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l So Good (기리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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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흩날리는 눈발처럼 왕성한 작업량을 선보이는 기리보이에게 새 앨범 하나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이벤트일지 모른다. 힙합의 언저리에서 자유롭게 장르를 넘나드는 래퍼이자 프로듀서. 나사 하나 채워주고 싶게 만드는 불완전함이 매력인 기리보이. ‘0개 국어’를 한다고 알려진 그의 입이 트였다.

기리보이 이름으로 나온 음악을 찾아 들어보면서 생각했다. ‘하나쯤 별로인 곡이 있을 만도 한데, 왜 다 좋지?’ 어휴, 그럼. 다 좋지.

당신이 생각해도 그런가? 자기가 만들어놓고 별로면 발표 안 하지 않나?

그런데 팬 아닌 다수에게 익숙할 법한 히트곡은 아직 없는 듯하다. 기리보이가 프로듀싱한 음악들에 시그너처로 깔리는 ‘G.R.보이’라는 소리는 낯설지 않은데 말이다. 히트곡을 내고 싶다는 열망, 얼마나 큰가? 그런 거 별로 없다. 평소에는 필요성 자체를 아예 못 느낀다. 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해줘도 된다. 다만 딱 한순간, 히트곡이 있었으면 하고 아쉬울 때가 있긴 하다. 대학교 축제 무대에 설 때. 관객들에게서 전해지는 에너지라는 게 있는데, 내 콘서트가 아닌 그런 무대에서는 대중적인 히트곡이 있어야 에너지가 다를 것 같다.

우리가 대화하는 지금부터 24시간 뒤인 122일 저녁에 정규 7집 <치명적인 앨범 III>가 발매된다. 이번 앨범에서 히트곡이 나올 수 있을까? 음… 안 나올 것 같은데?(웃음) 내 감성에 푹 젖어서 내 멋대로 만든 앨범인데, 그런 음악이 대중적으로 크게 히트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앨범을 감상용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전에 틀어놓을 만하다. 혹은 ‘제설’이라는 타이틀곡도 있고 하니 눈 오는 어느 날, 혼자 청승 떨면서 들어주세요.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들 제목만 쭉 보자. <육감적인 앨범>, <기계적인 앨범>, <외롬적인 4곡>, <갑분기>(갑자기 분위기 기리보이), <성인식>, <졸업식> 등등… 대충 지은 제목 같은 데 관통하는 주제는 있다. ‘치명적인’ 시리즈는 이번이 세 번 째고. 이번 앨범의 핵심은 뭔가? 콘셉트를 잡고 앨범을 만 들 때도 있고, 딱히 그런 게 없을 때도 있다. 이번에는 ‘내가 원래 하고자 했던 음악’을 했다. 어릴 때부터 영향을 받은 발라드, 인디밴드 음악 등의 가요와 팝 감성. 나는 그런 걸 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다른 것에 빠져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음악을 막 시작하던 무렵의 느낌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기리보이는 힙합 신의 인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전천후 멀티플레이어임을 드러내는 건가? 내가 워낙 하고 싶은 게 많다. 원래 힙합과 록 음악을 매일 들었는데 이번 앨범 작업하면서 완전히 끊었다. 카니예 웨스트 앨범 새로 나온 것도 안 들었고, 넷플릭스에 트래비스 스캇 다큐 풀린 것도 앨범 완성할 때까지 꾹 참고 안 봤다. 힙합 들으면 또 그런 색깔로 하고 싶어질까봐.

작업하는 동안 ‘필’을 유지하기 위해 자주 틀어놓은 음악이 있나? 어릴 때 많이 들은 노래들, 초기에 만들어 하드에 저장해놓은 것들, 데모 음악들을 다시 찾았다. ‘그때 내가 어떤 생각 했더라?’ ‘뭘 하고 있었더라?’ 떠올리면서. 성시경의 음악과 롤러코스터를 워낙 좋아했다. 김동률, 윤종신 선배님의 발라드도. ‘이때다’라는 곡은 롤러코스터 스타일로 만들어봤는데 주변에 들려주니 중독성 있다는 반응이 많았다.

