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아티스트 빛나는 조명 뒤엔…아이돌 뺨치는 매니지먼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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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1.25. 오전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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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도-클래식 매니지먼트의 세계]

매니지먼트 ‘부티크’형 뜬다
대형 회사는 거물의 그늘에 가려
조성진 등 세계 콩쿠르 우승자들
집중관리 받을 수 있는 부티크로

매니저는 ‘영혼의 단짝’
비자 발급부터 공연 계약 넘어
아티스트를 넓은 세계로 이끌어
“희로애락 함께”…10대때 발굴도

클래식 좁은 시장 ‘넘어야 할 산’
회사가 아티스트 컨셉 프로듀싱
스타성 갖춘 음악가 그룹 결성도
“위기일수록 음악발전에 집중을”
“그는 마치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해준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녀를 애지중지했어요. 만약 그녀가 자기 이를 닦아주길 원했다면, 그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

2016년 미국 주간지 <뉴요커> 기사에서 나오미 그래프먼이 중국계 여성 피아니스트 유자 왕(왕위자)과 매니저인 얼 블랙번의 관계를 설명하며 한 말이다. 화가인 나오미 그래프먼은 유자 왕의 스승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커티스 음대 교수인 게리 그래프먼의 아내였기에 유자 왕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유자 왕이 세계 클래식계의 떠오르는 별이기는 했지만, 블랙번 또한 30년 경력의 명망 높은 매니저였다.

유자 왕이 2014년 블랙번을 떠나 젊은 매니저 마크 뉴뱅크스에게로 간 것을 두고 <뉴요커> 기자 재닛 맬컴은 이렇게 썼다. “유자 왕이 이런 표현을 쓰진 않았지만, 매니저 교체는 결혼의 파경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내가 젊고 짜릿한 남자를 만나려고 나이 들고 무덤덤한 남편을 떠나는 것 같은 상황 말이다.” 하지만 유자 왕은 블랙번처럼 자신에게 헌신적이지 않은 뉴뱅크스를 두고 맬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남자친구나 조수를 고용해야 하는 걸까요?” 결국 유자 왕은 2018년 뉴뱅크스와 결별하고 다시 블랙번에게로 돌아온다.

클래식 아티스트와 매니저의 관계는 흡사 결혼한 부부처럼 보일 때가 많다. 유자 왕과 블랙번의 관계처럼 파경과 재결합을 거듭하는 관계도 있고, 한쪽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티스트에겐 비자 발급부터 공연 계약까지 수많은 행정 업무를 처리해주는 것을 넘어 오랜 경험과 탄탄한 인맥을 기반으로 자신을 더 넓은 세계로 이끌어줄 매니저가 필요하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서구 클래식 매니지먼트의 역사는 클래식의 역사만큼 오래됐지만, 기업형 매니지먼트가 등장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다. 세계적 클래식 아티스트의 이름 옆에는 언제나 143년 역사를 가진 영국의 아스코나스 홀트, 89년 된 미국의 컬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CAMI) 같은 유서 깊은 클래식 매니지먼트 회사의 이름이 따라붙었다. 이런 매니지먼트 회사의 핵심은 당연히 매니저들이다. 아네조피 무터와 발레리 게르기예프 같은 거물 아티스트를 보좌하며 53년 동안 컬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의 간판 매니저로 일하다 올해 은퇴한 더글러스 셸던(78)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2003년 그의 사무실에서 인턴을 했던 박선민 공연기획 컨설턴트는 “서너명의 보조 매니저를 데리고 있는데도 환갑이 훌쩍 넘은 셸던이 자기보다 20살이나 어린 무터의 무대의상을 직접 들고 다니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셸던은 ‘매니저는 24시간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공연장이나 호텔 쪽 관계자들을 만날 때는 항상 정장을 입고 얕보이지 않도록 딱딱하게 굴어라. 매니저가 우습게 보이면, 아티스트도 우습게 본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리처드 용재 오닐(가운데)과 ‘앙상블 디토’의 피아니스트 스티븐 린(뒷줄 왼쪽),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정(뒷줄 오른쪽), 첼리스트 문태국(앞줄 오른쪽). 디토는 올해를 끝으로 활동을 종료했다. 크레디아 제공


■ 저무는 메이저, 뜨는 부티크

최근 세계 클래식 매니지먼트의 흐름은 ‘메이저’에서 ‘부티크’로 이동하고 있다. 대형 메이저 매니지먼트사들에서 일하던 매니저들이 관리하던 아티스트들을 데리고 나와 소수정예 부티크 회사를 설립하는 일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해리슨패럿 등에서 20년 가까이 일한 매니저 리비 에이브러햄스가 2014년 아이엠지(IMG)를 퇴사하면서 지휘자 테오도르 쿠렌치스와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를 데리고 나와 키노트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를 차린 것이 대표적이다.

세계적 콩쿠르에서 우승한 국내 아티스트들은 대형 매니지먼트사에서 거물 아티스트들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보단 집중적인 관리를 받을 수 있는 부티크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조성진도 쇼팽 콩쿠르 우승 직후인 2016년 프랑스의 부티크 매니지먼트사인 솔레아와 계약을 맺었다. 2017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선우예권도 키노트를 선택했다. 2008년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아스코나스 홀트와 계약하며 기자회견까지 열었던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이다.

