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세례명 추천해주세요

전 30대중반 주부인데요, 12월에 세례받을 예정입니다.

생일은 3월인데 좋은 세례명좀 추천해 주세요

내 프로필 이미지
  • 질문수1
  • 채택률0.0%
  • 마감률0.0%
닉네임sg****
작성일2008.10.06 조회수 24,172
답변하시면 내공 10점을 답변이 채택되면 내공 25점을 드립니다.
지식인 채택
1번째 답변
GON888 com 클릭
채택답변수 41
중수
프로필 사진

자동차보험, 가톨릭, 의료, 상해 보험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프로필 더보기

세례 받으시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빰빠라밤~

 

세례명을 지으실땐 세례일이나 생일에 가깝게 지으시자나요~^^

 

그건 잘 잊어버리지않고 항상 기억하기 위함이구요^^

 

성인 성녀분이 아니라도 세례명을 정할수 있습니다.

 

제 친구중에 두명은 3년전 7월에 함께 세례를 받았는데요

 

두친구는 다 29세 여자였으며 한친구는 까리따스,한친구는 베리따스라고 지었구요

 

지끔까지도 그 둘은 따스자매로 통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까리따스 성녀는 실제 인물이시며 아주 유명하신분인데요

 

베리따스라는 성녀님은 안계십니다. 세례를 주신 신부님께서 정해주셨는데

 

진리라는 말의 "베리따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정해주셨어요

 

이렇듯 좋은단어나 의미있는 단어도 사용하실수 있구요

 

여성분이지만 남성의 세례명에서 딸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베드로를 쓰고싶으신경우

 

베드로는 영어로 PETER피터라고 발음되는데요 피에리나'라는 세례명이

 

베드로의 여성형입니다.

 

흔히 들어보셨을 프란치스카 역시 프란치스코의 여성형이구요

 

일단은 세례월에 맞는 12월 성녀분들중 몇가지 올려드릴꼐요

 

참고하시고 본인께서 기도중에 정하시길 빌어요

 

12월만해도 정말 많으신데 추리고 추린거랍니다

 

형광색으로 칠한것은 개인적으로 추천해드리는거에요

 

쪽지 주시면 자세히 알려드릴께요^^

 

성녀 나탈리아, Natalia (12월 01일) 304년경 니코메디아 순교

성녀칸디다Candida12.01순교
성녀마르타나Martana12.02순교254-259년경

성녀 비비아나, Bibiana (12월 02일) 4세기경 로마 순교

성녀 힐라리아, Hilaria (12월 03일) 연대미상 로마 순교

성녀 바르바라, Barbara (12월 04일) 4세기경 니코메디아 동정, 순교

성녀 크리스피나, Crispina (12월 05일) 304년 테바스테 순교

성녀 아셀라, Asella (12월 06일) 406년경 로마 동정

성녀 세레나, Serena (12월 07일) 로마 과부, 순교

성녀 발레리아, Valeria (12월 09일) 리모주 동정, 순교

성녀율리아Julia12.10동정, 순교메리다304년

성녀 아가타, Agatha (12월 12일) 790년경 윌보른 동정

성녀 루치아, Lucia (12월 13일) 304년경 시라퀴즈 동정, 순교

성녀 오틸리아, Ottilia (12월 13일) 720년경 호헨부르크 원장

성녀 실비아, Silvia (12월 15일) 스페인 동정

성녀 아델라이데, Adelaide (12월 16일) 999년 이탈리아 황후

성녀 올림피아, Olympias (12월 17일) 408년 콘스탄티노블 과부,여부제

성녀파우스타Fausta12.19수절시르미움3세기경
성녀플로로Florus12.22순교

성녀 마르가리타, Margaret (12월 23일) 1464년 사보이 과부

성녀 아델라, Adela (12월 24일) 730년경 파젤 수절

성녀 에밀리아나, emiliana (12월 24일) 550년경 로마 증거자

성녀이르미나Irmina12.24원장외렌708년

성녀 수산나, Susanna (12월 25일)

성녀 아나스타시아, Anastatia (12월 25일) 304년경 시르미움 순교

성녀 에우제니아, Eugenia (12월 25일) 257년경 로마 순교

성녀 크리스티나, Christina (12월 26일) 1160년 마크게이트 은수자

성녀 아니시아, Anysia (12월 30일) 304년 순교

성녀 콜룸바, Columba (12월 31일) 273년 상스 동정, 순교

 

다시한번 세례를 축하드리며 행복하시길 기도할께요

 

사랑합니다.환영합니다.

 

 

출처본인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2번째 답변
jame****
채택답변수 12
초수
프로필 사진

가톨릭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프로필 더보기

† 찬미예수님

 

진심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3월 성인ㆍ성녀 축일표랍니다.

참고하세요.

혹시 더 필요하신 자료있으면 제가 만들고 있는 통에 오시면 성인ㆍ성녀에 대한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방문해 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3월의 성녀에 대한 자료를 아래 올려드리겠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하네요.

 

http://tong.nate.com/sks280

 

 

 

3월 1일

성 다비드 웰스/ 6세기, 주교

성 레오 루왕/ 900년, 주교, 순교

복녀 보나비다/ 1357년, 증거

성 수잇베르또 영국/ 715년, 주교

성 아드리아노/ 290년, 순교

성 아분단시오/ 순교

성 알비노 앙제/ 554년, 주교

성 에우도치아 헬리오 폴리스/ 117년, 순교

복녀 요안나 마리아/ 동정

성 펠릭스 3세/ 492년, 교황

성 헤르메스/ 390년, 순교



3월 2일

성 바실레오/ 258년, 순교

성녀 세군딜라/ 305년, 순교

복녀 아네스 보헤미아/ 1282년, 동정

성녀 야누아리아/ 306년, 순교

성 요비노/ 258년, 순교

성 프리돌리노/ 수도자

성 헤라끌리오/ 305년, 순교



3월 3일

성녀 가밀라 오세르/ 437년, 동정

성녀 논니따/ 6세기, 수절

성 띠시아노 브레쉬아/ 536년, 주교

성녀 마르시아/ 순교

성 마리노/ 262년, 순교

성 마르디아노/ 458년, 순교

성 아스떼리오/ 262년, 순교

성녀 아스떼리오 베네벤또/ 6세기, 동정

성 안셀모 노난톨라/ 803년, 원장

성 제노비노 셍리귀에/ 1075년, 원장

성녀 쿠네군다/ 1039년, 왕후

성녀 포일라 갈웨이/ 6세기, 동정



3월 4일

성 가시미로 폴란드/ 1488년, 증거<기념>

성 까이오/ 259년, 순교

성 루치오 1세/ 254년, 교황, 순교

성 바시노트레브/ 750년, 주교

성 아드리아노/ 875년, 순교

성 에우제니오/ 4세기, 순교

성 에프렘/ 4세기, 순교

성 펠릭스 루이스/ 1038년, 원장



3월 5일

성 디오니시오/ 1622년, 순교

성 비르질리오 아를르/ 610년, 주교

성 에우세비오 크레우나/ 423년, 원장

성 요한 요셉 십자가/ 1734년, 증거

성 제라시모/ 475년, 원장

성 카르타고(맏이)/ 540년, 주교

성 콜만 아르마/ 5세기, 주교

성 클레멘스 사라퀴즈/ 800년, 원장

성 테오필로 체사레아/ 195년, 주교



3월 6일

성 마르치아노 또르또나/ 120년, 주교

성 바사/ 230년, 순교

성 바실리오 볼로냐/ 335년, 주교

성 빌프리도 린디스파른/ 758년, 증거

성 사뚜로/ 203년, 순교

성 바그리오 콘스탄티노플/ 308년, 주교

성 치릴로 콘스탄티노플/ 1235년, 증거

성녀 콜레따/ 1447년, 동정

성녀 쿠네스비다/ 680년, 동정

성녀 팁바/ 680년, 동정

복녀 헬레나 폴란드/ 129년, 수절



3월 7일

성 기우디오소 브레쉬아/ 445년, 주교

성 바울로/ 339년

성녀 뻬르뻬두아/ 203년, 순교<기념>

성 아르도 아니안/ 843년, 원장

성 에우불로 체사레아/ 308년, 순교

성녀 펠리치따스/ 203년, 순교<기념>



3월 8일

성 로가도/ 순교

성 베레문도 이라슈/ 1092년, 원장

성 뽄시오 카르타고/ 260년, 증거

성 빈첸시오/ 1223년, 주교

성 스테파노 오바진/ 1154년, 원장

성 아뽀로니오/ 305년, 주교

성 아리아노/ 311년, 순교

성 요한(천주의)/ 1550년, 창설자<기념>

성 율리아노 톨레도/ 690년, 주교

성 필레몬/ 305년, 순교

성녀 헬레니어/ 순교

성녀 헬레나/ 순교



3월 9일

성 그레고리오 니싸/ 395년, 주교

성 멜리똔/ 순교

성 빠치아노 바르셀로나/ 390년

성 보사 요크/ 686년, 주교

성 아달라스 봄비오/ 627년, 원장

성 안또니오 프로와드몽/ 10세기, 증거

성 치리온/ 순교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 1440년, 수절, 수녀<기념>



3월 10일

성 까이오/ 172년, 순교

성 드록또베오 마카리오 예루살렘/ 535년, 주교

성 마카리오 예루살렘/ 535년, 주교

성 심플리치오/ 483년, 교황, 증거

성녀 아나스다시아/ 6세기, 동정, 은수

성 알렉산델/ 172년, 순교

성 에밀리아노 레거/ 675년, 원장



3월 11일

성 깐디도/ 259년, 순교

성 꼰스딴띠노 스코틀랜드/ 576년, 순교

복녀 데레사 마르가리따/ 1770년, 동정

성 소프로니오 예루살렘/ 369년, 주교

성녀 아무니아/ 1069년, 수절

성녀 아우레아 산밀란/ 1069년, 동정

성 아엔고/ 830년, 주교

성녀 알베르따 아쟝/ 286년, 동정, 순교

성 에울로지오 꼬르도바/ 859년, 순교

성 조시모/ 263년, 순교

성 피루미노 아미앵/ 원장

성 피르미아노 페르모/ 120년, 원장



3월 12일

성 마밀리아노 로마/ 순교

성 막시밀리아노/ 295년, 순교

성 무라/ 645년, 원장

성 베르나르도 카리놀라/ 1109년, 주교

성 베드로 니코메디아/ 303년, 순교

성녀 세라피나 산제미니아노/ 1253년, 동정

복녀 유스티나 베졸리/ 1319년, 동정

성 테오파네스 시그리아나산/ 818년, 원장



3월 13일

성녀 님포라/ 순교

성 루데리꼬/ 857년, 순교

성 마체도니오/ 304년, 순교

성녀 모데스따/ 304년, 순교

성녀 빠뜨리치아/ 304년, 순교

성 보니파시오 사보이/ 1270년, 주교

복녀 산차 셀라/ 1229년, 동정

성 살로몬/ 857년, 순교

성녀 아라비아/ 순교

성녀 에우프라시아 콘스탄티노플/ 420년, 동정

성 제랄드 마요/ 732년, 원장

성녀 크리스띠나 페르시아/ 동정, 순교

성녀 테오도라/ 순교



3월 14일

성 디아꼬노/ 6세기, 순교

성 레오/ 주교, 순교

성녀 마틸다/ 968년, 여왕, 수절

성녀 바울리나 젤/ 1107년, 수절

복자 아르놀드 파두아/ 1254년, 순교

성 아프로다시오/ 5세기, 순교

성 에우티치오/ 741년, 순교



3월 15일

성 론지노/ 1세기, 순교, 백부장

성 라이문도 피떼르/ 1163년, 원장

성녀 레오크리시아 코르도바/ 859년, 동정, 순교

성녀 루도비까 마릴락/ 1660년, 창설

성녀 마뜨로나 테살로니카/ 350년, 동정, 순교

성 만치오 에보라/ 5세기, 순교

성녀 말꼬디아 아스띠/ 1090년, 은수

성 쁘로보 리에띠/ 571년, 주교

성 아리스또불로/ 1세기, 순교

성 클레멘스 흡바우어/ 1820년, 증거



3월 16일

성 따시오/ 284년, 순교

성 데니스/ 284년, 순교

성 라르고/ 284년, 순교

성 빠뜨리시오 오르베뉴/ 주교

성 아가비도 라벤나/ 4세기, 주교

성 아브라함/ 366년, 증거

성녀 에우세비아 하메이/ 680년, 여원장

성 요한 소르디/ 1183년, 주교, 순교

성 헤리베르또 퀼른/ 1022년, 주교

성 힐라리오/ 284년, 순교



3월 17일

성 바울로/ 777년, 순교

성 빠뜨리시오 아일랜드/ 461년, 주교

성 아그리꼴라 샬롱/ 580년, 주교

성 암브로시오 알렉산드리아/ 250년, 순교, 증거

성 요셉 아리미테아/ 1세기, 성서인물

성녀 제르뚜르다 니벨/ 659년, 여원장



3월 18일

성 나르치쏘/ 307년, 순교

성녀 베아따/ 1567년, 증거

성 안셀모 루까/ 1086년, 주교

성 알렉산델 예루살렘/ 387년, 주교, 학자

성 에그베르또 리폰/ 700년, 증거

성 치릴로 예루살렘/ 387년, 주교, 학자<기념>

성 프레디아노 루가/ 1086년, 주교



3월 19일

성녀 과르띨라/ 순교

성 뀐도/ 순교

성녀 뀐띨라/ 순교

성 란도알도/ 668년, 증거

성 레온시오/ 순교

성 마르고/ 순교

성 아드리아노 마스트릭트/ 668년, 순교

성 아뽈로니오/ 순교

성 아만시오/ 668년, 증거

성 요셉/ 1세기, 예수의 양부<대축일>

성녀 요셉피나

성 제모 므와엥부티에/ 증거



3월 20일

성 깔디아/ 300년, 순교

성 굿베르도 영국/ 687년, 순교

성녀 데르푸따/ 300년, 순교

성녀 마뜨로나 소아시아/ 300년, 순교

성 마르띠노 브라가/ 580년, 주교

성 베니뇨 플라이/ 725년, 원장

성 세르지오/ 796년

성 세바스띠아노/ 순교

성 아나똘리오/ 순교

성 아르치뽀 꼴로쎄/ 1세기

성녀 알렉산드라/ 300년, 순교

성 에우제네/ 순교

성녀 에우페미아/ 300년, 순교

성녀 에우프라시아/ 300년, 순교

성 윌리암 페냐코라다/ 1042년, 은수

성녀 율리아나/ 300년, 순교

성녀 치리아까/ 순교

성녀 테오도시아/ 300년, 순교

성녀 포띠나/ 순교

성녀 포시오/ 순교

성 헤르베르또/ 687년, 은수



3월 21일

성 니콜라오 플뤼에/ 1487년

성 루삐치노 로콘느/ 480년, 원장

성 베네딕또/ 원장

성 비릴로 까따니아/ 90년, 주교

복녀 상두치아/ 1035년, 수절

성 세라삐온 트무이스/ 370년, 주교

성 엔다 아란모어/ 590년, 원장

복녀 클레멘시아 오에렌/ 1176년, 수절

성 필레몬/ 순교



3월 22일

성녀 깔리니까/ 250년, 순교

성녀 다레르까/ 5세기, 수절

성 데오그라시아스 카르타고/ 457년, 주교

성녀 레아 로마/ 384년, 수절

성 바실리오 안시라/ 362년, 순교

성녀 바실리싸/ 250년, 순교

성 사뚜르니노/ 순교

성 옥따비아노/ 484년, 순교



3월 23일

성 니콘/ 250년, 순교

성 도미시오/ 361년, 순교

성 뚜리비오 데 모그로베요/ 160년, 주교<기념>

성녀 뼁라지아/ 360년, 주교

성 빅또리아노/ 484년, 순교

복녀 시빌리나/ 1367년, 동정

성녀 아뀔라/ 361년, 순교

성 요셉 오리올/ 1702년, 증거

성녀 테오도시아/ 361년, 순교

성 펠릭스/ 5세기, 순교

성 프루멘시오/ 484년, 순교

성 피델리스/ 250년, 순교



3월 24일

성녀 가타리나 스웨덴/ 1381년

성 띠모테오/ 150년, 순교

성 라띠노 브레쉬아/ 115년, 주교

성 로물로/ 순교

성 마까르띠노 클로거/ 505년, 주교

성 세꾼도/ 순교

성 셀레우꼬/ 순교

성 시므온 트렌트/ 1475년, 순교

성 아가비또 신나다/ 3세기, 주교

성 에삐메니오/ 사제, 순교

성녀 힐데리다 바킹/ 717년, 여원장



3월 25일

성 뀌리노 로마/ 269년, 순교

성 데시데리오/ 725년, 수도

성 디스마/ 29년, 십자가의 우도

성 로베르또 베리/ 1181년, 순교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 1732년, 동정

성녀 마르가리따 클리스로우/ 1586년, 순교

성 바론시오/ 725년, 수도

성녀 안눈씨아따

성 이레네오 시르미움/ 304년, 주교, 순교

성녀 퀘노카/ 1007년, 동정

성 하롤드 클루스터/ 1168년, 순교



3월 26일

성 까스똘로 로마/ 288년, 순교

성 과드라도/ 304년, 순교

성 룻제로 독일/ 주교

성녀 막시마/ 304년, 순교

성 몬따노/ 304년, 순교

성 바실리오(젊은)/ 952년, 은수

성 브라울치오 사라고싸/ 646년, 주교

성 에우띠치오 알렉산드라/ 356년, 순교

성 엠마누엘/ 304년, 순교

성녀 펠리치따스 파두아/ 9세기, 동정

성 펠릭스 트레브/ 400년, 주교

성녀 테끌라/ 순교

성 테오도로/ 310년, 순교



3월 27일

성 나자로/ 344년, 순교

성녀 레따

성 로물로 님스/ 730년, 원장

성 루스뻬르또/ 720년, 주교

성 루페르또 짤스부르크/ 720년, 주교

성녀 리디아/ 121년, 순교

성 마태오 보배/ 1098년, 순교

성 아마똘 과르다/ 증거

성녀 아우구스따 트레비소/ 동정, 순교

성녀 알켈다/ 10세기, 동정

성 요한 다마스체노/ 749년, 증거, 학자

성 요한 리코폴리스/ 394년, 은수

성 젤라시오 아르마/ 1174년, 주교

성 필레따스/ 121년, 순교



3월 28일

성 까스돌/ 순교

성녀 군데린다/ 750년, 동정

성 군트람노/ 왕

성 뚜딜로/ 915년, 증거

성 쁘리스꼬/ 260년, 순교

성녀 오스부르가 코벤트리/ 1016년, 여원장



3월 29일

성녀 글라디스/ 5세기, 수절

성녀 라시라/ 6세기, 동정

성 루돌포 라체부르크/ 1250년, 주교

성 바라치시오/ 327년, 순교

성 빠스똘/ 311년, 순교

성 빅또리노/ 311년, 순교

성 세꾼도 아스띠/ 119년, 순교자

성 에우스띠체 륙세이유/ 625년, 원장

성 요나/ 327년, 순교

복녀 요안나 마리예/ 1414년, 동정, 3회원

성 치릴로 헬리오폴리스/ 362년, 순교

복자 후고 보쎌/ 1239년, 증거



3월 30일

성 가뚤라/ 수절

성 귀리노 간수/ 117년, 순교

성 레굴로 상리스/ 260년, 주교

성 빠스똘 오를레앙/ 6세기, 순교

성 베드로 레갈라도/ 1456년, 증거

복자 아마데우스 사보이/ 1472년, 증거

성 요한 끌리마꼬/ 605년, 원장

성 울프란노/ 주교

성 조시모 시라퀴즈/ 660년, 주교

성 클리니오 뽄떼꼬르보/ 원장

성 페르고 다운페트릭/ 6세기, 주교



3월 31일

성녀 고르넬리아/ 순교

성 구이 라벤나/ 1046년, 원장, 은수

복녀 마리아 마말라/ 1453년, 수절

성 마카베오 아르미/ 1174년, 원장

성녀 발비나 로마/ 130년, 동정

성 베냐민 부제/ 421년, 순교

복자 보나벤뚜라 또르니엘리/ 1491년, 증거

성 아모스/ 기원전 예언자

성 알도 하스논/ 8세기, 증거

복녀 요안나 뚤루즈/ 1286년, 3회원

 

■■■■■■■■■■■■■■■■■■■■■■■■■■■■■■■■■■■■■■■■■■■■■■■■■■■■■■■■■■■■■■■■■

 


 축일 : 3월 2일 (3월 6일)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 동정

St. AGNES of Prague

St. Agnes of Bohemia

Santa Agnese di Boemia (o di Praga) Monaca

1205 at Prague, Bohemia (modern Czech Republic) -

6 March 1282 at Saint Saviour convent, Prague, Bohemia of natural causes

Beatified : 1874 by Pope Pius IX

Canonized : 12 November 1989 by Pope John Paul II at Rome
 


 

성녀 아녜스는 1205년경 보헤미아의 왕 프레미슬라우스의 딸로 태어났다. 황제의 청혼을 거절하고 1236년 왕궁 근처에 가난한 자매 수도원을 지어 동정녀들을 살게 한 후 스스로 그곳에 입회하였고 오랫동안 수도원장으로 봉사하였다. 성녀 클라라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고 여러 번에 걸쳐 서신 교환을 하였다. 1280년에서 1283년 사이에 선종하였다. 라하의 성녀 아네스는 성 벤체슬라오(축일 : 9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수호성인)의 후손이며,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축일:11월17일.게시판1474번.재속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녀)의 사촌 자매이다. 
 


