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극작가 돌턴 트럼보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 출범한 미국 하원 반미활동위원회(HUAC)의 영화인 청문회 증언을 거부한 '할리우드 텐' 중 한 명이다. 트럼보는 빨갱이로 찍힌 탓에 남의 이름으로 작품을 썼다. 무려 11개의 가명을 사용했다. 그렇게 숨어서 쓴 작품 중 '로마의 휴일(1953)', '더 브레이브 원(1956)'은 오스카상을 받았다. 영화 '트럼보(2015)'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난 블랙리스트의 공포와 잔인함을 봤다" "남의 이름으로 받은 오스카상은 내 친구들의 피로 물들어 있다" "(매카시즘의 전쟁에) 영웅이나 악당은 없었고, 희생자들만 있었을 뿐이다"
국가정보원 개혁위원회가 지난 달 30일에 공개한 '국정원 적폐청산 TF'의 조사 결과는 박근혜정부의 블랙리스트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난폭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13년부터 CJ를 사찰한 국정원은 CJ E&M이 제작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살인의 추억', '공공의 적', '공동경비구역 JSA', '베를린' 등을 찍어 '공무원과 경찰을 부패하고 무능한 집단으로 묘사하고 종북세력을 친근한 이미지로 오도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삼시세끼'의 나영석 PD는 'KBS 노조 파업을 지지했던 좌파 세력'으로 규정했다.
국정원은 그러면서 'CJ의 좌경화'를 문제삼고, 그 배후로 이미경 부회장을 지목했다. 그가 '친노의 대모'라는 것이다. 국정원은 '좌성향 문제단체' 15개와 '문제인물' 249명을 적시한 '문예계 내 좌성향 세력 현황 및 고려사항'이란 보고서도 만들었다. 현 국정원의 설명대로라면 이런 공작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부임하면서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배후의 배후' 쯤 됐겠다. 박근혜정부의 정치시계는 이처럼 이란의 오늘이나 미국의 그 때 쯤을 향해 부지런히 역행했다. 이런 정권이 한 번, 아니 두 번쯤 재창출됐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김효진 사회부 기자 hjn252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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