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흰 밥, 김용택

흰 밥



김용택



해는 높고


하늘이 푸르른 날


소와 쟁기와 사람이 논을 고르고


사람들이 맨발로 논에 들어가


하루 종일 모를 낸다


왼손에 쥐어진


파란 못 잎을 보았느냐


캄캄한 흙 속에 들어갔다 나온


아름다운 오른손을 보았느냐


그 모들이


바람을 타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파랗게


몸을 굽히며 오래오래 자라더니


흰 쌀이 되어 우리 발 아래 쏟아져


길을 비추고


흰 밥이 되어


우리 어둔 눈이 열린다


흰 밥이 어둔 입으로 들어갈 때 생각하라


사람이 이 땅에 할 짓이 무엇이더냐



[태헌의 한역(漢譯)]


白飯(백반)



日高春天碧碧日(일고춘천벽벽일)


人驅耒牛治水田(인구뢰우치수전)


衆人赤足入田裏(중인적족입전리)


盡日揷秧無休眠(진일삽앙무휴면)


君不見左手中靑靑稻苗(군불견좌수중청청도묘)


又不見黑泥裏入出右手(우불견흑니리입출우수)


稻秧因風欲倒下(도앙인풍욕도하)


靑靑屈身生長久(청청굴신생장구)


終竟爲白米(종경위백미)


照耀吾前路(조요오전로)


終竟爲白飯(종경위백반)


開敞吾暗眸(개창오암모)


白飯呑口時(백반탄구시)


吾子思而思(오자사이사)


人生於世間(인생어세간)


做事果是何(주사과시하)



[주석]


* 白飯(백반) : 흰 밥, 백반.


日高(일고) : 해가 높다. / 春天(춘천) : 봄 하늘. / 碧碧日(벽벽일) : 푸르른 날, 푸르고 푸른 날.


人驅耒牛(인구뢰우) : 사람이 쟁기와 소를 몰다, 사람이 쟁기를 메운 소를 몰다. / 治水田(치수전) : 논을 고르다. ‘水田’은 논을 가리킨다.


衆人(중인) : 여러 사람들. / 赤足(적족) : 맨발. / 入田裏(입전리) : 전답 안에 들어가다. 여기서 전답은 논을 가리킨다.


盡日(진일) : 진종일, 온종일. / 揷秧(삽앙) : 모를 심다, 모를 내다. / 無休眠무휴면) : 쉼이 없다, 쉴 겨를이 없다.


君不見(군불견) : 그대는 ~을 보지 못했는가? / 左手中(좌수중) : 왼손 안. / 靑靑稻苗(청청도묘) : 푸르고 푸른 못 잎.


又不見(우불견) : 또 ~을 보지 못했는가? / 黑泥裏(흑니리) : 검은 흙 속. / 入出(입출) : 들고 나다, 들어갔다 나오다. / 右手(우수) : 오른손.


稻秧(도앙) : 볏모. / 因風(인풍) : 바람으로 인하여. / 欲倒下(욕도하) : 쓰러지려고 하다.


靑靑(청청) : 푸르고 푸르게. / 屈身(굴신) : 몸을 굽히다. / 生長久(생장구) : 오래 자라다.


終竟(종경) : 마침내. / 爲白米(위백미) : 흰 쌀이 되다.


照耀(조요) : ~을 비추다. / 吾前路(오전로) : 우리의 앞길.


爲白飯(위백반) : 흰 밥이 되다.


開敞(개창) : ~을 활짝 열다. / 吾暗眸(오암모) : 우리의 어두운 눈.


呑口時(탄구시) : 입으로 삼킬 때, 입으로 들일 때.


吾子(오자) : 그대. / 思而思(사이사) :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人生(인생) : 사람으로 살다. / 於世間(어세간) : 세상에서.


做事(주사) : 하는 일, 할 일. / 果是何(과시하) : 과연 무엇인가?



[직역]


흰 밥



해 높고 봄 하늘 푸르른 날


사람이 쟁기와 소 몰아 논 고르고


사람들은 맨발로 논에 들어가


하루 종일 모 내느라 쉴 겨를 없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왼손 안에 있는 푸르고 푸른 못 잎을!


또 보지 못했는가?


검은 흙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오른손을!


