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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바람둥이 카사노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싶어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25,595 작성일2003.05.24
백과사전 같은 내용 말구요..

어떻게 세계에서 초특급 유명한!!

"바람둥이"라는 명칭을 달았는지가 궁금하네요

예를 들어 그가 여성을 꼬시는법,그리고 그 여성을 차는법등

여러 잼있는 에피소드 같은것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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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
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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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의 전부를 사랑에 바쳤던 그가 사랑을 여자에게만 나누어주었던 건 아니다. >
18세기 프랑스의 이름난 바람둥이였던 카사노바는 벤처투자에도 열정적이었다.
이원재( 취재팀장)

카사노바는 우리에게‘호색한’이라는 단어로 기억된다. 1725년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그는 귀족 여인들을 상대 로 애정행각을 벌이면서 육체적 쾌락과 권력과 돈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종 기록에 서도 카사노바를 키가 2m에 이르고 박식한 데다 예술적 재능까지 뛰어나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다고 묘사한다. 하지만‘호색한’이라는 단어는 카사노바의 표면을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근원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카사노바는 매력적인 남성이 었을 뿐 아니라, 신사업에 서슴없이 뛰어들어 거액을 투자하는 벤처투자자이기도 했다. 그가 투자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첫 사업은 요즘 한창 게이트에 시달리고 있는 복권사업이었다. 고향 베네치아를 떠나 파리 사 교계를 전전하던 카사노바는, 1757년 재정난을 겪고 있는 파리시의 어려움을 간파하고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15세에게 복권제 도 도입을 건의했다.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복권사업 책임자로 임명된 카사노바는, 첫 번째 사업으로 파리시에 60만 프랑의 이익을 남겨줬다. 이 와중에 개인적으로도 복권사업소 다섯 곳에 투자해서 1만 프랑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복권사업으로 번 돈을 1759년 다시 염직물 사업에 투자했다. 18세기 근대 산업혁명이 방직산업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점 을 감안한다면, 그 시대 경제의 최첨단에 서 있는 투자자였던 셈이다. 당시 상류층에서 로코코풍의 화려한 옷감이 인기를 끌던 반면, 중산층 이하에서는 상대적으로 값이 싼 인도산 옷감이 유행했다고 한다. 프랑스 정부가 방직산업 보호를 위해 외국산 옷 감수입을 금지하고 있었는데도 인도산 옷감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이어졌다. 카사노바는 이런 점을 간파하고 투 자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 종업원이 중요한 공장설비를 훔쳐 달아난 뒤, 투자 파트너들이 카사노 바를 의심하면서 그는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그의 투자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말년인 50세가 됐을 때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가 다시 출 판업에 투자했다. 그가 사업을 벌인 뒤 유럽 각국의 많은 사람들은 책을 구하기 위해 베네치아로 몰려들었 고 이 지역 출판업이 활기를 띨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카사노바는 또한 당시의 진보사상인 계몽주의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이 계몽주의자는 18세기 중반 유 럽의 지식층이 중심이 돼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하던‘프리메이슨’이라는 결사체의 단원이기도 했다. 1760 년에는 스위스에서‘새로운 시대가 문을 두드린다’고 외치던 유명한 개혁 사상가 볼테르와 만나기도 했다. 호색한이자 투자가이자 개혁사상가인 카사노바가 일생을 두고 추구했던 것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미천한 태생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점이다.

카사노바는 희극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연극배 우 아들이 사회에서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고, 그는 평생을 열등감에 시달렸 다. 18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엘리트였지만, 그가 계속해서 ‘튀는 인생항로’를 걷지 않았다면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을지 모 른다. 투자자로서 그의 철학은 아마‘돈은 모든 불평등을 평등하게 만 든다’고 말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그것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결국 노년에 이르렀을 때 투자는 모두 실패했고, 사상가로 인정받 지 못했으며, 여성편력을 가능하게 했던 육체도 쇠락했지만, 개인의 독립성과 자유, 그리고 성취감이 통하는 지점에 도달한 기억만으로 그 는 행복했을지 모른다.

< 호색한이라구요? 지성입니다! >
김준묵씨 '감각의 순례자-카사노바'

호색한의 대명사인 카사노바(1725~1798)의 열정은 비단 여체만에 집중된 게 아니었다.

세계 최초의 공상과학 소설을 쓴 작가, 프랑스에 로또 복권을 첫 도입한 벤처 사업가, 4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저술가, 볼테르의 계몽주의를 반박한 법학박사….

18세기 유럽의 지성인 그가 왜 희대의 탕아로만 평가절하 돼야만 할까. 한 고서적상이 이 같은 의문을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 책을 펴냈다. 한국의 첫 카사노비스트라고 자부하는 김준묵 씨(39)의 <감각의 순례자- 카사노바>. 그의 출생지인 베네치아에서 출발해 로마 파리 프라하 구석구석까지 발자취를 추적해 현지인들의 반응, 자신의 상상, 카사노바 회고록 등을 녹여낸 여행기 형식이다.

