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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지역감정 왜 있는건가요?
아직 고등학생이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서

우리나라 지역감정에 대해 잘 몰라요..

뭐 저는 40대 이상분들은 옛날 기억에 지역감정이 어느정도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저희 삼촌이 50대 이신데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군대에서 다구리 엄청 당했다고 이런 이야기도 들은적있어요.)

근데 20대 30대초중반 분들도 sns보면 이런 지역감정 기사의 댓글에서 엄청 싸우던데

왜 그러는 걸까요??

그리고 (어느 특정 지역) 사람들은 다 ××같은 사람들이야 이런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부분은 매우 이해를 할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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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비공개
작성일2020.01.21 조회수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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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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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신 열심답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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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14위, 세계사 30위, 철학, 심리철학 2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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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역이나 텃새가 심합니다.

도시 사람은... 촌 사람 무시하고.....

경상도는 전라도를 갈구고....

전라도에선 경상도를 차별하죠.

제주도에 가면~ 육지 것들 경멸을 해요. ㅎㅎ

코 딱지 만한 나라에서.... 이렇게 분열 정신이 강하니~

한국이 잘 될수가 없는 거죠.

강대국이나 큰 대국의 사람들을 만나보세요.

정말 호탕하고... 성격 좋고.... 아량과 포용력이 느껴진답니다.^^

나라가 작으면~ 소견도 좁쌀 만하게 작습니다.

알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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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돼지박사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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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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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서비스업

#한국형우주관 #우주계산식 #김인호돼지박사저서

사람과 그룹, 철학, 심리철학 99위, 천문우주학 6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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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하는 일과 오른손 하는 일 달라서 그리된다네요

협력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말입니다

알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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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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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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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40위, 정당, 사회단체 55위, 신화, 전설 22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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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배경이나 이유들이 있습니다.

미국을 예로, 다양한 이민집단간에 비슷한 갈등이 존재합니다. 아일랜드 촌놈과 같은 특정 인식이 존재합니다.

독일도 남부 촌좀이나 남부 돼지 같이 지역갈등이나 감정이 상당합니다. 유럽쪽은 남쪽의 지중해성 기후로 농작물 작황이 좋아서 대부분 남쪽은 작물과 관련한 산업이, 북쪽은 냉대기후로 산업이 발전해서 도시화가 잘되어 있습니다.

지역감정이 제일 큰 곳이 대표적으로 중국입니다. 중국은 아애 언어가 소통이 안될정도록 방언이 심해서

대놓고 꽌시라고 인연을 표방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역항우회 같은 단체들이 발달이 잘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외적인 요인이 상당합니다. 과거 삼국시대와 같이 역사적 배경도 있고, 조선시대에도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붕당정치 같이 파벌싸움이 워낙 심해서..)

근대에는 결정적으로 친일파와 독재라는 정치적 부분이 큰 배경입니다. 정치을 하려면 지지세력이 굳건해야합니다.

즉 니편 내편을 갈라야 통솔하기가 편합니다. 분배는 평등하면 가치가 떨어집니다. 특별하고 싶은 심리, 피라미드 구조에서 다수인 하부구조가 반발하면 사회가 불안정해 집니다. 가장 좋은 통치수단이 하부집단을 가르는 것입니다, 서로 충성경쟁을 시키는거죠.

일제시대부터, 독재까지 지역적으로 경상도라고 하는 지역을 편애하고 (우리가 남이가,, 유명한 명언이 있죠) 차별 대우함으로서 지지기반을 공고하기 유지하고, 하부계층의 단결요소을 차단함으로 특별한 지위을 유지하는데 유리합니다.

과거에 정책적으로 갈등을 조장했습니다. (전대갈의 3S 정책과 같이 우민화 사업의 일환이었죠)

이러한 인식을 세대가 완전이 바뀌어야 조금씩 완화됩니다. 인식이나 저변에 기반의식화 되기 떄문에 위험하고 잘 안바뀝니다.

(체감이 되어 인식으로 정착되어 있기 떄문이 큽니다. )

알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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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답변
조선왕조실록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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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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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개소리 주작질입니다

전라도 지역감정 관련 검색어 넣고

한시간만 검색해봐도 여러분은 놀라운

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조작을 하고 다니는지

아디를 돌려쓰며 기생충처럼 살아가는지

그들의 일상이 보입니다

좌표 찍는 방법은 특정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첨부해서 자기들끼리 약속된

단어(예컨대 전라도 지역감정, 차별, 뒤통수 등)로

지역비하 글과 시궁창 답글을 올립니다

아니면 특정 문구가 들어가는 문장을

써서 벌레들이 냄새맡고 오는 식입니다

티 안나게 하려고 한두개 답변은 특정지역에

편견을 갖지 마라고 훈수를 두고

나머지 답변은 쓰레기 답글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목적달성이 됬다싶으면 답변 채택하고

더 이상 답글을 못달게 막아버립니다

이 자들이 하는 짓은 왜구 밀정들 저리 가랍니다

인간 쓰레기가 있다면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 신채호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베 노부유키 (일제 마지막 총독) :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찿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략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 ​동서고금 세계문명 발상지는 기름진 평야의 농경사회 잉여생산물을 기반으로 한다

스페인 프랑스 그리스 로마 등 온화한 평야지가 유럽문명의 중심이고 산악지역은 미개하다

오늘날에도 문명발상지역은 자부심으로 자유분방하며 산간지역은 야만성을 숨기기 위해 형식적인 법규 예의를 중시하고 동양도 마찬가지다

정통성 없는 친일독재 트리오가 장기독재를 하려고 식민사관과 영남우월주의를 섞어서 역사왜곡을 일제 못지않게 했다

조선왕조 주류인 충청 호남을 교묘하게 갈등(논산일부 금산 충남편입 등) 구조로 바꾸고 비주류 영남을 착시효과로 집중 조명하니 조선이 약하고 부정적인 나라가 되버렸다