 

성녀 클라라가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쓴 편지 
 

프라하의 아녜스가 누구이며 그녀가 어떻게 클라라를 알게 되었을까?  아녜스는 1205년에 프라하에서 태어난 공주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보헤미아의 Premsyl Ottokar I세 임금(1197-1230)이고, 어머니는 헝가리의 Arpad 왕조 출신 Constance이다.
 

아녜스의 사촌 자매가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자베스이다.

아녜스가 3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믿을만한 전통에 의하면 Silesia의 공작의 아들인 Boleslaus와 약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이 금방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녀는 Premonstratensian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한 때 그녀는 후에 헨리 4세 황제가 되는 프레데릭 2세 황제의 아들과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그는 오스트리아의 Luke Leopold 공작의 궁정에서 살았었다. 그래서 아녜스는 그 궁정으로 보내졌지만, 헨리가 Leopold의 딸과 결혼하는 바람에 그녀의 약혼은 후에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서 파기되었다. 아녜스는 프라하로 되돌아왔는데, 그 때 영국의 헨리 3세로부터 다시 한 번 약혼 신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젊은 공주는 동정 서원을 하였고, 모든 혼인 신청을 거절하였다.
 


 성녀 클라라와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1225년에 첫 번째 작은 형제들이 오게 되었다. 아녜스는 그들을 통해 아시시의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한편, 그녀의 사촌인 엘리자베스는 성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참회자들의 회에 가입하여, Marburg에 병원을 짓고,거기에서 병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1230년 아녜스의 아버지 Premsyl Ottokar I세가 죽자 그녀는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의 생활양식에 따라 자발적으로 가난의 삶의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녀의 오빠인 Wensenslaus I세가 1232년에 그녀에게 땅을 주어서 거기에 성 프란치스코에게 봉헌하는 병원을 지어 그 병원을 Crosiers of the Red Star(빨간 별이 새싹들 - 이들은 나중에 성 아오스딩의 회칙을 받아들인 봉사단체이다)에게 맡겨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또한 작은 형제들을 위하여 성당과 수도원을 지어 주었고, 1233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명확히 청원하여 자신의 삶을 인준 받은 후, 트렌트에서 그녀의 삶에 함께 하고자 들어온 가난한 자매들을 위해 수도원을 지어 주었다. 아녜스는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이 받아들인 복음적 삶이 양식에 따라 살기를 원했다. 그녀는 1282년에 프라하에서 죽었으며, 1874년에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9년 11월 12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를 시성하였다. 
 


 성 다미아노 수도원 회랑
 


클라라는 아녜스네게 여러 편의 편지를 썼다. 4개의 편지가 다 보존되어 있다. 첫 번째 편지는 1234년 6월 11일 이전에 쓰여졌다. 이때는 아녜스가 아직 서원을 하기 전이었다. 클라라는 그녀를 아직 “보헤미아의 위대한 왕 각하의 따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두 번째 편지는 1234-1239년 사이에 쓰여진 것인데, 이때 작은 형제회의 총장은 엘리아 형제였다. 이 편지에서 엘리아 형제가 언급되고 있다. 세 번째 편지는 1238년으로 연대를 추정하는데, 그것은 1237년에 그레고리오 교황이 클라라회원들에게 시토회원들처럼 금육을 지키라고 권함에 따라 금육을 지키는 것과 관련한 어렴움들에 대한 답을 이 편지에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또한 자신이 성 프란치스코에게 봉헌하여 지은 병원(혹은 간호시설)이 다른 수도 단체에 의해 관리되어서 그녀 자신은 현세의 관심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는 것이 언급하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 생각에 대해 애초에는 반대하였으나,  후에는 Crosiers of the Red Star에게 병원을 넘겨주는 것을 받아들였다. 마지막 편지는 한참 후인 1253년에 쓰여지는데, 이때는 클라라가 죽을 무렵인데, 연대를 그렇게 보는 이유는 이 편지에서 클라가 자신의 동생 아녜스를 언급하면서, 아녜스가 클라라의 죽음 몇 달 전에 Monticelli 수도원으로부터 돌아왔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성 다미아노 수도원 회랑의 다른 모습
 

이 편지들은 상당히 신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편지들은 여성적 영성의 다양한 주제들을 발전시키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정배에 관하여;  

봉헌된 동정성; 가난의 찬미; 가난하고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관상;

육화의 신비 안에서의 복되신 동정녀; 단식과 금식에 관한 실질적인 규정들;  

그리스도의 여러 신비들 안에서 관조되는 그분의 겸손.  

여기서 우리는 이 편지들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지는 것으로 자족함이 좋겠다. 보헤미아의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1,2,3, 또는 4LAg라고 표기될 것이다. 

 

“자매는 그분을 사랑할 때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더 깨끗해지고, 그분을 맞일할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1LAg 8) 
 

“가난을 사랑하고 포옹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부(富)를 부여하는, 오 복된 가난이여!  가난을 소유하고 또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를 약속하시고 의심할 여지없이 영원한 영광과 복된 생명을 주시리니, 오 거룩한 가난이여! 말씀 하시자 존재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존재한 하늘과 땅을 다스리셨으며 지금도 다스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황송하옵게도 무엇보다 특별히 포옹하신, 오 성스러운 가난이여!“(1LAg 15-17). 
 

“오히려 가난한 동정녀여,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포옹하십시오”(2LAg 18). 
 

"고귀하신 여왕이여, 그대의 정배를 닮으려는 열망으로 바라고, 깊이 생각하고, 관상하십시오“(2LAg 20).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신적 실체의 형상 가운데에 두고, 그대의 전존재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변화시키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태초부터 하느님 몸소 마련해 놓으신 분의 벗들이 느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3LAg 12-14). 
 

“동정녀께서 잉태하시고 거룩한 태중의 작고 은밀한 곳에 보셨고, 동정의 품에서 기르신 그 위대한 하느님의 지극히 감미로우신 어머니께 매달리십시오”(3LAg 18-19).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매여, 주님 안에서 부탁하고 간청합니다: 그대가 지켜 온 단식은 무분별하고도 불가능한 것으로 내가 알고 있는데 이 엄격함을 지혜롭고 신중하게 삼가시고...”(3LAg 40).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요. 오,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시고 지존하신 임금님의 딸과 지극히 정결한 정배가 단장해야 하는 모든 덕행의 꽃과 의복으로 속속들이 단장하고... 먼저, 거울의 맨 밑에서부터 보시고,  말구유 위에 강보에 싸여 주워 계시는 그 가난을 깊이 바라보십시오. 오, 놀라운 겸손이여, 오, 기막힌 가난이여!  천사들의 임금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이 구유에 누어 계시다니! 다음으로, 거울의 중간을 보시고 그분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겪으신 무수한 수고와 고통 그리고 그분께서 지니신 겸손과 함께 복된 가난을 깊이 바라보십시오. 이제 끝으로 거울의 맨 위를 보시고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 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깊이 바라보십시오” (4LAg 15; 19-23).
 

- 작은형제회홈에서www.ofm.or.kr -
 


 


 성녀 클라라와 자매들이 사용하였던 성 다미아노 성당 가대
 

3월 2일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 (2회)
성녀 클라라가 쓴 편지 중에 남아 있는 네 통의 편지 수신인인 프라하의 아네스 성녀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1205년 거룩한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아네스의 축일 전날에 보헤미아 왕, 프리미스라우스 오토카 1세의 딸이 태어났다. 그녀는 세례 때 성녀 아네스의 이름을 받았다. 헝가리의 성 엘리사벳의 숙모인 어머니는 어린 딸이 놀랄 만큼 진지함을 알고 기뻐하였다. 그 당시 관습에 따라 공주는 세 살 때 실레지아의 공작의 아들과 약혼하고 당시 헤드위그 성인이 장상으로 있던 트레브니츠에 있는 실레지아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다. 3년 후에 약혼자가 죽자 그녀는 보헤미아 도잔에 있는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성 헤드위그에 의해 뿌려진 성덕의 씨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제왕들의 청혼에 시달린 그녀는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게 중재해 줄 것을 간청하여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그후 아네스는 거룩한 신랑과 결합하기 위하여 수도생활을 열망하였다. 가난한 클라라회 명성이 보헤미아까지 자자하여 아네스는 프라하 수도에 가난한 클라라회 수도원을 세웠다. 성녀 클라라는 5명의 수녀를 보내주었다. 아네스와 7명의 젊은 귀족여성들이 이 수도원에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그녀는 그들 가운데 기도의 열정에 있어서, 순명과 수도적 수련에 있어서, 극기와 겸손에 이르기까지 덕행의 모범으로 두드러졌다. 수도원장직을 받아들이라는 교황의 명령은 겸손한 그녀에게 큰 시련이었다. 그녀는 그 직함을 지니지 않고 그저 “장상 수녀”로 불리는 것을 허락을 받았다. 거룩한 어머니 성녀 클라라의 거룩한 열정을 닮은 열정으로 가난을 지켰다. 그녀는 왕인 오빠가 보내는 왕가의 선물을 거절하고 수녀들이 개인적인 소유물을 지니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천상의 덕이 가득했던 그녀는 40년 동안 하느님께 봉사하고 1282년 3월 2일에 천상으로 돌아갔다. 
  

기도
오 하느님, 복된 아네스 동정녀로 하여금 왕궁 생활의 즐거움을 경멸하고 당신의 십자가를 겸손하게 따르게 하여 천상 높은 곳으로 들어올리셨으니, 저희에게 그녀의 중재와 모범을 통하여 영원한 영광에 함께 하게 하소서.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묵상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같이 가난과 겸손 안에서 주님을 섬기며 신뢰심을 가지고 동냥하러 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셨으니 부끄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여러분을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 하고, 물질에 가난한 사람이 되게 하면서도, 덕행에 뛰어나게 하는 지극히 높은 가난의 탁월성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이 가난에 완전히 매달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하늘 아래서는 결코 다른 어느 것도 가지기를 원치 마십시오.

- 작은 형제들의 제 2회칙 6장 -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

 


 축일 : 3월 3일

성녀 구네군다 황후 동정

Saint Kunegunda,(Kinga)

Sta. Cunegundis, V

Santa Cunegonda Imperatrice

Died : 1040.buried at Bamberg, Bavaria near Saint Henry

Patronage : Lithuania, Luxembourg, Poland

Cunegonda = che combatte per la stirpe, dall’antico tedesco
 


 

성녀 구네군다는 부친 스그프리드와 모친 헤드비그로부터 아주 어릴 적부터 신심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바바리아의 공작인 성 헨리꼬와 결혼하였는데, 이때 헨리꼬는 동방의 어느 목수가 제작한 십자가를 선물했고, 이것이 지금도 뭔헨에 보존되어 있다.

○ 성 헨리코 축일 : 7월 13일
어느 전기작가는 그들 부부는 결혼식날에 동정서원을 발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당시의 황제 오토 3세가 서거하자, 헨리꼬는 로만스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대관식은 마인쯔에서 성 빌리지스에 의하여 성대히 거행되었다. 또 1013년에는 그들이 로마로 가서 교황 베네딕또 8세로부터 황제관을 받았다. 이러한 구네군다였지만 그녀는 얼마 뒤에 중상모략자들의 희생물이 되었고, 남편마저 일시적이나마 아내를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확고히 항변해야 할 입장에 선 그녀는 불에 의한 시죄법 적용을 허용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헨리꼬는 자신의 의혹을 풀고, 마음으로 일치하여 살았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국내의 신앙 전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구네군다는 황제에게 청을 들여서 밤베르그 대성당을 비롯히여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하였고, 교황 성하가 직접 오시어 축성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녀가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녀는 병이 낫자 까셀 근교 카우푼겐 성당을 수 차례나 방문하고, 미사 때 복음을 봉독한 뒤에, 그녀는 원래의 십자가 일부를 제대에 봉헌하였다. 그 후 그녀는 주교로부터 수녀복을 받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지난날의 황녀로서 모든 부귀영화를 잊고 비천한 환경과 초라한 수도원에서 기꺼이 살았으며,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삶을 살았다고 주위 사람들이 높이 칭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독실한 신자는 신분의 귀천이나 빈부 여하에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영혼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 성녀 쿠네군다는 독일의 황후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그의 양친도 왕후의 가정이었다. 황제나 황후로서 공경받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녀 쿠네군다는 특별히 세상에 알려진 성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열심한 그리스도교 신자인 부모의 교육을 받아 경건하게 자랐고, 또한 왕후의 여식으로서의 적합한 교육을 받았다. 나이가 차서 쿠네군다는 바바리아 왕의 원의로 그의 황후가 되어 성대한 결혼식도 거행했다. 이때 하인리히(헨리코)는 동방의 어느 목수가 제작한 십자가를 선물했는데, 이것이 지금도 뭔헨에 보존되어 있다. 그녀가 전부터 동정의 서원을 발하고 있었던가는 확실치 않지만, 결혼식 후 남편인 왕에게 하느님께 정결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하여 일생을 동정으로 지내겠다고 청했다는 것이다. 이 말에 의외에도 남편은 “실은 나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남매와 같이 사이좋게 지내자. 그래도 세상에는 이를 끝까지 감추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때 쿠네군다의 즐거움이 어떠했는가는 이루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은 정결한 생활을 계속하며 서로 격려하며 각각 덕행의 길로 매진했다. 쿠네군다는 모든 상류 부인의 전형으로 공경을 받고 남편인 하인리히(Heinrich, 성 헨리코, 축일 7월13일)는 또한 오토(Otto)대제의 사후 바바리아 뿐 아니라 전 독일을 다스리는 황제로 추대되어 마인쯔에서 대주교의 손으로 왕관을 받았다.
 


 

대관식 후 황제는 곧 어떤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국내를 시찰한 뒤 비로소 황후가 기다리고 있는 바데르보룬에 돌아왔다. 그러나 쿠네군다도 그 동안 한가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국모의 책임을 완수하며, 다른편으로는 기도나 빈민, 병자의 방문 등 쉴 새가 없었다. 그녀는 국경일에는 화려한 의상으로 사람들과 연회를 같이 했지만, 홀로 되면 검소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엄한 단식재를 지켰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에서 선행도 할 수 있는 한 남몰래 행하려고 했지만 덕의 광채는 숨기지 못하고 그로 말미암아 한층 더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1114년에 황제와 같이 로마를 방문하고 성 베드로 대성정에서 교황의 손에서 다시 독일 황제의 관을 받았다. 하인리히는 교회에 복종하는 표시로써 그것을 또한 성 베드로 제대에 봉헌하고 아울러 종교에 충실하고 교회를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쿠네군다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이 예식에 참여하고 진심으로 자기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가 허락되었음인지 사실 하인리히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는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귀국하자 황제는 밤베르크(Bamberg)에 크나 큰 성당이 붙은 한 수도원을 건립했고 틈이 있을 때마다 그 수도원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지내기를 좋아했다. 이 수도원은 지금도 남아있으며 경건했던 황제를 사모하는 유일한 기념으로 되어 있다. 그 건축에는 쿠네군다도 자기의 재산을 희사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원조를 했고, 황제의 도움을 얻어 카우푼겐에 한 여자 수도원을 건설하고 황금보석과 귀중품 전부를 제단의 장식품으로 바침으로써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공경하는 정성을 표시했다. 이렇게 두 성인은 기쁨 속에 살아가고 있었으나 무슨 영문인지 황제의 마음에 그녀의 정결을 의심하는 마음이 일어나 지금까지 그녀를 존경하고 있었던 만큼 그의 번민도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습관대로 하느님께 직접 그 정결의 진부(眞否)를 결정해 줄 것을 간청하게 되었다. 그 방법은 장기 열두 개를 불에 벌겋게 달구어놓고 쿠네군다에게 맨발로 그 위를 건너게 하여 화상을 입으면 죄가 있는 것이고 무사하면 죄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황후도 몸의 정결함을 밝히기 위해 이를 원하고 잠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 후 맨발로 한창 달은 쇠의 장기 앞에 섰다. 황제를 위시하여 입회인들은 결과의 여하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다보고 있었다. 쿠네군다는 천천히 맨발로 뜨거운 쇠 위를 걷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이렇게 벌겋게 달은 쇠 위를 걸어갔어도 기적으로 아무런 상처를 입은 데는 없었다. 마침내 열 두 개를 전부 걸어갔다. 사람들은 저절로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그녀의 결백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다. 그것을 목격한 황제는 달려가서 그녀 앞에 머리를 숙이고 이유 없이 의심한 점에 대해 용서를 청했다. 쿠네군다도 쾌히 남편을 용서해주고 두 성인의 마음은 전과 같이 명랑해졌다. 두 사람은 많은 선행을 하다가 1024년 황제가 먼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황제는 친우, 중신, 사제들을 병석에 부르고 국정(國政)에 관해 세밀하게 유언을 한 후 비로소 쿠네군다와 같이 평생 동정을 지킨 사실을 말했다. 일동은 경탄하며 다시금 황제, 황후의 성덕에 탄복하며 또한 이전에 쿠네군다의 무죄를 밝힌 기적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황제를 여읜 쿠네군다는 하느님만을 위해서 살았다. 그녀는 잠시 평화로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친척인 콘라도 1세에게 국정을 양도하고, 그 후는 기도와 자선 사업으로 날을 보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1년이 지나서 그녀는 손수 설립한 카푸친의 여자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정해 예수 십자가의 한 조각을 거룩한 유물로 그곳에 헌납하고 아름다운 의복은 전부 버리고 그 대신 친히 만든 누추한 옷을 입고 발을 하고 주교께서 축성한 수건을 썼다. 그리고 나서 즐거이 수덕에 힘쓰며 이전의 고귀한 신분도 잊어버린 듯이 아무리 천한 일도 실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성당을 장식하는 여러 물품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예전과 같이 병자 방문 등도 기꺼이 계속했다. 수도생활을 한 지 15년 후 그녀도 마침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으로 떠났다. 유해는 유언에 의해 밤베르크의 성당에 운반되어 그녀가 늘 오빠라고 부르던 배우자 성 헨리코(하인리히) 옆에 매장하게 되었는데, 행렬 도중 그녀의 덕울 사모한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와 길 옆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 성녀 쿠네군다 수도자(2회, +1292년) 축일 : 7월 23일 


 

 


 
 

 

Fratello Sole, Sorella Luna
 

Dolce sentire come nel mio cuore
ora, umilmente, sta nascendo amore.
Dolce capire che non son piusolo
ma che son parte di un’immensa vita,
che generosa risplende intorno a me:
dono di Lui, del Suo immenso amor.
 


 

Ci ha dato il cielo e le chiare stelle,
fratello Sole e sorella Luna;
la madre Terra con frutti, prati e fiori
il fuoco, il vento, l’aria e l’acqua pura,
fonte di vita per le Sue creature:
dono di Lui, del Suo immenso amor,
dono di Lui, del Suo immenso amor.
 


