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영, 녹색으로 바위치기] IMF 키드의 엔딩은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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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1.23. 오후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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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영 ㅣ 녹색당 미세먼지 기후변화 대책위원장

1997년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나라 망하는 줄 알았다. 교복 물려 입기, 아나바다 운동이 시작됐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를 외우고 다녔다. 이듬해 나도 동네 언니의 헌 교복을 입고 중학교 입학식을 치렀다. 지금 떠올리면 포대처럼 큰 치마에 폭 싸인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지만, 그때는 조금 위축됐더랬다. 낡은 교복을 입은 친구들과 나는 어느 교복 브랜드가 스타일이 좋다더라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부모님과 친척들은 금을 모았다.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쳤으니,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다 커서야 헤아려지는 것이 있고, 나는 종종 그때를 생각한다. 그때 성장기를 보낸 지금 청년들에게도 아이엠에프는 아픈 단어다. 그때 교복을 만들었던 미싱사들과 작은 교복가게나 외주 공장의 사장들은 직장을 잃고도 남 탓을 못 했겠구나, 딸들에게 낡은 교복을 입혔겠구나, 그때 그 운동을 널리 알렸던 ‘사회지도층’과 의사 결정을 했던 그들의 딸들은 아마 새 교복을 입고 푸른 미래를 꿈꿨을 텐데. 그런 내용이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 나온다지. 외환위기 때 실제 망한 것은 나라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2020년 기후위기 시대다. 과학자, 진보 지식인들이 기후재앙, 기후위기를 경고한 지 수년째. 위기에 편승해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차량총량제 없이 마냥 전기차를 늘리는 정부와 우리나라 석탄 발전을 줄인다며 국외 석탄 투자를 늘리는 자본들)이 넘쳐나고, 위기를 이용해 나라를 바꾸려는 자들(극일한다며 산업안전보건법과 주52시간제를 건드리고, 석탄 대신 핵발전이 필요하다고 선동하는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웃고 있다. 바닥을 드러내는 탄소 예산, 위기를 은폐하려는 관료, 망해가는 자영업자, 이익을 가져가는 소수의 기업, 위기의 본질에 입 닫는 언론. 벌써 움직임이 빤히 보인다.

이쯤 되면 클리셰(틀에 박힌 것)인데, 또 어김없이 위기를 감지해 뛰어다니는 사람이 나온다. 나 또한 ‘기후위기에 불평등을 깨부술 사회 대개혁이 필요하다!’고 전국을 다니며 강연하고 있다. 하지만 영웅이 아닌 것이 문제. 청중들의 눈을 보며 희망이 반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늘 무너져내린다. 거대한 지구적 위기를 누구의 희생으로 막게 될지, 아니 막을 수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다. 외환위기 후 찾아온 각자도생 시대에, 아나바다하며 버틸 힘이 남은 사람이 많지 않다. 결국 ‘기후 우울증’을 얻었고 하루 수 알의 약을 삼키면서 기댈 곳을 찾는다. 여기서 우울하게 끝나면 <국가 부도의 날> 결말, 외환위기 엔딩일 텐데, 반전은 이제부터다.

혼자가 아니다. 일회성으로 끝날 것으로 보였던 ‘기후위기 비상행동’의 대규모 집회가 총선을 앞둔 3월14일 전국 규모로 다시 열린다는 소식이다. 또 며칠 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180여명의 시민이 기후위기 비상행동 기후학교에 등록해 1박2일 동안 활동가 교육을 받았다. 사전에도 안 나오는 기후활동가가 되겠다며 지방에서 온 청소년들이 눈에 띄었다. 이 사람들이 함께 위기를 막는 동료 시민이 될 것이다.

동료를 만든 후에도 쉬운 전개는 없을 것이다. 분명히 정부는 그때처럼 위기를 인정하지 않을 테고, 기업들은 위기를 이용해 돈 벌 궁리만 할 것이다. 이미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받은 24조원의 사업 외에도 총선 때 수많은 토건 공약이 제안될 것이고, 기후위기는 더욱더 가속화할 것이다. 빨대 안 쓰고, 비닐과 플라스틱을 줄이려고 애쓰는 시민들도 당장에 부동산값과 각자도생을 위해 그 공약을 지지할 것이다. 위기는 우리를 갑자기 덮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엠에프 키드, 청년 세대의 엔딩은 분명 다를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방파제를 만들 줄 안다. 우리 세대는 지금의 위기를 낳고 이용하는 자들과 치열하게 싸워, 마침내 기후위기를 막고, 아이엠에프와 약속한 국내총생산(GDP)을 폐기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엔딩을 쓸 것이다. 2020년이다.

*그동안 ‘고은영, 녹색으로 바위치기’를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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