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단팥빵을 사 드시던 빵집, 명절이면 엄마가 머리를 하러 찾아가던 미용실, 아빠가 꼬맹이 시절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동네 슈퍼마켓….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가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온 가게들은 살아있는 역사의 기록관과도 같죠. 지나온 세월만큼 추억을 그대로 간직한 오래된 가게들. 그곳에 소중 학생기자단이 다녀왔습니다.
글=최은혜 기자 choi.eunhye1@joongang.co.kr, 사진=이원용(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김은비(서울 동산초 5)·이은채(경기도 명당초 5)·홍지수(경기도 상탄초 5) 학생기자·진효원(인천 예송중 1) 학생모델, 자료=서울스토리(www.seoulstory.kr)
서울 금천구의 한 주택가 골목. 빛바랜 낡은 간판에 ‘평택 쌀 상회’ ‘잡곡일절·국수’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글자 ‘회’는 획이 하나 떨어져 나가 ‘호’처럼 보이기도 하죠. 가게 앞에는 철제 건조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바로 국수를 널어 말리기 위해 면발을 걸어두는 틀입니다. 김은비·이은채 학생기자가 찾아갔을 땐 아직 국수가 걸려 있지 않아 건조대만 휑하니 서 있었죠. 1988년부터 이 가게를 지켜온 사장님 이기석씨는 “기온과 습도 등 날씨에 따라 면을 뽑을지 말지 결정한다”며 “오늘은 물국수(칼국수 면)를 뽑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30여 년 전 처음에는 쌀가게로 시작했지만 국수가 더 잘 팔리자 이씨는 20여 년 전부터 국수만 판매하고 있어요. 지금은 소면이나 칼국수 면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국수 면을 만들고 있죠. 면발의 굵기와 종류에 따라 대면·중면·소면·우동면이 있고, 천연 재료로 색과 맛을 낸 백련초·강황·메밀·쌀·보리 면도 있어요. 5가지 종류의 면을 한데 묶은 오색 국수가 인기죠.
밀가루에 적당량의 소금물을 넣어 반죽을 만드는데요. 그동안의 경험으로 익힌 감으로 되직한 정도를 맞춥니다. 이씨는 “손으로 반죽을 만져보면 알 수 있다”면서 “물국수는 조금 더 되직하게, 건국수는 조금 질게 만든다”고 설명했죠. 전원을 켜자 기계가 덜덜덜 돌아가며 반죽을 만들어 냈어요. 30년이 넘은 국수 기계는 그동안 고장도 많이 났죠. 이씨가 발품을 팔아 부품을 구하고 직접 수리해서 쓰고 있다고 해요. 기계뿐 아니라 국수를 널 때 쓰는 대나무 막대기나 국수를 담는 나무 궤짝 등 가게 안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이 가게만큼이나 나이를 먹었죠.
가게 앞 건조대에 널은 국수 면을 보고 소중 기자단은 “마치 커튼 같다”며 신기해했어요. 면끼리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커다란 선풍기로 건조대를 향해 바람을 불어줬죠. 소금물을 넣어 반죽한 면은 말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뜨거운 열풍이 아닌 자연의 햇빛과 바람으로 면을 건조시키는 것도 더 수고로운 일이죠. 더 힘든 방식을 고집하며 국수를 만드는 이유는 뭘까요. 이씨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면서 내는 맛을 새로운 기술이 쫓아오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불고데’로 머리에 멋 살리는 정겨운 미용실
미용실의 주인장이자 유일한 미용사인 장선심 원장이 소중 기자단에게 투박하지만 친근한 인사를 건넸죠. “그래, 뭘 물어보려고 왔어? 어린 학생들이 뭐가 궁금하대?” 1979년 장 원장이 미용사로 취직했던 혜성미용실은 가게 건물 주인이 자녀들의 이름 앞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해요. ‘혜성처럼 빛나라’는 의미도 담겼죠. 이곳에서 미용사로 일하기 시작한 장 원장이 이듬해부터 미용실 운영을 맡아 지금까지 40년을 이어왔어요. 같은 골목의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처음 자리에서 20여 년, 지금 자리로 이사한 뒤 20여 년입니다.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더 걸리는 ‘불고데’를 장 원장이 고수하는 이유는 “불편해도 손님들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미용실을 다녀봤지만 만족하지 못한 손님, 비싼 값을 주고 머리를 했는데도 금방 모양이 풀려 버린 손님, 머리가 너무 짧거나 숱이 적어 모양을 내기 어려운 손님 등이 혜성미용실을 찾아오죠. 이제는 입소문이 제법 나서 대학생 등 젊은 손님들도 ‘뽀글이’ 머리를 하러 많이 온다고 해요. 장 원장은 “불고데의 맛을 아는 사람은 다른 건 안 하려고 한다”고 말했어요.