 

Sia laudato nostro Signore
che ha creato l’universo intero.
Sia laudato nostro Signore
noi tutti siamo Sue creature:
dono di Lui, del Suo immenso amor,
beato chi Lo serve in umilta
 

 

HENRY II

Also known as

Heinrich, Duke of Bavaria; Good King Henry

Memorial

13 July
 
 

3 marzo

Etimologia: Cunegonda = che combatte per la stirpe, dall’antico tedesco

Le fonti relative a Cunegonda sono costituite da notizie sparse, fornite da alcuni cronisti contemporanei, come Tietmaro di Mersburgo e e Rodolfo il Glabro, e da una vita composta da un canonico di Bamberga piu di un sec. dopo la morte. Quest’ultima composizione e in connessione con il culto che prese particolare incremento verso burgo e la madre, Adesvige, diedero alla figlia, dai primi anni, profondi insegnamenti cristiani. A vent’anni circa, ella sposo il duca di Baviera, che nel 1002 fu incoronato re di Germania e nel 1014 imperatore. Su questo matrimonio sono sorte, specie al principio del nostro sec., molte polemiche: in alcuni testi antichi, tra i quali la bolla di Innocenzo III, si narra che i due coniugi fecero voto di perpetua verginita, per cui vissero sempre come fratello e sorella. Si parlo cosi di "matrimonio di s. Giuseppe" e per questo fatto in alcuni testi si da a Cunegonda il titolo di vergine. Secondo altri autori moderni una simile qualifica non corrisponde alle narrazioni di contemporanei (come Rodolfo il Glabro). I fatti, in realta, sarebbero andati in questa maniera: Enrico si accorse che la moglie era "sterile" e in casi consimili il matrimoniale germanico, tollerato da Roma, ammetteva il ripudio. L’imperatore non volle usare questo diritto per la grande pieta e santita che riscontrava nella moglie e preferi vivere assieme a lei anche senza speranza di prole. Il fatto di non aver figli e la santita dei coniugi pote, in seguito, far nascere la leggenda del "matrimonio di s. Giuseppe".
 

Nella Vita e nella bolla pontificia si legge che Cunegonda fu oggetto di una grande calunnia di infedelta coniugale ed Enrico, per provarne l’innocenza, volle sottoporla alla prova del fuoco. Cunegonda accetto tale prova e, a piedi nudi, passo indenne sopra vomeri infuocati. L’imperatore chiese perdono alla sposa per aver troppo creduto agli accusatori e da quel momento visse in stima e piena fiducia nella virtu della sposa. Non sappiamo quanta validita storica abbia questo episodio.
 

Gli avvenimenti piu importanti della vita di Cunegonda sono i seguenti: a Paderborn nel 1002 (10 agosto) fu incoronata regina; nel 1014 si reco a Roma ove ricevette, assieme al marito, la corona imperiale da papa Benedetto VIII (14 febbraio). La vita dell’imperatrice fu un mirabile esempio di virtu: carita, umilta, mortificazione la caratterizzarono in molteplici manifestazioni. Svolse una mirabile attivita costruttrice, assecondata dallo stesso imperatore. Fra le sue realizzazioni vanno segnalate l’erezione del duomo di Bamberga (1007) e del monastero di Kaufungen (1021), fondato in seguito ad un voto fatto durante una gravissima malattia da cui era uscita pienamente ristabilita. Proprio in questo monastero benedettino ella volle ritirarsi dopo la dolorosa perdita del marito (1025). Nel giorno anniversario della morte di Enrico fece radunare molti vescovi per la dedicazione della chiesa di Kaufungen, alla quale dono una reliquia della Croce. Dopo la lettura del Vangelo, Cunegonda si spoglio delle insegne e degli abiti imperiali, si fece tagliare i capelli e si vesti di rozzo saio. Il suo patrimonio servi (come aveva gia fatto in precedenza) a fabbri care monasteri, a decorare chiese, a sostentare i poveri. Nella vita monastica visse dimentica della passata dignita, in completa umilta. Passava gran parte della giornata in orazione o nella lettura dei sacri testi; non disdegnava nemmeno i lavori manuali o i piu umili servizi. Un ufficio che gradi sommamente fu la visita alle ammalate per confortarle e assisterle. Si distinse anche per le severe pratiche di penitenza: prendeva il cibo indispensabile per vivere, rifiutando quello che poteva solleticare in qualche maniera il gusto. Condusse questa vita per molti anni.
 

Sull’anno di morte non c’e concordanza: generalmente viene preferito il 1033, anziche il 1039, mentre nessuna discussione si riscontra sul giorno e sul mese: 3 marzo. Cunegonda fu sepolta presso il marito nella cattedrale di Bamberga. Nei primi anni non fu oggetto di grande culto, ma nel sec. XII la venerazione crebbe grandemente superando quella data in precedenza ad Enrico. La causa di canonizzazione fu iniziata sotto Celestino III ma solo Innocenzo III, con bolla del 29 marzo 1200, ne approvo il culto. Nella diocesi di Bamberga nel sec. XV c’erano ben quattro solenni celebrazioni: il 3 e il 29 marzo (canonizzazione), il 9 settembre (traslazione delle reliquie), il 1o agosto (commemorazione del primo miracolo). Oggi nell’arcidiocesi di Bamberga si celebra il 3 marzo e il 9 settembre, ma la memoria della canonizzazione ricorre il 3 aprile.
 

Autore: Gian Domenico Gordini
 

CUNEGUNDES
 

Also known as

Cunnegunda; Kinga; Kunegunda

Memorial

3 March
 

Profile

Daughter of Sigfrid, Count of Luxemburg. Received a religious education, and took a private vow of virginity. Married Saint Henry, Duke of Bavaria, who agreed to honour her vow. On the death of Emperor Otho III, Henry was chosen King of the Romans, and Cunegundes was crowned queen at Paderborn in 1002. Holy Roman Empress in 1014, receiving the crown from Pope Benedict VIII.

At one point, gossips accused her of adultery, but she proved her innocence by asking for God’s help, then walking over pieces of flaming irons without injury.

During his time as emperor, Henry gave away the bulk of his wealth in charity; when he died in 1024, Cunegundes was left relatively poor. On the 1025 anniversary of his death, which coincided with the dedication of a monastery she had built for Benedictine nuns at Kaffungen, Cunegundes took the veil, and entered that monastery, spending her remaining 15 years praying, reading, and working beside her sisters.

Died

1040; buried at Bamberg, Bavaria near Saint Henry

Patronage

Lithuania, Luxembourg, Poland

 

■■■■■■■■■■■■■■■■■■■■■■■■■■■■■■■■■■■■■■■■■■■■■■■■■■■■■■■■■■■■■■■■■

 


 축일:3월 7일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스 순교자

Sts. Perpetua and Felicitas(Felicity) Martyrs

ST. PERPETUA, AND FELICITAS, MM. WITH THEIR COMPANIONS.

Died:mauled by wild beasts and beheaded 7 March 203 at Carthage, North Africa

Perpetua = fede immutabile = immutable faith

Felicita (come Felice) = like Happy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시기인 203년 카르타고에서 순교했다. 그들 자신의 증언과 당대 저술가의 글에서 모아놓은 매우 정확한 그들의 순교사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Felicitas) 및 4명의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초기 순교자들의 전기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그 일부는 성녀 페르페투아 자신이, 그리고 다른 일부는 나머지 순교자들이 기록한 글에 의해서 하나의 전기가 완성되었다. 성녀 비비아 페르페투아(Vibia Perpetua)는 좋은 가문의 딸로서 순교 당시에 귀여운 아기를 팔에 안은 젊은 부인이었고, 성녀 펠리치타는 여종이었다. 나머지 4명의 순교자는 노예였던 성 레보카투스(Revocatus), 성 세쿤둘루스(Secundul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그리고 성 사티루스(Satyrus)이다. 로마제국 내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황제의 칙령에 따라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검거할 당시 성 사티루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예비자였으나 모여 있던 집이 포위될 순간에 모두 세례를 받고 함께 감옥에 갇혔다. 그 당시에 성녀 페르페투아는 처음으로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를 꿈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신비한 어느 사제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는 이교도의 사제였다. 성녀는 "나는 그 노인의 불행을 슬퍼하였지요." 하며 아기를 안고 걱정하던 차에 체포되었다. 재판정에서 그들은 모두 맹수의 밥이 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감옥에 돌아온 뒤에 성녀 페르페투아는 두 번째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어릴 적에 죽은 동생을 보았다. 그리고 성 사티루스는 자신이 천국에 당도한 꿈을 꾸었다. 이윽고 순교의 날이 왔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너희들이 우리를 심판하였으나 하느님은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일행은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하느님의 귀여운 자녀답게” 형장으로 나갔다. 맹수들이 덤벼들자 그들은 서로를 붙잡고 의지하다가 한 사람씩 죽어갔다. 
 


 카르타고의 거룩한 순교자들의 『순교사기』에서

(Cap. 18,20-21: edit. Van Beek, Noviomagi, 1936, pp. 42,46-52)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받아 간택되었다.


승리의 날이 밝아 오자 그들은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듯 유쾌한 표정으로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마음 설레며 감옥에서 원형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먼저 뻬르뻬뚜아가 소에 받혀 허공에 떴다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다시 일어서서 펠리치따스가 땅에 넘어져있는 것을 보고는 달려가 손으로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함께 섰다. 관객들의 광포가 가라앉자 그들은 "사나비바리아"라고 하는 문으로 호출되었다. 거기에서 당시 그와 친밀했던 예비자인 루스티쿠스가 뻬르뻬뚜아를 부축해주었다. 뻬르뻬뚜아는 너무도 깊은 탈혼에 빠져있었으므로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모든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는 가운데 "우리가 언제 소에게 내던져 지나요?" 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미 내던져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 몸과 옷에서 허다한 광포의 흔적을 자기 눈으로 볼 때까지 그 사실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다음에 자기 오빠와 그 예비자를 부르고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에 견고하고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의 고통이 여러분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다른 문에 있던 사투루스도 병사인 푸덴스를 격려하며 말했다. "내가 생각하고 예언한 대로 지금까지 나는 짐승에게 받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심으로 내말을 믿어 주십시오. 나는 거기에 나아가 표범에게 한 번만 물어뜯기면 끝이 날것입니다." 이 살인공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표범에게 내던져졌고 표범이 한 번 물어뜯자 피가 낭자하였다. 표범이 다시 물려고 돌아섰을 때 관중들은 그것을 제2의 세례로 인정하고 "피로 씻기운 자를 구해주어라. 피로 씻기운 자를 구해주어라."고 외쳤다. 이렇게 피로 씻기운 이는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사투루스는 병사 푸덴스에게 말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신앙을 잊지 말고 나도 잊지 마십시오. 이 모든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오로지 이 일로 인해 강해지십시오." 그리고는 푸덴스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달라고 하여 자기 상처에 담그고는 자기 피의 증거와 기념으로서 그에게 유산으로 되돌려 주었다. 그는 의식을 잃었고 다른 이들과 함께 목을 자르는 곳으로 내던져졌다. 군중이 순교자들의 몸이 창에 찔리는 광경을 살기에 찬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도록 그들을 경기장 가운데로 끌어내달라고 청했을 때, 순교자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군중이 원하는 곳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평화의 예식으로 순교를 완수하고자 서로 입을 맞추었다. 그들 모두는 움직이지 않고 침묵 중에 칼을 받아들였다. 사투루스는 뻬르뻬뚜아를 부축하여 있었기 때문에 맨 앞에 올라가 맨 먼저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뻬르뻬뚜아는 아마도 고통을 받고 있었음인지 내려치는 칼이 뼈에 닿는 것을 느끼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자원하여 서투른 초년생 검객의 손을 이끌어 자기 목에 갖다대었다. 마귀까지 무서워했던 그런 용맹한 여인이 스스로 자원하여 검객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그를 죽일 수 있었겠는가! 오, 더할 수 없이 용감하고 복된 순교자들이여! 여러분은 정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받아 간택되었습니다.


(가톨릭홈에서) 
 


 

페르페투아는 라틴어로 ’영원한’이란 뜻이다. "아버지가 내게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설명으로 내 신앙을 약화시키려고 할 때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 이 그릇을 보세요! 이것이 물그릇이거나 다른 무엇이거나 상관없을까요? 이것이 본래의 그것과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요?’ 그러자 ’아니지.’하고 대답하셨다. 나는 ’그렇다면 저도 저의 있는 그대로의 이름인 그리스도인 말고 다른 어떤 이름으로 저 자신을 부를 수는 없어요.’라고 말했다."  페르페투아는 카르타고의 귀부인이며 귀공자의 어머니로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셉티미오 세베루스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에 대한 역사를 쓰기도 했다. 박해와 죽음에 대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페루페투아와 펠리치타스(노예로서 임산부였다.) 그리고 세 동반자인 레보카투스와 세쿤둘루스, 사투르누스는 끝까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켰다. 이러한 그들의 고집 때문에 그들은 모두 원형 극장의 대중 경기장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는 참수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페르페투아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이방인이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말을 듣지 않고 22세에 감옥에 갇혔던 것이다. 페르페투아는 그녀의 일기에서 감금된 동안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아! 얼마나 두려운 나날들이었던가? 군중들의 무서운 분노, 군인들의 거친 태도,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은 내 아기에 대한 걱정이었다. … 나는 이러한 고통을 여러 날 동안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기와 함께 감옥에 있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아기에 대한 걱정과 고민에서 벗어나자 나는 즉시 건강을 회복했고, 그때부터 감옥은 나에게 천국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그 곳에 있는 것이 더 좋았다." 펠리치타스는 경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 딸을 낳았다. 페르페투아의 재판과 감금에 대한 기록은 경기 시작 바로 전날을 끝났다. "경기장 자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원하는 사람이 그것을 기록하게 하자." 그 일기는 목격자에 의해 마무리 지어졌다. 

 


 

믿음에 대한 박해는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안네 프랑크를 생각해 보자. 그녀는 유대인 소녀로서 2차 대전 중에 가족들과 함께 숨어 있었으나 결국은 히틀러의 나치 당원들에게 잡혀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안네는 페르페투아나 펠리치타스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시련과 고통을 당했으며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른 것이다. 안네는 그녀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이상이 흩어지고 파괴될 때, 사람들이 그들의 가장 사악한 면을 보이고 있을 때, 진리와 정의와 하느님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때에 우리의 영역을 고수하고 우리의 견해를 지탱한다는 것이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배 이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페르페투아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자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이렇게 위로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202년 로마 황제 셉띠모 세베로는 전국의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공포했다. 그러면서 점점 박해가 심해졌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로 유명한 성녀 페르페투아는 카르타고의 귀부인으로 202년 경 그리스도교 박해가 극도에 달했을 때 펠리치타스 및 4명의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참수당했다. 그들의 전기는 성녀 자신이 쓴 것과 그리고 다른 일부는 나머지 순교자들에 의해 전해져오고 있다. 서로 의지하며 굳건히 신앙을 지킨 그리스도의 신부로 공경 받고 있다. 펠리칫따는 그 당시 노예였다. 그녀는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며 살기를 바랬기 때문에 감옥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임신 8개월의 아기가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산모는 기적적으로 사형장에 끌려가지 않았다. 사형법에 따라 아기를 낳은 후에 처형하게 되었다. 엄청난 산고를 치르며 감옥에서 출산했다. 출산 후 마침내 광장에 끌려가 맹수에게 던져졌다. 그러나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들은 분이 치밀어 의식을 잃어 쓰러질 때까지 매질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펠리칫따를 그물에 씌어 분노한 황소 뿔에 치어죽게 했다. 죽기 전에, "당신들은 우리를 재판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을 재판할 것입니다." 라고 외쳤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로마의 순교자 성녀 펠리치타와 일곱 아들들(Roman Martyr St. Felicita and seven sons)



가족 구성원


아쉽게도 초기 순교 성인들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진 내용보다 그곳에서 죽어간 순교자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페르페투아는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카르타고의 귀부인이자 어린 아들을 둔 어머니였고, 펠리치타는 노예 출신으로 죽기 전에 딸아이를 낳았다고 전해지는데, 둘 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었다. 그렇다면 두 성녀의 남편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또 자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아이들은 커서 과연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을까? 그 아이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성녀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를 둘러싼 이런 의문들은 기록을 남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방대한 분량의 일대기는 아니더라도 누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기 전에 앨범에 꽂힌 사진 아래에 짧은 메모라도 적어 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비록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경험하고, 보고, 겪고, 느낀 것을 남기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작고하신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우리 가족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

 


 

성녀 프란체스카 로마나의 환시(The Vision of St Francesca Romana) - GENTILESCHI, Orazio
1615-19. Oil on canvas. Galleria Nazionale delle Marche, Urbino
 

축일 : 3월 9일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 수도자

St. Frances of Rome

St. Francisca Romana, C

Born : 1384 in Rome, Italy

Died : 1440 in Rome, Italy; relics at Saint Frances of Rome Church, Rome, Italy;

entombed beneath the pavement of the Ponziani sacristy of the Church of Saint Cecilia, Rome, Italy

Canonized : 29 May 1608 by Pope Paul V

Third Order Franciscan
 

 



1384년에 태어난 프란치스카는 로마의 귀족 집안의 자녀로 12살때 다른 로마의 귀족인 로렌조 폰지아니와 형식적인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수녀가 되려고 하였으나,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였고, 모범적인 아내로서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결혼 후 얼마 안되어서 그녀는 중한 병이 들었는데 남편은 그 병을 고치려고 마법사를 불러들였으나, 프란치스카는 그를 딱 잘라 거절하며 집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자 성 알렉시스가 나타나서 그녀를 치유해주었다. 그 후로 그녀는 그 수호천사의 발현과 도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 수호천사는 그녀를 팔꿈치로 슬쩍 건드리곤 했다. 마의 트라스테베레 지역에는 폰지아니의 성이 있었고 그 한 모퉁이에 리빠의 성 프란치스코 소성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1212년에 세떼솔리의 야고바라는 로마의 귀부인이 성 프란치스코에게 바친 것인데, 그녀는 1226년에 프란치스코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다. 적어도 1414년 까지 그 이웃 수도원은 트린치의 바오로 형제와 바울루치오 형제에 의해 1368년에 시작되었고, 다음 세기에 베르나르디노와 요한 카피스트라노 같은 성인에 의해 공포된, 프란치스코 1회의 엄수파 수사들의 개혁운동에 속하는 34개중의 하나였다. 프란치스카 폰지아니가 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한 곳이 이 리빠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그곳 신부들 중에서 바르톨로메오 본디 신부가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비노자라는 프란치스카의 큰오빠의 아내가 폰지아니 성에서 함께 살았는데, 그녀도 역시 결혼전에는 수도회에 들어가고 싶어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프란치스카와 함께 자선과 신앙 생활에 충실하였다. 그들은 함께 쓰지 않는 다락방이나 정원의 낡은 여름 움악에서 몇 시간 동안 기도 하곤 하였다. 17살에 프란치스카는 첫 아들을 낳아 아기의 이름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지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프란치스카는 집안 일을 도맡게 되어 유능하게 또 성실한 크리스챤답게 의무를 잘 해나갔다. 마을에 기근이 들었던 동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옥수수와 포도주를 제공하였는데 너무 후하게 주어 그녀의 남편은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비어있던 곡식창고가 놀랍게도 밀로 가득 차 있고, 빈 술통이 포도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하고는 아내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해 주었다. 1400년 로마는 칩입을 받은데다 뒤따른 내란으로 폰지아니 집안에도 재난이 가해졌다. 로렌조는 로마 교황의 군대와 싸웠으나 부상을 당했다. 프란치스카가 그를 간호하여 건강이 회복되자 또 다시 전쟁에 참여하였다. 첫아들 요한은 포로로 잡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페스트가 전쟁으로 인해 생겨나 프란치스카의 둘째 아들과 딸이 그 병으로 죽었다. 황폐한 폰지아니 농장에서 농부들이 음식을 구걸하기 위해 프란치스카에게 왔다. 프란치스카는 환자들, 굶주린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그룹으로 조직된 로마의 부인들이 그녀의 일을 돕기로 하였다. 얼마 동안 그녀도 페스트에 걸렸으나, 잠시 후 금방 회복되어 자선사업을 계속하였다. 이때 프란치스카의 죽은 둘째 아들이 나타나서 대천사를 그녀의 수호천사로 모셔다 드렸다. 수호천사는 그녀가 조그마한 잘못을 저지르거나 하면 자신을 감추어서, 그녀가 통회의 행실을 보여줄 때까지 다시는 빛을 발하지 않았다. 

큰아들 요한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 얼마되지 않아 어떤 경솔한 성품의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그 여자는 프란치스카를 매우 싫어하여 화를 내다가 이상한 병에 걸려 괴로와 했다. 프란치스카의 다정한 손길이 그녀를 치료해준 후 며느리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프란치스카는 집안 일을 며느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도시의 자선사업에 전적으로 봉사하였다. 1425년에는 그녀와 동료 6명의 로마의 귀부인들이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이것이 3회 회원임을 취소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프란치스카와 바노자가 100마일을 걸어 로마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인 아씨시로 순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씨시 근처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 발현하여 그의 지팡이로 야생 배나무를 쳐서 배고프고 목 마른 이 순례자들에게 시원하고 물이 풍성한 배를 선물하였다. 1433년 로렌조가 죽자 프란치스카와 그녀의 동료들은 '헌신자회'를 창설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거룩하신 성부와 로마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일했다. 도시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픈 아들을 방문하고 수녀원에 돌아온 후 프란치스카는 갑자기 병이 들어 폰지아니성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7일 후인 1440년 3월9일 그녀는 사망하였다. 교황 바오로 5세는 1608년 그녀를 시성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그녀를 기념하여 산타 프란치스카 로마나라고 불리우는 로마 성당의 제대 아래에 있다. 성녀는 모든 베네딕도회의 중요한 수호자로 존중되고 있으나 역시 프란치스코 3회의 옷을 입었던 성인들 중의 한 분이시다.
 