책을 읽고 나면 낭만적인 여행지를 다녀온 듯하고 “난 철학자로 살다가 크리스찬으로 죽는다”라는 말을 남긴 카사노바에게 연민의 정을 가질만큼 너그러워질 수 있다.

▲카사노바의 비급 혹은 사명감

신장 2m의 만능 탤런트이자, 수려한 화술과 매너. 하지만 그 보다도 여성들을 위해 태어났다는 사명감에 투철했다. 한 가지 장점만 봐도 상대방에 푹 빠져들었고,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여인들에게 원망이나 비난을 사지 않았던 이유. 절정의 순간을 다시 갖고 싶어 일생을 기다렸다고 고백한 연인도 많다.

스페인의 전설적인 인물인 돈 후안과 비교하면 캐릭터가 좀 더 명확해 진다. 카사노바는 헤어진 여인에대한 그리움을 늘 간직했으나 돈 후안은 여자를 정복하는 것 자체에 쾌감을 느꼈다.

▲창의적 요리사- 식탁의 유혹

진짜 맛있는 요리는 욕정을 불러 일으킨다, 사랑 받기 위해선 기쁨을 줘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 정력제 및 최음제 구실을 하는 퓨전 요리를 스스로 개발했다. 베네치아 전통 요리 중엔 카사노바의 창작물이 많다. 여인의 머리와 피부색, 느낌과 분위기에 따라 늘 다른 종류의 요리와 술을 내놨다. 단 요리는 8가지를 넘지 않았다.

사랑의 전희를 맛보기 위한 최고의 음식은 석화에 레몬즙을 뿌려 날로 먹는 것, 6번의 오르가즘을 가능케 했던 음식으론 식초, 박하, 올리브 오일을 등 곁들인 계란 흰자 샐러드를 꼽았다. 당시 숭어 알집을 요즘의 콘돔처럼 활용했다. 그러나 진짜 테크닉은 철저한 자기 관리. 지속적인 쾌락을 위해 희열의 8할만 채운다는 것.

▲감각의 전도사- 난행과 성취

남자가 도저히 유혹할 수 없을 정도로 정조가 굳은 여자는 없다고 장담했다. 첫 직업이 성직자였던 그는 첫 경험을 자매와 함께 했다. 친구 사이인 수녀, 부녀와도 한 이불 속에서 동침했던 카사노바는 “삶의 강렬함은 탈선 없이는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카사노바는 모차르트를 만나 <돈 조반니>의 개사를 도왔고, 러시아 예카테리나 대제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사무엘 극장의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했다. 연극 대본이나 수학 및 의학 연구서도 펴냈다. 또 질 베른에 앞서 공상 소설 <자코사메론>을 집필했다. 이 밖에 손수 옷을 만들어 입은 디자이너, 프랑스 정부에 60만 프랑의 수익을 남겨준 복권 사업가 등등.

▲낭만주의자의 아킬레스건

모녀와 동침 때 자신의 딸일 확률이 높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게 충격적. 그 마저도 가감없이 기록해 불멸의 난봉꾼이란 오명을 자초했다. 신비주의에 푹 빠진 후작 부인에게 ‘원하는데로 환생시켜 주겠다’는 일종의 사기극을 벌여 7년간 100만 프랑의 돈을 얻어냈다. 도박 죄를 사면받기 위해 도박장을 감시하는 스파이 노릇도 했다. 창녀에 푹 빠져 사기를 당했고, 이로 인해 파산과 성병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다 자살 결심도 한 바 있다.

▲자기 변명의 철학- 자유 의지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는 걸 의심할 때 자유를 상실한다. 운명에 의존하면 신이 내린 자유 의지마저 상실한다.” “난 여자들을 미친 듯이 사랑했지만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자유를 택할 것이다.” 여성 편력도 자유 의지의 연장이라는 해석.

인류에대한 사랑을 내세운 볼테르를 만나 ‘의식 과잉’이라고 몰아부쳤고, 선이든 악이든 자신은 자유의지로 행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즐겁게 보낸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권태로운 시간만이 낭비일 뿐이다.”


< 카사노바 연보 >

1725
지아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가 4월 2일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산 사무엘레 극장(Teatro San Samuele) 근처의 칼레 델라 콤메디아(Calle della Commedia)에 위치한 집이었다. 그의 부모 자에타노 지우세페 카사노바와 자네타 니 파루시는 배우였다. 지아코모 카사노바는 나중에 자신의 저작 <네 아모리 네 돈네>(1783)에서, 자신의 진짜 아버지가 베니치아의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라고 주장했다.
그리마니 가문이 자에타노 카사노바와 자네타 니 파루시가 일하던 극장의 소유주였던 것이다. 지아코모 카사노바의 부모는 공연을 위해 국내외를 돌아다니느라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고, 지아코모 카사노바는 외할머니 마르지아 파루시 손에서 자라났다. 카사노바는 병약한 아이였다. 카사노바는 자신이 유아기 동안 거의 식물에 가까운 상태였으며, 그런 상태가 여덟 살 때까지 이어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1733
지아코모 카사노바의 만성적인 코출혈 증세가 '마술'로 치료되었다. 이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734-1738
파두아로 보내 진 카사노바는 고지 박사(Dr. Gozzi) 밑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에 고지 박사의 여동생 베티나(Bettina)와 사랑에 빠졌고, 이로써 카사노바는 태어나 처음으로 여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1738-1742
이 시기에 카사노바는 파두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나, 워낙 명석했기에, 시험을 치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파두아로 돌아가야 할 때를 제외하면, 1739년부터 카사노바는 대부분의 시간을 베네치아에서 보냈다.

