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풍문으로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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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1.04. 오전 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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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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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한국 대중음악계의 나침반은 ‘트로트 고고’의 개막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록(당시엔 ‘고고’라 했다) 음악과 트로트가 만난 이종교배의 산물이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시작으로 최헌, 윤수일, 조경수, 함중아, 김훈 같은 가수들이 1979년까지 연속적으로 히트곡을 쏟아냈다. 1975년 대마초·금지곡 파동으로 청년문화와 밴드 음악(당시엔 ‘그룹사운드’) 지대가 와해된 틈새에서 대중음악가들이 살아남기 위해 타협을 시도한 장르가 트로트 고고였다. 대중들은 열광했다. 젓가락 장단 두들기며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었다. 심지어 소풍 나간 초등생들 입에서도 ‘오동잎’(최헌) ‘돌려줄 수 없나요’(조경수) ‘진정 난 몰랐었네’(최병걸)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시대를 풍미한 인물 중 한 사람이 함중아다. 다문화 가정 출신(당시엔 '혼혈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경북 포항이 고향인 순수 토종 한국인이다. 어릴 때 집안이 너무 가난해 집을 나왔다가 펄벅재단과 인연이 맺어지면서 일찌감치 음악인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멤버가 모두 혼혈인으로 구성된 밴드에서 음악을 하고 싶어 굳이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는 숨은 사연이 있다. 물론 서구적 외모 때문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함중아는 곧잘 혼혈 가수 윤수일과 ‘라이벌’로 비교된다. 함중아가 탈퇴한 밴드의 빈자리를 윤수일이 메꿨는데, 이 팀이 ‘사랑만은 않겠어요’라는 노래로 대박을 쳐버렸다. 늦게 시작한 윤수일이 먼저 유명해지자 이에 자극받은 함중아가 만든 회심의 역작이 바로 ‘안개 속의 두 그림자’다. 이후로 두 사람은 숱한 히트곡을 만들면서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내게도 사랑이’에서 알 수 있듯, 함중아 표 음악은 대단히 감각적이다. ‘풍문으로 들었소’ ‘그 사나이’ 같은 노래는 30년 이상 묻혀 있다 근년에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 쓰이면서 시대를 앞선 독창성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트로트 고고가 자리를 잡는 데는 음악 도시 부산의 힘이 컸다. 부산 사람은 화끈한 음악도, ‘뽕끼’ 서린 애상적 음악도 좋아한다. ‘다양성’ 혹은 ‘용광로’라 불리는 지역 특성이 그렇다. 함중아가 1984년 이후 부산에 정착하도록 이끈 힘도 부산의 품일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하루 소주 30병씩 들이켜는 애주가였다는 풍문이 있었다. 풍문은 끝내 암 투병을 거쳐 지난 주말 ‘죽음’이라는 현실의 땅에 당도하고 말았다. 식은 적이 없었던 고인의 음악 열정을 생각하면 67세는 너무 때 이른 부고다. 명복을 빈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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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도 분별도 아닌 공감! 김건수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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