롤러코스터는 현재 히치하이커라는 이름을 쓰는 지누, 기타 이상순, 보컬 조원선 한명 한명이 너무 주옥같은 존재인데 기리보이가 히치하이커의 영향을 받은 바가 있다는 점을 알고 나서 놀랐다. 그분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엿보고 뺏어오고 싶다. 만든 곡을 들어보면 그냥 다 좋다. 나를 위해 만든 것 같아.

히치하이커도 밴드 음악부터 ‘아브라카다브라’ 같은 사운드까지 다 소화하는 작곡가라 두 사람이 같이 음악 얘기하면 신구 거장이 대담하는 모양새일 텐데…(웃음) 그와 만난 적 있나? 만나면 뭘 물어보고 싶나? “남는 곡 있나요?”(웃음) 일단은 내 음악을 먼저 들려드려야겠다. 형님은 예전에도 남다른 느낌의 가요를 만드셨고, 팝은 물론 전자 음악도 잘하신다. 연락처를 알아서 문자를 몇 번 주고받았는데 날짜 잡자고만 하고선 아직 못 만난 사이다. 이제는 정말 만날 때가 됐다.

기리보이의 순수한 취향을 극대화해서 작업한 이번 앨범이 힙합 팬들에게는 신선한 배반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인디밴드 공연 보러 다녔다. 5년 전 <쇼미더머니>에 프로듀서가 아닌 참가자로 나갔을 때도 밴드 게이트 플라워즈와 함께 무대를 꾸몄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음악 신에 밴드 감성이 사라진 것 같더라. 내가 그 감을 잃어서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걸까? 가장 최근에 등장한 잘 알려진 밴드가 혁오 정도인 것 같다.

장기하 데뷔 전후로 흥미로운 인디밴드와 레이블이 꽤 생겨났지만, 이제 그런 식의 자리는 힙합이 차지했다. 국내 유명한 록 밴드 멤버가 ‘우리나라에서 록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라는 말을 인터뷰 때 한 기억도 난다. 하지만 힙합 신에서는 힙합에 록 감성을 결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지 않았나? 해외 힙합을 찾아 들어보면 록적인 힙합을 시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록 보컬처럼 노래 부르거나 사운드 면에서 록 느낌을 내거나. 우리나라에서는 록이 인기를 얻더라도 멜로디가 좋은 스타일이 유독 사랑받는 것 같다. 라디오헤드의 수많은 곡 중에서 ‘Creep’만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몇 년 전부터 ‘싱잉 랩’ ‘멜로디컬한 랩’이라는 게 부상했으니 멜로디의 중요성은 록 이야기만이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쇼미더머니 8>에 혜성같이 나타나 출연자들의 입을 벌어지게 한 고등학생 래퍼, 서동현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나? ‘빈지노가 내 옆에서 같이 랩을 뱉고 있는 것 같아’라고 취권 하듯 멜로디 타던 그 친구. 동현이는 천재다. 그 아이는 무대라는 것 자체를 <쇼미더머니 8>에서 처음 경험해본 건데 그 수준이다. 말 그대로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인물. 제대로 갖춰진 장비로 녹음을 평생 처음 하면서도 잘했고, 멜로디도 잘 쓴다. 무엇보다 착하다. 어른스러운 데가 있어서 내가 오히려 많이 배운다. 동현이를 보면 딱 드는 생각이 ‘와, 이런 아들 낳고 싶다’다. 좋은 부모님 아래서 잘 자란, 모든 걸 다 가진 애 같다.

대치동에서 중학교를 나와 대원외고에 입학했는데 대입까지는 무사히 치르고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하면 어떨까… 라고, 서동현 엄마도 아닌데 괜히 생각해봤다. 나도 동현이에게 그런 말 자주 했다. ‘공부 접고 음악 하겠다는 말 같은 거 하지 마라, 네가 할 공부를 우선 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이 음악이어야 좋은 음악이 나올 거다, 너의 원래 상태에서 바뀌려고 하지 말아라.’ 주변의 그런 조언을 동현이도 알아듣는다. 애가 똑똑하니까 쓸데없는 짓이나 이상한 행동을 안 한다. 자기도 공부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더라.