조선왕조실록 번역은 북한보다 늦게 90년대 후반에 하고 2007년에야 인터넷

등재되서 그동안 일반인들은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징비록 난중일기도 입맛대로 발췌해 정권유지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정보화시대 똑똑한 국민이 더이상 속지않으니 일베 토착왜구들도 조선왕조실록 보고 반성하기 바랍니다

● 친일독재가 저지른 역사왜곡 놀랍고 역사 바로세우기 시급하다

예컨대 임진왜란은 난중일기(1962년), 징비록(1969년)을 국보지정하고 영남 위주로만 발췌해 반역도 빼고 호남의 활약은 축소한다

비호남 인물위주로 임난을 조명하고 쿠데타를 나라 구한 구국의 결단이며 독재자를 영웅처럼 세뇌시킨다

객관적 조선왕조실록은 1972년에 지정후 북한보다 한참 늦게 1994년 번역 2007년에야 인터넷 등재된다 국보, 보물, 독립유공자도 조선사편수회 출신 포함된 위원들이 영남에 집중시켜 당에 부역한 신라 중심 식민사관을 강화한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친일파》

경상도529명(1위), 전라도285명(7위)

서울: 480

경기: 321

강원: 127

경북: 221 경남: 308

전북: 123 전남: 162

충북: 113 충남: 216

황해: 111

평북: 259 평남: 254

함북: 149 함남: 191

* 총 4389명 중 해외 및 미상 제외

..김구가 활동한 동학부터 1909년 일제의 남한대토벌 의병까지 희생된 왕조주류 충청 전라 수십만은 독립유공자가 아니다 대륙병참기지로 경부 경의축이 개발되면서 소외됬던 영남과 서북이 친일파가 많다

최근 국가보훈처가 일제강점기 수형자 전수 조사한 결과만 봐도 호남이 절반을 넘는데 독립유공자 지정은 영남이 월등한 것은 친일독재 왜곡의 결과물이다

https://www.minjok.or.kr/archives/102187 (관련 기사)

● 조선시대 관료를 단지 본관별 과거급제 숫자로

비교하는 것은 눈속임이다.

과거급제자 대부분은 하위직에 머무르거나 보직을 받지못한 경우도 많고 고위직과 중요 보직은 대부분 명문가 출신이 많다

조선의 명문가는 건국과 국난에 공을 세운 평야지대 호남 호서 가문들로 왕조전성기를 만들었고 후손들도 대대로 중용된다

정조가 언급한 '연리광김'(연안이씨, 광산김씨)이란 조선시대 대표적인 양반가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벼슬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고 벼슬 중에서도 대제학 등 문형이 많이 나오고 그 후손들 중에서 역적이나 간신 따위가 없어야 했다

광산 김씨와 연안 이씨는 조선왕조 500년간 각각 7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다.

특히 이들 집안은 3대에 걸쳐 연달아 대제학에 올라 ‘3대 대제학’ 문벌로도 명성을 떨쳤다.

또한 왕이나 왕비 등 척족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지 않은 집안이어야 했다

한사람의 특출한 인물을 배출했다고 하여 가장 빛나는 문벌가는 아닌 것이다

조선시대에 문형과 청백리가 많이 나오고 탐관오리가 없는 연안이씨와 문형을 많이

배출하고 예학에 밝은 광산김씨 이 두 집안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나라 본관별 정승판서를 보면, 인구 1위 김해김씨(450만)가 3명이고

2위 밀양박씨(310만)는 10명이다

반면 8위 광산김씨(93만)는 29명이고, 60위권 반남박씨(16만) 연안이씨(16만)는

30명이 훨씬 넘는다

궁금하면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관인별 검색해 고관들의 출신지와 가문을 검색하세요

조선의 주류는 왕조전성기 호남 호서 명문가문이 한양에 이주한 경우가 많고 영남은 상대적으로 적다

백제 패망후 신라 성씨로 형식적으로 개명한 가문들은 사실상 영남과 거리가 멀고 중앙집권도 낮은 수준이었다

'영남학파' '통일신라' 용어도 친일독재가 집권하면서

영남우월주의를 부각시키기 위해 현대에 만든 것이다

● 친일독재는 백제(호남) 역사 파괴한 일제 식민사관을 장기집권 전략으로 이용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07년 링크한 조선왕조실록으로 그동안 저지른 역사왜곡 반민족범죄가 다 드러났다

* 왕조기반 전라도에 태조의 태실을 안치하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7일 1393년]

태실을 완산부 진동현에 안치하고 승격시켜 진주로 삼다. 삼사 좌복야 권중화를 보내어 태실(胎室)을 완산부 진동현에 안치하고, 그 현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고, 명령하였다

※ 진동현(전북 금산, 쿠데타 후 충남편입)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1007_004 (조선왕조실록 해당기사)

* 왕조기반 전라도 중심으로 명산대천에 신위를 봉하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21일 1393년]

이조에서 경내(境內)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神)을 봉(封)하기를 청하니,

송악의 성황은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화령·안변·완산의 성황은 계국백(啓國伯)이라 하고,

지리산·무등산·금성산·계룡산·감악산·삼각산·백악의 여러 산과 진주의 성황(城隍)은 호국백(護國伯)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의 신이라...