(평화의사도 -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기념집에서)
 


 

 

1384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매우 어려서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았다. 성녀는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고 병자를 돌보아 주었다. 덕행에서 특히 겸손과 인내 그리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선업에서 뛰어났다. 1425년 성 베네딕도의 회칙을 따르는 봉헌자회를 창설했으며, 1440년 세상을 떠났다.
 

봉헌자회 총장 마리아 막달레나 안귈라리아가 쓴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까의 전기]에서

(Cap. 6-7: Acta Sanctorum Martii 2, 185-187)
 

성녀 프란치스까의 인내와 사랑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까에게 일어난 재앙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만성적이고 심한 질병을 통해서도 그녀의 인내심을 시험하고자 하셨다. 그럼에도 그녀는 짜증을 내는 일이 없었다. 자신에 대한 간호가 아무리 서툴러도 불만을 드러내는 것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 프란치스까는 그토록 사랑하던 자녀들이 채 크기도 전에 죽어갔을 때 자신의 확고부동한 인내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항상 평온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복했고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그분께 감사를 드렸다. 자기를 비판하고 중상 모략하는 사람들의 말과 자신의 생활 양식을 비방하는 이들을 똑같은 인내로써 견디어 낼 수 있었다. 또 자신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에게 결코 반감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아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까를 단순히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만 뽑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을 이웃의 영신적이고 육신적인 복지를 위해 쓰도록 간택하셨기 때문에 그녀에게 어진 성격을 주셨다. 그래서 그녀를 대하는 이들은 누구나 즉시 그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 사로잡혀 그녀가 지시하는 것을 순순히 따랐다. 하느님의 권능은 그녀가 하는 말이 위대한 효과를 거두도록 하셨다. 그래서 프란치스까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써도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근심하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성난 이들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며, 원수들을 화해로 이끌어 오랜 증오와 원한을 없애 주고, 언젠가는 앙갚음하려는 사람들의 복수심을 막으며, 한마디로 사람들의 격정을 가라앉히고 그것을 올바른 목표로 이끌어주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녀를 안전한 피난처로 여기고 사방에서 와 그에게 모여들었다. 비록 그녀가 직선적으로 죄를 힐책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느님을 진노케 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 없이 벌을 주어도 찾아오는 이들은 한결같이 위로를 받고 떠났다. 그때 로마에는 생명을 앗아가는 여러 가지 전염병들이 돌고 있었다. 전염의 위험도 불사하고 거리낌없이 나아가 고통받는 이들과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선 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한 다음 분주하게 간호해주면서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병이 어떤 것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먼저 그들 때문에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견디어 내신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그 고통을 견디도록 격려해주었다. 프란치스카는 자기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던 병자들만을 간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오두막집이나 공립병원을 찾아가 목말라 하는 환자들에게 물을 주고 침상을 마련해주며 상처를 싸매주었다. 더 더럽고 참기 더 어려운 것일수록 더 세심히 더 성심껏 간호해주었다. 그가 캄포산토라는 병원에 갈 때에는 그 병원의 제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과 진미를 늘 가지고 갔다. 집에 돌아온 때에는 그들의 낡은 옷가지와 더러운 속옷을 가지고 와 깨끗이 빨아서 마치 주님 친히 입으실 옷인 듯 정성과 세심한 주의를 쏟아 수선하고 향수를 뿌리고는 고이 접어서 상자에 넣었다. 프란치스카는 30년 동안 즉 남편과 함께 살 때에도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돌보면서 이런 일들을 했다. 그는 특히 산타 마리아 병원,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체칠리아 병원, 사시아의 산토스피리토 병원, 그리고 캄포 산토 병원에서 이런 일들을 했다. 전염병이 만연하던 이때에는 육신을 돌볼 의사들뿐 아니라 영혼에게 봉사할 사제들마저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사제들을 찾아내어 먼저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받을 준비를 시킨 환자들에게 모시고 갔다. 그리고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비용으로 한 사제의 생활비를 충당했고 그 사제는 위에서 언급한 병원들을 찾아가 그가 지적해준 환자들을 방문하곤 했다.

(가톨릭홈에서)
 


 


 

프란체스카의 생활은 세속 생활과 수도 생활 양면을 결합한 것이었다. 헌신적이고 사랑스런 아내였던 프란체스카는 기도와 봉사의 생활을 열망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줄 부인들의 단체를 조직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카는 어릴 때부터 수도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이를 반대하고 젊은 귀족을 그녀의 남편감으로 골랐다. 프란체스카는 결혼 후 시가의 친척들과 가까워지게 되자 자기 시누이도 기도와 봉사의 생활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프란체스카와 시누이 반노차는 각각 남편들의 격려를 받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함께 나섰다. 프란체스카는 얼마 동안 병을 앓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사명감을 더욱 깊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프란체스카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가정에 대한 새로운 책임과 더블어 이 젊은 어머니는 자기 집안 일에 더욱 마음을 쓰게 되었다. 프란체스카의 가정은 그녀의 사랑으로 번성하게 되었지만 몇 년 안가서 크나큰 재앙이 이탈리아를 휩쓸었다. 로마를 무자비하게 휩쓴 흑사병으로 프란체스카의 둘째 아들도 죽었다. 프란체스카는 병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마음에서 병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입할 수 있도록 자기 재산을 내놓았다. 재산을 모두 탕진하자 프란체스카와 반노차는 자선을 청하러 다녔다. 그 뒤 프란체스카는 딸마저 죽자 자기 집의 일부를 병원으로 내놓았다. 프란체스카는 이와 같은 헌신이 세상에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공식 서원을 하지 않은 부인들의 단체를 설립할 수 있도록 교회에 허가를 청하여 승낙을 얻었다. 이 부인들은 단순하게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다. 한편 이 단체가 설립되고 난 뒤에도 프란체스카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지 않고 집에서 남편과 함께 사는 생활을 택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죽을 때까지 7년 동안을 이렇게 살다가 그녀의 남은 여생을 공동체에서 보냈다. 그녀의 반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산 것이었다. 이 성녀는 1608년에 시성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프란체스카 로마나가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충성과 동료들에 대한 헌신으로 축복을 받으며 이끌어간 모범적인 생활을 찾으려 할 때 캘커타의 데레사 수녀를 기억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데레사 수녀는 기도와 가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프란체스카와 같은 환시를 본 것이다. 프란체스카 로마나의 생애는 우리 각자에게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깊이 찾도록 하며, 우리의 고통 속에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심을 일깨워준다. 프란체스카는 이런 생활이 꼭 서원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하느님께 아름다운 것들(Something Beautiful for God)'에서 마더 데레사는 자기 공동체의 수녀들에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빈민굴에 있는 수녀들 안에서, 그 수녀들을 통하여 당신의 생활을 뿌리 내리고 사시도록 합시다. 가난한 사람들이 수녀들을 보면서 그리스도께로 끌려가고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과 생활 속에 들어오시도록 초대하게 합시다."
 

프란체스카 로마나는 이렇게 말한다. "결혼한 부인이 사회에 헌신적인 것은 대단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집안 일을 하는 중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가끔 감실에 계신 하느님을 떠나야 합니다." (버틀러,’성인전’)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세상에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성녀는 그 이름대로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자랐고, 로마 시민을 위해 힘쓰고 로마에서 돌아가신 순전한 로마 사람이었다. 또한 그녀의 본명 프란치스카는 그녀의 양친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유난히 존경하고 있었던 점에서 유래된 것이고, 이름은 인간성을 표시한다는 말대로 가난한 이에게 대한 성녀의 동정심이 많았다는 점에 있어서 성 프란치스코와 흡사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 : 10월 4일

○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 : 9월 17일 
 

그녀는 1384년에 부유한 로마 귀족인 바오로 부쏘와 야코벨라의 딸로서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두 분 다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고 특히 교황청을 위해 적지 않게 노력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카는 그와 같은 양친의 자녀로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감화를 받고 성모 마리아의 소성무 일도와 다른 기도를 어머니와 같이 바치며 로마의 곳곳에 있는 성당을 참배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낙으로 삼고 있었다. 이처럼 신심이 깊었던 프란치스카가 어려서부터 수도자가 되어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겨우 12세 되었을 때 일찍이도 그를 라우렌시오 데 폰시아니(Laurentius de Pontianis)라는 귀족 청년에게 출가시켜 버렸다. 프란치스카는 이를 알고 대단히 놀랐지만 고해 신부도 결혼을 좋다고 하므로 마침내 자신의 희망을 버리고 폰시아니 가정에 출가해 남편을 잘 섬기며 일가의 주부로서의 책임을 완수했다. 그 동안 자녀 여섯을 낳았지만, 그녀는 이를 모두 건실하게 교육시키고 또한 종들도 친자녀와 같이 친절히 대했으므로 그 가정은 늘 봄바람이 부는 듯이 화기의 행복 속에 살아나갔다. 라우렌시오는 군인이었던만큼 무뚝뚝한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결코 아내의 영적 생활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프란치스카가 구석의 작은 방을 성당모양으로 꾸미고 그곳에 들어가 묵상할 때 가끔 종들이 비방하는 것을 듣고서는 그들을 훈계하기도 했다
 


 

폰시아니 가문의 가정(家政)을 완전히 위탁받은 프란치스카는 한편 자선사업도 시작했다. 즉 그녀는 매일 아침 성당 앞에 모여오는 여러 거지들을 도울 뿐 아니라, 친히 빈민굴을 돌보며 가능한 한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병자를 위로하는 것도 하느님께 받은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성내에 병실까지 설립하며 이런 가련한 사람들을 수용하고 친히 그들을 간호했다. 특히 흑사병과 같은 악성 유행병이 만연되었을 때나 기근(饑饉)과 같은 천재때에는 한층 더 병자나 빈민의 구제에 동분서주하고 그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재산을 통틀어 바쳐도 섭섭지 않을 열의를 표시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천사와 같이 존경하고 하느님께서도 그녀의 자선으로 비게 된 창고를 기적으로 다시 채워주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프란치스카에게도 쓰라린 시련의 시기가 왔다. 15세기 초엽 로마의 귀족들은 계속 서로 싸우고 있었으나 얼마뒤에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가 로마에 침입해 시내는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프란치스카의 남편 라우렌시오도 시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포로가 된 데다 장남 요한 마저 적의 볼모가 되고, 가장 사랑하던 차남 에반젤리스트는 흑사병에 죽고, 딸 아녜스가지도 갑자기 죽게 되었다. 게다가 악한에게 재산을 약탈당하는 등 온갖 불행이 닥쳐온 것이다. 그런 프란치스카는 일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모든 고통을 인내해가며 오히려 가난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당나귀를 끌고 로마 근교 캄파니아의 들에 나가서 나무를 주워 팔아 식료품을 사서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전쟁으로 인해 빈민과 병자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도저히 프란치스카 혼자의 힘으로는 마음대로 구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뜻을 같이하는 귀부인들을 모아 자선 사업을 하는 수도원을 시작하여 톨레 디 스베키에 그 수도원을 건설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일원으로 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마침 적의 수중에 있던 남편과 아들이 돌아왔으므로 잠시 그 뜻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남편이 병을 얻어 프란치스카의 간절한 간호를 받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그때에야 원하던 희망을 풀기위해 아들 요한과 손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혈육의 정을 대의(大義)를 위해 끊고, 그들을 하느님의 손에 의탁하고 그들의 강복을 빌면서 이별하고 나서 겸손을 표시하기 위해 목에 줄을 걸고 톨레 디 스베티 수도원의 문전에 엎드려 입회를 원했다.
 


 

그곳 수녀들은 본래 창립자인 프란치스카인지라 마치 인자한 어머니를 만난 아이와 같이 기뻐하며 영접했다. 그리고 원장은 자발적으로 사임해 프란치스카에게 그 직을 맞도록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고행이나 활동이 심신을 모두 피로케 했음이지, 4년 뒤인 1440년 그녀는 병석에 눕게 되고 마침내 3월 9일 자매들이 애석해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는 56세였다. 그리고 성녀 프란치스카는 평소 수호천사와 친밀히 지냈다고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에반젤리스트를 여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간 늘 수호천사를 자신의 옆에서 환하게 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자세는 태양과 같이 찬란하게 빛나고 얼굴은 늘 황홀히 하늘을 우러러 보고 손을 가슴에 십자 모양으로 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보인 것은 성녀가 기도할 때와 성당에 있을 때 뿐이었다. 수호천사는 그림자와 같이 그녀를 잠시도 떠나는 일이 없었으나 다만 조금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불합한 일을 하면 별안간 보이지 않았다가 그녀가 보속을 다하면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 수호 천사 기념일 : 10월 2일 


 


 


 

3월 9일 로마의 프란체스카 성녀 (3회)


프란체스카는 1384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겨우 12살이었을 때 귀족이었던 부모는 수녀가 되고 싶어 하는 그녀의 희망을 무시하고 그녀를 로마 귀족이었던 로렌죠 폰지아노와 결혼시켰다. 다행히 행복한 결혼이었으며 40년간의 결혼생활 가운데 경건한 부부는 결코 싸우지 않았다. 프란체스카는 언제나 기도와 은둔을 사랑하였지만 가정의 의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늘 말하곤 했다. “결혼한 여자는 제대에 계신 하느님을 떠나 가정의 의무 안에서 그분을 찾아뵈어야 한다.” 한번은 시편을 읊는 중에 네 번이나 방해를 받았는데 다시 시편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이 황금으로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식탁에 놓인 훌륭한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의 보잘 것 없는 부스러기와 바꾸곤 했다. 그녀의 일상음식은 마른 빵이었으며 음료는 물 뿐이었다. 1410년 로마의 침략 시기동안 남편 폰지아노는 추방당했으며 재산은 몰수당했고 집은 파괴 되었고 장남은 인질로 잡혀 갔다. 프란체스카는 이 모든 상실 안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손길과 그분의 거룩한 복된 이름만을 보았다. 평화의 결실로 손실이 유익으로 변했다. 프란체스카는 경건한 부인들의 회(오블라테스)를 설립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에 그녀는 그 수녀원에 들어갔다. 맨발에 허리에 띠를 두르고 공동체에 받아들여줄 것을 간청하며 겸손히 들어갔다. 곧 장상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을 보시고 하느님은 그녀의 수호천사로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친구를 보내주셨다. 그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는 그녀가 유혹을 받을 때 그녀를 보호해주고 선한 일을 할 때 인도해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예언한 대로 1440년 3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1608년에 시성되었다.
 

기도
오 주님, 당신의 종 프란체스카에게 다른 어떠한 선물보다 다정한 동반자 천사를 허락함으로써 그녀를 영광스럽게 해주셨으니, 당신께 간청하는 저희에게 성녀의 전구로 천사들과 함께 할 수 있게 허락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묵상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신이 괴로움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육신이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은 겸손과 인내, 순수하고 단순하며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힘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그분의 지혜와 그분의 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 작은 형제회 제 1 회칙 17장 -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우선 순위 

가족들의 생활은 돌보지 않고 교회 일에만 바쁜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여러 단체와 위원회와 회장직을 유지하는데 자신의 시간을 다 쏟아 붓는다. 바자회를 준비하고 기도회에 참석하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동안에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방치되고 잊혀진다. 가장 슬픈 것 중의 하나는 그들은 지금 하느님이 자신에게 기대하시는 일을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카는 가정과 신앙 생활을 어떻게 병행해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일생을 기도와 회개와 선행의 모범으로 살면서도 아내로서도, 어머니로서도 부족한 점이 없었다. 그가 가족들을 그토록 잘 돌볼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일의 우선 순위를 먼저 정하고 그것을 지켜 나갔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든 시간을 교회에만 쏟아 붓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거나, 무슨 일을 하거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제단 앞에서 성가가 연주되는 것을 들으면 거룩함을 더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 바로 그곳에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어디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가?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

 


축일:3월 12일

성녀 세라피나(피나)

ST. SERAPHINA(Fina)

Santa Fina di San Gimignano Vergine

Born:1238. at San Geminiano, Tuscany, Italy

Died:12 March 1253 of natural causes

 

 

투스카니의 산 제미니아노 옛마을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는 산따 피나는 몰락한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그녀는 매혹적인 모습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착해서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서도 적은 음식조차 반을 나누어 남을 주곤 하였다. 그는 집에서 은수자처럼 살았는데, 낮에는 수예 등으로 가사를 돕고 밤에는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녀가 아직 처녀일 때 부친이 죽었는데 그녀 역시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중병 증세가 있었고, 좋은 얼굴이 망가져서 추한 여성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 후 16년 동안이나 한자리에 누워서 고통을 앓았지만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상처보다 그리스도의 상처"가 더 마음 아프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후 그녀는 자신이 늘 공경하던 성 그레고리오(대)의 발현을 보았고, "사랑하는 딸아, 하느님께서 너에게 안식을 주시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1253년 3월 12일, 그녀는 환시에서 들은 바로 그날에 운명하니, 그녀의 무덤에서는 매일같이 기적이 일어나서 그녀의 높은 성덕을 꽃으로 정하고 서로 나누어 갖는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 성 그레고리오(대) 교황 학자 축일:9월 3일


 


 
 

그녀는 뛰어난 금발의 미녀였다. 소녀 세라피나(피나)는 모든 고향사람들의 칭찬과 사랑을 받았다. 어느날 그녀는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오렌지를 선물을 받았다. 이 사실을 안 모친은 피나를 나무라면서 죽음에 이르도록 구타했다. 그런데 그녀의 장례식날이었다. 그날 많은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중에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기적은 그 고장 언덕에 난데없이 계절도 아닌데 꽃이 만발했다고 한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의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 옛 마을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는 성녀 세라피나는 몰락한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그녀는 매혹적인 모습으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착해서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서도 적은 음식조차 반을 나누어 남을 주곤 하였다. 그는 집에서 은수자처럼 살았는데, 낮에는 수예 등으로 가사를 돕고 밤에는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녀가 아직 처녀일 때 부친이 죽었는데 그녀 역시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중병 증세가 있었고, 좋은 얼굴이 망가져서 추한 여성으로 변하였다. 그녀는 그 후 16년 동안이나 한자리에 누워서 고통을 받았지만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상처보다 그리스도의 상처가 더 마음 아프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이 늘 공경하던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발현을 보았고, “사랑하는 딸아, 나의 축일에 하느님께서 너에게 안식을 주시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1253년 3월 12일 그녀는 환시에서 들은 바로 그날에 운명하였다. 당시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의 축일은 3월 12일이었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매일같이 기적이 일어나서 그녀의 높은 성덕을 증명하였다. 산 지미냐노의 농부들은 흰 오랑캐꽃을 성녀 세라피나의 꽃으로 정하고 서로 나누어 갖는다. 그녀는 피나(Fina)로도 불린다.


(가톨릭홈에서)



 

 

■■■■■■■■■■■■■■■■■■■■■■■■■■■■■■■■■■■■■■■■■■■■■■■■■■■■■■■■■■■■■■■■■

 



그리스도의 생애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No. 35 Scenes from the Life of Christ: 19. Crucifixion) - GIOTTO di Bondone
1304-06. Fresco, 200 x 185 cm. Cappella Scrovegni (Arena Chapel), Padua
 

 

성모 통고의 신비 5단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와 함께 고통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성모칠고(聖母七苦)

① 시메온의 예언(루가2,34-35) -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② 에집트로 피신하심(마태2,13-18) - 그 밤으로... 에집트로 가서... 거기서 살았다.

③ 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루가2,41-51) -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④ 예수, 골고타 갈바리아로 오르심(루가23,26-32) -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와 만나심.

⑤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요한19,25-30) -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가 서 있었다.