1740
2월 14일에 체발식을 하고 성직에 입문했다. 카사노바는 자신의 이웃이자 베네치아의 귀족인 알비세 마리피에로(Alvise Malipiero)의 각별한 호의를 입었다. 테레사 이메르(Teresa Imer), 나네타 사보르그난, 마르타 사보르그난(Nanetta and Marta Savorgnan), 지울리에타(Giulietta) 등과 애정 행각을 벌였다.

1741
1월에 카사노바는 하위 성직을 얻게 되었고, 교회 안에서 경력을 쌓기로 결정한다.

1742
파두아 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바르샤바에 머물고 있던 어머니는 베네치아의 집을 더 이상 임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카사노바는 산 키프리아노(San Cipriano)의 교회 학교에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쫓겨나고 말았다. 카사노바는 이 때 베네치아 소유의 코르푸(Corfu)섬을 관장하던 지아코모 다 리바(Giacomo da Riva)의 비서가 되었다.
카사노바는 코르푸에는 물론, 콘스탄티노플도 방문했다. 그러나 자서전에서는 카사노바가 1745년까지 코르푸, 콘스탄티노플 등지를 방문한 기록을 볼 수 없다. 자서전은 카사노바의 삶의 여러 다른 에피소드들이 혼합, 중첩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여하튼, 카사노바는 1743년 3월 이전에 다 리바의 비서직에서 사임했거나 적어도 사임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1743
카사노바는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어린 카사노바를 키웠던 외할머니 마르지아 파루시가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카사노바는 3월 말일부터 7월 27일까지 상트안드레아(Sant'Andrea) 성에 투옥되었다. 자네타(Zanetta)가 애쓴 덕분에 카사노바는 베르나르도 다 베르나르디스(Bernardo da Bernardis)의 비서로 임명된다.
베르나르디스는 칼라브리아(Calabria)의 마르티라노(Martirano)의 새 주교였다. 10월에 카사노바는 개인적으로 로마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주교의 측근이 되기를 희망했다. 연말이 다 되어 마르티라노에 도착한 카사노바는, 시골 지역인 칼라브리아의 문화적 척박함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주교의 비서직에서 물러나게 해 줄 것을 청했다.

1744
나폴리를 거쳐 로마를 여행했다. 돈나 루크레지아(Donna Lucrezia) 및 그 남편, 그 자매와 만나게 되었다. 카사노바와 루크레지아의 관계는 사뭇 뜨겁고도 격렬한 것이었다. 6월에 카사노바는 교황청 주재 스페인 대사인 아쿠아비바(Cardinal Acquaviva) 추기경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자신이 교회 안에서 경력을 쌓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745
카사노바는 자신의 프랑스어 선생의 딸인 바바루치아(Barbaruccia)의 도망 미수에서 원하지 않은 공범이 되었다. 사실 그는 죄가 없었지만, 카사노바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게 되었고, 대주교는 그를 해고해야만 했다. 베네치아로 돌아오면서 카사노바는 카스트라토(어릴 적에 거세하여 여성의 목소리를 지니게 된 남성 가수) 소프라노로 알려져 있던 벨리노(Bellino: 훗날 테레사 란티(Teresa Lanti)로 불리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안지올라 카로리(Angiola Calori)이다.)와 만났다.
카사노바는 그가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믿지 않으려 했고, 결국 그가 여자라는 것을 밝혀낸 뒤 격렬한 사랑에 빠졌고, 급기야 결혼까지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사노바는 극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직업 없는 남편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지위 하락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여배우나 가수는 창녀보다 그리 나을 것 없는 신분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결국 카사노바는 벨리노-테레사를 사랑의 포로 신세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카사노바는 4월 초에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가 다 리바의 비서가 되어 코르푸로 그를 수행, 방문한 것이 이 때이다.

1746
생계를 위해 카사노바는 산 사무엘레(San Samuele) 극장의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해야 했다. 그는 그 직업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4월 21일에 그는 베네치아 귀족 마테오 지오반니 브라가딘(Matteo Giovanni Bragadin)과 만났다. 카사노바는 브라가딘이 심한 발작으로 고통 받을 때 도움을 주었고, 결국 브라가딘의 치료를 맡게 되었다. 브라가딘 및 그의 친구들은 마술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젊은 카사노바의 비범하기 짝이 없는 의학 지식이 신비적인 기원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카사노바는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cabala)에 대한 지식을 사용하여 그들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사로잡았다. 결국 브라가딘은 카사노바를 자신의 비공식적인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막대한 양의 용돈까지 지급했다. 이후 3년 동안 카사노바는 쾌락에 몰두하는 젊은 귀족으로 살았다.

