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 놀리는 장애인 코미디언 뻔뻔한 게 아니라 fun fun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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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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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스탠드업 코미디언 한기명

"여러분이 제가 하는 코미디를 보고 '웃어야 돼? 안 웃을 수도 없고…' 이렇게 생각하느라 힘드실 거 알아요. 안 웃으면 장애인 차별하는 거 같고, 웃자니 장애인 비하하는 것 같잖아요? 그럴 거면 오늘 여기서만큼은 저 비하로 갑시다!"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한기명씨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다. 자신을 ‘뻔장코’(뻔뻔한 장애인 코미디언)라고 소개하기도 하는 한씨는 “장애인으로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자는 의미에서 ‘뻔뻔’이란 말을 가져왔지만, ‘펀펀(fun fun)’이라고 읽힐 수도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무대에 오르자마자였다. 한기명(25)씨는 바로 웃음과 환호와 박수를 이끌어냈다. 지난달 16·23일 방영된 KBS '스탠드업'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운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 홀로 무대에 서서 오직 말로만 관객을 웃긴다. 그는 자신을 "국내 최초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뇌병변 장애와 지체 장애를 동시에 지닌 복합 장애인이다. 그의 소재는 자신의 장애. 불편한 팔과 다리를 거침없이 희화화한다. 이런 그의 당당함은 무대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좀 유명한 장애인'이라는 제목으로 소셜미디어(SNS)에 공유된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에 3000명 넘는 네티즌이 '좋아요'를 눌렀다.

―자신의 장애를 웃음 소재로 삼는 게 불편하진 않은가.

"전혀. 내 이야기니까. 나의 이야기를 풀어서 들려드리는 것일 뿐이다. 듣는 분들이 웃고 즐거워하면 나도 기쁘다."

―불편해하거나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없나.

"미국에서는 흑인이나 성적 소수자가 자기 피부색이나 성 정체성, 빈곤 등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코미디를 한다. 장애를 코미디 소재로 삼는 걸 불편해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또 다른 선입견이자 편견이다."

―비장애인이 이런 소재를 코미디로 만든다면 어떨까.

"비장애인이 장애를 소재로 코미디하는 거 실제로 봤다. 기분 좋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가 아닌 남을 웃음 대상으로 만드는 건 비하(卑下)다."




―어떻게 장애를 소재로 삼게 됐나.

"지난해 2월 서울 홍대 앞 한 스탠드업 무대에 처음 서게 됐다. 아재 개그와 정치를 소재로 잡았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어떻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던 때였다. 그냥 하소연했다. '장애인을 위한 일자리가 없다, 길거리에서 장애인이 안 보이는 건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올 수가 없고 나갈 데도 없다' 뭐 이런 것들. 반응이 썰렁했다."

한씨에게 마술을 가르쳐준 심상범 마술사가 '장애 문제를 공론화하려는 시도는 좋은데, 일단은 그냥 지금 가지고 있는 장애와 겪은 경험을 가지고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조언해줬다. 한씨는 '이거다' 싶었다. "그러고 둘러보니 내 일상이 다 스탠드업 코미디 소재였다. 두 번째 무대부터 바로 장애로 바꿨다. 너무 많이들 웃어주셨다. 그때부터 쭉 장애를 소재로 하고 있다."

―장애인으로 살면서 겪는 일상이 어떻게 소재로 활용되나.

"하루는 지하철을 탔는데 어떤 할머니가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할머니께서 대뜸 '어쩌다 몸이 그렇게 됐어?' 묻더라. 할머니에게 웃으면서 말씀드렸다. '전철 공짜로 타려고요.' 당황한 할머니가 아무 말씀도 못 하더라. 할머니는 내 맘 아실 거다. 그분도 공짜로 전철 타시잖나? (나와 할머니가) 업종은 서로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고 해야 하나?(웃음) 이 일도 자주 이야기하는 소재다."

―장애를 가진 분들 반응은 어떤가.

"정말 재미있게 봤다고 격하게 공감해준다. 한 고등학생은 자신도 장애가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SNS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럴 때 코미디 하는 보람을 느낀다. 장애인 친구들은 '나도 웃길 수 있는데 자리 없느냐?'고 물어본다.(웃음)"

한씨는 장애인을 보는 사람들 시선을 절묘하게 활용한다. 그가 "영화 '부산행' 보셨느냐"고 관객에게 물었다. "저는 부산행을 보면서 정말 화가 났어요. 저기 딱 봐도 내가 해도 되는 배역이 있는데 왜 비장애인을 쓰냐는 말이지! 네 맞아요, 지금 웃으신 분들이 생각하시는 거, 두 글자! 하나 둘 셋 하면 함께 외쳐볼까요?" 한 여성 관객이 "좀비…?"라고 작은 소리로 내뱉는다. 그러자 한씨는 답답하다는 듯 "공유!"라고 외친다. 관객석에서 폭소가 터져 나온다. "물론, 좀비 역할도 잘 할 수 있지만요."


―선천적 장애가 아니라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일곱 살 때 태권도 학원에 다녔다. 다 내리지도 않았는데 학원 차가 그냥 출발했다. 식물인간 상태로 반년을 중환자실에 있다가 깨어났다."

―병실에 누워 TV를 보다가 개그맨을 꿈꾸게 됐다던데.

"일반 병실로 옮기고 우연히 '개그콘서트'를 보았다. 나도 사람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주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럼 대학도 연극영화 쪽으로 진학했나.

"'자운학교'라고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학교에 진학했다. 부모님이 안정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포장, 조립, 제과 제빵, 바리스타 등 여러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장애인 연극, 뮤지컬에 계속 출연했다. 스토리텔링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거기서 심상범 선생님을 만나 마술을 배웠다."

―개그맨 공채 시험은 안 봤나.

"자신이 없어 오래 망설이다 지난해 도전했는데 서류 전형에서 떨어졌다. 이제 데뷔했으니 더는 도전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KBS '스탠드업'은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홍대 앞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 이후 연락을 받았다. 장애를 소재로 삼은 게 신선하다고 했다."


―요즘도 홍대 앞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나.

"'아이디어스 크래프트하우스'라는 수제 맥줏집에서 매주 금·토요일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를 마련한다. 여기에 한 달에 두 번 서고 있다. 이번 달에는 셋째·넷째 토요일 공연한다."

―그것만으로 생계가 되나.

"재택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블로그 홍보해주는 장애인 일자리다.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한다."

―스탠드업 코미디 외에 목표로 하는 일이 있나.

"드라마에 출연해보고 싶다. 단역이나 카메오로라도. 웃기는 거 말고 주말 드라마 같은 진지한 정극. 장애인이 공중파 드라마에 나온 적이 없다. 궁극적으로는 장애인을 위한 스탠드업 전용 코미디 극장을 세우고 싶다. 장애인이 무대에 설 수 있고 동시에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연장. 그러려면 우선 돈을 많이 벌어야겠지.(웃음)"

―예상보다 훨씬 더 밝고 유쾌하다.

"나는 '뻔장코'다. '뻔뻔한 장애인 코미디언'. 뻔뻔하기도 하지만 영어로 '펀 펀(fun fun)'이란 뜻도 있다.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씨는 늘 이렇게 스탠드업 코미디를 마무리한다. "옛말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죠. 저는 제 장애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가 장애를 즐긴다고는 함부로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가 장애에 굴복하지 않고 있다고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KBS ‘스탠드업’에 출연한 한기명씨. /화면 캡처


[김성윤 기자 gourme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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