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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불문 로맨스 퀸… 시대불문 첫사랑 보증수표 ‘손예진’

[전찬일 강유정의 한국영화 100년의 얼굴] (25·끝) 손예진(1982∼)
배우 ‘손예진’ 하면 첫사랑이 먼저 떠오른다. 첫사랑 영화의 고전이 된 ‘클래식’(감독 곽재용·2002) 때문만은 아니다. ‘연애소설’(이한·2002)의 심수인도,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오종록·2003)의 주일매도 그렇지만 손예진 하면 하얗고 푸른 바탕의 청량한 음료가 먼저 떠오른다. 10대에 광고로 먼저 데뷔한 손예진에게 있어 이런 ‘청순한 이미지’는 긍정 요소였음에 분명하다. 특히 손예진이 활동을 시작한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신인 여배우에게 있어 청순함은 매우 강력한 셀링 포인트였다. 아니, 엄밀히 말해, 대개 그 나이대의 모든 여배우들을 소비하는 중점적 매력이 바로 그 지점이다. 소녀적 청순함과 청결한 미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손예진은 20대 초반 여배우에게 대중이 바라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진 배우로 등장했다. 드라마 ‘맛있는 청혼’ ‘여름향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은 눈썹, 또렷한 눈동자, 적당히 긴 머리칼까지. 문제는 청순함의 유효기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다. 소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탐하듯 대중적 매체는 그 시절을 향유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소녀는 여성이 되며, 아이는 어른이 된다. 수많은 하이틴 여배우들이 성인 배우로 성숙하지 못한 채 사라진 이유도 여기서 멀지 않다. 소녀다움과 결별하기 위해 때로 과감한 선택을 하기도 하고, 거꾸로 소녀다움에 박제되기 위해 세월을 부정하기도 한다. 첫사랑으로의 성공이 클수록 변화의 위험부담도 커진다. 손예진이 바로 딱 그런 배우였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손예진은 청순가련한 10대의 이미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30대 여배우로도 성공한 매우 희귀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청순과 결별한 게 아니라 나이에 맞게 재개발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손예진의 성공은 자신이 일궈낸 첫사랑 여배우라는 아름답고도 위험한 수식어를 그때그때 어떻게 타협하며 개조하느냐에 달려있었다. 손예진은 매우 영리한 방식으로 첫사랑의 손예진을 보존하면서 성숙한 손예진을 보탰다. 어떤 점에서, 그 변화와 변신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첫사랑의 서사… 18년의 연속성

손예진의 첫 번째 영화 출연은 박기형 감독의 2000년작 ‘비밀’의 조연이었다. 하지만 같은 조연이라도, 손예진이라는 배우를 기억에 남긴 작품은 임권택 감독의 2002년작 ‘취화선’의 소운이었다. 취화선 장승업의 영혼에 각인된 첫사랑으로 등장한 소운, 이룰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사랑은 고운 한복의 자태와 함께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선명히 남겼다.

왼쪽부터 영화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아내가 결혼했다’. 해당 영화사 제공
2002년작 ‘클래식’의 주희와 지혜는 한국형 첫사랑 영화의 원형으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곽재용 감독 특유의 비와 물의 감수성, 아련한 장애물과 불가능한 결합의 서사들은 조승우와 손예진이라는 배우를 통해 하나의 신화로 남았다. 교복 우산 비 입학 전쟁과 같은 조금은 빤한 오브제와 고전적이며 정통적인 장애물 안에서 첫사랑의 신화는 오롯이 완성되었다.

손예진 영화 인생의 초반은 거의 이 첫사랑 이미지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연애소설’에서 손예진은 고(故) 이은주와 완전히 대조적인 청순가련형 여배우로 등장한다. 제목에서부터 첫사랑이 등장하는 ‘첫사랑 사수 궐기 대회’는 명랑만화 버전으로 변주된 첫사랑 서사라 할 수 있다. 손예진이 맡은 일매는 명랑 서사 주인공 태일이 반드시 획득해야 할 트로피와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한국영화사 안에서 첫사랑 서사란 늘 여성에게 수동적이며, 대상적인 역할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첫사랑 사수 궐기 대회’의 일매 역시 평범 이하의 남학생이 목표로 삼은, 최고의 ‘인기녀’이다. 손예진표 첫사랑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차태현표 로맨스인 이유이기도 하다. 로맨스와 코미디의 적극적 주체는 늘 차태현이고, 손예진을 비롯한 당대 20대 초반의 여배우들은 그 대상이 되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던 셈이다.