1749
카사노바의 방탕한 생활은 곧 베네치아 종교재판관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그들은 국가의 안전 유지와 치안 질서 확립의 측면에서,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브라가딘의 충고로 베네치아를 잠시 떠난 카사노바는, 체세나(Cesena)에서 수수께끼 같은 여성 모험가 헨리에트(Henriette)와 만났다. 그리고 그녀와 파르마(Parma), 제네바 등지로 동행했다. 카사노바와 헨리에트가 이 때 나눈 사랑은, 카사노바의 많은 사랑 가운데에서도 최대급에 속한다. 7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그들은 서로에게 탐닉했다.

1750
헨리에트는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카사노바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2월). 카사노바는 4월부터 5월 사이에 베네치아에 머물렀다. 6월 1일에 그는 파리로 향했다. 여행 도중 리용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그는 프리메이슨(Freemason) 단원이 되었다. 이 비밀 결사체의 단원이 됨으로써, 카사노바는 매우 귀중한 인적 네트워크를 지니게 된 셈이었고, 이것은 그의 나머지 생애에서 무척 큰 도움이 되었다.

1750-52
카사노바의 첫 파리 체류 기간. 그는 프랑스 문화의 열성적인 관찰자로 시간을 보냈다. 프랑스어를 배우는 데에도 무척 열심이었다. 도덕적 청렴성과 예술적 재능으로 이름이 높았던 연극인 가족 발레티 일가를 무척 자주 방문했다. 그 일가의 일원인 마농 발레티(Manon Balletti)는 나중에 카사노바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0월에 지아코모와 그의 형제 프란체스코는 파리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향했다. 카사노바의 어머니가 선제후 밑에서 배우로 일하고 있던 삭소니(Saxony)에서, 카사노바는 사실상 자신의 첫 번째 문학 작품이라 할 연극대본 La Molucheide를 작성했다.

1753-1756
프라하와 비엔나를 거쳐 5월 말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C.C.라는 약칭으로 알려져 있는 카테리나 카프레타와 애정 행각을 벌였다. 카사노바는 브라가딘에게, 카테리나의 아버지에게 자신과 카테리나의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청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카테리나의 아버지는 그녀를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카테리나는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 아베 드 베르니스와 내연의 관계였던 수녀 M.M과 만난다. 이로서 카사노바는 아베 드 베르니스와 교유할 수 있었다. 물론 수녀 M.M과 카사노바는 열정적인 성관계를 갖는 사이가 되었다. 사랑이 아닌 단순한 육체 관계에 있어서는 수녀 M.M.과의 관계가 가장 뜨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카사노바는 베네치아의 종교재판관들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카사노바의 이단적인 지식과 파격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외국 대사들 및 베네치아 정부 인사들과 자주 접촉하는 카사노바의 행태가 베네치아에 잠재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카사노바는 1755년 7월 25-26일 밤에 체포되어 그 지붕이 납으로 되어 있어 '납'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건물 감방에 투옥된다. 카사노바는 1756년 10월 31일-11월 1일 밤에 그곳에서 탈출하여 베니스를 떠났다. 그리고 파리로 발길을 향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사실상 고국에서 추방된 도망자 신세였지만, 이 탈출은 오히려 그의 명성을 높여 주었고(카사노바 자신이 그 탈출에 대해 워낙 그럴듯하게 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류 사회에서 각광받는 인사가 될 수 있었다.

1757
2월 5일에 파리에 도착했다. 아베 드 베르니스(Abbe de Bernis)의 도움과 카사노바 자신의 어머니의 수완 덕분에, 그는 프랑스 정부 발행 복권 사업에 참여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카사노바는 프랑스 외무장관을 위해 덩케르트(Dunkirk)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또한 듀페 후작부인(Marquise d'Urfe, 미망인)과 만나 이단적 종교와 신비주의에 대한 지식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
듀페 후작부인은 카사노바가 자신이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믿고, 카사노바의 후원자(파트롱)가 되었다. 이후 7년 동안 카사노바는, 다른 점에서는 매우 지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이 여인을 능숙하게 속이면서 백만 프랑에 가까운 돈을 사취할 수 있었다.

1758
10월에 카사노바는 또 다른 비밀 임무를 지니고 네덜란드로 갔다. 그의 임무는 프랑스 정부 발행 채권을 판매하는 협상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그는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여 협상 상대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고, 돈도 챙길 수 있었다. 에스더(Esther)와 애정 행각을 벌였다.