노부스 콰르텟. 사진 Jinoo Park, 목프로덕션 제공


■ “천재와 희로애락 함께하는 영광”

서구에 비해 한국의 클래식 매니지먼트 역사는 짧을 수밖에 없다. 해방 이후 클래식 공연은 언론사가 기획한 경우가 많았고, 민간 클래식 기획사는 1972년 김용현 대표의 국제문화회가 최초였다. 지금과 같은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 크레디아 같은 ‘2세대’ 매니지먼트사가 등장한 이후다. 2000년대 후반에 크레디아를 거친 매니저들이 세운 목프로덕션, 아트앤아티스트, 봄아트프로젝트는 콘서트 매니지먼트보다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에 더욱 집중하는 회사들이다.

이 중 목프로덕션은 노부스 콰르텟, 선우예권 등 국내에서 가장 많은 28명의 연주자와 전속계약을 맺어 국내에서 가장 활발히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사업을 하고 있다. 매니지먼트 사업의 관건은 아티스트의 예술적 재능을 먼저 알아보고 선점하는 것이기에 10대 연주자한테도 관심을 가진다. 이샘 목프로덕션 대표는 주요 콩쿠르는 물론 중학교인 예원학교 오케스트라 협연까지 챙겨 볼 정도다. 10대 때부터 함께하다 보니 사생활이 분리가 잘 안 되는 면도 있다. “아티스트가 28명인데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나. 사춘기를 맞은 연주자가 음악을 안 하겠다며 가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티스트들의 경조사를 겪으면서 마치 내가 수없이 결혼한 것 같고 수십명의 아이를 출산한 것 같다. 이런 어려움을 넘어 천재적 예술가를 통해 내가 갈 수 없는 영역의 환희를 함께 경험하는 건 매니저의 영광이다.”

수익 분배는 어떻게 이뤄질까. 이 대표는 “국외에선 아티스트 대 매니지먼트사 분배 비율을 8 대 2로 나누는 걸로 고정되어 있다”며 “국내에선 업무 영역이나 경력에 따라 차이가 크다. 업계에선 7 대 3이 많은 편이고, 신인의 경우 6 대 4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협소한 시장에서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만으로 버티기는 힘들다. 실제로 매니지먼트사들은 공연 기획, 홍보, 음반 제작, 기업체 행사 대행 등을 선택적으로 병행한다. 이 대표는 “공연 기획과 매니지먼트를 한 사람이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모순이기도 하다. 흥행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공연기획자와 아티스트의 예술적 면을 보호해줘야 하는 매니저의 역할이 내적으로 충돌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Jeremy Enlow/Cliburn, 목프로덕션 제공


■ 일정 관리부터 프로듀싱까지

현대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는 내한 공연을 주최하거나 아티스트의 일정을 관리하고 수행하는 소극적인 ‘콘서트 매니지먼트’를 넘어, 회사가 적극적으로 아티스트의 이미지와 콘셉트를 기획해내는 ‘프로듀싱’의 영역에 이르렀다. 국내에선 첫번째 성공 사례가 바로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고아로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장애인이고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는 불우한 환경에서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한 그의 스토리는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2006년 크레디아에선 이런 스토리에 착안해 ‘섬집 아기’ 등 슬픈 노래로만 구성한 앨범 <눈물>을 기획했고 통산 8만장 판매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크레디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7년 용재 오닐을 중심으로 스테판 피 재키브, 지용 등 뛰어난 실력에 수려한 외모까지 갖춘 젊은 음악가들로 진용을 짠 실내악 프로젝트 연주단체 ‘디토’를 결성해 대박을 터뜨렸다.

이강원 크레디아 이사는 “용재 오닐과 디토의 사례는 워낙 시장 규모가 작기에 이를 확장해보려는 시도 끝에 일궈낸 성과였다. 디토 때는 ‘이삼십대 여성이란 대상층에 맞춰 상업적으로 접근한다’는 우려도 많았지만, 이제는 대중적 인지도와 파격적 시도를 원하는 연주자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Harald Hoffman/Deutsche Grammophon, 크레디아 제공


■ “음악적 발전에 더 집중해야”

수준 높은 클래식 음악가들은 점점 많아지지만 관객층은 좀처럼 늘지 않는 것은 국내 클래식계의 오랜 숙제다. 여기에 뉴미디어의 등장은 기회보단 위기가 되고 있다. 이강원 이사는 “클래식계가 미디어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음반 제작이 축소되고, 방송에서도 외면하니 홍보를 할 통로가 줄었다. 자구책으로 유튜브도 만들지만, 고전음악의 특성상 뉴미디어에 적응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크레디아와 목프로덕션 등 7개 클래식 기획·매니지먼트사가 각 사의 대표 연주자들을 한 무대에 올린 ‘스타즈 온 스테이지’를 기획한 것도 이런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경쟁 관계인 회사끼리 힘을 합쳐야 할 정도로 상황이 절박한 것이다. 2017년 결성된 사단법인 ‘영 아티스트 포럼 앤 페스티벌’도 여러 매니지먼트사가 모여 악단·연주자와 함께 새로운 방향을 찾고, 젊은 연주자를 발굴·육성하기 위해 포럼과 연주회를 같이 여는 단체다.

한정호 에투알클래식 앤 컨설팅 대표는 “유튜브 같은 뉴미디어로 클래식 인구가 늘어날 것이라는 낙관주의나 ‘케이클래식으로 동남아를 개척하자’는 제국주의적 시각 모두 문제가 있다. 그동안 질적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기에 조성진 같은 스타도 등장할 수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본질적인 음악 발전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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