게 합니다.

여기서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금가루를 백성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이 물이 백성들에게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이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5장에 보면 외간 남자와 부정한 행위를 한 것으로 의심받은 여인은 조사를 받고 난 다음, 그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저주의 물’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지금 그의 ‘신랑’ 되신 하나님께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 물은 바로 ‘저주의 물’의 성격을 지니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반드시 스스로 죄값을 담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교훈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언약판을 깨뜨려 버린 이유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모세가 왜 하나님의 언약판을 깨뜨려 버렸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판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고 직접 친필로 써주신 언약판이었습니다.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라(출 15:16)”.

모세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던져서 깨뜨려 버립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돌판을 감히 깨뜨려 버릴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그럴 자신이 있으십니까? 저는 솔직히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그 돌판을 내려놓고 다른 돌을 들어서 던지든지 하지 그렇게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가차 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시고 친필로 써 주신 이 돌판을 던져서 깨뜨리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한 것이 너무 화가 나서 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랬을까요?

물론 모세가 화가 난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모세가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생각 합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겨우 달래고 모세가 내려왔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순간도 너무나도 화가 났지만 이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보다 앞서 선수를 치자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모세의 사랑

어렸을 때 저는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크게 혼날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가 먼저 저를 호되게 혼내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하신 것은 저를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먼저 선수를 쳐서 저를 혼내니까 아버지께서는 오히려 저를 다독거려 주셨습니다.

모세는 지금 하나님 대신 먼저 화를 내고 조치를 취함으로 인해, 이스라엘백성들이 진멸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시내산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다짐을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두 돌판을 새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들은 모두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판을 깨뜨려 졌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 다시 한 번 긍휼하심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이 모든 일을 어느 정도 수습한 이후에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소서(출 32:31-32)”.

모세는 지금 하나님께 ‘저는 지옥가도 좋사오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증거판을 다시 모세에게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써주신 언약판을 깨뜨리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저들을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했던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좋아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깨뜨리심은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처럼 일부러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깨뜨리십니다. 깨뜨림을 당하면 아픈 것이 사실입니다. 힘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길이 사는 길이기 때문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에덴동산에 추방을 당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추방을 당한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비극적 출발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들을 깨뜨림으로 인해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야곱의 눈물

하나님께서는 얍복강가에서 야곱을 깨뜨리십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자기를 맞이하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야곱이었기에 살 수 있는 방법을 나름대로 마련해 놓았지만 그래도 두려웠습니다.

야곱은 가족들을 먼저 강을 건너게 한 이후에 홀로 얍복강가에 남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지금 이 밤은 긴장된 밤이며 고통스러운 밤이었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형에서는 만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밤에 야곱은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 밤에 홀로 그 강가에 남아 자기에게 싸움을 걸어온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했습니다. 이 씨름은 추석 장사 씨름대회 같은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격렬한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이 때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만듭니다. 장애인을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얍복강가에서 야곱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를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에서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깨뜨리셨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자신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가 보이니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호 12:4)”.

야곱은 지금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겼는데 왜 야곱이 웁니까?

야곱의 눈물은 승리의 감격 때문에 운 것이 아닙니다. 밤새도록 싸우고 났더니 너무 힘들어서 우는 눈물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자신의 고백입니다. 이 눈물은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알고서 터져 나오는 항복과 감격의 눈물입니다.

지금까지의 야곱은 절대로 울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빼앗는 한이 있어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자신을 깨뜨리신 하나님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울뿐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실 때, 눈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깨뜨리시는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버티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깨뜨리심은 민낯을 보라는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얼굴을 민낯이라고 합니다. 여자들의 민낯을 보고 많은 남자들이 놀래곤 합니다.

언젠가 TV에서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남편에게 민낯을 한 번도 안 보이지 않고 살아가는 여자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남편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남편에게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서로의 민낯을 그대로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민낯’이라는 단어는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불의가 어떤 이유로 밝혀졌을 때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시는 것은 우리의 민낯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실체를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때로 가면을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가면이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뜨리시므로 민낯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민낯을 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민낯을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창피를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나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깨뜨리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시고 무너뜨리시는 것은 우리가 미워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더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리 손을 쓰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깨뜨리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고 그냥 내버려 두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기에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잘못된 길로 갈 때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깨뜨리시고 무너뜨리십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축복해 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중에 다윗의 후손들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들이 죄를 범하면 내가 매와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을 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악한 일을 하고도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육신이 건강하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몸으로 부지런히 죄 짓고 사는 것은 안 좋은 것입니다. 비록 몸이 아파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인생입니다.

깨뜨림은 일상 속에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신다고 생각하면 대단히 큰 부분만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작은 부분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깨뜨리심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상 가운데 우리를 깨뜨리실 때 그것을 잘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큰 깨뜨림을 안 당할 수 있습니다.

‘숨바꼭질’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오만데 한글이 다 숨었는 걸
팔십 넘어 알았다.
낫 호미 괭이 속에 ㄱ ㄱ ㄱ
부침개 접시에 ㅇ ㅇ ㅇ
달아 놓은 곶감에 ㅎ ㅎ ㅎ
제아무리 숨어 봐라
인자는 다 보인다”

이 시는 80세가 넘어서 글을 배우신 정을순 할머니가 지은 시입니다. 정을순 할머니에게는 단 한 개의 글자도 읽지 못했던 세월이었습니다. 그 세월 끝에 글을 배우고 주변을 바라본 할머니께서 한글에 둘러싸여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감동과 기쁨을 절묘하게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실시한 대국민 투표에서 최우수상을 받습니다. 할머니는 한글을 배움으로 일상에서 숨겨주신 한글을 찾아내는 숨바꼭질의 재미를 맛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 가운데서 우리의 민낯을 볼 수 있도록 많은 보물들을 숨겨놓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고, 어떤 글귀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일 수도 있고 누구의 말 한 마디일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생명의 전화 빌딩에 쓰인 글귀라고 하면서 사진 하나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신발이 없음을 한탄했는데, 거리에서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났다.”

이 글귀는 저를 깨뜨리는 글귀였습니다. 불평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부끄럽게 하는 글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상의 수많은 것들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깨뜨리십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십니다. 자존심을 깨뜨리십니다.

깨뜨림의 의미를 알고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깨뜨림을 잘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 차렸으면 회복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진정한 민낯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실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초청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깨뜨리심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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