1759
2월 초에 파리로 돌아왔다. 카사노바는 자신의 친구인 베네치아 귀족 안드레아 맴모(Andrea Memmo)의 연인이었던 지우스티아나 윈네(Giustiniana Wynne)의 인공 유산을 도왔다는 이유로 고발되었지만, 그것이 거짓된 혐의임을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복권 사업에서 얻은 수익을 실크프린팅 사업에 투자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종업원 하나가 실크프린팅 공장의 거의 모든 설비를 훔쳐 달아났고, 이에 카사노바의 사업 파트너들과 채권자들은 카사노바가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들의 고발로 카사노바는 결국 포르배크(For-l'Eveque)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마담 듀페(Mme D'Urfe)의 중재로 나흘만에 풀려났다. 법적으로 곤란을 겪는 처지였지만, 카사노바는 또 다른 재정 관련 임무를 지니고 네덜란드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했다. 그가 네덜란드에 도착한 직후, 프랑스 법원은 그가 환어음을 위조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여러 해에 걸쳐 카사노바는 유럽 각지를 끊임없는 방랑했다. 어떤 연구자들은 그 방랑의 시기에 카사노바가 스파이로 고용되어 활동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가 정말 스파이 활동을 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밝혀진 증거는 아직까지 없다.

1760
2월에 네덜란드를 떠나 퀼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카사노바는 빚을 떼먹었다는 이유로 고발당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기각되었다. 3월에 그는 슈투르가르트에서 전문적인 사기도박꾼의 피해자가 되었다. 도박꾼들에게 도박빚을 갑을 길이 없었던 카사노바는 다시 한 번 투옥되었다. 그는 탈출하여 취리히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그는 베네딕트회 소속 아인시델(Einsiedel) 수도원을 방문했고, 잠시 동안이나마, 수도사가 될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바로네스 드 롤(Baroness de Roll)에게 반한 나머지 그 생각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에 Les Delices(볼테르의 거주지로 유명한 곳)로 불테르를 방문했다.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그레노블, 아비뇽, 마르세이유, 툴롱, 앙티베(Antibes), 니스, 제노아, 피렌체 등지를 돌아다녔다. 가짜 환어음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피렌체를 떠나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사실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12월에 로마에서 그는 그의 형제 지오반니 및 지오반지의 동료인 화가 라펠 맹그스(Raphel Mengs), 예술사가 요한 빈켈만(Johann Winkelmann) 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교황 클레멘트 13세로부터 교황청 기사 작위(knight in the Papal Order of the Holy Spur)를 받았다.

1761
나폴리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카사노바는 17세 나이의 레오닐다에게 푹 빠져 구혼한다. 당시 레오닐다는 노쇠하여 성불능이었던 마타로네(Matalone)공의 명목상의 정부였다. 그러나 레오닐다의 어머니를 만난 카사노바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머니는 다름 아닌, 카사노바 자신과 1744년에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던 돈나 루크레지아(Donna Lucrezia)였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 자신이 레오닐다의 어머니라고 말했고, 결과적으로 근친상간이 될 결혼은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결혼하려는 뜻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카사노바는 루크레지아, 레오닐다 모녀와 모두 관계를 갖는다. (루크레지아 쪽에 거의 전적으로 몰두하기는 했지만.)
로마로 돌아온 카사노바는 계속해서 피렌체, 모데나, 파르마, 튜린(5월까지 머물렀다.) 등지를 돌아다녔다. 친구 지안 지아코모 마르첼로 감바 드 라 페로사(Gian Giacomo Marcello Gamba de la Perosa) 백작은 카사노바에게 아우그스부르그 회의에서 포르투갈을 대표해 줄 것을 부탁했다. 8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카사노바는 아우그스부르그에 머물렀다. 회의가 열리지 않게 되자 파리로 돌아왔다.

1762
파리에서 카사노바는 마담 듀페와 접촉했고 듀페는 카사노바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어 주었다. 카사노바는 듀페에게 그녀가 남자로 다시 태어날 때가 임박했다고 말했고, 남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이단적, 신비주의적 의식을 듀페가 소유한 퐁카레(Pontcarre)성에서 거행했다. 이후 엑스라샤펠(Aix-la-Chappelle)에서도 비슷한 의식을 거행했다.
카사노바는 이 사기극의 공모자는 마리안느 코르티첼리(Marianne Corticelli)였다. 코르티첼리가 자신의 몫을 더 늘려주지 않으면 사기극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자, 카사노바는 듀페에게 코르티첼리가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확신시켰으며, 재탄생 의식을 당분간 보류할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카사노바는 코르티첼리를 튜린으로 보냈고, 자신은 제네바로 갔다. 그곳에서 카사노바는 개신교 목사의 딸로 지적인 여성이었던 헤드위제(Hedwige)와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튜린으로 갔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그 도시에서 쫓겨났고, 제네바로 다시 돌아갔다.

1763
카사노바는 튜린으로 돌아왔다가 밀란으로 갔고, 다시 제노아를 거쳐 마르세이유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마담 듀페의 재탄생 의식을 거행했다. 새로운 공모자는 자신의 형제 게아타노(Gaetano)와 자신의 비서 지아코모 파사노(Giacomo Passano)였다. 코르티첼리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카사노바를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그들을 떠나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게아타노의 연인이었다가 카사노바의 연인이 된 마르콜리나의 도움으로 사기극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재탄생 의식에서 카사노바는 마담 듀페를 임신시켰고, 아이가 태어나면 듀페가 죽게 될 것이며, 그러나 듀페의 영혼은 아이의 몸 속에서 계속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담 듀페는 자신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카사노바의 마술적인 힘을 믿지 않게 되었다. 결국 마담 듀페를 상대로 7년에 걸쳐 지속된 카사노바의 사기극은 끝났다.
5월에 파리로 돌아왔고, 6월에는 런던으로 떠났다.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마담 듀페로부터 멀리 떠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파울린(Pauline)와 관계를 가졌다. 창녀 마리안느 샤필론(Marianne Charpillon)에 탐닉했다. 샤필론은 카사노바로 하여금 막대한 돈을 쓰게 했고, 카사노바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카사노바의 삶이 내리막을 걷게 된 것이 바로 이 무렵부터라고 할 수 있다.

