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중령 피우진 "여군은 여흥자리의 '기쁨조'가 아니다"

  • 입력 2006년 12월 13일 14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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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여군 중령 피우진이 털어놓은 군내 여성인권 실태

● 군에 대한 미련, 분노 버리려 전국 도보 종주

● 나의 敵은 주변의 男軍과 ‘문서 쪼가리’

● 여군을 남자와 똑같은 군인으로 봐달라

● 군사령관, 한밤중 여군 호출해 술시중에 블루스까지

● 여 부사관 술 먹인 후 장군과 앉혀놓고 사라진 여군 장교

● 여군 50년…아직 일반병과 출신 장군 배출 못해

이 기사는 시사 월간지 신동아 12월호에 실린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전문은 동아닷컴( http://www.donga.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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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0500007_1.html

육군 중령 피우진(皮宇鎭·50). 한국 최초의 여군 헬기조종사인 그는 ‘더 이상 군복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역 판정을 받고 이에 불복해 국방부에 인사소청을 한 상태다. 그리고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듯 도보로 전국 종주를 하고 있다.

군을 짝사랑한 여자

1979년 27기 여군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한 그는 올해로 28년째 군 생활을 하고 있다. 2002년 10월 유방암 1기 판정을 받고 유방 절제수술을 했다. 이때 그는 암에 걸리지 않은 쪽 유방도 함께 절제했다. 군인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후 3년 동안 별문제 없이 육군항공단에서 군 생활을 계속했다. 암은 재발하지 않았고 후유증도 없었다. 1년에 한 번씩 있는 체력검정도 가뿐하게 통과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상부에서 갑자기 그의 병력(病歷)을 문제 삼았다. 군 규정상 암에 걸리면 군복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법이 만들어질 무렵만 해도 ‘암=죽음’이란 인식이 강했다. 결국 군은 이 규정을 들어 그의 항공조종사 자격을 박탈했고 곧이어 전역심사에 회부했다.

올해 초, 그의 딱한 사연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언론과 시민단체 등은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몇몇 국회의원까지 관심을 갖자 군은 관련법 개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역심사위원회도 그를 구제하기 위해 심사를 보류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이뤄질 것 같던 법 개정은 진척이 없었다. 결국 지난 9월 전역심사위원회가 열려 전역 판정이 내려졌고, 그는 이에 불복해 인사소청을 했다.

관련법 개정 전에 인사소청이 기각되면 나중에 법이 개정되어도 소급 적용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정년까지 3년여 남은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전역해야 한다. 육군 헬기조종사 시절 그의 항공호출명은 ‘피닉스(불사조)’였다. 남자 동료들이 붙여준 것인데, 불사조도 군의 낡은 규정을 뚫고 날아오르지는 못할 모양이다.

‘마지막 아마조네스’

피우진 중령은 자신의 전역 문제에 대한 분노도 크지만 여군의 인권 현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28년을 군에서 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군 헬기조종사로서의 자부심보다는 성희롱, 성차별 등 여군에 대한 지휘관들의 비뚤어진 언행에 마음 상할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피우진 중령은 자신의 전역 문제에 대한 분노도 크지만 여군의 인권 현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28년을 군에서 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군 헬기조종사로서의 자부심보다는 성희롱, 성차별 등 여군에 대한 지휘관들의 비뚤어진 언행에 마음 상할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면 으레 겪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밤늦은 시각에 술에 취한 상관이 여군 혼자 있는 숙소로 찾아오는 것이다. 아무리 군대라지만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남자 상관을 들이는 것은 곤란했다. 그러면 상관들은 대개 “이래서 여군을 참모로 두면 불편하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가 모 부대에 근무할 때였다. 일요일 오후에 상관이 “내무검사를 해야겠다”며 불쑥 들어섰다. ‘냉장고 하나가 전부인 개인 숙소에 내무검사라니…’ 하고 의아해하는데, 상관은 손에 들고 있던 피자를 내밀며 함께 먹자고 했다. 거절하면 무안해할까봐 “감사하다”고 하고는 냉장고로 가서 마실 것을 꺼내려는데 상관이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놀라 가슴이 뛰면서 저도 모르게 주먹이 올라가는 걸 겨우 참았어요. ‘왜 이러십니까’ 하고 화를 내니까 민망한 표정으로 ‘아니, 냉장고에 뭐가 있나 보려고’ 하고는 슬며시 돌아가더라고요. 그 장교는 그나마 얌전한 편이었어요. 군에서는 각종 테스트가 많아요. 그럼 그걸 도와주겠다, 시험 문제를 알려줄 테니 내 방에서 공부하라며 접근하는 상관들도 있어요.”

1988년, 대위이던 그는 여군 부사관을 술자리에 내보내지 않아 사령관의 노여움을 샀다. 일직을 서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사령관이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그리로 오라고 하는 것을 거절했다. 며칠 후에는 여군 일직 사관이 전화를 걸어 사령관이 어느 여군을 보내라고 명령했다며 외출승인을 요청했다. 사령관이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서 분위기를 띄워줄 여군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여군 부사관들로부터 그 사령관이 툭하면 술자리에 여군을 불러들인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어느 여군을 지목해서 보내라고 할 때도 있고 그냥 알아서 몇 명 보내라고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불러서는 옆에 앉히고 술시중을 들게 하면서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블루스를 추게 한다고 했다. 접대부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올 때는 꼭 예쁜 사복을 입고 오라고 했다.