※ 완산(전주), 지리산(남원), 무등산(광주), 금성산(나주)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1021_002 (조선왕조실록 해당기사)

《토착왜구 역사(조선 전기)》

● 경상도의 각 고을 촌락에 도적이 성행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 1월 6일 병신 6번째기사 1437년]

연사가 흉년이 들었으므로 백성들이 빈궁하여져서 중외(中外)에 도적이 흥행하였는데, 하삼도가 더욱 심하고 화적(火賊)이 가장 많아서 관가에서 이루 금할 수가 없었다.

경상도 감사가 아뢰기를,

"도내의 각 고을 촌락에 도적이 성행하여 인리(隣里)의 정장(正長)만 가지고는 사세를 잡기가 어려우니,

각기 동리 안의 하번 갑사 및 시위 별패, 한량, 공사(公私)의 천복(賤僕)들로서 패를 짓고,

또 패두(牌頭)를 정하여 통솔하게 하고, 인하여 그 호역(戶役)을 감면하고 두 번으로 나누어 밤마다 순찰하게 하여,

만일 능히 도적을 잡거나 화재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벼슬과 물건으로 상을 주고,

그 중에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도적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죄를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1006_006

● 전라도의 곡식 20여만 석을 조운하여 경상도로 날라 구제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 1월 30일 경신 2번째기사 1437년]

경상도·전라도의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요사이 들으니 대마도가 전혀 농업을 잃었고,

또 화재를 당하였으며, 게다가 병란의 근심이 있다고 하니 장래가 염려되어,...

그런데 지난 겨울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왜인으로서 사자(使者)라고 일컫는 자가 여러 번 이르렀는데,

매양 배 한 척에 왜인이 3, 40명 혹은 5, 60명이 타고 와서 내이포에 머물고 있는 자가 거의 천 명에 이르는데, 와서 바친 물건을 상고하여 보면 칼 두어 자루에 지나지 못하고, 사사로이 싸 가지고 온 물건은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하며, 있는 것도 역시 소금·미역 두어 섬에 불과하니, 그 형편이 기근을 견디지 못하여 우리에게 얻어먹으려고 온 것 같다.

그러나 왜노의 성질이 본래 완악(頑惡)하여,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마음이어서 그 꾀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무지한 백성들이 오랫동안 편안한 데에 습관이 되어, 눈앞의 이익만 탐하여 바닷가에 깊숙이 들어가 사는 자가 매우 많으니, 적이 혹시 졸지에 이른다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장수도 미처 구원하지 못할 것이니, 이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지금 각포의 병선과 소금 배로 전라도의 곡식 20여만 석을 조운하여 경상도로 나르는데, 만일 굶주린 왜인들이 알면 반드시 도둑질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1030_002

● 전라도의 양곡으로 백만 창생의 생명을 구제한다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 7월 10일 임진 1번째기사 1438년]

...병조 참판 신인손은 의논하기를,

"병진해 한재는 근래에 없던 바로서, 충청·경상도의 백성들이 오로지 국가의 구제에 은혜를 입어 겨우 생명을 보전하였던 것이니, 전라도에 비축했던 양곡을 충청도로 40여 만석을 옮기고, 경상도로 30여 만석을 옮겨서 백만 창생의 생명을 구제하였습니다.

정사년도 역시 풍년이 아니여서 백성들이 오히려 그 기근을 면치 못하였고, 금년은 화곡이 비록 무성하다고는 하오나, 여름부터 가을까지 흙비와 장마가 개이지 않았고, 또 풍재(風災)의 변이 있어 풍년을 기필할 수 없는 바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007010_001

● 상주에서 도적떼가 감옥과 관리를 습격한다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 3월 29일 임인 5번째기사 1471년]

경상도 관찰사 이서장과 경상도 병마 절도사 이극균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듣건대 상주의 경내에 도적떼 1백여 명이 촌의 민가를 공격하여 약탈하였으므로 본주의 관리가 체포하였는데,

그 무리 가운데 도망 중에 있는 자가 와서 옥을 겁략(劫掠)하였으나 본주의 관리들이 잡고자 하다가 잡지 못하고 목사 구치명이 도적들의 화살에 맞았다니,

내가 매우 놀라와하고 있다.

경 등이 같이 의논하여 체포하고 더 심하게 번지지 말도록 하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203029_005

● 영남 해안에서 넘어온 해적이 호남에 출몰한다

[성종실록 35권, 성종 4년 10월 23일 신사 3번째기사 1473년]

전라도 수군 절도사 민효간이 계달하기를,

"강진 만덕사의 중 혜휴 등 17인이 배를 타고 순천 내량포에 이르자, 도적 10여 사람이 배를 타고 푸른 옷을 입고 왜말을 쓰면서 칼을 뽑아 배 안에 뛰어들어와 혜휴 등 두 사람을 쳐서 죽이고, 재물을 전부 약탈하여 동남쪽 바다를 향하여 갔는데, 그 배는 거의 경상도 배와 비슷하였습니다."

하므로, 원상(院相)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정창손·신숙주·한명회·최항·홍윤성·조석문·김질이 의논하기를,

"순천·광양 등지의 해적이 왜인의 모양을 가장하고 남의 재물을 약탈하기에 전일 조금씩 잡았었는데,

이제 또 이와 같이 하니, 크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급하게 유시(諭示)를 내리시어 경상도·전라도의 감사·병사·수사로 하여금 같이 의논해 가지고 다방면으로 계책을 설정하여 끝까지 찾아서 잡도록 하되,

장영기를 잡았을 때 상주던 격례(格例)에 의하여 기어코 꼭 잡아야 할 것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410023_003

● 만호·수령의 기강해이로 왜인과 우리 백성이 섞여 산다

[성종실록 45권, 성종 5년 7월 27일 경진 5번째기사 1474년]

경상도 관찰사 김영유·좌도 병마 절도사 김순신·수군 절도사 이양동·우도 병마 절도사 박거겸·수군 절도사 이거인에게 하유하기를,

"이제 듣건대 삼포의 왜인이 집을 짓되 한계에 구애되지 않고 정수(定數)도 무시한다 하니,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두어 침점(侵占)이 더욱 많아지면 장차 만연될 폐단이 있을 것이다.