1764
빚 때문에 고발당할 처지에 놓은 카사노바는 5월에 영국에서 도망쳤다. 6월에는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대제가, 카사노바를 포메라니아 출신(Pomeranian) 사관후보생들로 이루어진 부대의 대장으로 임명했지만, 만족하지 못한 카사노바는 거절했다. 9월에는 러시아로 향하여, 12월에 상트페테르스부르그에 도착했다.

1765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예카테리나 대제를 만났다. 폴란드로 향하여 10월에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당시 폴란드 왕이었던 스타니슬라스 보니아토브스키(Stanislas Poniatowski)가 카사노바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카사노바는 폴란드 궁정에 고용되기를 원했던 것이 거의 틀림없다.

1766
여배우 한 사람을 놓고 사비에르 브라닉키(Xavier Branicki) 백작과 결투를 벌였다. 브라닉키가 심각하게 부상당했다. 7월에 폴란드를 떠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드레스덴으로 갔다. 그곳에서 12월까지 머문 뒤 비엔나로 떠났다. 카사노바와 브라닉키의 결투는 유럽 전역으로부터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은 폴란드에서 가장 저명하고 고귀한 가문의 일원인 브라닉키가 카사노바와 기꺼이 결투했다면, 카사노바야말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카사노바는 이후 일생 동안 그 결투 사건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1767
비엔나에서 도박을 금하는 법을 어긴 죄로 고소당했고, 결국 비엔나 시에서 추방되었다. 1월부터 여름이 끝날 무렵까지, 카사노바는 파리를 향하며 방랑했다. 아우그스부르그(Augsburg)에서 슈베친겐(Schwetzingen)으로, 만하임(Mannheim)에서 마에엔스(Mayence)로, 퀼른에서 스파(Spa: 광천수가 나오는 셈으로 유명한 벨기에 휴양지)로..... . 10월에 파리에 도착했다. 11월에 프랑스 왕은 카사노바를 강제로 나라 밖으로 떠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담 듀페의 가족들이 그의 추방을 왕에게 청원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카사노바는 스페인을 향해 떠났다.

1768
마드리드에서 카사노바는 임시직이 아닌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고자 했다. 그는 일단의 스위스-독일 이주민들로 하여금 시에라 모레나(Sierra Morrena)를 식민지화한다는 계획을 기초했는데, 그 식민지에서 자신이 대리 총독이 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마드리드 주재 베네치아 대사 알비세 모체니고(Alvise Mocenigo)와 친분을 두텁게 하고자 애썼다. 대리 총독직 물망에 오르려면 아무래도 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사노바는 경솔하게도 어느 지인에게 대사의 비서(이름난 동성연애자였던) 마누지(Manuzzi) 백작이 사실은 귀족 출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대사관 측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그의 구상은 수포로 돌아갔다. 카사노바는 마드리드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카탈루냐(Catalonia)의 총사령관의 아내와 인연을 맺었고, 예전에 협력자였으나 지금은 불구대천의 적이 된 지아코모 파사노(Giacomo Passano)와 만나게 되었다. 파사노의 책략으로 카사노바는 42일 동안 투옥되었다. 감방에서 카사노바는 de la Houssaie's Histoire du gouvernement de Venise의 내용을 반박하는 글을 집필했다. de la Houssaie's Histoire du gouvernement de Venise는 베네치아 유력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국 카사노바는 그것을 반박하는 글을 통해 베네치아 당국의 환심을 사, 귀국이 허락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카사노바는 12월 8일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1769
스페인을 떠난 카사노바는 남부 프랑스를 여행했다. 엥시앙-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그는 심한 병에 걸려 앓았고, 1월 말부터 5월말까지 회복을 위해 휴양을 취했다. 아픈 동안 그는 어느 헌신적인 간호사의 도움을 받았다. 회복되고 나서 그는 그 간호사의 이름을 물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누구이며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엑시앙-프로방스를 떠난 직후 우연히 Croix d'Or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말은 들은 카사노바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인 즉, 자신은 카사노바가 20년 전에 깊은 사랑을 나누었던 헨리에트의 하녀이며, 헨리에트의 분부로 카사노바를 헌신적으로 돌보았다는 것이었다. 카사노바와 헨리에트는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부유한 미망인이 되어 있던 헨리에트는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싫어서 카사노바가 엑시앙-프로방스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헨리에트는 카사노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변함 없음을 밝혔고, 만일 카사노바가 돈이 필요하다면 자신의 지갑은 그에게 열려 있다고 말했다. 카사노바는 남부 프랑스를 거쳐 튜린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루가노(Lugano)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Confutazione della Storia del Governo Veneto d'Amelot de la Houssaie를 출간했다.