서동현 외 기리보이의 눈에 음악도 사람도 다 멋진 대상이 있나? 최근에 본 사람 중에서는 <쇼미더머니 8>에 출연한 짱유. 사투리 쓰면서 ‘형님’ 하는데, 그냥 사람 자체가 멋있다. 거기에 에너지도 있고, 정도 있고. 역시 <쇼미더머니 8>에 나온 맥대디 형은 랩과 그의 스타일이 완벽한 물아일체다. 보이고 들리는 대로의 모습 자체가 진짜 캐릭터 같아서 더 좋다. 물론 언제나 나의 ‘원 픽’은 바로 자이언티 형이다. 그 형의 모든 게 너무너무 멋있다.

기리보이의 멋과 개성은 상상력에서 오는 것 같다. 특히 가요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보편의 감성을 녹인 가사가 힙합 비트와 만날 때 자아내는 신선함이 있다. ‘이 빌어먹을 종이 안에 어려운 단어들을 이해하고’라는 식으로 이별의 상황을 설정하거나(‘이혼서류’), ‘많은 관심을 받고 싶어 너에게 소식이 닿을 만큼’이라고 연애 감정으로 이어가는 스타일(‘관종’)은 힙합 세계에서 좀 다른 감성이다. 자랑하고 나 잘났다고 말하는 것도 많이 해봤는데 그렇게 멋있는 것 같지가 않더라. 나는 ‘찌질’한 걸 드러내는 게 오히려 멋져 보인다. 영화 볼 때도 배우가 폼 잡고 있는 것보다는 이별한 연인에게 돌아오라면서 엉엉 우는 게 더 마음에 든다. 주인공이 우울감에 빠져 있고, 방은 더러운 상태에 술병이 뒹굴고 있는 장면 같은 것. <존 윅>에서 키아누 리브스도 멋지지 않나? 내가 그런 감성에 더 매력을 느끼니까 음악에도 그런 느낌이 담길 것이다.

내 경우 힙합 음악을 들을 때 가사집을 따로 보고 싶게 만든 뮤지션은 당신이 처음이다. ‘엉뚱하고 귀여운 자유시’가 힙합을 입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는데. ‘그녀의 예쁨 그녀의 향기 그녀의 말투 그녀의 발 그녀의 팔 / 그녀의 목 그 위에 목걸이 그녀가 담긴 그녀의 욕조 위 떠 있는 거품’. 어둡고 처절한 분위기인 이런 음악은 아픈 이별의 감정을 꺼내 쓴 건가? 절대 아니지. 빈집그거 사실은 살인에 관한 내용인데 난 살인을 한 적이 없으니까(웃음). 잘 들어보면 폭력적이고 좀 섬뜩한 내용이다. 내 꿈 중에 영화배우가 있었다.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만화가처럼 스토리 짜는 일을 좋아한다. 나는 현재 랩을 하고 있으니까 스토리를 랩 가사로 쓰는 거지. 음악에서 이것저것 중요한 요소가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분위기’다. 어쨌든 결국은 분위기가 답이더라, 음악은.

기리보이라는 캐릭터의 분위기는 어딘가 어눌하고 나른하다. 음악에 깔린 ‘찌질함’이 좋다는 팬도 많던데, 밑바탕에 약간의 우울함과 흔들리는 면도 느껴지고. 스스로는 본인이 어떤 부분에서 결여됐다고 느끼나? 너무 많다. 일단 맞춤법도 잘 모르고(웃음).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 시험을 보면 짝꿍이 채점해주는데 그게 너무 창피해서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내 몸이 좀 흐느적거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악수 하나를 할 때도 딱 카리스마 있게 하고 싶은데 흐느적흐느적, 비실비실. 음악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공부한다, 역사나 사회 문제 같은 거 검색하면서. 너무 멍청하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폰 하나로 모든 정보를 다 습득할 수 있는 세상인데 나는 왜 공부를 안 하고 있었을까?