결국 여배우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만 했는데 그때 선택한 작품이 바로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이다. 손예진이 첫사랑 이미지의 배우에서 로맨스 영화계의 블루칩 손예진으로 연착륙하게 된 매개 역시 바로 이 작품이다. 소설가 김영하가 각색하고 이재한 감독이 연출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김수진은 지금껏 손예진이 맡아왔던 수동적인 식물성 여성 인물이 아니었다. 소주를 마시면서 사귀자고 말하고, 유부남과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가출도 하고,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어떻게든 성사시키며, 심지어 남편 가족의 불화를 봉합하기 위해 나서는, 그런 적극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해에 주연을 맡았던 ‘작업의 정석’(오기환·2005)의 한지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지원은 자신의 수려한 외모를 적극 활용해 ‘작업’에 이용하는 영악한 캐릭터로, 더 이상 운명의 바람 앞에 흔들리는 연약한 첫사랑의 여자가 아니었다. 당당하고 속악하게, 손예진은 이처럼 아름다움이라는 명사를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활용함으로써 아름다움의 구속을 조금씩 영화적으로 확장하고 풀어나갔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2005)에서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고 상대 여성의 남편과 사랑을 하게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소녀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아내로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며 그렇게 손예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왔다. 데뷔한 지 18년, 손예진이 모두 21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거의 주연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02년 첫 주연을 맡은 이후로 손예진은 매년 ‘다른’ 영화에 출연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강렬하고도 고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또 변화의 계단 앞에 선 손예진

왼쪽부터 ‘비밀은 없다’ ‘해적:바다로 간 산적’ ‘덕혜옹주’ ‘지금 만나러 갑니다’. 해당 영화사 제공
따지자면 손예진의 영화 인생은 계단이라기보다는 완곡한 상승 경사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 변신이 필요할 때마다 ‘연애시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와 같은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통해 대중적 이미지의 변화에 성공했고, ‘작업의 정석’ ‘아내가 결혼했다’(정윤수·2008) ‘비밀은 없다’(이경미·2015) ‘덕혜옹주’(허진호·2016)와 같은 영화들을 선택함으로써 변화의 지점들을 예고하기도 했다.

드라마의 변화들이 대개 성공적이었다면 영화에서의 변화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무방비도시’(이상기·2007)에서 팜 파탈로 변신을 예고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한편 ‘아내가 결혼했다’나 ‘오싹한 연애’(황인호·2011)는 대중적·비평적 평가가 나쁘지는 않았으나 완전히 새로웠다기보다는 약간의 변주에 가까웠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석훈·2014)이 코믹 블록버스터 영화로서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고, 대종상 여우주연상까지 받았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을 두고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재미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덕혜옹주’ 역시 정신을 놓친 노년 연기까지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긴 했으나 덕혜옹주라는 캐릭터와 역사적 고증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이장훈·2017)의 수아는 서른여섯의 손예진이 여전히 청순가련한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흡입력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새로운 도전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예진은 여전히 로맨스와 멜로드라마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배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예민한 예술영화의 신경증까지 담아낼 수 있는 배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손예진은 여전히 그 아름다움에 구속된 여배우라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70세와 80세의 그레이 로맨스와 그레이 멜로드라마가 가능하다면 어쩌면 손예진이 있기에 기대해볼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돌이켜보면 손예진이 주연을 맡은 작품 중에 대중적으로 크게 실패한 작품은 드물다. 이것이 손예진이 끊임없이 한국영화계의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 매우 큰 이유임에 분명하다. 지금껏 완만한 경사를 달려왔다면 진짜 높은 계단은 앞으로의 시간 속에 남아 있을 테다. 변화의 계단 앞에 선 여배우, 지금의 손예진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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