1770
3월에 카사노바는 다시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파르마로, 볼로냐를 거쳐 피렌체로, 로마로, 나폴리로. 나폴리에서 그는 도박사로 활동하면서, 막대한 돈을 따거나 잃거나 했다. 북쪽으로 향하여, 살레르노(Salerno)에서 멈추었다. 그곳에는 돈나 루크레지아와 레오닐다 모녀가 살고 있었다. 레오닐다는 70세 나이의 후작과 결혼한 상태였고, 그 결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사노바는 이번에는 루크레지아가 아니라 레오닐다에게 전념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카사노바는 레오닐다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로마로 돌아 온 카사노바는 추기경이 되어 있는 오랜 친구 아베 드 베르니스와 다시 연락을 취했다. 7월에 카사노바는 피렌체로 향했다. 그러나 12월에 그 도시에서 다시 추방당했다. 12월 말에 볼로냐에 도착했다.

1771-1774
볼로냐에서 카사노바는 Lana caprina를 출간했다. 여성의 이성이 자궁에 의해 조정되는지 여부를 놓고 두 대학 교수가 벌이는 논쟁을 조롱하는 풍자적인 글이다. 9월에 볼로냐를 떠나, 안코나로 향했고, 다시 트리에스테로 향했다. 트리에스테에서 그는 2년 동안 머물렀다. 베네치아의 종교재판관들의 마음을 돌려 추방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사노바는 몇 가지 사소한 외교 업무와 비밀 조사 업무를 베네치아를 위해 수행했다. 동시에 그는 폴란드의 역사(Istoria delle turbolenze della Polonia)를 집필했다. 1774년 11월 15일, 그는 결국 베네치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기나긴 방황이 끝이 나는 듯 싶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1775-1783
베네치아로 돌아 온 카사노바는 돈을 벌기가 힘들었다. 작가로서 생계를 유지해보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이탈리어로 번역했고, 볼테르에 대한 신랄한 비평을 집필했으며, 월간지 Opuscoli miscellanei를 출간했고, 브라닉키와의 결투를 주제로 한 글을 펴냈고, 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산타젤로 극장에서 프랑스어로 연극을 공연하고 있던 일단의 프랑스 배우들과 연계하여 일종의 문화 흥행사업을 시도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는 연극 전문 주간지 Le Messager de Thalie를 펴냈는데, 모든 내용을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극 흥행사업에서나 잡지 발간에서나 그는 실패했다.
카사노바는 결국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베네치아 정부를 위한 스파이로 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적, 공적으로는 무척 불우한 시기였지만, 일상 생활만은 어느 정도 안락했다. 바로 프란체스카 부스치니(Francesca Buschini) 덕분이었는데, 그녀는 미천한 신분의 교육받지 못한 재봉사였다. 그녀가 카사노바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카사노바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한결같았는지 잘 알 수 있다.
카사노바는 제노아 외교관 카를로 스피놀라(Carlo Spinola)의 임시직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스피놀라는 카르레티(Carletti)라는 사람에게 진 빚을 잊고 있었다. 카사노바는 자신에게 수수료를 주면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제의했다. 결국 카사노바는 스피놀라가 서명한 담보증서를 들고 베네치아의 귀족 카를로 그리마니(Carlo Grimani) 집으로 카르레티를 만나러 갔다. 카사노바와 카르레티가 카사노바에게 지급될 수수료를 놓고 의견을 달리하게 되자, 그리마니는 카르레티 편을 들었다. 격렬한 언쟁 끝에 주먹질이 오고가게 되었고, 카사노바의 명예는 공적으로 실추되기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복수로 카사노바는 Ne amori ne donne를 집필했다. 그는 그 글에서 자신이 그리마니의 아버지 미첼레(Michele)의 사생아이며, 그리마니는 다른 베네치아 귀족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베네치아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1783년 1월 17일에 카사노바는 베네치아를 떠나야 했다.