귀한 책이 가득…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서점
이 대표는 통문관의 창업주 이겸로 선생의 손자인데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오래된 책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자란 이 대표는 아버지에 이어 3대째 서점을 지키고 있습니다. 통문관은 처음에 ‘금항당’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어요. 이 대표는 “‘글이 통하는 집’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은 것 같다”고 말했죠. 옛날의 통문관은 교류의 공간이 부족했던 문인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고서(아주 오래 전에 간행된 책)·희귀본·인문학서적 등 박물관에서 볼 법한 오래된 책들을 주로 다루는 전문 서점으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죠. 수집가나 연구원 등이 주된 손님이에요. 이 대표는 “할아버지 때부터 주력해온 이 분야는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 흥미로운 분야”라면서 “그러나 이런 책들을 접할 기회가 없는 요즘 학생들에게는 새롭고 낯설 것 같다”고 말했어요.
하나도 바꾸지 않고 3대째 이어온 빵 맛
신 부장은 태극당이 긴 세월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무엇보다 ‘빵 맛’이었다고 강조했어요. 그는 “빵집은 빵이 맛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당도를 조금 낮추는 정도의 변화는 있었지만 인기 제품들의 레시피는 처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설명했죠. 태극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모나카인데요. 모나카는 찹쌀가루를 반죽해 얇게 펴서 구운 것 사이에 팥소 등을 넣은 과자입니다. 태극당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넣은 모나카가 인기죠. 지금도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전부 수작업으로 만들어 하루에 최대 2000개만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해요. 신 부장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빵은 버터빵인데요. 두 장의 식빵 사이에 버터크림을 바른 것인데, 프라이팬에 빵을 앞뒤로 구워서 먹으면 더 맛있다는 귀띔입니다.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이번 취재를 통해 30년 이상 된 가게들을 가보니 서울의 역사를 다 품고 있는 것 같았어요. 30년 내공으로 면을 만드시는 정 많으신 사장님을 만났는데요. 면 뽑는 과정을 알려주시는 모습에서 정성과 사랑이 듬뿍 느껴졌어요. 혜성미용실의 연륜이 느껴지는 사장님도 고데기의 원조인 인두로 한복에 어울리는 머리를 해주셔서 정말 좋은 체험이었어요. 한복을 입고 있어서인지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레트로 감성이 핫한 요즘 부모님과 함께 다른 오래된 가게들을 찾아보며 여행을 떠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이은채(경기도 명당초 5) 학생기자
처음 통문관에 들어섰을 때 책방 분위기가 예스럽고 오래된 느낌이 났어요. 일반 서점과는 책에서 나는 향기도 조금 다른 것 같았죠. 할아버지에 이어 서점을 운영하시던 아버지로부터 희귀한 책을 돈을 주고 샀다는 얘기가 인상적이었어요. 부자지간에도 못 주는 게 있다니 재미있었죠. 동요집·시집 등 오래된 책들을 보여주셨는데 눈앞에 있는 책들의 가격이 엄청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책을 만지기가 조심스러워졌죠. 태극당은 빵집치고는 내부가 정말 넓었어요. 이 가게도 3대에 이어 하고 있다니 놀라웠죠. 벽과 기둥 장식, 샹들리에 등 옛 느낌이 남아 있었습니다. 버터빵도 맛있었어요. 홍지수(경기도 상탄초 5) 학생기자
서울시내 '오래된 가게' 지도
서울시는 개업한지 30년이 넘었거나 2대 넘게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곳, 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장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을 추려 '오래가게'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있습니다. 시민 추천과 자료조사를 통해 기초자료를 수집하고, 전문가와 문화해설사, 외국인, 대학생들의 현장방문과 꼼꼼한 평가를 거쳐 2017년 39곳이 처음 선정됐죠. 이후 2018년에 26곳, 2019년에 22곳이 추가로 선정됐어요.
그중 15곳의 '오래가게'를 소중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호기심이 생기는 곳이 있다면 가족·친구와 함께 찾아가 보면 어떨까요. 또는 여기에 소개되지 않은 우리 동네 오래된 가게를 찾아 그곳의 이야기를 조사해 보세요. 오래된 가게의 매력을 인증샷에 담아 공유하는 독자에게 책 선물을 드립니다.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학교·학년·이름·주소·연락처를 적어 소중 e메일(sojoong@joongang.co.kr)로 보내면 응모 완료. 사진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잊지 마세요. (자료=서울시 오래가게 가이드북)
서울시 관악구 신림로 14길 30
02-885-8290
서울대학교 인근 녹두거리에 처음 문을 연 1988년 이래 대학생들이 주로 찾는 인문·사회과학 전문 서점.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80년대 서울대 학생들의 전초기지가 되는 등 한국 사회의 역사를 함께 통과해왔다.