⑥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요한19,38-40)

⑦ 예수, 무덤에 묻히심(요한19,42)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Feast of Our Lady of Sorrows) : 9월 15일

 

 




 


 

축일 : 3월 13일

성녀 에우프라시아 동정

Saint Euphrasia; Saint Euphraxia
(Greek: of good cheer)

380 - 420 of natural causes

Canonized : Pre-Congregation

 

콘스탄티노플 출신인 그녀가 일곱 살 때, 그녀의 홀어머니가 중부 에집트의 타베니시에 살도록 하였다. 소녀 때 그녀의 소망은 동정생활을 하는 공동체에서 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성취되어 그녀는 수녀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녀는 남은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세속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자신이 사는 공동체의 내부 일이 너무나 힘이 들어서 뛰쳐 나오려는 유혹에 수 없이 직면할 때마다, 그녀는 일주일 내내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등의 온갖 고행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였다. 그녀는 이런 노력으로 보여주는 인내심으로 인하여 동료들로부터 위대한 성녀로 높은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7세의 어린 나이로서 수녀가 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나, 성녀 에우프라시아는 이를 실행한 분이다. 그녀는 380년 동 로마 제국의 서울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궁정에서 일을 하던 고관인 안디고노라는 사람인데 그녀의 탄생후 1년이 되자 세상을 떠나 버렸다. 어머니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성녀로 존경을 받고 있으며, 남편이 죽었을 때 그녀의 나이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사바에서 재혼의 청탁을 여러 번 받았지만 고인을 사모하고 자식을 생각한 나머지 도리어 세상을 귀찮게 여기며 혼담을 다 물리치고 딸을 데리고 죽은 남편의 재산이 있는 이집트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성인, 은수자에게 설교를 듣기도 하고 혹은 자선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우연히 한 수도원의 동정녀들의 엄격한 생활양식에 감동되어 그 후로는 그 수도원 근처에 거처를 정하고 종종 그곳을 방문해 수녀들과 같이 기도를 바치기도 하고 그들에게 영신상의 교훈을 청하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그 수녀들의 생활이 너무나 가난한 것을 가련히 여긴 그녀는 남편을 위한 기도를 받는 대신 매년 일정한 금액을 기부하며 그들을 원조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우리는 모처럼 하느님을 위해 이와 같은 가난한 생활을 시작했으니 일평생 이런 부자유를 참아나가려 합니다."하고 그녀의 호의를 굳게 사앙하고 다만 성당에 사용되는 성체 등의 기름과 약간의 향을 받을 것을 승낙했다. 에우프라시아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차차 자라나 어느덧 7세가 되었다. 어느 날 전과 같이 어머니와 더불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기도하며 즐겁게 지내는 수녀들의 모습을 보고 어린아이 마음에도 무언가 느낀 바가 있었던지 시간이 되어 어머니가 데리고 가려고 해도 "언제까지든지 이곳에 있겠어요."하며 좀체로 움직이지 않았다. 원장이 "이곳은 하느님께 몸을 봉헌한 사람이 아니면 있을 수 없어요."하고 타이르며 보내려고 했지만, 에우프라시아는 곁에 있던 십자가를 들고 가슴에 안으며 "그렇다면 저도 하느님께 몸을 봉헌하렵니다."라고 했다. 원장은 그녀의 지성에 탄복을 금치 못하면서도, 또한 수도원에 들어오면 엄한 단식이나 심한 노동을 해야 하고 온전히 자유가 없는 데라는 것까지 말하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지만, 어린 에우프라시아는 "무엇이든 하라는 것을 할 터니이 이곳에 있게 해주세요."하고 끝끝내 간청해 마지않았다. 그녀의 열성에 놀라 어머니도 이제는 만사를 원장께 부탁하고 그녀를 수도원에 맡기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너무 어린아인지라, 처음에는 수도원의 다른 사람들도 자못 근심했지만, 정말 같이 생활해보니 어른도 따를 수 없을 정도의 진지한 태도에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5년 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에우프라시아가 13세 되던 해에 동 로마 제국의 궁전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무엇일까?" 하며 의아심을 갖고 뜯어보니 그것은 어릴 때의 약혼자와 결혼을 이루도록 하라는 권고였다. 그러나 나날이 하느님과 정결한 친밀을 즐기고 있는 에우프라시아에게는 혼잡한 세속에 다시 돌아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테오도시오 황제 및 황후에게 회답을 보내어 지금 자기로서는 사랑하는 예수의 베필로서 일생을 보내려는 마음 외에 아무 희망도 없다는 것을 말하며 용서를 청하고, 아울러 자신의 전 재산을 컬어 빈민에게 희사할 것을 의뢰했으므로 황제, 황후도 대단히 감탄하여 그녀의 뜻대로 다 처리해주었다. 그 후에 에우프라시아는 더욱 자신의 몸을 수앙하며 덕을 닦고, 남보다 더 열심히 고행, 기도, 일과를 실천했으므로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30세에 이르러서 갑자기 중병에 걸려 421년 3월 13일 천국을 향해 떠났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충동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고 나중에 후회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집이나 자동차처럼 크고 비싼 어떤 것을 사고 난 뒤에 후회가 되었다면 그만큼 자책감도 컸을 것이다. “돈을 너무 많이 썼어.”, “기대했던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아.”, “좀더 시장을 둘러봤어야 하는 건데….” 이런 자책감에 빠진다면 성녀 에우프라시아가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에우프라시아는 다섯 살에 약혼을 했는데 결혼을 앞두고 수녀원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또한 자신이 받은 많은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노예들도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기를 청했다. 놀랍게도 그가 원하던 것들은 모두 이루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후회가 그를 사로잡았다. 에우프라시아는 세속의 생활을 좀더 즐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에 시달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한 후에 후회나 미련을 가진다. 그럴 때 우리는 미련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고, 에우프라시아처럼 모든 망설임을 끊어버리고 계속 전진할 수도 있다. 후회나 초조함 등 마음의 동요를 막으려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다. 성녀 에우프라시아는 기운이 다 빠질 때까지 돌 나르는 일을 함으로써 그러한 망설임을 끊어버렸다. 비단 돌을 나르는 일은 아닐지라도 화장실 청소를 한다든지 세차를 함으로써 쓸데없는 후회나 망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결정을 하고 나서 후회한 적은 없었는가? 나는 충동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

 


 
축일 : 3월 14일
성녀 마틸다 왕후

St. Matilda 

Santa Matilde di Germania Regina

Engern, Sassonia, ca. 895 - Quedlimburgo, Sassonia, 14 marzo 968

Matilde = strongly in war, from the German
 


 

마틸다는 ’힘과 전투’란 뜻이다. 웨스트팔리 백작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삭소니아의 공작인 오토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그 얼마 후에 독일의 헨리 1세 국왕이 되었다. 또 그녀의 아들 오토는 오토 1세 왕이 되었고, 다른 한 아들 브루노는 쾰른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녀는 32세 때에 과부가 되었는데, 이 때 아들인 오토 1세로부터 극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신심이 뛰어났으므로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동생 헨리가 형인 오토 1세에게 반기를 드는 판국이라 그녀의 고통은 극심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그녀는 수도원을 세곳이나 세웠고, 만년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지냈다. 그녀는 궤돌린부르그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과 교회의 후원자로서 큰 공경을 받는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마틸다 왕후는 9세기 말경 독일 웨스트파렌 주(州)의 테오도리고 후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덴마크의 왕녀 라인힐다다. 그 당시는 자녀를 수도원에 의탁하여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상류사회의 관습이었으므로 마틸다도 관습에 따라 숙모가 원장으로 하는 헬포르드 여자 수녀원에 맡겨져 필요한 일반 지식과 함께 종교 교육도 받으며 경건히 자랐다. 그러던 중 그녀는 어려서 삭소니아의 공작인 하인리히와 결혼하고, 안락한 부부 생활을 하며 3남 2녀를 낳았다. 결혼 후 3년째인 912년의 일이다. 독일 황제 콘라도 1세가 승하하고 하인리히가 그의 후계자로 추대되자 자연히 마틸다도 국모로 존경을 받게 되었지만 겸손한 그녀는 조금도 교만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도리어 빈민을 돕고 병자를 문안하고 백성을 돌봐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남편이 천성적으로 성미가 급하고 쉽게 화를 잘 내는 성격임에도 늘 그녀는 온화하고 온순한 태도로 대하고, 또한 죄수를 석방하고 죄인을 관대히 처분해 줄 것을 종종 부탁한 일도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수도원이 한 나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함을 깨닫고 남편과 함께 수도원을 몇 군데 세우고 그중의 하나인 궤돌린브르크 수도원을 자신들의 묘소(墓所)로 정하기까지도 했다. 936년, 하인리히 황제는 중병에 걸려 마틸다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때는 아침이 아니었으나 그때 왕후는 아직 식사도 들지 않은 사제를 다행히 만나 한시라도 빨리 죽은 남편을 위해 미사를 드리게 한 후 자신도 미사에 참여하면서 진정으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했다.
 


미사가 끝난 뒤 마틸다는 그 사제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의 표시로 자신의 황금 팔찌를 증정하고 황제의 관 앞에 가서 다시 이별의 슬픔에 잠겼지만, 이내 아직 어린 오토, 하인리히 두 황자를 불러놓고 "보는 바와 같이 황금의 왕관을 쓰던 황제라 하더라도 때가 이르면 일반 평민과 똑같이 죽어 하느님의 심판 마당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 그대들은 신분이 높을수록 더욱 제 몸을 수양하고 선을 행하며 악을 피해 훌륭한 성군이 되어 하느님의 뜻에 의합한 자가 되고 사후에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각별히 조심해 달라."고 간곡히 타일렀다. 새로 황제위에 오른 오토는 바바리아 후작이 된 동생과 어머니의 훈계에도 아랑곳없이 오랫동안 서로 싸워 마틸다에게 많은 걱정을 하게 했다. 후에 간신히 화해를 하자마자 이번에는 "마틸다 황태후가 가난한 자를 구하기 위해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악한들의 모함을 곧이 듣고 형제가 합세하여 어머니의 재산을 거두어 버렸다. 마틸다는 이러한 자식의 불의에 몹시 마음이 상했지만 자신이 궁전에 있으면 도리어 풍파의 원인이 되리라 생각하고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나 엔게룬 수도원에 들어가서 밤낮 하느님만을 섬기며 불효한 아들들을 위해 용서와 회개의 은혜를 간구했다. 마틸다가 궁전을 떠난 뒤에는 국내에 여러 가지의 재앙과 불행이 계속 일어났으므로 성직자들이나 제후들은 이를 천벌로 생각하고 왕비를 통해 황제에게 황태후를 도로 모셔올 것을 간청했으므로 오토도 깊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어머니를 영접하러가서 진심으로 죄의 용서를 청했다. 마틸다 황태후는 이와 같이 다시 궁중의 사람이 되었지만 호화로운 생활에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고 다만 마음대로 불쌍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을 좋아할 뿐이었다. 그녀의 자선사업의 공적은 그녀가 죽은 후 6년에 걸쳐 편찬된 전기에 자세히 실려 있지만 그 일부를 들어보면 "성녀는 하루 두번씩 빈민에세 식사를 제공했고, 자신의 음식 중에서 맛있는 것은 불쌍한 이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토요일은 남편의 기일(忌日)도 되고 주일의 전날도 되므로 특별히 더 많은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고 아울러 빈민을 위해 목욕물까지 마련해주며 손수 심부름을 해주는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마틸다의 기도에 대한 열성은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종종 밤중에도 시녀(侍女)와 함께 일어나 성당에서 기도했다. 그리고 평일에는 다윗의 시편 150편을 빠뜨리지 않고 외웠다고 한다. 955년, 마침 성녀가 궤돌린부르크의 수도원에 머물고 있을 때 바바리아 후작이던 아들 하인리히의 부고가 왔다. 그러자 마틸다는 즉시 수녀들에게 그를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빌어주기를 부탁하고, 아울러 고인이 된 남편과 자녀의 행복을 빌 목적으로 노르트하이젠에 여자 수도원을 세웠다. 그뒤 천국으로 갈 날이 가까워 온 줄을 안 마틸다는 남편의 옆에 묻어주기를 원하며 그의 묘가 있는 궤돌린부르크 수도원에 가서 968년 3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프리슬란드-덴마크의 귀족 가문인 그라펜 디트리히의 딸로 태어난 성녀 마틸다(Mathildis)는 909년 작센(Sachsen)의 공작인 하인리히(Heinrich)와 결혼했다. 919년 하인리히가 독일의 하인리히 1세 국왕이 되자 독일 여왕이 된 그녀는 슬하에 다섯 명의 자녀들을 두었는데, 훗날 독일과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오토(Otto), 프랑스의 루이 4세와 결혼한 게르베르가(Gerberga), 바이에른(Bayern)의 공작인 하인리히, 프랑스 카페(Capet) 왕조의 위그 카페의 어머니인 하드비히(Hadwig), 그리고 쾰른(Koln)의 대주교가 된 성 브루노(Bruno, 10월 11일)가 그들이다. 그녀는 32세에 과부가 되었는데, 이때 아들인 오토 1세로부터 극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신심이 뛰어났으므로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동생 하인리히가 형인 오토 1세에게 반기를 드는 판국이니 그녀의 고통은 극심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그녀는 베네딕토 수도원을 세 곳이나 세웠고, 만년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지냈다. 그녀는 죽기 전에 그녀의 아들 오토 1세와 화해를 하고 968년 3월 24일 사망하여 궤틀린부르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과 교회의 후원자로서 큰 공경을 받는다.
 

(가톨릭홈에서)
 
 

 

■■■■■■■■■■■■■■■■■■■■■■■■■■■■■■■■■■■■■■■■■■■■■■■■■■■■■■■■■■■■■■■■■

 


  축일 : 3월 15일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
St. Louise de Marillac
Santa Luisa de Marillac Vedova e religiosa
15 August 1591 at Meux, France -
15 March 1660 at Paris, France of natural causes; body incorrupt
Beatified : 9 May 1920 by Pope Benedict XV
Canonized : 11 March 1934 by Pope Pius XI
크리스찬 사회사업가들의 주보성녀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은 1591년 8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한 정치가들을 탄생시킨 귀족 드 마리약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푸이시에 있는 수도원에 맡겨져 교육을 받으며 자란 루이즈는 1613년 본래 수도자로 살고 싶어하며 결혼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거절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청원서 심의관 앙투안 드 그라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후에도 영적독서로 영성을 성화시켜 나갔고 부르심을 받고도 부름심을 따르지 않았던 괴로움에 어두운 밤과 같은 영적인 시련을 거쳐야 했다. 1623년 성 니콜라스 성당의 성령강림절 미사에서 루이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의 순간을 체험했다. 그날 자신의 모든 이기적인 야심과 인간적인 계획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1624년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만난 루이즈는 1625년 남편 앙트안이 세상을 떠나자, 남은 생애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만 모두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후 루이즈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도와 1633년 가난한 이들의 종이라 불리우는 지금의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였다. 1660년 3월 15일 69세를 일기로 자신과 함께 사도직을 수행했던 자매들과 협력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 그녀는 1934년 3월 11일 성인품에 오르셨고 1960년 2월 16일에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모든 크리스챤 사회사업가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홈에서)
 


 

 

그녀의 임종 때, 프랑스 내에는 이미 4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병자와 가난한 이를 돕는 구호소는 수 없이 많았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라...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 것이다. 그대가 섬기는 이는 곧 그리스도이시니..." 
 

 

1617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샤티옹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애덕부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어느 날, 평소대로 빈첸시오는 미사를 집전하기위해 제의를 입고 있을 때, 한 부인이 외딴 집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의 처참한 환경에 대해 말하였다. 전 식구가 다 아파 몸져 누워있으나 그들을 돌봐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빈첸시오는 측은함이 넘친 강론을 하여 모든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미사후, 빈첸시오는 그 외딴집을 방문하기 위해 길을 가는 도중, 빵과 약품 바구니를 들고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하루에 그 집을 방문하고 그 다음날에는 전혀 방문하는 이들이 없는 모습을 보면서 조직적인 봉사단체가 필요함을 깨달았고, 체계적인 봉사활동을 위하여 애덕부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렇게 창설된 애덕부인회는 프랑스 전체로 그 조직이 커 나갔다. 귀족 부인들로 구성된 애덕부인회는 본당이나 마을에 가난하고 병든 환자들을 방문하여 돌보았고, 자선병원 등에서 봉사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애덕의 마음은 넘쳤으나, 그들의 대부분이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활동할 수 없는 이들이 많아, 때때로 그들은 자신들의 하녀들에게 대신 봉사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애덕부인회는 증가했으며 빈첸시오는 루이즈 드 마리약에게 애덕부인회를 맡기며 하느님의 다른 뜻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 봉사하고 싶다는 원의를 품은 한 양치기 소녀가 빈첸시오를 찾았다. 빈첸시오는 말가릿 나조와 같은 지향을 갖고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를 원하는 자매들을 모아 루이즈에게 맡겼다. 1633년 11월 29일. 6명의 처녀들이 성 루이즈 드 마리약에게 맡겨졌으며 이로써 최초의 활동회인 사랑의 딸회를 창설되었다. 그 당시, 교회에서는 수녀들이 수녀원 담밖을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실질적인 활동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기를 원했던 빈첸시오는 수도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의 딸회라 이름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는 1655년 파리 대주교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1668년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로마에서 승인되었다. 성 빈첸시오는 사랑의 딸회 창설 당시부터 1625년에 창설한 빈첸시안 선교회 (라자리스트회) 총장신부에게 사랑의 딸회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성 루이즈 드 마리약이 본회의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청한 것이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홈에서)
 


 


성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25이하)’는 가난하고 불우한 처지에 놓인 이웃에 대한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을 보여준다. 못 본 척 외면하는 사람. 동정심은 지니지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 그들의 무능을 내심 질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돌보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있다. 성 빈체신오 아 바울로(1581-1660)는 ’애덕부인회(1617)’, ’선교회(라자리시트회.1625)’,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1963)’을 설립하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자선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그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들의 주인"이라며 스스로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청했다. 빈첸시오는 1581년 프랑스랑드 지방의 푸이에서 검소하고 성실한 가정의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하면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배웠다. 가난한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가정교사로 일해 스스로 학비를 벌었던 그는 19살 때 사제로 서품된다. 그러나 그는 서품 5년째인 1605년 마르셀리나로 여행을 하는 도중 터키의 해적을 만나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빈첸시오는 연금술사로부터 병을 고치는 법과 화학, 물리학 등을 배웠는데 이는 나중에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데 요긴하게 쓰여졌다. 그 후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나 냉담하고 있던 농부를 회두시킨 그는 농부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훗날 그 농부도 로마의 한수도원에 입회했다. 빈첸시오는 가난하게 컸고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은 내적 갈등도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피에르 베륄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이들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께 봉사하겠다고 서약하기에 이른다. 1617년 빈첸시오는 병들고 불쌍한 이들을 돌볼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평신도 여성들의 봉사 단체인 ’애덕부인회’를 만들었다. 40세가 됐을 때는 노예들을 찾아가 돌봤으며, 활동의 폭을 더욱 넓히기 위해 1625년 남자 수도회인 ’선교회’를 창설했다. 이어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의 도움을 받아 1633년 ’가난한 이들의 종의 회’라고도 알려진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를 청설했다.
 