1783-1785
카사노바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유럽 각지를 전전했다. 비엔나로 갔다가 비밀리에 베네치아에 잠입하기도 했지만, 불과 몇 시간밖에 머무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볼자노, 인스부르크, 아우그스부르그, 프랑크푸르트, 엑스라샤펠, 스파 등지를 전전했다. 스파에서는 몇 달 동안 머무르기도 했다. 그리고 9월에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자신의 형제 프란체스코와 석 달 동안 함께 살았는데, 벤자민 플랭크린(Benjamin Franklin)을 만나기도 했고,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섬 탐험에 참가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다시 비엔나, 드레스덴, 베를린, 프라하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784년 2월에 비엔나로 돌아와 비엔나 주재 베네치아 대사 세바스티노 포스카리니(Sebastiano Foscarini)의 비서가 되었다. 포스카리니의 요청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크고, 다시 한 번 베네치아 정부를 향해 자신의 귀국을 허락해 줄 것을 설득하는 차원이었을 가능성도 큰데, 그는 베네치아와 네덜란드와의 외교 분쟁에서 베네치아의 입장을 지지하는 내용의 글을 작성, 출간했다.
1784년 2월에 카사노바는 요세프 칼 엠마누엘 폰 발드스타인(Josef Karl Emmanuel von Waldstein) 백작을 만났다. 발드스타인 백작 역시 카사노바와 마찬가지로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으며, 마술에 관심이 많았다. 백작은 카사노바를 둑스(현재 체코 공화국에 영역 안에 위치.)에 위치한 자신의 성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해주었다. 카사노바는 망설였지만 포스카리니의 사망으로 그에게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결국 발드스타인 백작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1786-98
둑스에서의 카사노바의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물론 도서관 사서로서의 일은 그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았기에,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납'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베네치아의 성에서 자신이 탈출했던 이야기를 담은 책(1787), 일종의 공상과학소설(1788), 입방체의 수학적 문제에 대한 책(1790) 등을 출간했다. 그밖에도 둑스에서 작성한 많은 수고가 그의 사후에도 출간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딘 드 상 피에르에 대한 비평,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여제의 모습을 그린 것, 인간의 풍속, 어리석음, 약점 등에 주제로 한 풍자적인 글, 그레고리안력 및 율리우스력(曆)에 대한 비평, 그 밖의 여러 글들.
카사노바는 둑스를 떠나 여행하기도 했다. 1787년에는 프라하에서 모차르트와 만났는데, 돈 지오반니의 대본을 수정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듬해인 1788년에는 라이프찌히, 드레스덴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1791년에 프라하에서 레오닐다가 낳은 자신의 아들과 만났다. 1795년에는 바이마르로 가서 그곳 공작 밑에서 일자리를 구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둑스에서의 카사노바가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리그네 공작과 정기적으로 만났고, 가끔씩 오랜 친구들이 카사노바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매우 빈번하게 서신을 교환했다.
그러나 그는 고립되어 있다고 느꼈고,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보다 더 비참한 느낌, 즉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고 배척하고 심지어 박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카사노바는 저술 활동, 특히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 주리라 잔뜩 기대했던 일종의 공상과학소설(줄 베른의 <지저 여행>의 선구로 일컬어지는) Icosameron에서 큰 실패를 맛보았다.
더구나 발드스타인 백작이 성을 비우는 동안에는, 백작 밑에서 성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카사노바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나타내기 일쑤였다. 게오르그 펠드키르슈너(Georg Feldkirchner)가 선봉이었는데, 그는 특히 카사노바가 스스로를 신사로 자처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카사노바를 괴롭히고자 했다. 펠드키르슈너를 비롯한 백작의 수하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 나이 지긋한 사서를 모욕하고 괴롭혔다. 그들은 심지어 카사노바가 집필, 출간한 책에 실려 있는 카사노바의 초상화를 찢어내 성의 화장실에 걸어 놓기도 했다.
펠드키르슈너를 필두로 한 그들의 그런 행태는 발드스타인 백작이 성으로 돌아오면 중단되었지만, 카사노바는 작성해 놓고 보내지 못한 편지 에서 성불능 상태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성불능, (설혹 그것이 자신의 무기력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적인 표현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로 카사노바로서는 견디기 힘든 증상이었다. 그는 결국 오늘날 의학적으로 우울증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빠져들었다. 치유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카사노바는 1790년부터 자서전 Histoire de ma vie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를 돌이켜보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회상으로의 여행'(jouir par reminiscence)을 작정했던 것이다. 1792년에 초고가 완성되었다. 카사노바는 그것을 자신의 극소수 친구들에게 보여주었고, 계속 집필, 수정, 보완을 하고 기억을 되살리고 또 집필하고.....이렇게 했다. 그의 자서전 집필은 말하자면, 살 맛이 통 나지 않는 둑스에서의 자신의 생활을 사뭇 분방하고 파란만장했던 과거 자신의 생활로 머리 속에서나마 대체하는 행동이었다.
카사노바는 어떤 의미에서 자서전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의 자서전은 베네치아로 돌아왔던 1774년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 이후로 카사노바로서는 기억하기 싫은 일이 계속 이어졌었다. 과거를 돌이켜보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일들이었고, 결국 카사노바는 1774년 이후의 자신의 인생 행로 전체를 자서전에서 공란으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1797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변변한 저항 없이 나폴레옹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1798년 4월에 카사노바가 비뇨기관의 감염으로 발병하지 않았다면, 카사노바는 베네치아로 돌아가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침대에서 자신의 자서전 수고를 외조카(nephew-in-law) 카를로 안지오리니(Carlo Angiolini)에게 건네주었다. 카사노바는 1798년 6월 4일에 둑스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리그네 공작(Prince de Ligne)에 따르면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나는 철학자로서 살아오다가, 기독교인으로서 죽는다."

200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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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mh****
영웅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제가 아는건 한가지뿐.....
총 부인이 38명인가? 58명인가?
그정도였죠....
하지만 이남자도 결국 매독으로 죽었음...-_-
(바람둥이다운 죽음인가....)

200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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