그는 그 여군이 아프다고 둘러대고는 외출승인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사령관 참모가 전화를 걸어 “빨리 보내라”며 욕을 해댔다. 고민 끝에 그 여군에게 전투복을 입혀 내보냈다. 덕분에 여군은 곧바로 부대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는 이 일로 꼬투리가 잡혀 보직해임을 당했다.

▼ 그 무렵엔 여군들이 술자리에 불려가는 게 일반적이었던 모양이죠?

“그랬어요. 저는 지휘관 생활을 오래 해서 여군학교, 특전사, 88사격단, 육군항공학교, 군사령부, 여군단, 국방부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어요. 거기서 부대원을 관리하는 직책에 있다보니까 종종 부사관들이 제 방문을 노크하는데, 고민을 들어보면 남자 상관들이 자기네들을 어떻게 한다, 막아달라는 얘기가 빠지지 않았어요.”

사단장의 여군 성희롱 사건

피우진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건 2001년 발생한 사단장 성희롱 사건 때였다.당시 사건을 정리하면 이렇다.

소위로 갓 임관한 여군 장교가 모 사단 부관부에 배속됐다. 사단장은 업무보고를 하고 나가는 여군 장교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시작은 그렇게 단순했다. 그 자체만 보면 사단장이 딸 같은 여군 장교를 대견하게 여겨 격의 없이 친밀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송년모임이 있었다. 여군 소위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비상대기 상태였다. 행사가 시작되고 30분쯤 지나 ‘모든 여군은 회식에 참석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른 여군들은 이미 퇴근한 상태라 그만 유일하게 참석하게 됐다. 사회를 보던 참모가 그를 사단장 옆에 앉혔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그는 사단장 옆에서 다소곳이 술을 따랐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단장의 손이 허벅지와 엉덩이에 닿았지만 하늘 같은 상관들이 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사단장은 “회식 후 공관에 들러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했다. 명령이나 진배없었다.

회식이 끝나자 사단장이 직접 차를 보내 그를 데리러 왔다. 소위는 참모에게 보고하고 차를 타고 갔다. 사단장은 거실에서 직접 차를 내주고 자신의 군 생활 얘기를 들려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찾아와 상의하라”고 격려도 했다. 그러다 “거실에선 당번병들이 일을 해야 하니 내실로 옮기자”며 먼저 일어섰다. 소위는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침실이 보이는 내실에서 차를 마시는데, 사단장이 갑자기 소위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는 입을 맞췄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한번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세요. 그 여군이 회식자리에 불려갈 때부터 성추행을 당할 때까지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상황이 한번이라도 있었나요?”

여군 장교는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고 한다. 대인기피증과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것. 풋풋한 20대 초반의 처녀가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그는 결국 1년 정도 치료를 받다가 전역했다. 피 중령은 그 후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는데, 지금도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여흥자리의 ‘기쁨조’

“더 기가 막힌 건 일부 여군 장교들의 그릇된 처신이에요. 같은 여자로서 특히 후배들을 지켜주고 여군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할 선배 장교가 오히려 자신의 영달을 위해 후배 여군들을 남군 간부들의 여흥자리에 기쁨조로 데려가는 일도 있었어요.”

한 여군 장교가 자신의 당번 부사관인 여군 하사를 서울 강남의 한 일식집으로 데려가 장군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자리에서 양주 두 병이 비워졌는데, 장군과 장교의 강권으로 하사가 가장 많이 마시게 됐다. 세 사람은 2차로 단란주점엘 갔고 거기서도 술병이 여럿 비워졌다.

한참 후 장군이 지갑을 건네며 계산을 하라고 하자 여군 장교는 지갑을 받아들고 룸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장군이 룸의 문을 잠갔다. 그리고…. 여군 장교가 계산을 하고 곧바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면 장군은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군은 이미 장교가 룸으로 일찍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하사가 “장군님, 따님을 생각하십시오”라며 당차게 저항해 그 자리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돌아온 여군 장교는 부대로 복귀할 때도 하사를 장군의 차에 동석시켰다. 하사는 차에서 장군의 집요한 접근에 시달리다 중간에 도망치듯 내렸다.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제가 바라는 건 제 후배들만큼은 남군과 공평하게 군인의 길을 갈 수 있는,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군은 자유와 정의의 수호자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저는 군을 군답게 하고, 여군이라는 이유로 한 사람의 후배도 차별받지 않을 때까지 계속 싸워 나갈 겁니다.”

그는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이란 말을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내가 남긴 발자욱이 다음 사람에게 길이 되길 바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군 생활 역정을 담은 에세이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를 곧 출간할 예정이다.

최호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이 기사는 시사 월간지 신동아 12월호에 실린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전문은 동아닷컴( http://www.donga.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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