 빈첸시오의 협조자가 된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1591-1660)은 어릴 적부터 수도자가 되고 싶었던 꿈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앙뜨완과 결혼, 아들 한명을 낳았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다음 그녀는 빈첸시오가 일하고 있던 ’착한 어린이들의 학교’근처에서 살며 경건한 생활을 했다. 루이즈는 빈첸시오와 만나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이 가져온 내면적 어둠을 이웃에 대한 봉사로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루이즈가 빈첸시오 모르게 받아적었던 훈화는 빈첸시오가 수녀들에게 직접 썼던 방대한 양의 편지와 함께 그의 영성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빈첸시오는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많은 여자 수도회가 봉쇄 구역 안에서 페쇄적인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사랑의 딸들은 병자들의 집과 그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수도원이며 셋방이 수녀들의 독방이다. 성당은 본당 성당을 사용하고, 도시의 거리가 바로 봉쇄 구역이며, 병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 외에는 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빈첸시오에게 기도는 필수적이었고 그는 수녀들에게도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것을 누누히 강조했다. 세속에서 일하는 수도자들은 봉쇄생활을 하는 수도자보다 죄지을 기회를 더 많이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빈첸시오는 또 수녀들이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충실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내 모든 자매가 어디에 있든간에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부폐되지 않은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악의 시신(Incorrupt body of Saint Louise de Marillac.)
2001년 4월 20일 촬영(Picture taken April 20, 2001, by Joann.)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면서 그들 모습으로 육화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섬겼다. 그는 주인이 불렀을 때 즉시 달려가는 착한 종처럼, 하느님이 불렀을 때 즉각적으로 순명한 옛 예언자들처럼 수녀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에게 가는 모습은 마치 불이 났을 때 달려가는 사람과 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집, 자기의 가장 소중한 물건에 불이 붙어 사랑스런 가족을 위협하고 있을 때 취할 행동, 바로 그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태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가족

루이즈 드 마리약은 매우 바쁜 여성이었다. 그는 성 빈첸시오 드 폴과 함께 ‘애덕의 수녀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요한 23세 교황은 그 공을 받들어 그를 사회사업가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루이즈는 어린 시절에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일생을 수녀원에서 보낸 ‘전형적인’ 수녀는 아니었다. 그는 남편이 죽기 전까지 12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고, 외아들 미셀을 낳았으며 언제나 그를 마음에 두고 살았다. 그의 자서전에는 “수도 생활을 하며 온갖 일을 다하는 중에도 결코 아들을 잊지 않았다.”라고 씌어 있다. 루이즈는 아들이 장성한 후에도 결코 그를 홀로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는 항상 아들을 마음에 가까이 두었고 임종 순간에도 마지막으로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축복했다. 우리가 아무리 생활에 쫓긴다고 하더라도 루이즈의 모범을 잊지 말아야겠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일을 하는데 바쁘더라도 우리 자신이 가족의 축복이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족 중에 소홀히 대한 사람은 없었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야기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

 


 

축일 : 3월 23일 (3월 22일, 9월 14일, 9월 15일)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

St. CATHERINE of Genoa

Santa Caterina Fieschi Adorno da Genova Vedova
Also known as
Apostle of Purgatory; Caterinetta
Memorial: 15 September; formerly 22 March

22 maggio (memoria liturgica: 14 settembre) - Comune
Born: 1447 at Genoa, Italy
Died: 14 September 1510 at Genoa, Ital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6 April 1675 by Pope Clement X
Canonized: 16 June 1737 by Pope Clement XII
Name Meaning: pure one

Third Order Franciscan


 


 
 제노아의 귀족 가문의 자녀인 가타리넷따('작은 가타리나"라는 뜻) 피에시는 1447년 태어났다. 13세에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했으나 너무 어려서 거절당했다. 16세에 젊은 귀족 줄리앙 아도르노와 형식적인 결혼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때때로 성녀 가타리나 피에시 아도르노라고 불리운다. 남편은 바람기가 많고 성미가 급한데다 불성실했다. 가타리넷따에게 이것은 굉장한 시련이었다. 한동안 이러한 실망들을 여러가지 오락의 소용돌이 속에 가라앉게 하려고 하면서도 그녀는 하느님께 굳은 신뢰심을 두었고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1473년 어느날 수녀가 된 여동생을 만나러 수도원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고백성사를 보았는데, 이 고백성사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슬픔과 절망 속에 있던 그녀는 하느님을 향하게 되었고, 주님은 그녀의 영혼을 축량할 길 없는 은총으로 가득 채워서, 자신의 죄를 생생하게 깨닫게 해주시고 그녀의 마음을 천사적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셨다. 매일 성체성사를 영하기 시작했고, 남은 여생도 계속 그렇게 하였다. 참으로 열렬한 신앙생활에 몰입하였다. 개심을 한 뒤 남편을 변화시켰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남편의 낭비가 심한 생활로 인해 로멜리니에 있는 궁전같은 집을 처분하여, 그들은 제노아에서 가장 큰 자선시설인 파마토네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 후로 그들은 수사와 수녀처럼 지내면서, 가타리나와 남편은 자선사업에 완전히 자신들을 봉헌하였다. 1490년 가타리나는 병원의 여성병동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 죽을 때 까지 21년 동안 이 일에 종사하였다. 1497년 남편이 죽은 후에 무서운 흑사병이 4년 동안 제노아에 퍼져 인구 5분의 4의 생명을 앗아갔다. 가타리나는 밤이나 낮이나 환자들에게 영웅적으로 헌신하였다. 동시에 참회예절과 신앙생활도 꾸준히 하였다. 빈번히 탈혼에 빠졌으며, 바쁘게 일에 종사하고 있을 때라도 마음은 천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실용성과 또 다른 세상을 완벽하게 연결하는 놀라운 태도로 일에 임하였다. 연옥에 관한 훌륭한 논문과 '영혼과 육체의 대화'라는 훌륭한 저서도 남겼다. 로마 성청은 이 작품들만으로도 그녀의 참된 거룩함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선언하였다. 가타리나는 "연옥은 비록 견디기 어려운 고통들 중 어느 하나도 감소되는 곳은 아닐지라도, 기쁨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지적하였다. 가타니나는 대녀 토마시나 베르나자에게 작별을 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토마시나, 네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기를! 네 마음에 영원함이 있기를! 너의 모든 행동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 하시기를!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 하느님의 사랑, 흠없는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그것은 또한 그녀 자신의 삶의 모토이기도 하였다. 참으로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병, 곧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가타리나의 마지막 9년간 삶과 함께 하였다. 1510년 8월 어느 날 저녁, 별들이 뱇나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수많은 촛불이 밝혀지고 죽어가는 청순한 이 연인은 '오서서 창조주 성신이여'를 노래 불렸다. 그녀는 소리쳤다. "가자, 더 이상 이 땅에서 더 이상 이 땅에서..." 2주일 후인 9월15일, 십자가 현양축일에 사망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1737년 그녀를 시성하였다.

 (평화의 사도,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기념집에서)


 


야고보 피에쉬와 프란치스카 디 네그로의 딸인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는데, 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도생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지만, 그녀의 부친이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줄리아노 아도르노란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성마르고 방탕하였으며 아내에게 불성실하였다. 반면에 그녀는 민감하고 신중하였으며, 거의 유머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매몰스런 여인은 아니었다. 불행하였던 이 결혼은 10년이 지나면서부터 남편의 방탕으로 인하여 극도의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게 되어 프란치스코 3회원이 되었으며, 함께 회개 생활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팜메토네 병원에서 일하였는데, 특히 카타리나는 아주 뛰어난 영성생활로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고, 1479년에는 아예 그 병원에서 생활하였으며, 1490년에는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녀는 흑사병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자 자신의 직분을 사임하였다. 그 후 1년 뒤에 남편이 죽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가 된 카타네오 마라보토를 만났다. 그녀는 수많은 신비 체험을 하였으며, 악화된 병으로 인하여 한없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신심은 비범하였다. 그녀는 세속에 있으면서 천상적인 사물을 관상하는 뛰어난 명상가였으며,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악으로 서서히 물드는 세상의 오염’이었고,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마귀의 간계였다고 한다. “영혼과 육신의 대화”, “영혼론”은 신비신학 분야에서 유명한 저서가 되었다. 이 책들이 1934년에 영국에서 간행된 바 있다.

 

(가톨릭홈에서 www.catholic.or.kr)
 


 


 

Catherine of Genoa :

Purgation and Purgatory, the Spiritual Dialogue
by Serge Hughes (Editor)
 

3월19일(9월15일?) 제노아의 카타리나 성녀 (3회)
 

카타리나는 1447년 제노아의 귀족 피에치 집안에서 태어났다. 매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겨우 13세에 수도생활에 강하게 끌렸으나 나이가 어려서 허락을 얻지 못했다. 16세 때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변덕스러운 젊은 귀족 율리아노 아도르노와 결혼하게 되었다. 덕이 없는 남편은 신심 깊은 어린 아내에게 결혼생활을 고문과 같이 만들었다. 쾌락을 찾아다니고 화를 잘 내는 그는 카타리나를 집안에 홀로 남겨두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생활은 그녀에게 참기 힘든 짐이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그녀는 이러한 실망을 쾌락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묻어버리려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으며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그녀에게 나타났다. 이 환시의 인상이 너무나 강하여 카타리나는 즉시 자신의 모든 생활에 대한 총고백을 하고 매일 성체를 영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죽는 날까지 지켰다. 그런 후 그녀는 남편이 회개하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몰락으로 그들은 성을 떠나 초라한 집으로 옮겨갔다. 인내하며 참음으로써 그녀는 마침내 남편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함께 회개생활을 하기로 하고 팜마토네에 있는 병원의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1497년에서 1501년까지 역병이 창궐하여 도시 인구의 1/5을 앗아간 시기동안 카타리나의 사랑은 참으로 영웅적이었다. 그 병원의 경영은 그녀에게 맡겨졌으며 그녀는 병자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늘 하던 회개생활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엄격한 생활에 기진한 그녀는 마침내 쓰러졌다. 죽기 전에 그녀는 많은 고통을 겪었다. 1510년 3월 19일(9월 15일)에 그녀는 크나큰 마음의 평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남긴 글들은 그녀의 영혼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1737년에 성인품에 올랐다. 
 

기도
오, 우리 구세주 하느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어 당신의 동정녀 복된 카타리나의 축일을 맞이하여 기뻐하는 저희에게 성녀에게서 당신께 향한 사랑 가득한 헌신을 배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묵상
우리를 위하여 이같이 견디셨고 이같이 온갖 좋은 것을 주셨으며 앞으로도 주실 하느님께, 하늘과 땅, 바다와 심연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찬미와 영광과 영예와 축복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홀로 선하시고, 홀로 지존하시고, 홀로 전능하시고, 감탄할 만한 분이시고, 영광스러우시고, 그리고 홀로 거룩하시고, 세세대대 영원히 찬미 받으실 만한 분이시며, 축복 받으실 바로 그분은 우리의 힘이시고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2-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Santa Caterina Fieschi Adorno da Genova Vedova
15 settembre - Comune
Genova, 1448 –1510
 

Nasce nel 1447 in una delle principali famiglie genovesi. A sedici anni viene data in moglie a Giuliano Adorno, appartenente ad una importante famiglia ghibellina. Vive una vita frivola e mondana ma dopo un incontro con la sorella suora, decide di cambiare vita e condivide le sue esperienze mistiche e caritative con un piccolo gruppo di figli spirituali. Muore il 15 settembre 1510. Dopo la conversione, la vita di Caterina ha il proprio centro nel rapporto con Cristo. Non si dedica però solo alla contemplazione, ma anche all'azione, rivolgendo il suo impegno concreto soprattutto agli ammalati. Opera nella Compagnia delle dame della Misericordia e inizia a visitare il lebbrosario di san Lazzaro, svolge le mansioni più umili; cura pure i bambini abbandonati e fronteggia varie epidemie di peste. Nel 1497 fonda la prima «Compagnia del divino amore», che sarà il modello per analoghe istituzioni di altre città italiane nel quadro di quella che è stata chiamata la Riforma cattolica. Il suo corpo è conservato nella chiesa genovese della Santissima Annunziata in Portoria. (Avvenire)
 

Etimologia: Caterina = donna pura, dal greco

Nel 1494-95 l’esercito del re francese Carlo VIII ha percorso l’Italia, portando con sé, come dice Francesco Guicciardini, i semi "di orribilissimi accidenti... e infermità fino a quel dì non conosciute". L’infermità che atterrisce è la sifilide. Esisteva già, ma lo scorrazzare degli eserciti l’ha propagata in dimensioni catastrofiche e con effetti ripugnanti. I malati ricchi chiamano i medici in casa, quelli poveri muoiono per le strade, nei fossi. Ma a Genova, nel 1497, emerge un gruppo che si dedica a questi scarti umani, li accoglie, li nutre, li cura. Animatrice: una signora di rango, Caterina Fieschi, moglie del nobile Giuliano Adorno. Li hanno sposati le famiglie e sono due malmaritati, che stanno insieme per ragioni di facciata; e delle avventure di lui parla tutta Genova. Lei però si libera da questa situazione attraverso un’esperienza mistica che la porta a guidare in Genova la reazione evangelica alla decadenza della Chiesa, anche attraverso la dedizione agli abbandonati; a diventare riformatrice con largo anticipo, attirando nell’impresa anche il marito, e dirigendo l’impegno dei rinnovatori verso un obiettivo preciso: vivere l’esperienza dell’amore di Dio andando dai più infelici e disprezzati. "Andava lei e nettava le miserie e brutture di detti infermi e poveri... con puzze quasi intollerabili et trovava anche quelli che dicevano parole terribili di disperazione". Qui c’è un aspetto applicato della sua esperienza, che non si ferma a quest’opera com’è descritta dai suoi discepoli. Caterina è una mistica che si tuffa nella realtà, con singolari doti che nel XX secolo si chiameranno manageriali: cambia organizzazione negli ospedali, cerca il nuovo e il meglio tra medici e cure. Ma parte sempre dall’idea di Dio-Amore, di quest’amore che va trasmesso subito a tutti, cominciando dai disperati. Il notaio e umanista genovese Ettore Vernazza, su impulso di lei, dà vita alla fraternità del Divino Amore, movimento di clero e di laici protesi a una riforma radicale della vita cristiana, che servirà di modello ad altre associazioni simili, tutte fondate sulla riforma interiore da un lato e sullo spendersi dall’altro, in ogni necessità. “Madonna Caterinetta”, come la chiamano, si ammala anche di peste curando una malata. E i suoi discepoli scrivono che, "sanata che fu, ritornò al servizio dell’hospidal con gran cura e diligenzia". Il movimento di riforma cattolica, dall’interno e senza ribellione, reagisce all’indifferenza colpevole di Roma insegnando e facendo, dando coraggio a molti cristiani anche nei tempi più demoralizzanti. Bisogna "piantare in li cori nostri il divino amore, cioè la carità". Questo è l’insegnamento di Caterina, dispensato e vissuto fino alla morte; la ricetta contro l’inerzia, la premessa per la ripresa. Morta nel 1510, Caterina Fieschi Adorno sarà canonizzata da Clemente XII nel 1737.
La Diocesi di Genova ne celebra il culto il 12 settembre.
 

Autore: Domenico Agasso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3-Jun-2002
Letto da 5009 persone


Catherine (Caterinetta) of Genoa, Widow (RM)
Born in Genoa, Italy, 1447; died there, September 14, 1510; beatified in 1737 and equipollently canonized by Pope Benedict XIV a few years later (others say she was canonized in 1737); feast day formerly on March 22.
 

"He who purifies himself from his faults in the present life, satisfies with a penny a debt of a thousand ducats; and he who waits until the other life to discharge his debts, consents to pay a thousand ducats for that which he might before have paid with a penny."
--Saint Catherine, Treatise on purgatory.
The biography of Saint Catherine of Genoa, who combined mysticism with practicality, was written by Baron Friedrich von Hügel. She was the fifth and youngest child of James Fieschi and his wife Francesca di Negro, members of the noble Guelph family of Fieschi, which had produced two popes (Innocent IV and Adrian V). After her birth, her father later became viceroy of Naples for King René of Anjou.
 

From the age of 13 Catherine sought to became a cloistered religious. Her sister was already a canoness regular and her confessor was the chaplain of that convent. When she asked to be received, they decided that she was too young. Then her father died and, for dynastic reasons, her widowed mother insisted that the 16-year-old marry the Genoese Ghibelline patrician, Guiliano Adorno. Her husband was unfaithful, violent, and a spendthrift. The first five years of their marriage, Catherine suffered in silence. In some ways it seems odd that he did not find her attractive, because Catherine was a beautiful woman of great intelligence, and deeply religious. But they were of completely different temperaments: she was intense and humorless; he had a zest for life.
 

Then she determined to win her husband's affection by adopting worldly airs. As it turns out, this only made her unhappy because she lost the only consolation that had previously sustained her-- her religious life. Ten years into her marriage, Catherine was a very unhappy woman; her husband had reduced them to poverty by his extravagance. On the eve of his feast in 1473, Catherine prayed, "Saint Benedict, pray to God that He make me stay three months sick in bed." Two days later she was kneeling for a blessing before the chaplain at her sister's convent. She had visited her sister and revealed the secrets of her heart. Her sister advised her to go to confession.
 

In following her sister's advice, Catherine experienced a sort of ecstasy. She was overwhelmed by her sins and, at the very same time, by the infinite love of God for her. This experience was the foundation for an enduring awareness of the presence of God and a fixed attitude of soul. She was drawn back to the path of devotion of her childhood. Within a few days she had a vision of our Lord carrying His cross, which caused her to cry out, "O Love, if it be necessary I am ready to confess my sins in public!" On the Solemnity of the Annunciation she received the Eucharist, the first time with fervor for ten years.
 

Thus began her mystical ascent under very severe mortifications that included fasting throughout Lent and Advent almost exclusively on the Eucharist. She became a stigmatic. A group of religious people gathered around Catherine, who guided them to a spirit- filled life.
 

Eventually her husband was converted, became a Franciscan tertiary, and they agreed to live together in continence. Catherine and Giuliano devoted themselves to the care of the sick in the municipal hospital of Genoa, Pammatone, where they were joined by Catherine's cousin Tommasina Fieschi. In 1473, they moved from their palazzo to a small house in a poorer neighborhood than was necessary. In 1479, they went to live in the hospital and Catherine became its director in 1490. The heroism of Catherine's charity revealed itself in a special way during the plagues of 1493 and 1501. The first one killed nearly 75 percent of the inhabitants. Catherine herself contracted the disease. Although she recovered, she was forced to resign due to ill health three years later.
 

After Giuliano's death the following year (1497), Catherine's spiritual life became even more intense. In 1499, Catherine met don Cattaneo Marabotto, who became her spiritual director. Her religious practices were idiosyncratic; for instance, she went to communion daily when it was unusual to do so. For years she made extraordinarily long fasts without abating her charitable activities. Catherine is an outstanding example of the religious contemplative who combines the spiritual life with competence in practical affairs. Yet she was always fearful of "the contagion of the world's slow stain" that had separated her from God in the early years of her marriage.
 

Her last three years of life were a combination of numerous mystical experiences and ill health that remained undiagnosed by even John-Baptist Boerio, the principal doctor to King Henry VII. In addition to her body remaining undecomposed and one of her arms elongating in a peculiar manner shortly before her death, the blood from her stigmata gave off exceptional heat.
 

A contemporary painting of Catherine, now at the Pammatone Hospital in Genoa, possibly painted by the female artist Tomasina Fieschi, shows Catherine in middle age. It reveals a slight woman with a long, patrician nose; pronounced, cleft chin; easy smile of broad but thin lips (and, surprisingly, deep laugh lines); high cheekbones; and large dark eyes punctuated by thin, graceful eyebrows.
 

Dialogue between the soul and the body and Treatise on purgatory are outstanding works in the field of mysticism, which were inspired by her and contain the essence of her, but were actually composed by others under her name. She is the patron of Genoa and of Italian hospitals (Attwater, Benedictines, Delaney, Farmer, Harrison, Schamoni, Schouppe, Walsh).
 

Of interest may be The Life and Doctrine of Saint Catherine of Genoa.
 


Saint Catherine of Genoa
Also known as Caterina Fieschi Adorno. Born in 1447 in Genoa, Italy; died there in 1510. Widow. Of an illustrious family, she was married at 16 to Giuliano Adorno, a young nobleman. After ten years of unhappiness and spiritual apathy, a divine light enabled her to appreciate the Love of God. Thenceforth her interior state was one of intense absorption in God. After the conversion and death of her husband, she cared for the sick in the hospital at Genoa. Her wonderful revelations she embodied in two works, "Dialogues of the Soul and Body" and "Treatise on Purgatory." Canonized, 1737. Relics in church of her hospital, Genoa. Feast, 14 September.
 


New Catholic Dictionary
 

 

CATHERINE of Genoa

Also known as
Apostle of Purgatory; Caterinetta
Memorial
15 September; formerly 22 March
Profile
Daughter of Giacopo Fieschi and Francesca di Negro, Geonese nobles. Youngest of five children. In her youth she felt a call to religious life, but on her father's death when she was 16, she married Julian Adorno. They were a childless couple, he was careless and unsuccessful as a husband and provider, often cruel and unfaithful, and reduced them to bankruptcy.
 

After Catherine converted him, the two lived together chastely the rest of their lives, working with the sick and poor till Julian's death in 1497. Franciscan tertiary. Directress in 1490. Caught and survived the plague in 1493. Spiritual student of Don Cattaneo Marabotto in 1499. Visionary. Mystic. Writer.
Born
1447 at Genoa, Italy
Died
14 September 1510 at Genoa, Ital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6 April 1675 by Pope Clement X
Canonized
16 June 1737 by Pope Clement XII
Name Meaning
pure one
Patronage
brides, childless people, difficult marriages, people ridiculed for their piety, temptations, victims of adultery, victims of unfaithfulness, widows
 

Readings
If it were given to a man to see virtue's reward in the next world, he would occupy his intellect, memory and will in nothing but good works, careless of danger or fatigue.
 