같은 레이블 대표인 스윙스와 기리보이를 함께 두고 보면 그 대비가 더 두드러진다. 한 사람은 인생 파이팅을 외치며 자기 계발의 멘토가 되어 포효하고, 한 사람은 찌질함의 미학으로 살고. 그는 사자 같고, 당신은 엉뚱하며 천진난만한 소년 같고. 물론 작은 소년은 사자가 부르짖든 말든 전혀 쫄지 않는다. 그 형은 세상 욕을 다 먹고 살면서도 막상 세상 앞에 나섰을 때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여러 이유로 힘들어하는 게 바로 옆의 내 눈에는 보인다. 그런 티가 겉으로는 잘 안 난다는 게 바로 프로다운 면모겠지. 그런 점에서 나도 느끼는 바가 많다. 형의 끈기 하나만큼은 내가 확실히 알고.

두 사람의 ‘끄떡없음’의 양상이 좀 다를 텐데. 기리보이는 남이 뭐라고 하든 ‘노 상관’ 스타일 아닌가? 약한 사람 아니지 않나? 응? 나 약한데? 항상 내가 약하다고 느끼는데?

어떤 면에서 그런가? 사실 이렇게 얼굴 알려진 일을 하는 게 체질상 맞지 않다. 나는 그저 방구석에서 좋아하는 음악 만들며 사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다. 킹 메이커라고 하나? 내 얼굴은 드러내지 않은 채 누군가의 뒤에서 조력자가 되는 것. 그런 일에 더 가슴이 뛴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다. 스윙스 형의 영향도 있었고.

스윙스가 방구석에 처박히려는 재능을 수면 위로 끌어낸 셈인가? 그렇다. 형이 옛날부터 ‘우린 최고가 되어야 해’라고 하도 말하니까 학습되어서(웃음). 공연이라는 걸 처음 했을 때 너무 떨려서 가사도 다 틀렸고, 그냥 집에 가고 싶기만 했다. 남들에게 내가 비친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진다.

래퍼로 <쇼미더머니>에 나간 지 몇 년 안 되어 다른 래퍼들을 평가하고 곡을 기획하는 프로듀서가 됐다. 당신은 지금 아이돌에게 곡을 주면 고액의 작곡비를 받는 위치다. 그 이른 성공으로 욕망이 어느 정도 충족됐기에 이제 ‘체질’ 생각하며 뒤돌아보게 되는 걸까? 충족이 된 건 아니다. 일단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거의 안 한다, <쇼미더머니 3>에 나갈 때나 좀 했었지. 내가 유명해져서 어디에 가도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볼 정도인 상황을 떠올리면 너무 무섭다. 그거 SF 영화 내용 같지 않나? 어딜 가도 누군가 지켜보고, 감시받는 기분으로 사는 것. 그래서 ‘적당히만 하자’는 생각을 매일 하던 때가 있었다. 힙합인들은 ‘성공! 성공하자!’ 이러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런 걸 보고 배우고 싶지 않았다. 또 뭐 하나를 해서 잘되면 그것만 쭉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도 싫었다.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은 사람인데.

그래서 요즘의 상태는 어떤가? 음악을 하기 싫은데 한 적도 있고, 나 혼자 음악 만들고 즐기면 되는데 뭐 하러 세상에 내놓아 평가받고 사나 싶을 때도 있었다. 다잡기 위해서 일단 이것저것 재미 붙일 수 있는 일, 환기될 만한 일을 많이 찾아다녔다. 디제이도 하고, 만화책을 보거나 게임도 하고. 요즘엔 작업을 하고 싶을 때가 많아서 거의 맨날 한다. 그런 필이다. 음악적인 부분의 목표는 따로 없지만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 스튜디오에 숨어서 내가 만들고 싶은 음악 만들면서 쭉 살고 싶다.

철드는 것 같나? 철들기 싫다는 연예인은 많이 봤어도 철들고 싶다는 연예인은 아직 못 봤다. 나는 철들고 싶다. 2020년이면 서른인데 기분이 좀 이상하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막 울컥하고. 원래는 이 나이쯤이면 결혼해서 가정 꾸리고 싶었는데…. 철들어야 할 것 같다. 뭐 이러다 또 생각이 바뀌면서 왔다 갔다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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