옛 제도로는 왜인의 집과 우리 백성이 섞여 있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만호·수령이 게을리하여 법대로 봉행(奉行)하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

경 등은 관할 수령·만호를 시켜 저들이 한계 밖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하고 우리 백성도 서로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여, 단절시켜서 후환을 막으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507027_005

● 삼포의 왜인이 우리 땅에 살면서 자손을 생장하여 우리 백성과 섞여 산다

[성종실록 79권, 성종 8년 4월 16일 계축 2번째기사 1477년]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대학연의》를 강하다가,...도승지 현석규가 아뢰기를,

"...근년에 고기를 낚는 왜인이 변방의 백성과 더불어 서로 치고 빼앗는 것이 있으며, 혹은 도적이 거짓 왜인의 복색을 하고 죽이고 약탈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전부터 흔히 있는 일이지마는, 근자에 더욱 심합니다.

전자에 남해(南海) 지경에서 두 번이나 변방 백성을 죽이었고, 지금 또 하동에서 변민(邊民)을 죽이었습니다...

국가가 승평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도이(島夷)의 난을 염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현석규가 말하기를,

"...세종조에 삼포 왜인을 60호만 머물게 했는데, 지금은 몇 호인지 알지 못하니, 왜환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검토관 성담년이 아뢰기를,

"삼포의 왜인이 오래 우리 땅에 살면서 자손을 생장하여 해마다 늘어나고 달로 더하여 우리 백성과 섞여 살고 있으니, 만일 싸움을 벌이어 흔단(釁端)을 만든다면,

이 무리가 우리의 허실을 아니 연해변의 고을이 반드시 그 해독을 받을 것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04016_002

● 경상도에서는 도적이 성행하여 밤낮으로 지붕에 올라가서 방비

[성종실록 128권, 성종 12년 4월 27일 신미 2번째기사 1481년]

정언 정광세가 경상도에 도적을 체포하는 영을 거듭 밝힐 것 등을 아뢰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정언 정광세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경상도에서는 도적이 성행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고, 밤낮으로 지붕에 올라가서 방비하는데, 날로 생활이 더욱 구차스러워지고, 인하여 그 생업을 잃어 그 폐해가 매우 적지 않다고 하니,

청컨대 도적을 체포하는

영을 거듭 밝히고, 유서(諭書)를 감사에게 내리도록 하소서."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204027_002

● 삼포에 사는 왜인이 연해지방에 드나들면서 약탈

[성종실록 281권, 성종 24년 8월 22일 갑신 1번째기사 1493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이 사조(辭朝) 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왜사선(倭使船)이 장차 이르게 되면 삼포에 사는 왜인이 몰래 큰 배를 보내어 바꾸어 타고 와서 포에 머무는 양식을 많이 받기를 꾀하니, 변장(邊將)이 비록 이를 알더라도 틈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적발하지 못합니다.

또 삼포에 사는 왜인은 연해지방에 드나들면서 몰래 약탈을 행하는데 그 형세가 금하기 어려우니,

신은 삼포에 순행할 때에 일을 주장하는 왜인을 불러서 말하기를,

‘연해 지방에 약탈하는 자를 변장이 너희들의 소위라고 의심하는데, 그것이 사실임은 알지 못하지만, 만약 너희들의 소위가 아니라면 너희들이 마땅히 유감이 있을 것이다.

장차 우리 나라 배에 표를 붙여서 구별해 알도록 할 것인데, 만약 너희들이 배에만 표를 붙이기 아니하면 적선과 더불어 분변하기 어렵다.

너희들은 대대로 삼포에 살아서 우리 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으므로, 너희 배에도 함께 표를 붙이면 피차가 의심이 없을 것이니, 너희들의 계책은 어떠한가?’

라고 이런 권사(權辭) 로써 여러 가지로 물어서 그 뜻을 알고자 하는데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영돈녕 이상과 의정부에 문의하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08022_001

● 제포 항거 왜인(恒居倭人) 들이 밭을 개간하여 산다

[성종실록 284권, 성종 24년 11월 5일 병신 1번째기사 1493년]

예조에서 아뢰기를,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의 계본 안에

‘수도(水島)는 웅천현과 7리 떨어져 있는데, 이에 앞서 제포에다 밭을 일구어 둔전으로 삼았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묵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항거 왜인(恒居倭人) 들이 밭을 개간하여 살고 있는데, 형세로 보아 경작하는 것을 금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자세히 살펴보건대,

수도(水島)의 둔전을 다시 묵히게 되었던 본래의 뜻은 아마도 우리 나라 백성들이 외딴 섬을 왕래하다가 혹 적에게 노략질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항거 왜인들이 제멋대로 점유하여 경작하니 매우 미편(未便)한데, 만약 금지하지 않으면 방자하게 굴면서 꺼리는 바가 없을 것이고, 장차 백성들의 전지(田地)를 빼앗아 차지할 것이니 끝내는 금지하여 막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혹 어떤 까닭이 있기 때문에 주거한다고 해도 사람 수가 점점 불어나면 몰래 산 섬을 차지하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니, 또한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하니, 영돈녕 이상과 의정부에 의논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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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도(本島)의 왜인이 혼인한다 칭탁하고 또한 많이 들어옵니다.'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 3월 25일 임진 1번째기사 1503년]

햇무리가 졌다.

