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역사의 희나리’와 나경원·전두환·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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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3.21. 오전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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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편집인

가수 구창모씨가 1985년에 발표해 크게 히트한 ‘희나리’는 ‘덜 마른 장작’이란 순수 우리말에서 제목을 따왔다. 덜 마른 장작은 불길이 쉽게 타오르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불씨가 남는다. 그런 희나리 장작처럼 사랑이 끝난 뒤에도 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아련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노랫말에 담았다. 이것이 ‘사랑의 희나리’라면, 요즘에는 ‘사건의 희나리’를 많이 목도한다. 과거에 완전히 타지 못하고 방치돼 있던 사건들이 하나둘씩 재점화되는 광경을 말이다.
김학의 사건, 장자연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권력형 성폭력 의혹의 악취가 진동하는 사건이었는데도 당시 검찰과 경찰은 서둘러 물을 끼얹어 불을 꺼버렸다. 하지만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권력층의 일탈, 봐주기 부실수사, 힘 있는 자들의 유착 등 음습한 단어들의 연기가 계속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제 진상규명과 단죄의 날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 진실은 아무리 땅에 암매장해도 언젠가는 두꺼운 지각을 뚫고 땅 위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는 철칙을 새삼 깨닫는다.
희나리는 또 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반민특위 발언, 전두환 전 대통령의 광주 법정 출두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희나리’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 제때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두고두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우리 곁을 맴돈다. 불완전연소한 역사에서 피어나는 매캐한 연기는 국민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관련자들의 아픈 상처를 들쑤신다.
해방 직후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단순히 친일파를 단죄하는 데 뜻이 있지 않았다. 무너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토대를 닦는 중차대한 과업이었다.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의 책동은 집요했다.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자는 빨갱이”라는 선전선동은 그들의 최대 무기였다. 심지어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법정에 선 피고인 중에는 “나는 애국자다. 내가 풀려나는 날 빨갱이 회색분자를 모조리 토벌하겠다”고 날뛴 자도 있었다. 나경원 의원은 이런 논리의 충실한 계승자다.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분열했다”는 해괴한 논리는, 어법은 다르지만 친일파들의 정서와 정확히 포개진다.
반민특위의 좌절이 두고두고 안타까운 것은 친일 세력에 대한 면죄부 부여와 사회정의의 붕괴만은 아니다. 친일 세력이 한국의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들의 후예는 지금도 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주류 세력이다. 나 의원의 조상이 친일파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그의 핏줄 깊은 속에는 친일과 접맥된 사회 기득권층의 정서가 맥맥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자위대 기념식 행사 참석, 친일파 재산환수법 결사반대 등 그의 수많은 친일적 행적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직접 반민특위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이 정부의 모든 사회개혁 노력을 “좌파 포퓰리즘” “좌파 홍위병” 따위로 싸잡아 매도한다. 반민특위 시절 ‘빨갱이’ 주장의 완전 판박이다. 그는 대표적인 공안검사 출신이다.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몸 바친 사람들을 잡아 가두던 공안검사의 이력은 따지고 보면 항일 민족운동 애국지사들을 잡아 가두던 일제 관헌과 잇닿아 있다. 그런데도 황 대표는 자신의 경력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좌파 딱지 놀이’에 여념이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광주 법정 출두 광경은 희나리 역사 비극의 정점이다. 광주 학살 39년 만에 광주 법정에 선 그는 한마디 사죄도 없이 변호인을 통해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하다 만’ 역사 바로세우기, 섣부른 사면, 당사자의 반성도 없는 용서와 화해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웅변한다.
이런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최근 들어 황교안 대표, 나경원 원내대표 등 자유한국당 사람들은 박 전 대통령의 사면론을 일제히 꺼내기 시작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가끔은 박 전 대통령을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용서와 화해는 당사자가 고개를 떨구고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비로소 출발한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반성하고 국민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정황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목을 뻣뻣이 곧추세우고, 그 유명한 레이저 눈빛으로 법과 역사를 노려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물에 젖은 장작은 남겨놓지 말아야 하고, 역사는 청산할 때 확실히 청산해야 한다. 역사의 희나리를 남기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는 요즘이다.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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