Saint Catherine of Genoa

 

 

■■■■■■■■■■■■■■■■■■■■■■■■■■■■■■■■■■■■■■■■■■■■■■■■■■■■■■■■■■■■■■■■■

 

 

 축일 : 3월 24일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

St. CATHERINE of Sweden

St. Catherine a Suecia, V

Catherine of Vadstena, Bridg. V (RM)

Santa Caterina di Svezia Religiosa

1331 at Sweden - 24 March 1381 of natural causes

Canonized : 1484 (cult confirmed) by Pope Innocent VIII

Caterina=donna pura, dal greco=pure woman, from the Greek
 

 


 
 

가타리나는 ’순수한’이란 뜻이다. 성녀 브리지따의 8명의 자녀 가운데 4째인 가타리나 울프스도터는 스웨덴의 울파사에서 태어나, 14세 때 에가르트 폰큐르넨과 결혼하였으나, 자신은 정결 서원을 하겠노라는 뜻을 남편에게 확신시켰다고 한다. 1350년, 그녀는 로마에 있는 어머니(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 축일 : 7월 23일)를 방문하였다가, 어머니로부터 설득당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가 예언한대로 가타리나는 그 해에 과부가 되었다. 그 후 가타리나는 25년 동안을 어머니의 항구한 동반자로 활동하였다. 브리지따가 운명하자, 그녀는 스웨덴의 받스테나로 돌아온 후부터 줄곧 건강이 나빴으므로, 늘 고생하다가 1484년 3월 24일에 운명하였다. 인노체시오 8세 교황은 그녀를 성인으로 공경하도록 허락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 축일 : 7월 23일

○ 잉글랜드의 성녀 브리지다(비르지다) 축일 : 2월 1일 


 


 


스웨덴의 성녀 브리지타(Saint BRIDGET of Sweden)

축일 : 7월 23일
 

 

한 마디로 선(善)이라 함은 하느님의 명령을 완수한 ’선’도 있는가 하면, 그의 권고를 따른 ’선’도 있다. 명령의 경우에는 이를 게을리 하면 죄가 되지만, 권고의 경우에은 순종하지 않아도 별로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특별한 공로를 세우게 된다. 지금 말하려는 가타리나 성녀도 이와같은 특별한 공로를 세운 분이었다. 그는 성녀 비르지타(축일 : 7월 23일)의 넷째 딸로서 1331년 북유럽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특별한 생각 끝에 7세에 이미 집을 떠나 리세베르그의 수도원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 했다. 그 뒤 가타리나는 그 수도원에 입회해 평생 동정을 지킬 서원을 했지만 그런 일도 모르는 아버지는 독단으로 그녀를 에카르트 폰큐르넨과 결혼시킬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가타리나는 아버지에게 수녀원에 입회해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싶다고 간청했으나 아버지는 만사를 제쳐놓고 결혼하라고 했다. 가타리나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었고, 또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동정을 보호해주시리라 확신한 끝에 아버지의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 결혼한 가타리나는 남편에게 자기가 동정서원한 사실을 말하며 양해를 구하자 남편도 처음은 매우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다행히 그 역시 신앙이 두터웠던 사람이었으므로 가타리나의 원을 들어 명색은 부부이면서도 사실은 남매처럼 정결을 지키면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도우며 덕행의 길을 걸었다. 가타리나의 전기를 저술한 울포 수사는 이 고결한 부부에 대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정원에 나란히 자란 두 백합같이 아름다운 정결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한 것은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다. 그들이 결혼한 후 얼마 안 되어 가타리나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하느님의 성소를 받아 로마에 가게 되었다. 이 구원의 성도(聖都)는 가타리나에게 있어서도 전부터 동경해오던 땅이었고 특히 어머니가 그곳으로 떠난 후부터는 한층 더 그곳에 순례하고 싶은 생각이 열렬해져 마침내 병까지 걸리게 되었다. 남편 에카르트는 이를 대단히 걱정하며 여러 모로 이유를 물어 가타리나가 설명하니 남편은 기쁘게 로마 순례를 허락해주었다. 가타리나는 동료 세 명을 데리고 먼 여행을 떠났다. 당시는 교통 수단이 없었으므로 18세의 젊은 여성에게는 위험도 매우 많았으나 무사히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타리나는 즉시 어머니의 거처를 찾았으나 쉽게 행방을 알아낼 길이 없었다. 8일간 사방을 헤맨 결과 로마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수녀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 뒤 그녀는 어머니의 안내를 받으며 소원이었던 로마의 여러 성지를 반복해 순례한 후 귀국하려고 할 때 뜻밖에 남편의 부고를 받았다. 그를 사랑하고 있던 가타리나는 일시 비탄에 잠겼으나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남편이 떠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병자를 방문하고 도와주고 기도하고 간호하며 선종을 준비시키는데 여념이 없었다. 순례하기를 즐기던 가타리나는 그 후에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로마의 여러 성당을 참배했다. 그러나 그 당시 교황은 아비뇽(Avignon)으로 옮겨가 로마는 극히 풍기가 문란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직 젊은 딸을 염려하고 혼자 길 걷는 것을 금했다. 처음에 가타리나는 그것이 불만스러워 견딜 수 없었으나 하느님의 빛을 받은 다음에는 순례하는 것 보다 어머니에게 순명하는 것이 더 하느님의 뜻에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가타리나는 성모 소일과와 피정과 묵상 들을 즐기며 특히 주님의 수난을 묵상할 때에는 몇 시간씩 걸린 때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172년 가타리나는 어머니와 함께 성지 팔레스티나를 순례하는 도중 어머니는 병을 얻어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그녀는 어머니의 유골을 가지고 스웨덴에 돌아와 전에 어머니가 세운 바드스테나 수녀원에 묻고, 자신도 그 수녀원의 수녀가 되어 많은 자매들에게 말과 행실로서 모범을 보여주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1381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인노첸시오 8세 교황은 그녀을 성인으로 공경하도록 허락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

 


 축일 : 3월 25일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 동정

St.LUCIA FILIPPINI

Santa Lucia Filippini Vergine

Born : 13 January 1672 at Corneto, Tuscany, Italy

Died : 25 March 1732 of cancer at Montefiascone, Italy; buried at the Cathedral of Montefiascone

Canonized : 22 June 1930 by Pope Pius XI

Foundress of the Religious Teachers Filippini
 
 


 

그녀는 투스카니의 따르귀니아 태생으로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러나 놀라운 신심이 뛰어난 은혜를 많이 받고 성장하였으므로 그 교구의 주교이신 마르깐토니오 추기경의 주목을 받고 몬떼피아스꼬네로 초청받았다. 이곳의 수도자의 지도아래 훈련 교사들의 교육기관이었다. 루치아는 열과 성의를 다하여 일하던 중에 비떼르보에서 이와 비슷한 기관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던 로사 베네리니(축일 : 5월 7일)를 만났다. 루치아는 애덕, 단정함, 영적인 일에 대한 확신, 용기 그리고 풍부한 상식 등이 크게 돋보였고 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업은 크게 번창해졌다. 교황 끌레멘스 11세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새로운 교육 센타를 세워야 할 입장이어서, 그녀는 로마로 왔다. 여기서 그녀는 "신심깊은 교사"회(Instituti Magistrarum Piarum)의 첫번째 학교를 세웠다. 이때부터 그녀는 "거룩한 교사"로 알려졌고, 로사 베네리니처럼 놀라운 설교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여 병을 않다가 운명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축일 : 5월 7일

복녀 로사 베네리니 동정

Blessed ROSE VENERINI

Beata Rosa Venerini

Born : 9 February 1656 at Viterbo, Italy

Died : 7 May 1728 at Rome, Italy

Beatified : 4 May 1952 by Pope Pius XII

Canonized : pending
 
 

비떼르보 태생인 로사는 그곳의 의사이던 고드프리 베네리니의 딸이다.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한 젊은이가 죽은 후에 그녀는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이번에는 부친을 잃음으로써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로사는 주위의 처녀와 부인들을 모으고 저녁마다 로사리오를 가르치는 등 종교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예수회원인 이냐시오 마르띠넬리 신부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그 사제는 그녀가 "세속 안에서의" 교사가 되는 것이 주님의 뜻으로 알아듣고 그렇게 인도한 것이다. 1685년, 그녀는 두 사람의 지원자와 함께 비떼르보에 여학교를 개설하였다. 이리하여 그녀의 명성은 퍼져나갔고, 급기야는 카르디날 바르바리고의 초청과 큰 도움으로 몬떼피아스꼬네 교구 내에 교사 훈련원을 세우게 되었다. 여기서 루치아 필립피니(Saint LUCIA FILIPPINI, 축일 : 3월 25일)를 만나 "자비로운 교사회"를 공동으로 창립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베네리니 수녀"들로 알려져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

 


 축일 : 3월 25일
성녀 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
St. Margaret Clitherow
Santa Margherita Clitherow Martire in Inghilterra
York, Inghilterra, 1550/1556 - Tyburn, York, 25 marzo 1586

Beatified : 1929 by Pope Pio XI
Canonized : 1970 by Pope Paolo VI


 


 

부유한 양초 제조업자 토마스 미들턴의 딸인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의 요크(York)에서 출생하여 도살업자인 존 클리테로우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결혼 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녀는 프로테스탄트 예배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2년 동안이나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 그녀는 그전보다 더욱 용감하게 되었는데, 어린이들을 위한 가톨릭 학교를 세웠고 자기 집이나 혹은 빌린 집에서 미사를 거행하였다. 그녀의 집은 잉글랜드 내에 숨어있는 사제들의 은밀한 피난처 중의 하나였다. 1584년 그녀가 일년 반 동안 자신의 집에 감금당할 때에는 맏아들을 프랑스 두에(Douai)로 보내어 교육받게 하였다. 그녀는 1586년에 또다시 체포되었으며, 미사 도구를 비롯하여 가톨릭 사제들의 은신처로 판명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운명하였다. 그녀는 1970년 10월 25일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로서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

 

 

(비잔틴 이콘) 주님 탄생 예고

14세기. 스코풀데 박물관(오크리드의 성 클레멘스 성당에 소장되어 있었음)
 


 오늘 우리 구원이 시작되고 영원한 신비가 나타났도다. 하느님의 아들이 동정녀의 아들이 되시나니 가브리엘이 은총의 복음을 전하도다. 우리도 그와 함께 외치나니 테오토코스여 은혜 주신 주께서 같이 계시니 기뻐하소서.

 

- 3월 25일 성모영보 조과 아뽈리띠끼온 중 -
 


 이 이콘은 대개 이코노스타시스(성상대. 이콘 칸막이)의 중앙의 문, 즉 임금문 상부에 그려진다. 요한복음 1,14의 "말씀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구절의 내용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동정녀 마리아와 가브리엘 대천사의 동작 속에 묘사되어 있다. 말씀이 되심은 제2의 창조로 아담의 재탄생이다. 제1의 아담이 하느님의 숨결에 의해 인간이 된 것처럼 제2의 아담도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에 의해 동정녀에게서 잉태되고 인성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해서 인성과 신성과의 일치 즉 구원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육화의 증인이며 주님의 말씀의 전달자인 네 복음사가들이 이 성모영보 이콘 아래의 화면에 그려진다. 이 성모영보 이콘에서 천사는 날개 달린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이콘의 전통에서 이 상징(날개)은 말씀의 신적인 기원과 긴박성을 나타내는데 쓰이고 있다. 그리고 또한 성모영보에 관한 대부분의 이콘들은 가브리엘을 움직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막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모습은 주인께로부터 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부지런한 종의 모습이며 그의 왼손은 사자의 지팡이를 쥐고 있고 그 오른손은 마치 보이지 않는 바톤을 쥐고 있는 듯 거의 뻗어 있다. 마리아는 무척 놀라서 그를 향해 돌아보고 있으며, 그동안 손에 쥐고 있던 뜨게실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자를 응시하지 않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가브리엘 역시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메시지가 가브리엘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메시지임을 나타내고 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 이후 동방 정교회의 입장은 마리아가 테오토코스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본질을 그 어머니께로부터 취했고,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그분이 하느님이시기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것이다. 그분은(예수 그리스도) 단순히 하느님을 알고 있는 정도의 사람도 아니요, 하느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그런 정도의 사람만도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하느님이신 것이다.  

마리아는 피조물들 중에서 유일무이한 분이시니, 그 까닭은 그녀의 순명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당신의 창조과업을 은총의 본래 상태로 회복시키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부르시고 있는 그 완덕의 첫 열매이시다.

마리아의 순명은 ’지상의 아들(딸)’ 들로 하여금 ’제2의 탄생’에로 소생되도록 한다. 마리아의 순명의 열매인 육화는 이 내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평화로 가득차게 만든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그 옛날 잃어버린 은총의 상태에로 회복되는 그 ’완전한 날’까지 빛나면서 말이다.

이렇게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그리스도를 잉태한 사실을 고치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일은 서방 교회와 같은 3월25일이다.
 

(’이콘. 신비의 미’에서/교회미술 아카데미 장긍선 신부)
 


 


주님 탄생 예고(성모영보, Annunciation) - MURILLO, Bartolome Esteban
1660-65.Oil on canvas, 125 x 103 cm, Museo del Prado, Madrid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성모 영보) 대축일

Annuntiatio Domini

Annunciazione del Signore

Annuncia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성모영보대축일(聖母領報大祝日, 라틴어:Sollemnitas in Annuntiatione Domini, 영어:Solemnity of Annunciation of the Lord)
 

하느님께서 동정녀 마리아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가브리엘 천사를 시켜 계시한 사실을 성모 영보라하고 이를 성대히 기념하는 날(3월 25일)을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 부른다. 성모 영보에 관한 성서의 말(루가 1:26-28)에 의하면 동정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명을 받은 천사로부터 "은총이 가득하시다."는 인사를 받으셨고 동정녀는 천사에게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에 동의함으로써 예수의 모친이 되셨고, 아무런 죄의 거리낌도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교부들은 마리아가 순전히 피동적으로 하느님께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교회헌장 56) 성모 영보 대축일을 동방교회에서 지킨 사실이 콘스탄티노플의 수호성인(守護聖人) 프로클로(Proclus)의 설교에 나타난다. 서방교회에서는 젤레시오 전례서에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다. 서방교회에서 이 대축일을 널리 지내게 된 것은 8세기부터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나자렛 고을의 처녀 마리아에게서 구세주가 탄생할 것이라고 예고한 구세사의 중대한 사건(루가 1,26-38)을 경축하는 날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역사적인 사건에서 마리아께서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을 기념하는 이 축일은 8세기경부터 지내기 시작하였다.
 

 

사순 시기의 전례

  

주일에는 다른 모든 축제 거행이 금지된다.

대축일이 주일에 올 때에 옮겨 지낸다. (2007. 3. 25.은 주일이므로 3. 26.로 옮겨 지낸다.) 축일과 기념일이 주일에 오면 올해(2005년)에는 생략된다.

 

주일이 아닌 다른 날에는 대축일과 축일만은 허용된다. 

교구장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는 한, 여러 가지 기원 미사와 신심 미사는 금지된다. 보통 위령 미사는 금지된다.

 

모든 미사에서 언제나 "알렐루야"를 생략한다.

성무일도:성무일도는 그날 지시대로 하고, 주일과 평일 두 가지로 되어 있는 초대송 후렴과 찬미가는 사순 시기 첫째 부분의 고유한 것을 한다.


"알렐루야"는 언제나 생략하고 또한 대축일과 축일에도 생략한다.

혼인 예식은 언제나 혼인 축복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혼자들에게 이 전례 시기의 특수성을 알아듣도록 일러주어야 한다. 오르간과 다른 악기들은 성가 반주를 위해서만 연주할 수 있다.
 

사순시기의 대축일은

3월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과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이날은 사순시기이지만 제의는 백색이며 대영광송, 1ㆍ2독서를 봉독하며, 사도신경을 바칩니다.
 

(가톨릭홈에서)



교회가 이 축일을 크게 기념하는 것은 구세주의 강생에 대하여 책임감있는 협조를 하신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상기함과 아울러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으로써 인간을 통한 수단을 선택하였음을 인식하는데 있고, 마리아를 본받아 매일 반복되는 작은"네"를 통하여 그분을 계속하여 강생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주님 탄생 예고(성모영보, The Annunciation)

Moldovita Monastery Fresco. Bucobina Romania
 


 

성 대 레오 교황의 편지에서

(Epist. 28, ad Flavianum, 3-4: PL 54, 763-767)
 

우리 화해의 성사 
 

엄위하신 분이 비천을, 권능을 지니신 분이 연약함을 취하시며, 영원하신 분이 죽음을 입으셨습니다. 고통받으실 수 없는 분이 우리의 실추된 상태의 빚을 갚기 위해서 고통받는 인간과 결합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동일한 중재자이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죽으실 수 있지만 하느님으로서는 죽으실 수 없으므로 우리 구원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참 하느님께서 참되고 완전한 인성을 지니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그분은 본성상 지니신 신성을 그대로 보존하신 채 당신이 태초에 창조하시고 그 후에 회복시키신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속이는 자가 우리 안에 서려 놓고 우리가 속아서 받아들인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는 흔적조차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약점을 함께 나누어 가지셨다고 해서 우리의 죄도 함께 나누어 가지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의 티 없이 종의 형상을 취하셨고, 당신의 신성을 손상함이 없이 우리의 인성을 고양시키셨습니다. 불가견적인 분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려고 인간의 비천한 상태를 취하시고 만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신 분이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실 때, 그것은 당신 권능을 낮추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당신의 자비를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던 그분이 종의 형상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당신의 천상 옥좌에서 내려오시어, 가장 비천한 데에 들어오시지만, 아버지의 영광을 떠나지 않으시고 새로운 질서 안에서 새로운 탄생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질서라고 말하는 것은, 본성상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의 본성 안에서 볼 수 있게 되시고,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 이해받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며, 시간 이전에 계신 분이 시간 안에 존재하기 시작하시고, 우주의 주인이신 분이 당신의 무한한 엄위를 가리시어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고통받으실 수 없는 하느님께서 고통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며, 불사불멸이신 분이 죽음의 법에 속하게 되셨기때문입니다. 

참 하느님이신 분은 또한 참 사람이시며, 이 결합에는 아무런 속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인간의 비천함과 하느님의 드높으심이 기묘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베푸실 때 변화되지 않으신 것처럼 사람도 신성의 엄위로 말미암아 흡수되지 않습니다. 각 형상은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 다른 형상과 협동하여 활동합니다. 말씀께서는 말씀으로서 행하시며 육신은 육신으로서 행합니다. 

하느님의 형상은 기적을 행하실 때 빛나고 종의 형상은 모욕을 참아내실 때 드러납니다. 그리고 말씀께서는 성부의 동일한 영광을 떠나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류의 본성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시고 같은 분이신 예수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시라고 언제나 고백해야 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으며,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의 똑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분은 사람이십니다.
 

(가톨릭홈에서)
 


 


주님 탄생 예고(성모영보, The Annunciation) - ANGELICO, Fra
late 1430s. Fresco, 230 x 321 cm. Convento di San Marco, Florence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CONSTITUTIO DOGMATICA DE ECCLESIA

LUMEN GENTIUM
 


 

제8장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동정 마리아


 

하느님의 계획

52.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세상 구원을 완수하시려고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다.”(갈라 4,4-5)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며,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셨나이다.”1) 그 구원의 신비가 우리에게 계시되고 주님께서 당신 몸으로 세우신 교회 안에서 지속되고 있다. 그 안에서 신자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분의 모든 성인과 일치하여 먼저 “우리 주 천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영광스러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2) 기억하며 공경한다.

 

마리아와 교회

53.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예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천주의 성모로 또 구세주의 참 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을 받으신다. 당신 아드님의 공로로 보아 뛰어난 방법으로 구원을 받으시고 아드님과 불가분의 긴밀한 유대로 결합되시어, 천주 성자의 모친이 되시고 따라서 성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딸이 되시며 또한 성령의 궁전이 되시는 이 최고의 임무와 품위를 지니고 계신다. 이 뛰어난 은총의 선물로 마리아께서는 하늘과 땅의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앞서 계신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받아야 할 모든 사람과 함께 아담의 혈통 안에 결합되어 계실뿐더러 “분명히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이시다.…… 왜냐하면 저 머리의 지체인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태어나도록 사랑으로 협력하셨기 때문이다.”3) 이 때문에 마리아께서는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유일무이한 지체로서 또 믿음과 사랑 안에서 교회의 가장 훌륭한 전형과 모범으로서 존경을 받으시며, 가톨릭 교회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자녀다운 효성으로 마리아를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로 받든다.