조참(朝參)을 받고 경연에 납시었다.

시독관 정인인은 아뢰기를,

"신이 근일 선위사로 제포에 가보니, 왜인 호수가 날로 점차 불어나는데,

본도(本島)의 왜인이 혼인한다 칭탁하고 또한 많이 들어옵니다.

법을 엄하게 의논해서 밝히도록 하여 관방(關防)의 방비가 있게 하소서."

하고, 영사 이극균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제포 북쪽에 작은 고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만일 여기에 성을 쌓는다면 저들이 넘어오지 못할 것이니, 이 계책이 어떨까 합니다.

염려되는 것은 날이 갈수록 더 불어가는데 비록 쇄환(刷還)한다 해도 실지는 그렇게 되지 않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도주(島主) 및 삼포 왜인의 이득이 모두 우리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당초에 정한 수효가 있었는가?"

하자, 극균이 아뢰기를,

"조종 때부터 이미 일정한 수효가 있었는데, 지금은 몇 배만이 아닙니다."

하고, 인인은 아뢰기를,

"땅은 적은데 사람은 많고,

또 장사하기에도 불리하기 때문에 다투어 우리 땅으로 들어오는 것이니, 만일 금지 제한하지 않으면 사세가 앞으로 다 와서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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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도(本島)의 남녀가 삼포(부산 울산 창원)에 혼인하여 와서 사는 자도 퍽 많습니다.'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 3월 25일 임진 3번째기사 1503년]

전한 정인인이 서계(書契)하기를,

"신이 직접 제포의 왜인을 검찰하여 보니 호의 총수 4백, 인구 2천여 명으로 출생이 날마다 불어나니, 염포·부산포 역시 반드시 이럴 것입니다.

마치 종기가 뱃속에 맺히는 것과 같아 언젠가는 썩어 터질 것이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깁니다.

또 본도(本島)의 남녀가 삼포에 혼인하여 와서 사는 자도 퍽 많습니다.

옛 약조대로 쇄환(刷還)하지 않은 것도 벌써 국가로서 계책이 아닌데, 어찌 또한 새로 삼포에 들어오는 왜인을 받아야 합니까?

남자는 바다에 나가 해산물을 캐고, 여자는 여염에서 장사하여 모두들 넉넉하게 지내고 나아가서는 많은 일꾼을 두고 부유하게 사는 자까지 있으니, 정말 낙토(樂土)입니다.

본도(本島)는 토지가 모두 모래·자갈인 데다가 좁고 작으며, 비록 바다에서 나는 것이 있으나 가져다 팔 곳이 없는데, 따라서 인구는 날마다 번성하고 살 길은 적으니, 만일 금지하지 않는다면 누가 살기 어려운 곳을 굳이 지키고 낙토로 가지 않으려 하겠습니까?

더구나 도주의 일용이 거개 삼포에 의존하므로 반드시 유도하여 나가 살게 하되 모두 혼인하는 것으로 구실을 삼은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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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을 삼포(부산 울산 창원) 왜인(倭人)의 집에 비밀히 판다

[연산군일기 50권, 연산 9년 7월 29일 계사 3번째기사 1503년]

예조에서 아뢰기를,

"웅천 사람 마동·철동·김동·유몽·윤검정·박강·배후동·우돌동

등이,

각 고을에 사는 백성을 삼포 왜인(倭人)의 집에 비밀히 팔았습니다.

왜인들이 우리 강토에 와서 산 지 오래인데, 금하는 법이 허소하므로 구애없이 출입하여 우리 백성들과 섞여 거처하기 때문에, 인근의 유민들이 부탁을 받아 자녀들을 팔아 넘기는데 지금 드러난 것이 이러하니, 만일 다 찾아내기로 한다면 이 수효에 그치지 않으리라 합니다.

조관(朝官)을 보내서 찾아내고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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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간지역에서 떼강도들이 통행하는 길을 차단하여 약탈

[중종실록 5권, 중종 3년 3월 5일 임인 4번째기사 1508년]

충청·전라·경상도 등 관찰사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듣건대, 강도들이 충청도 황간·영동·옥천·연풍·괴산·청안과 전라도 무주·금산과 경상도 문경·상주·지례·금산·거창·산음 등지에서, 백주에 떼를 지어 통행하는 길을 차단하여 약탈하고, 마을에 공공연하게 다니면서 의복·양식·반찬·활·화살 등 물건을 탈취하며,

또 소를 겁탈해 내어 실어 가기도 하고 행인과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짊어지게 하며, 소는 잡아 먹고 민간의 여자들을 공공연하게 붙잡아 가고,

양반집 부녀들에게까지도 난행을 하려 든다고 한다.

그래서 도처의 사람들이 다 떨고 두려워하여 손님 대접하듯이 하고,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거나 뒤쫓아가 찾아서 체포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살해한 것이 전후 30여 명이 되며,

3개 도(道)에 출입하면서 산림에 의지하여 옮겨 다니기를 예사로 한다고 한다.

혹은 각 관청의 군기(軍器)까지 가져다 쓰기도 하고, 혹은 빼앗아 불사르기도 하여, 조령 등지는 길이 막혀 다닐 수가 없게 되어 명령을 받은 조신(朝臣)도 지나기가 어렵다고 하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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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인과 아비, 형이라 부르며

국가 사정을 누설하는 백성

[중종실록 8권, 중종 4년 4월 2일 계해 4번째기사 1509년]

김근사가 왜노에 대한 방책으로 4조를 서계하니 유순·김수동 등이 의논하다

김근사가 4조를 서계(書契)하여,

"첫째, 국가에서 삼포의 왜리(倭里)에 제한 구역을 정하여 경계를 넘어 출입할 수 없게 한 것은 안팎의 구분을 엄히 하여 난잡히 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방자하게 출입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습니다...

