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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를 떠나 압해도에 정박하는 철선
ⓒ 김대호
함께 향토사를 연구모임을 하는 고 선생에게 연락이 왔다. 압해도를 가자는 것이다. 집안에 처박혀 있자니 좀이 쑤시던 터라 귀가 솔깃했지만 한번 퉁겨 보기로 했다.

“형님, 요즘 압해도에 동어(숭어)가 한창이라던데 따라가면 소금장에 창시(내장) 배터지게 먹고 오는 거요?”

숭어회를 사준다는 고 선생의 다짐을 억지로 받고 서야 어슬렁어슬렁 고양이 세수를 하고 목포 북항으로 향했다.

“아니, 김 선생이 여긴 무슨 일이요?”

부둣가에서 대학원 은사인 이종화 교수님이 반갑게 맞는다. 뒤이어 사학과 고석규 교수님과 도서문화연구소 문병채 교수님, 초당대 이덕안교수님(관광경영학과)까지 나타나 잔뜩 긴장하게 한다.

알고보니, 숭어회는 양념이고 오늘의 본 메뉴는 압해도 유적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한다는 것. 장난기 많은 고 선생에게 보기 좋게 한방 먹는 순간이었다.

▲ 몽고군의 침입을 처음 발견했을 송공산성
ⓒ 김대호
북항에서 배를 타고 5분 만에 압해도에 도착했다. 이름이 특이해서 인지 그래서 외지 사람들은 ‘앞에도’가 변해서 압해도가 된 것 아니냐고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압해도에 '누를 압(押)' 자에 '바다 해(海)'를 쓰는 것은 두 가지 설이 있다. 압해도를 거점으로 해상진출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는 설과 수달장군으로 대표되는 서남해안의 해상세력을 누르고자 하는 의미라는 주장이다.

동국여지승람과 속고려사 등에 따르면 이 항로는 통일신라 이전부터 사용되었고, 수도 개성과 평양으로 가는 세곡을 운반하는 통로로 쓰였다 한다. 또 송공산성은 이 항로를 감시하는 곳이었다고.

이 항로를 해상세력에서 침탈당했을 경우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흑산도까지 돌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이 지역이 고대 서남해안을 아우르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김 선생, 고려시대 목포 앞 바다를 침범했던 몽고군이 정규군도 아닌 압해도 사람들에게 쫓겨 회군한 사건을 아는가?”

삼별초가 진도에 용장산성을 쌓고 몽고군과 항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지만 압해도 해전은 고 선생에게 금시초문이었다.

거기다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던 시기에 승전보를 울렸다고 하니 처음엔 야사나 섬 마을 전설쯤으로 생각했다. 고 선생은 성곽이나 유물들을 통해 고대의 압해도를 보여주겠다고 장담한다.

▲ 송공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서해바다
ⓒ 김대호
그 첫 번째가 몽고와의 정면승부를 벌인 송공산성이었다.

차라대(몽고 장수)가 일찍이 70여 척의 수군을 거느리고 깃발을 나부끼며 압해를 공격하며 나와 관인 1명을 다른 배에 타게 하고 독려케 했는데, 압해 사람들이 대포 2문을 큰 함선에 장치하고 기다리고 있으므로 양쪽 해군이 서로 대치한 채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차라대가 해안 위에서 바라보더니 우리를 불러서 말하기를 “우리 배가 포격을 받으면 산산이 부서질 것이니 감당할 수 없다”면서 다른 곳으로 배를 옮겨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압해 사람들이 도처에 포를 비치해 둔 까닭에 몽고 사람들이 드디어 해상 침공을 포기하였다. <고려사 130, 열전 43, 한홍보전>


▲ 송공산 정상비
ⓒ 김대호
구릉에 위치한 성을 상상했는데 성은 230.9m 송공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 정도 높이쯤에야 하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움직이기 싫어하는 골방스타일 탓인지 숨이 턱까지 차온다.

‘김 선생 운동 좀 해야겠어’ 하시며 이종화 교수님이 교수님 걸음을 앞지른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송공산성은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돼 돌무더기로 보였으나 일부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는 곳도 있었다.

고석규 교수는 목포 앞바다를 오가는 배들을 감시했던 곳이 송공산성이었고 몽고군의 침입을 처음으로 발견해 봉화를 올렸던 곳도 이곳이었을 것이라는 전했다.

“김 선생, 산꼭대기에 있는 우물을 본 적 있소?”

우물이란 게 개울이 빗물이 고이거나 물을 저장할 수목이 있어야 되는 것이라는 내 상식과 달리 송공산성 안에는 현재까지 우물이 잘 보전돼 있었다.

다만 최근 석축공사 탓인지 바닥이 말라있어 갈증을 달랠 수 없었던 것이 조금 아쉬웠다.