 

공의회의 의도

54.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구원을 이룩하시는 교회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강생하신 말씀과 그 신비체의 신비 안에서 복되신 동정녀의 임무를,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고 인류의 어머니이시며 특히 신자들의 어머니이신 천주의 성모님께 대한 구원받은 사람들의 의무를 성실하게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마리아에 관한 완벽한 교리를 제시하거나 신학자들의 노력으로도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을 종결시킬 마음은 없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 안에서 가장 높으신 그리스도 다음으로 높고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 그분에 대하여 가톨릭 학파들에서 자유로이 제시되는 견해들은 당연히 유지된다.4)
 


 


 
 

구약 성서에 예언된 구세주의 어머니
 

55. 구약 성서와 신약성서 그리고 존귀한 성전은 구원 계획 안에서 맡으신 구세주 어머니의 임무를 갈수록 더욱더 분명하게 밝혀주며 마치 눈앞에 보여주듯이 제시하고 있다. 참으로 구약성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을 느린 걸음으로 준비하는 구원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제대로 읽혀지고 충만한 마지막 계시에 비추어 이해되는 그 초기 문서들은 구세주의 어머니인 여인의 모습을 한 걸음씩 더욱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죄에 떨어진 첫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 뱀을 이기리라는 승리에 대한 약속(창세 3,15 참조) 안에 그 여인의 모습이 이미 예언적으로 어렴풋이 그려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여인은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불릴 아들을 잉태하여 낳을 동정녀이다. (이사 7,14; 미가 5,2-3; 마태 1,22-23 참조) 그 여인은 신뢰로 주님께 구원을 바라고 받는 주님의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빼어난 분이다. 약속의 오랜 기다림 뒤에, 마침내 빼어난 시온의 딸인 이 여인과 더불어 때가 차고 새로운 계획이 시작되었으며, 그때에 하느님의 아들이 이 여인에게서 인성을 받아들이시어 당신 육신의 신비로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주님 탄생 예고 때의 마리아
 

56.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정된 어머니의 동의가 강생에 앞서 이루어져 마치 어느 모로 여인이 죽음에 이바지한 것처럼 그렇게 또한 여인이 생명에 이바지하기를 바라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에게서 가장 탁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생명 자체를 세상에 낳아주셨고 하느님에게서 이 위대한 임무에 맞갖은 은혜를 받았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부들 가운데에서, 천주의 성모님을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으로, 이를테면 성령께서 빚어 만드신 새로운 인간이라고 부르던 관습이 널리 퍼졌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5)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더없이 뛰어난 성덕의 빛을 가득히 받으신 나자렛의 동정녀께서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소식을 알리는 천사에게서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는 인사를 받으시고(루가 1,28 참조), 하늘의 사자에게 친히 대답하셨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이렇게 아담의 딸이신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동의하시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온전한 마음으로 아무런 죄의 거리낌도 없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이시고, 주님의 종으로서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시어,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셨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부들이 마리아께서 순전히 피동적으로 하느님께 이용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신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레네오 성인이 말한 대로, 그분께서는 “순종하시어 자신과 온 인류에게 구원의 원인이 되셨다.”6) 그러기에 적지 않은 옛 교부들이 자신의 설교에서 그와 함께 기꺼이 주장하였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묶인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하여 풀렸다.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묶어 놓은 것을 동정녀 마리아께서 믿음을 통하여 풀어 주셨다.”7) 그리고 그리고 하와와 비교하여 마리아를 “살아 있는 이들의 어머니”라 부르고,8) 더 자주 이렇게 주장한다. “하와를 통하여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이 왔다.”9)
 

(한국천주교주교회의홈에서)
 


 


주님 탄생 예고(성모영보, The Annunciation) - ALBANI, Francesco
Oil on copper, 62 x 47 cm.The Hermitage, St. Petersburg
 


 

희망의 소식은 기쁨을 가져오고
 

어느 때보다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시기이다. 여전히 넉넉한 사람들은 그리 힘들지 않다지만, 여러 가지 여건과 이유로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을 겪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도 새로운 변화를 겪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저마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만, 어떤 경우에는 낙담하기도 한다. 어깨가 무겁고 힘이 빠진다.

이럴 때 어디선가 희망적인 이야기가 들려오면 얼마나 기쁠까? 실의에 빠진 이들은 희망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희망이 있다면 이들은 더없이 기쁠 것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이야기, 희망을 전해주는 소식을 듣고 싶어한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그런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곧 미래가 열려있는 새로운 삶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소식이 들려온다면, 우리는 입가에 웃음을 띠게 되고 내심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희망의 소식을 기다린다.

희망의 소식, 희망을 전하는 소식, 그래서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이 전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소식을 기다린다. 각 개인이 그렇고, 가족이 그렇고, 단체들이 그렇고, 한 사회, 더 나아가 한 민족이 그런 소식을 기다린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 또한 그러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뒤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구세주이신 메시아를 기다려왔다. 수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갖고 기다렸다. 그들은 희망이 있었기에 그런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희망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에 대한 희망이 실현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주님의 탄생을 미리 알리는 사건을 기념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기다리며 희망하던 것이 이제 이루어지게 되었다. 매우 큰 기쁨의 소식이다. ‘예수 성탄 대축일’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것이라면, 그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알려준 사건은, 기다리던 희망이 이루어지게 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성취됨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이 축일은 이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축일은 예수 성탄으로부터 꼭 아홉 달 전에 기념하고 축하한다. 그래서 3월 25일이라는 날짜가 나왔다. 로마 교회에서는 이 축일을 7세기 후반부터 ‘주님의 예고(Annunciatio Domini) 축일’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였다. 하지만 이후 세기들부터 ‘성모영보 축일’ 또는 ‘수태고지 축일’(Annunciatio beatae Mariae Virginis)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천년 이상을 지내게 되었다. 성모 신심과 더불어 이 축일이 주님의 축일에서 성모님 축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전례력에는 본래대로 ‘주님 탄생 예고’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이 축일의 의미를 되찾게 되었다.

이 축일은 대부분 사순시기 중에 지내게 된다. 그래서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시기에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거행하는 것이 주제가 서로 연결이 잘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님 탄생의 기다림에 대한 희망이 성취되는 기쁜 소식이 전해진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 로마 교회에서는 성주간과 성삼일이 아니면, 이 대축일을 장엄하게 지낸다. 또 동방 비잔틴 교회에서는 사순절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토요일이 아니면 다른 축일 거행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 축일은 예외로 성주간과 성삼일에도 지내도록 하고 있다. 그만큼 이 축일은 주님의 축일로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님의 성탄 대축일을 중심으로 앞부분은 대림시기가 마련되어 있다. 성탄시기는 주님의 공현과 주님의 세례 축일까지 연결된다. 더 나아가 주님의 봉헌 축일(2월 2일)로 그 의미가 확대되고, 또 거기에 앞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로 일찍부터 준비된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지만, 오늘의 축일은 예수 성탄과 연결된다. 우리는 예수 성탄 대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묵상하고 그 의미를 되새겼다. 그리고 그날처럼 나날의 신앙생활이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성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 오늘 ‘탄생 예고’에서부터 ‘주님 봉헌’의 그날까지 나날이 성탄일 수 있다. 우리가 그 축일들의 의미를 연결하여 묵상한다면, ‘메리 크리스마스’가 ‘매일 크리스마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겠다고 알려주셨다. 구세주께서 오신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성모님은 그 기쁜 소식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셨고,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셨다. 우리도 이 축일을 지내면서, 희망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음을 기억하자. 힘들고 어려운 이때에 전해주는 희망의 소식이다. 주님께 ‘예’ 하고 그 소식에 귀기울이고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그래서 이 힘겨운 시대에 사순절의 의미와 함께 희망차고 용기있는 신앙생활을 다짐해 보자.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경향잡지 1999년 3월호 중에서)
 


 


 


주님 탄생 예고(성모영보, The Annunciation) - ANGELICO, Fra
1440-41.Fresco, 190 x 164 cm. Convento di San Marco, Florence
 


 

베아토 프라 안젤리코(축복받은 天使修道士. 본명 Giovanni da Fiesole.)는 15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화가로 성모영보를 즐겨 그렸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려진 ’성모영보’ 이다. 이곳은 현재 안젤리코 미술관으로 유명하지만 한때는 피렌체에서 가장 중요한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도원이었다. 1436년 코시모 데메디치는 미켈로초라는 건축가를 시켜 이 곳을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개조했다. 그리고는 안젤리코를 초빙하여 1436년부터 1445년까지 수도원 전체에 벽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이 그림은 2층 복도에 그려져 수도자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 지나 갈 때마다 수도자들의 구도생활에 평화를 주고 구세주 탄생으로 인한 인류 구원의 희망을 보여주는 묵상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림의 무대는 우아한 기둥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회랑이다.

그림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 앞에 내려와서 구세주 예수 잉태를 예언하고 있다. 천주의 모친이 되실 여인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의 모습은 두 손을 가슴에 포갠 채 여인에게 예를 다하고 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 38)라고 무릎을 꿇은 채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전형적인 동정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만 보이고 마리아의 얼굴은 한없이 청순하고 성스러워서 우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왼쪽에는 이 신비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한 수도자의 모습이 보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3세기 초에 살았던 성 베드로 순교자로서 성 도미니쿠스로부터 직접 사제 서품을 받고 평생 수도원에서 고행을 하며 지낸 수도자의 모범이 된 이 성인을 이 신비에 동참시킨 것이라고 한다. 안젤리코가 그린 성모영보는 화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종교적 의미 전달에 충실하여 엄격한 신앙심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 프레스코 벽화를 그린 안젤리코는 하느님 말씀 앞에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수도자들의 자세와 분심 없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글. 정지풍 신부)
 


 


천사의 알림과 마리아의 받아들이심(Angel Announcing and Virgin Announciated) - Giovanni BELLINI
c. 1500. Oil on canvas, 224 x 105 cm (each). Gallerie dell’Accademia, Venice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
(2005년은 4월4일로 옮김. 2005년 3월25일 :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성주간 : 다른 모든 축제 거행이 금지된다.
대축일은 부활 팔일축제 후로 옮겨 지내고 축일과 기념일은 올해(2005년)에는 생략된다.

2007년은 주일이므로 3월 26일(월)로 옮겨 지낸다.
주일과 부활 팔일축제 내에는 다른 모든 축제 거행이 금지된다. 대축일은 옮겨 지내고 축일과 기념일은 올해(2005년)에는 생략된다. 주일이 아닌 다른 날에는 모든 축제 거행이 허용된다.
주일과 부활 팔일축제 내에는 여러 가지 기원 미사와 신심 미사는 금지된다. 부활 팔일축제 후 평일에는 매우 중대한 사목적 필요나 선익이 있을 때에만 허용된다. 보통 위령 미사는 언제나 금지된다. 입당송과 영성체송에는, 말마디의 뜻이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아니면, 언제나 "알렐루야"를 붙인다.
*신경을 외울 때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구절에서 모두 고개를 깊이 숙인다.*

 

 

 

성모영보 - 심순화 가타리나

2002, 아크릴, 60*50, 작가소장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방문하여 성령으로 잉태하심을 알리는 모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명한다. 마리아 뒤에는 십자가가 드리워져 있다.
 

(굿뉴스평화화랑에서)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신비로움을 접할 때마다 마음속에 담아두거나 곰곰이 생각하는 마리아의 영성을 본받으며 우리도 "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하고 자주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경이에 대해 깊이 관조했던 성모 마리아처럼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의 지혜와 진리에 마음을 활짝 여십시요!
 


 

 

포르치운쿨라(작은몫)성당 내부의 제대벽화
 

 

복되신 동정마리아께 드리신 인사
 

성 프란치스코 
 

거룩한 부인이요 여왕이시여,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 동정녀여,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간택하시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며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협조자이신 성령과 함께 

당신을 축성하셨나이다.
 

당신은 온갖 은총과 온갖 선이 가득하셨으며 

지금도 가득하시나이다. 
 

천주의 궁전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장막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집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의복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여종이시여, 기뻐하소서.

천주의 어머니시여, 기뻐하소서.
 

그리고 거룩한 모든 덕행들이여,

당신들도 기뻐하소서.
 

성령께서 당신의 은총과 비추심으로

당신들을 믿는 이의 마음에 부어주시어 

당신들로 인해 불충한 이가 하느님께 충실한 자 되게 하리이다.
 


 


 

■■■■■■■■■■■■■■■■■■■■■■■■■■■■■■■■■■■■■■■■■■■■■■■■■■■■■■■■■■■■■■■■■

 


 

축일 : 3월 29일
복녀 요안나 마리아 드 마이유(3회)
Bl. JEANNE MARIE de MAILLE
Bl. Jane Mary de Maille
Beata Giovanna Maria de Maillé
Castello di La Roche (Tours, Francia), 14 aprile 1331 - Tours, 28 marzo 1414
Giovanna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요안나 마리아 드 마이유(Joanna Maria de Maille)의 세례명은 요안나이고 견진성사 때에 마리아란 이름을 받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고 장성한 후에는 결혼하여 남편과 오누이처럼 16년을 살았다. 그러나 남편이 전쟁 포로로 있다가 1362년에 죽음으로써 그녀는 과부가 되었다. 그 후 그녀는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 되어 수덕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플랑슈-드-보의 은둔소에서 지냈다.

(가톨릭홈에서)
 


 


 


성 다미아노 십자가(THE SAN DAMIANO CROSS)
 



3월 29일 마이유의 복녀 요안나 (3회)
요안나는 1332년 프랑스 마이유에서 하르두엥 남작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기도로써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해주었는데 그 소년이 커서 그녀에게 청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젊은 부부는 동정으로 살기로 동의하고 기도와 선행에 헌신하였다. 1362년 남편이 죽자 그녀는 남편의 가족들에 의해 성에서 쫓겨났다. 그녀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퍼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집을 잃은 그녀는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쉴 수가 없었다. 친척들이 그녀에게 재혼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피해 그녀는 투르에 있는 작은 집으로 물러가서 그곳에서 다시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그녀는 나병환자들과, 아무도 손대려하지 않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 뛰어난 효과가 있는 연고를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여인들을 구하고 재활시키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또한 그녀는 죄수들에게 매우 동정심을 느꼈다. 아마 그녀의 남편이 한 때 전쟁 포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은 왕으로부터 투르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석방하는 허락을 얻어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한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여자라고 불렀다. 3회 수도복을 입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애긍을 청하며 거리를 돌아다닐 때면 나태한 이들과 비판적인 이들로부터 자주 돌팔매질을 당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이라 여기고 기뻐하였다. 이런 시련 외에도 자기 스스로 가한 엄격함과 긴 단식으로 인한 고통이 보태졌다. 하느님은 그녀를 사랑하셔서 환시와 예언의 은총을 주셨다. 한 때 부유한 남작부인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엄격한 생활에 쇠진하여 1414년 투르의 가난한 작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1871년 복자품에 올랐다.
 


 


 


기도
오 주 예수 그리스도님, 겸손과 사랑을 사랑하시는 이여, 당신의 사랑으로 불타오른 복된 요안나를 천상 은총으로 가득 채워주시고 세상 것을 경멸하도록 가르쳐 주셨으니, 저희로 하여금 이 축일을 맞이하여 겸손과 사랑, 그리고 세상 것을 경멸함으로써 공경하올 요안나 복녀를 본받게 하소서. 언제나 생활하시고 다스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묵상
하느님의 종이 주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를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를 통하여 어떤 선을 행하실 때 그의 육신은 그것 때문에 자신을 높이지 않고, 인간의 육신은 항상 모든 선을 거스르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천한 자로 여기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작은 자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적 권고 12-
(재속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

 

 

 

축일 : 3월 31일

성녀 발비나 동정 순교자

St. Balbina

Santa Balbina di Roma Martire

martyred c.130; relics in the catheral of Cologne, Germany

Balbina = balbuziente, dal latino=stutterer, from the Latin
 


 

로마 순교록에 성녀의 순교 사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교황 알렉산델로부터 세례를 받고 순교한 복자 귀리노의 딸이며 동정녀인 성녀 발비나는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동정을 지킨 당신의 신부로 간택하셨다. 이 세상의 순례길을 마친 그녀는 아버지 무덤 근처인 비아 압피아에 묻혔다."

이 기록은 순교자를 기록해 온 아도라는 사람의 주장에 근거한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 발비나는 2세기초 사람이다. 아버지는 귀리노라는 로마제국의 군인으로서 대령까지 승진했다. 아버지나 딸이나 모두 처음은 우상교의 신자였지만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해 두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훌륭한 사람들이다. 발비나는 소녀 시대부터 외모가 아름다웠고 재능도 뛰어났으므로 아버지도 특별히 사랑했고 가정도 부유했으므로 많은 청년들에게서 혼담이 들어왔다. 그러나 세상일은 믿을 수가 없는 지 뜻밖에도 발비나는 목에 나쁜 부스럼이 생겨 용모가 추해져서 부끄러운 나머지 사람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안되었다. 아버지는 이를 대단히 슬퍼하며 각지의 의사에게 보이기도 하고, 갖은 약을 다 쓰기도 하고, 신들에게 기원도 해보고 점도 쳐보는 등 백방으로 고치려고 해보았으나 아무런 효험도 보지 못했다.

그때 마침 그리스도의 이름이 방방곡곡에 전파되고 기의 기적의 소문도 대단해 귀리노는 마침내 "만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두목이 딸의 병을 고쳐 준다면 가족 모두 교회에 나가겠다."는 맹세를 하느님께 드렸다. 이 시기는 아드리아노 황제의 박해시대였으므로 알렉산델 교황은 옥중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귀리노가 딸 발비나를 데리고 와서 면회하니 그는 그들의 진심을 알고 열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한 후 손을 묶은 쇠사슬을 발비나의 상처에 대자 곧 그녀의 병은 완치되어 발비나는 전과 같이 미모의 소녀가 될 수 있었다. 아버지와 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서 하느님께 감사를 올리는 동시 교황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쇠사슬에 친구했다. 그리고 그의 권고에 의해 전에 맹세대로 집안 모두 교리 공부를 시작하고 오래지 않아 훌륭히 세례를 받고 새 생활을 시작했다. 발비나가 완쾌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녀의 병을 싫어해 만나지도 않았던 청년들이 또다시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발비나는 현세의 사랑 같은데는 끌리는 마음 없이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평생 동정을 지킬 결심을 굳게 했다.

전승에 의하면 세례 후에 불을 켠 흰 초를 든 천사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배필이 될 것을 권고했다는 말도 있지만 하여튼 세상의 허무함을 깨달은 그녀가 영원을 바라보며 거룩한 일생을 보내려고 결심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녀는 매일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며 사랑을 표시하기 위해 자선사업에 헌신하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았다. 귀리노 대령의 일가족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관가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귀리노는 즉각 법정에 호출되어 판사 아우렐리아노의 준엄한 문초를 받았지만 그는 겁내는 기색도 없이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드디어 순교의 영관(榮冠)을 획득했다. 그 뒤 딸 발비나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천국에 가게 되니, 이로써 이 성스러운 부녀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서로 만나 즐기며 같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몸이 되었다. 그 후 성녀 발비나의 용감한 신앙의 덕을 사모한 나머지 로마 신자들은 아벤티노 언덕에 한 기념 성당을 세웠다. 발비나 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다니엘 예언자와 거룩한 세 젊은이 하나니아, 아자리야와 미사엘
(Daniel the Prophet & Ananias, Azarias, & Misail, the Three Holy Youths)
 


 

 

다니 1,6-7

6 그들 가운데 유다인으로는 다니엘, 하나니야, 미사엘, 아자리야라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7 내시부 대신은 이 젊은이들에게 이름을 새로 지어주었다. 곧 다니엘은 벨트사살, 하나니야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아자리야는 아벳느고라고 부르게 하였다.



다니3,14-20.91-92.95

14 느부갓네살이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너희는 내가 세운 금신상 앞에 절을 하지 않고 내가 위하는 신을 섬기지 않았다니, 그게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나팔, 피리, 거문고, 사현금, 칠현금, 퉁수 등 갖가지 악기 소리가 나는 대로 곧 엎드리어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절할 마음이 없느냐? 절하지 않으면 활활 타는 화덕 속에 던질 터인데, 그래도 좋으냐? 내 손에서 너희를 구해 줄 신이 과연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왕에게 대답했다. "저희는 임금님께서 물으시는 말씀에 대답할 마음이 없습니다.

17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주실 힘이 있으시면 임금님께서 소신들을 활활 타는 화덕에 집어 넣으셔도 저희를 거기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18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을 섬기거나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신상 앞에 절할 수 없습니다."

19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말을 듣고는 금방 안색이 달라지며 노기에 차서 화덕의 불을 여느 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지피도록 하고,

20 군인들 가운데서도 힘센 장정들을 뽑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어 활활 타는 화덕에 집어 넣으라고 명하였다.

91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그는 벌떡 일어나 측근자에게 물었다. "꽁꽁 묶어서 화덕에 집어넣은 것이 세 명 아니었더냐?" 그들이 대답했다. "임금님, 그렇습니다."

92 "그런데 네 사람이 아무 탈없이 화덕 속에서 거닐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냐? 저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모습을 닮았구나." 하면서

95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섬기는 신이야말로 찬양받으실 분이구나." 하며 느부갓네살은 외쳤다. "저들의 하느님께서,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목숨 걸고 당신만을 믿고 저희의 신 아닌 다른 신 앞에서는 절하지도, 섬기지도 않는 이 신하들을 천사를 보내시어 구해 내셨구나.


(2004년 3월 3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성 다니엘 예언자 축일 : 7월 21일

   Daniele = Dio e il mio giudice, dall"ebraico=God is my judge, from the Hebrew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3번째 답변
본인 입력 포함 정보
프로필 더보기

미카엘라로 하세요.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