둘째, 웅천현 보평역은 제포 북쪽 3리쯤에 있는데, 그 곳 인민과 역리들이 왜인과 결호하여, 수양(收養)이라고 칭하여 서로 왕래하면서 아비라 부르고 형이라 일컬으니, 상고(商賈)로서 장사하는 자나 와서 파는 왜인들이 모두 역인(驛人)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피차 사이에 끼여 정을 통해 주고 물품을 무역하며, 국가의 사정을 누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모두 이런 사람들의 소위입니다.

대체로 웅천 성 밑에 사는 인민은 모두 그러한데, 역인이 더욱 심합니다.

.....

네째, 부산포의 왜인들은 본읍 인민에게서 농기와 경우(耕牛)를 매입하여 동평현 땅에서 무리와 섞여 살면서 경작하는데, 경작을 다투어 싸움질을 매우 하는 자까지 있으니, 몹시 불가합니다.

청컨대 통절히 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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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의 인심과 풍속이 퇴폐하기 형언할 수 없다

[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 4월 1일 기사 1번째기사 1518년]

동지중추부사 김안국이 아뢰기를,

"신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그 도의 인심과 풍속을 보니 퇴폐하기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풍속을 변화시킴에 뜻을 두시므로,

신이 그 지극하신 의도를 본받아 완악한 풍속을 변혁하고자 하는데, 가만히 그 방법을 생각해보니 옛 사람의 책 중에서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을 택하여 거기에 언해를 붙여 도내에 반포하여 가르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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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부는 곧 우리 태조의 왕실이 발상한 지역

[중종실록 55권, 중종 20년 8월 1일 무자 4번째기사 1525년]

전라도 관찰사 홍경림이, 도내 전주부에 사는 품관 전 현령 정고석 등 50여 인의 등장(等狀)을 치계했다.

그 대략에,

"본부(本府)는 다른 주부와 같은 데가 아니고 곧 우리 태조의 왕실이 발상한 지역인데,

지형이 남쪽은 높고 북쪽은 허하여 바닥 기운이 분산하겠기 때문에,

진산(鎭山) 이름을 건지산이라 하고 또한 제방을 쌓고서 이름을 덕진이라 하였으며, 절을 창건하여 건흥사라 하고,

또한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산을 가련산이라 이름한 것이 모두 《여지승람》에 실려 있습니다.

나무꾼을 금단하고 경작을 금단한 지 그 유래가 이미 오랜데, 폐조(廢朝) 때에 총애받던 녹주(綠珠)가, 건지산 안팎 계곡과 덕진제의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개간한 것을 반정 후에 예전처럼 도로 묵혔습니다.

그런데 뒷날 청천 부원군 유순정이 공신전 준례에 의해 떼어받아 개간하여 왕실 고장의 진산이 마침내 빨갛게 되었으므로 온 고을 민중들이 팔을 걷어올리며 통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전처럼 경작을 금단하고 도로 묵혀 왕실이 발상한 고장을 가꾸게 하소서."

하였는데, 아뢴 말을 그대로 윤허하고, 유순정의 공신전은 해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보충해 주도록 하였다.

* 폐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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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떼도둑 발생했는데

감사와 병사가 복지부동한다

[중종실록 77권, 중종 29년 3월 28일 갑오 2번째기사 1534년]

전교하였다.

"경상도에는 도둑이 떼로 일어나 고을을 횡행하며 멋대로 살인과 약탈을 하고 있으니 지극히 놀랍다.

일체 잡아내어 민간의 폐해를 제거하라는 내용으로 이미 하서했는데도,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들이 조금도 놀래어 움직이지 않은 채 여사로 여기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하나도 잡아내지 않았으니, 이를 들어 추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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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속교화는 중요한 책무다

[중종실록 100권, 중종 38년 3월 10일 갑인 2번째기사 1543년]

경상도 관찰사 임백령의 장계에,

"...신은 즉시 도내 좌·우도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 각 고을 각포에 행이(行移)하여 알렸습니다.

이번에 영해 부사 김한일의 첩정(牒呈)에 ‘양민의 여인 내은비가 간부(姦夫) 정인련과 공모하여 본 남편 김망련을 살해한 것을 승복하였다.’ 하였습니다.

전번에 의성에 사는 윤승손은 자식으로서 아비를 살해하였고,

창원에 사는 오마지는 노비로서 주인을 살해하였는데, 일찍이 이 일을 가지고 치계하였습니다.

이번에 내은비가 또 아내로서 남편을 살해하여 세 번의 큰 변이 계속해서 발생했는데 모두 신이 부임한 후의 일입니다.

신은 본디 용렬하고 보잘것없으면서 방백의 막중한 임무에 대죄하고 있습니다.

기한 내에 문서를 보고하는 등의 일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있는데, 삼강의 큰 변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니 신은 결코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시켜 야박한 풍속을 후하게 하고 교화를 펴는 직임을 소중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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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는 전역이 모두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

[명종실록 12권, 명종 6년 12월 3일 병진 5번째기사 1551년]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도둑이 들끓지 않는 곳이 없으나 장단에 집결하고 있는 도적들이 더욱 포악해서 대낮에 무리를 지어 공공연히 재물을 약탈하며 아리따운 처녀는 집안까지 쫓아와서 색출해 가는데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는 데 마전·적성·우봉 등지의 백성들이 모두 그 침해를 입고 있습니다.