모들이 바람 때문에 쓰러질 듯하면서도


푸르고 푸르게 몸 굽히며 오래 자라더니


마침내 흰 쌀이 되어


우리 앞길을 비추고


마침내 흰 밥이 되어


우리 어둔 눈을 열었지


흰 밥을 입으로 들일 때


그대여, 생각하고 생각하라!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살면서


할 일이 과연 무엇인지를…



[漢譯 노트]


살기 위해 먹든, 먹기 위해 살든 누구나 다 밥을 먹는다. 고관대작들도 밥을 먹고 지하도(地下道) 노숙자들도 밥을 먹는다. 성찬(盛饌)이든 소찬(素饌)이든 먹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요컨대 그 밥값을 버는 방법과 밥값을 하는 모양새는 저마다 다르다. 각설이 품바 타령도 따지고 보면 밥값을 벌고 밥값을 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밥값은 꼬박꼬박 받으면서도 밥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밝히기가 정말 부끄럽지만 역자는 사실 고교 시절에 이미 음주를 하였다. 고교 2년 시절 여름 방학에 친구들과 밤늦도록 술을 진탕 퍼먹고는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적이 있었더랬다. 점심시간도 한참 지난 시각이라 배가 고파 혼자 찬물에 밥을 말아먹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불쑥 방문을 여시더니 역자를 한심하게 내려다보시고는, “밥이 아야 소리 안 하다?[밥이 아프다는 소리를 안 하더냐?]”라고 하셨다. 역자가 아버지께 들은 여러 책망의 말 가운데 가장 아프게 다가온 것이었다. ‘밥값도 못하는 한심한 놈’이라는 뜻의 이 말은 이상하게도 역자에게는 두고두고 힘을 주는 말이 되었다. 그리하여 “무얼 하든 밥값은 하자.”는 것이 역자에게는 평생의 좌우명처럼 되었다. 역자는, 선생이 선생답지 못하거나 학생이 학생답지 못하다면 밥값을 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평범한 듯하지만 ‘답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말이 아닌가!


“사람이 이 땅에 할 짓이 무엇이더냐”라며 밥값 하기를 권하는 김용택 시인의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역자는 당(唐)나라 시인 이신(李紳)의 <민농(憫農:농민들을 불쌍히 여기며)>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鋤禾日當午(서화일당오)


汗滴禾下土(한적화하토)


誰知盤中餐(수지반중찬)


粒粒皆辛苦(입립개신고)


벼에 호미질하자니 해가 한낮이 되었는데


벼이삭 아래 흙에 땀이 방울져 떨어지네.


누가 알리요, 밥상 위의 쌀밥


알알이 모두가 농민들 수고한 것임을!



쌀을 뜻하는 ‘米’자를 파자(破字)하면 ‘八十八’이 되는데 혹자는 쌀밥 한 톨이 만들어지기까지 여든 여덟 번의 손길이 가야 한다고 해서 만들어진 글자로 보기도 하나, 기실은 이삭 하나[가로선]에 여러 개의 낱알[여섯 개의 점]이 달린 것을 형상화한 상형문자이다. 어쨌거나 쌀밥 한 톨 한 톨에 농민들의 숱한 신고(辛苦)가 밴 것임은 틀림이 없다.



‘米’의 고문자


연 구분 없이 18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16구의 한시로 재구성하였다. 오언과 칠언은 물론 십언(十言) 시구(詩句)까지 사용하였으며, 원시의 일부 시어는 시화 과정에서 누락시키는 한편 마지막 2행은 오언 4구로 재구성하면서 원시에 없는 시어를 일부 보태기도 하였다. 짝수구마다 압운을 하면서 4구마다 운을 바꾸었다. 이 시의 압운자는 ‘田(전)’·‘眠(면)’, ‘手(수)’·‘久(구)’, ‘路(로)’·‘眸(모)’, ‘思(사)’·‘何(하)’이다.


2019. 12. 17.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 지난주에 소개한 ‘학생들이 지은 한글 영물시’ 제목 공개…


1. 베개[枕] / 2. 열쇠[鍵] / 3. 술[酒] / 4. 은행잎[杏葉] / 5. 거울[鏡] / 6. 시간[時間] / 7. 지하철[地鐵] / 8. 가로등[街燈·路燈] / 9. 접이식 부채[合竹扇·折疊扇] / 10. 흔들바위[掀動石] / 11. 스마트폰[智能手機] / 12. 고드름[氷柱] / 13. 스마트폰[智能手機] / 14. 쓰레기통[塵芥桶] / 15. 자전거[自轉車·自行車]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