▲ 신기하게도 산 정상에서 솟아 오르는 우물(좌), 풀 숲에서 발견된 망루를 지탱했을 주춧돌(우)
ⓒ 김대호
기와 파편들과 청자 파편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고 선생이 도난을 피하기 위해 감추어 두었다는 홈이 파인 건물 주춧돌도 구경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가본 곳이 주민들이 ‘흙성안’으로 부르는 토성이었다.

그런데 그 규모가 초기백제의 중요 군사거점이었던 풍납토성에 견줄 만큼 거대한 규모였다. 높이가 4.8m에 이르고 너비는 10여m, 거기다 그 길이는 2.5㎞에 이른다.

▲ 서울 풍남토성과 견줄만한 규모의 '흙성안' 토성
ⓒ 김대호
성 내부는 토기부터 시작해 청자파편까지 발견되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2기의 고분이 있어 그 발굴 결과가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석규 교수는 “판축식 성곽구조로 조곡창이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보여 조세보관용은 아닌 것 같고 바다에서 성을 보기 힘들다는 점을 볼 때 선박을 숨겨놓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 석기시대 거석문화를 알려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동서리 선돌
ⓒ 김대호
압해도는 선사시재부터 현대까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역이다. 목교리 등 섬 곳곳에 산재돼 있는 40여기의 고인돌을 비롯해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선돌은 지금도 볼 수 있다.

문병채 교수는 “압해도의 갯벌은 붉다. 황토가 녹은 갯벌에서 모시조개와 같은 풍부한 해산물을 채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석기와 신석기인들이 모여 살았고 동시에 거석 문화가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직 압해도는 숨어있다. 선사시대의 흔적도 수달장군이 품었던 백제의 꿈도, 몽고와 맞섰던 섬사람들의 기백도 노을보다 붉은 황토들에 숨어있다.

▲ 내년 완공예정인 목포-압해도간 압해대교(멀리 보이는 곳이 목포)
ⓒ 김대호
지금 압해도엔 목포를 잇는 압해대교 공사가 한창이다. 섬사람들은 ‘내년에 완공된다고 했지만 2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예산배정에 인색한 윗사람들에게 아쉬움을 전한다.

육지가 되면 압해도는 과연 무엇을 품게 될까? 과거 도회지 사람들에게 땅을 빼앗겨 버린 섬사람들이 다시 주인 노릇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겨울숭어 맛이 홍어 맛에 뒤질까"
압해도 송공항 미락횟집 숭어회

▲ 겨울동어 회와 내장 맛에 흠뻑 취한 교수님들
회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농어나 광어, 더 고급인 사람은 흑산홍어를 찾지만 섬사람들의 입맛은 다르다.

도시인들에게 회 축에도 들지 않지만 입맛이 고급인 섬사람들은 초겨울 숭어를 모치, 한겨울엔 동어라 하여 회중의 으뜸으로 친다.

생선도 맛이 차는 제철이 있기 마련, 여름 홍어는 가을 운저리만 못하고 여름엔 민어와 병어만한 생선이 없다. 가을 전어 머리엔 깨가 서말이고 겨울엔 홍어와 농어가 맛있지만 겨울숭어도 빠지지 않는다.

미식가들은 회는 입도 대지 않고 겨우내 먹이를 먹지 않아 비어있는 숭어내장을 재래소금에 참기름을 부은 소금장에 찍어 즐겨 먹는다. 그 맛이 하도 좋아 사위도 주지 않는단다.

여름숭어는 살에 물이 차고 흙냄새마저 풍겨 섬사람들은 개 먹이로 줄뿐 입에 대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 겨울을 보내고 봄에 영산강 인근에서 채취한 숭어알은 어란으로 가공해 ‘영암어란’이라는 이름으로 임금에게 진상했는데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사라지면서 세발낙지와 함께 압해도 산이 가장 맛이 좋다.

동어 맛을 보기 위해 압해도 송공항에 있는 미락횟집을 찾았다.

이덕안 교수는 ‘중국 황실에서는 어란이 미녀를 홀리는 술안주로 널리 애용될 만큼 유명했으며, 압해도 황토갯벌은 참숭어의 주요 산란장으로 풍부한 영양염류 덕분에 맛이 월등하다“고 가르쳐 준다.

이 집 주인인 김금진(여·30)씨는 “숭어는 매운탕도 맛있지만 된장을 풀어 대파에 풋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끓여도 일품이다. 요즘 겨울 동어를 맛보기 위해 송공항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한다.

육질이 단단하고 단맛이 드는 것이 침샘을 자극해 식욕을 돋운다. 내장안주에 소주가 금세 서너병이 동이 난다. / 김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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