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수많은 젊은 가슴 피로 물드나”…이한열 쓰러진 뒤 동료가 남긴 슬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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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1.12. 오후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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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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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쓰러진 뒤 동료들이 남긴 ‘날적이’…이한열기념사업회에 기증
이한열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글도 발견돼
“혁이 형 꼭 살 거다…왜 수많은 젊은 가슴 피로 물들게 하나”
이한열 열사의 필체로 보이는 1987년 3월21일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 날적이 글.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혁이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나는 드디어 참고 있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 모라는 놈이 보았어도 웃지는 못했을 거야. 그리고 결심을 했지. 어머니 노래의 가사처럼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내가 무언가는 해야 한다고.”

1987년 6월9일 반독재 시위에 참석했던 연세대생 고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뒤, 그가 생전 활동한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 날적이(1980~1990년대 대학 학과방에 있던 대학생들의 공용 일기장)에 적힌 글이다. 혁이는 ‘혁명’의 준말로 이 열사의 별명이다. 12일 이한열기념사업회는 “만화사랑으로부터 1987년부터 1996년까지의 날적이를 기증받아 이한열기념관으로 반입했다. 이한열의 글씨체로 보이는 글도 있다”고 밝혔다. 만화사랑은 동아리방에서 자료를 보관해오다 공간이 부족해 지난해 11월 사업회에 기증 의사를 밝혔다. 이 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인 임재우 만화사랑 회장은 “이 열사 관련 기록이고 사업회에서 자료를 잘 보관해줄 것이라고 뜻이 모여 스캔본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기증했다”고 말했다.

1987년 3월19일 쓰인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 날적이.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날적이에는 이 열사를 떠나보낸 동료의 슬픔이 담겼다. 그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뒤인 1987년 6월11일에는 “이 땅이 왜 수많은 젊은 가슴을 피로 물들게 하는지, 왜 우리는 슬퍼하고 통곡하는 많은 어머니를 가져야만 하는지”라는 글이, 같은 해 6월16일에는 “슬프다. 하지만 웃자. 기쁨의 그 날을 위해. 혁이 형은 살 거다. 꼭 그럴 거다. 웃으며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라는 글이 적혔다.

필체를 고려했을 때 이 열사 본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글도 발견됐다. 1987년 3월21일치 날적이에는 “전방입소 공청회는 86들의 참여 속에 활발한 의견개진이 있었으나 87들이 많이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는 글이 적혔다. 글이 쓰이기 1년전께인 1986년엔 최전방 부대에서 1주일의 군사훈련을 받아야 교련 학점을 주던 ‘전방 입소 교육’를 거부하는 투쟁이 이어졌다. 사업회 관계자는 “전방입소 거부 투쟁에 대한 생각을 나누려는데 참석률이 낮아 반성하는 내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경란 이한열기념관 관장은 12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훈증, 목록화, 자료화를 마친 뒤 필요한 분들이 자료를 만나볼 수 있도록 하겠다”며 “원본 전시 여부는 자료 정리 뒤에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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