그러니 체포할 대책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데, 시임(時任) 수령들은 모두 음관(蔭官)이라서 속수무책으로 이 무리들이 관사에서 유숙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습니다. 사기(事機)가 매우 중대하니, 수령의 교체에 따르는 영송(迎送)의 폐단은 생각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 4읍의 수령은 재능과 지혜가 있고 일에 숙달한 무신을 보내어 기필코 모조리 잡도록 하소서.

그리고 경상도는 전역이 모두 도둑의 소굴이 되어 길이 막혀서 수령이 임무를 띠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병마(兵馬)를 동원하여 앞을 인도한 후에 갑니다.

조정의 중신과 더불어 좋은 방책을 널리 강구하여 특별히 조처하여 잡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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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와 영천에는 도적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

[명종실록 14권, 명종 8년 1월 21일 무술 1번째기사 1553년]

권철이 회계하기를,

"경상도는 지난해 7∼8월에 심한 가뭄으로 곡식이 패지도 못해 거두어들일 것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은 기근을 견디지 못하여 유리한 자가 많고, 쌀값은 매우 비쌉니다.

지난 가을부터 지금까지 눈이 전혀 내리지 않아 샘과 못이 다 말랐으며, 날씨가 매우 추워 양맥(兩麥)이 냉해를 입어 전혀 소생할 기미가 없으니, 금년 농사가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소신이 본 바로는 일로(一路)가 다 이러합니다.

경주와 영천 지경에는 도적의 무리가 날뛰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므로 행상들이 다니지 못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권철이 아뢴 것을 보니, 백성들의 기근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구제해야 하겠는가.

농사의 피해가 더욱 심한 각 고을은 전년의 공물을 감면해 주고 온갖 정성을 다해 구제할 일을 호조에 이르라.

영천 등 지방에서는 도적이 날뛰어 사람을 해친다 하니, 조치하여 잡을 일을 역시 해당 관사에 이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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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 백성들은 보리 뿌리를 캐어 먹기도 하고 목화씨를 빻아 먹기도 한다

[명종실록 16권, 명종 9년 2월 18일 기축 1번째기사 1554년]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영경연사 윤개가 아뢰기를,

"경기·경상 두 도에 우곡(雨穀)의 이변이 있었는데 재이(災異)가 막심하여 염려스럽고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상의 우근(憂勤)하심이 지극한데도 천의(天意)를 돌릴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신이 용렬하여 성상의 뜻을 받들지 못해서 그런 듯합니다.

제왕의 덕은 하늘과 무간(無間)한 것이니 지성스런 덕은 잠깐 사이도 늦춰서는 안 되며 경외하는 마음은 편히 쉬는 사이에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히는 것이므로 항상 유념해서 호령을 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랫사람의 말을 모름지기 관대하게 받이들이시되 말이 비록 선하지 않더라도 죄주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가언(嘉言)이 숨겨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영남의 백성들은 보리 뿌리를 캐어 먹기도 하고 목화씨를 빻아 먹기도 한다는데, 돌림병이라는 것도 역시 굶주림의 소치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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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지방에 사나운 무뢰배 50여인 작당하여 한 마을 점거

[명종실록 23권, 명종 12년 11월 24일 계유 1번째기사 1557년 명]

간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들으니,

경상도 예천 지방에 사나운 무뢰배 50여인이 작당하여 추호(酋豪)가 되어 한 마을에 웅거하였고 그들에게 협종한 자가 무려 1백여 인이나 되는데, 이웃 고을 사족(士族)들의 서자로서 애비의 첩을 상피붙거나【백거추의 아들.】 형의 첩을 훔치거나【황이의 동생.】하여 몸을 피해 떠도는 비할 데 없이 사납고 날쌘 자들이 모두 그들과 한 동아리가 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또 타도의 모질고 교활한 자들과 통하여 세력을 서로 규합하고 있으니 이 사태가 어떻게 될지 측량할 수 없으며, 민가를 약탈하고 수령을 위협하는데도 감히 묻지도 못하니 지금 이 때를 놓치고 처치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엄청나게 불어나서 도모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경관(京官)을 보내 쫓아가 잡게 한다면 형편이 반드시 절박해질 것이고 소요도 심해질 것이니, 차라리 본군에서 재주와 지혜있는 사람을 가려서 그 완급을 때에 따라 조정하여, 뉘우치고 저절로 그치게 하거나 다방면으로 잡아 가두어 폐단 없이 조치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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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에서 대장과 대치한 군졸들의 일은 나라를 반역하려는 조짐

[선조수정실록 12권, 선조 11년 5월 1일 신해 1번째기사 1578년 명]

다시 대사간으로 이이를 부르자 이이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만일 오늘날에 외적의 침략을 받게 된다면 비록 1만 명이 못되는 기병이 온다 하더라도 어느 사람이 감히 막아내겠습니까.

비단 외적의 침략만이 걱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고 재정은 바닥이 나서 그 형세가 반드시 도적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영남에서 진을 치고 대장과 대치한 군졸들의 일로 보더라도 이는 나라를 반역하려는 조짐입니다.

한 곳에서 진을 치고 대치했다가 다시 흩어진 정도는 전하께서 붙잡아다가 처벌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만일 곳곳에 진을 치고 대치하면서 흩어지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신의 말은 모두 실지의 사실을 근거한 것인데 이것이 과연 지나친 말이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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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타의 도에서는 많은 인물을 얻을 수 없지만, 호남은 인재의 부고이다

[선조수정실록 20권, 선조 19년 10월 1일 임술 4번째기사 1586년]

주학 제독관으로 제수된 조헌이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 ④

"...지금 인재를 양성하면 그가 곧 훗날 큰 재목이 될 것이 분명한데 양성하는 데 있어 구비하지 못한 여건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교도하는 인물이 적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광문관(廣文官)을 주의하는 일에 있어 전조(銓曹)에서 극진히 살피지 못하고, 언제나 서리의 손에 맡김으로써 그 지방의 기름지고 척박한 것과 뇌물의 많고 적은 것에 따라 제수시키고 있습니다...