2.미림분식
서울시 관악구 호암로 553
02-888-8567
1988년부터 미림여고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식집이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봐야 할 곳. 고추장·짜장 양념의 즉석떡볶이를 먹은 뒤 밥을 볶아 먹어도 맛있다. TV프로그램 '수요미식회'에도 나왔던 맛집.
3.동양방아간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40길 77
02-379-6987
좋은 재료를 사용해 옛날 방식으로 만드는 맛있는 떡을 사 먹을 수 있는 곳. 하얀색 칠을 한 벽돌 건물 외관이 인상적이다. 주인장 차옥순 할머니가 직접 재료를 다듬어 그날 판매할 만큼의 양만 만든다.
4.문화이용원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7
02-762-2314
60년 넘는 세월 동안 혜화동 로터리에 자리 잡고 여러 정치인·기업인·교수·문인 등을 단골로 둔 이발소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옛날 모습 그대로의 세면대와 이발소 의자, 요금표 등이 남아 있다.
5.형제대장간
서울시 은평구 수색로 249
02-304-7156
1976년에 개업한 이 대장간은 형제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옛날 농기구와 전통 기구들을 구경할 수 있다. 주문 제작도 가능한 이곳에서 드라마 '대장금'의 소품을 만들기도 했다.
6.내자땅콩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 111-1
02-730-7239
부모님의 어린 시절 최고의 간식이었던 '센베이' 전문점이다. 아버지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은 김종호씨가 매일 센베이를 굽는다. 센베이 맛을 잊지 못하는 오랜 단골손님들이 꾸준히 찾는 곳.
7.낙원떡집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44-1
02-732-5579
1912년에 문을 연 이곳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궁중에서 떡 만드는 비법을 전수 받은 떡 명인을 외조모로 둔 이광순 대표가 기술을 이어받아 4대째 전통 떡을 만들고 있다.
8.삼우치킨센타
서울시 영등포구 시흥대로 671
02-847-9292
옛날 부모님이 어릴 적 먹던 통닭의 맛을 간직한 치킨집이다. 후라이드 치킨과 전기구이 통닭을 맛볼 수 있다. 1977년 아버지가 문을 연 가게를 아들이 물려받아 이어가고 있다.
9.합덕슈퍼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42길 20
02-793-8720
골목마다 편의점이 즐비한 요즘, 동네 구멍가게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슈퍼마켓은 정겹게 느껴진다. 1971년 슈퍼를 개업한 노부부가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게를 지켜왔다.
10.통문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55-1
02-734-4092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희귀한 책이나 역사 자료로 가치가 있는 오래된 서적을 주로 거래한다. 할아버지가 개업한 책방을 이종운 대표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운영하고 있다.
11.박인당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55 대신빌딩 302호
02-733-3429
명장으로 인정받은 석재 박호영 선생이 도장을 새긴다. 요즘은 컴퓨터 도장을 파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이곳에선 손으로 직접 도장을 새겨준다. 명장의 손길로 내 이름을 새긴 도장 하나 장만할 수 있는 곳.
12.평택쌀상회
서울시 금천구 독산로40길 27-5
02-895-4825
밀가루·소금물만으로 직접 반죽을 만들고 햇빛과 바람에 자연건조시킨 국수 면을 판매한다. 칼국수면과 소면, 우동면을 비롯해 백련초·강황·메밀 등으로 만든 오색 국수도 있다. 가게 앞에 국수를 널어둔 풍경이 정겹다.
13.혜성미용실
서울시 구로구 고척로6길 42
02-2682-9359
불에 달군 인두로 머리 모양을 내는 옛 방식을 고수하는 미용실. 컬이 쉽게 풀리지 않는 퍼머와 '고데기 머리'로 입소문이 나면서 젊은 사람들도 찾아온다. 사랑방 같은 편안한 분위기와 원장님의 푸근함이 매력.
14.돌레코드
서울시 중구 마장로9길 49-29
02-2235-7130
모바일 스트리밍 서비스로 듣는 음악이 아닌, LP판·CD·테이프에 담긴 음악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1975년부터 음반을 팔기 시작한 김성종 사장이 운영하는 이 가게는 음반 마니아들의 보물창고다.
15.태극당
서울시 중구 동호로24길 7
02-2279-3152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모나카와 단팥빵으로 유명한, 1946년 문을 연 지 70년이 넘은 빵집이다. 프랜차이즈를 내지 않고 개업 초창기의 레시피를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노후경유차 과태료 35만원 피하려면? 먼지알지!
▶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