이이가 이조 판서가 되어 향선(鄕選)을 천거하는 규례를 만들어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자는 천거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타의 도에서는 많은 인물을 얻을 수는 없지만, 호남은 인재의 부고이고 아울러 선배들에게서 친히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있어서, 하나의 행실을 취할 만하거나 하나의 경서를 가르칠 만한 인물이 없지 않았습니다.

신이 정철의 막하(幕下)에 있을 때 서로 마음을 다하여 찾아내어 50여 명의 인재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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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왜구 역사 (임진왜란)》

●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20번째기사 1592년]

전라 수군 절도사 이순신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 앞 나루에서 왜병을 격파하였다

...운룡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하니,

원균이 그 계책을 따라 율포 만호 이영남을 보내 순신에게 가서 청하게 하였다.

이때 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앞 바다에 모으고 적이 이르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 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하니 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5001_020

● "경상도 사람들이 다 배반하였는데 사실인가?"

(임난 1592. 4. 13)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3일 임술 6번째기사 1592년]

...이괵이 아뢰기를,

"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

...상이 이르기를,

"윤두수가 어떻겠는가?"

하니, 괵이 이르기를,

"윤두수는 재주와 기량이 있으니 어찌 합당치 않겠습니까."

...괵이 아뢰기를,

"서울의 시장 사람들은 태연하게 옮기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 사람들이 다 배반하였는데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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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이 잇따라 왜병을 패배시켰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2번째기사 1592년]

순신이 본영에서 사량으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당포에서 적선을 만났다.

적장이 큰 군함을 타고 층루(層樓)에 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순신이 휘하 병력을 진격시켜 통전(筒箭)으로 집중 사격하게 하니 층루 위의 왜장이 먼저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졌는데 마침내 엄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얼마 있다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휘하의 수군을 모두 데리고 와서 회동하여 마침내 함께 당항포에 이르러 왜선을 만나 크게 싸웠다.

이때 또 선루 위의 적장을 쏘아 죽이고 그 수급의을 취했으며, 왜선 30척을 밀어부쳐 격파하니 적이 대패하여 육지로 올라 도망하였다.

또 영등포에서 싸워 모든 배를 나포하여 섬멸시키니 이로부터 수군의 명성이 크게 떨쳤다.

승리를 아뢰자 상으로 순신에게 자헌 대부를 가자(加資)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6001_002

● 영남은 도망, 호남은 근왕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8일 1592년]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치계하였다.

"...본도(本道)에 함락되어 패전한 뒤에 무너져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이 도망한 군사나 패전한 병졸만이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대소 인원들이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새나 짐승처럼 숨어 있으니 아무리 되풀이해서 알아듣도록 설득해도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호남은 지금 근왕(勤王)으로 인하여 도내가 텅 비었으니 만약 또 적의 침입을 받는다면 더욱 한심하게 될 것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6028_004

● 연해의 백성들이 머리를 깎고 왜복을 입고 왜적을 따라 도적질한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8일 1592년]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치계하였다...

"..왜국은 정수(征戍)나 요역(徭役)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이미 그들을 좋아하고 있는데 왜적이 또 민간에 명을 내려 회유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모두 왜적의 말을 믿어 항복하면 반드시 살고 싸우면 반드시 죽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연해의 무지한 백성들이 모두 머리를 깎고 의복도 바꾸어 입고서 왜적을 따라 곳곳에서 도적질하는데 왜적은 몇 명 안되고 절반이 배반한 백성들이니 매우 한심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6028_004

● 녹도 만호 정운이 앞장서서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8월 1일 1592년]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순신이 원균과 함께 수군을 총동원하여 진격하였으나 적이 군사를 거두고 전투에 응하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가 총을 쏘므로 수군이 육지로 오르지 못하고 빈 배 4백여 척만 태워버리고 퇴각하였다.

이때 녹도 만호 정운이 앞장서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순신이 애통해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8001_002

● '싸움에 임해서 굳게 물러나지 않을 사람을 원한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6일 1592년]

상이 행궁의 동헌에 나아가 호성감 이주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먼 길을 어렵게 왔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상이 이르기를,

"고경명의 군사는 어느 곳으로 갔는가?"

하니, 주가 아뢰기를,

"경명이 죽은 뒤에 익산에 사는 소욱에게 소속되었다고 합니다."

...주가 아뢰기를,

"전라도 사람은 모두 모장(謀將)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싸움에 임해서 굳게 물러나지 않을 사람 얻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8026_001

● 전라도만은 온전해 근왕하고 경성 탈환을 도모하고 있다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11일 정묘 6번째기사 1592년]

중국에서 군사를 내어 구원하려고 왜의 정세와 우리 나라의 형세를 조목으로 물었다.

비변사가 조목에 따라 진술하였는데, 그 문답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1. 문: 왜노의 분명한 수효는 얼마이며, 어떤 정세이고, 어디에 잠복하고 있는가?

답: 왜선이 처음 부산에 도착한 것은 4백여 척이었으며, 또 뒤따라 도착한 것이 7∼8백 척이다.

그들의 개미처럼 흩어지고 멧돼지처럼 내달아 7도(道)를 나누어 점거하고 있다.

1. 문: 왜선은 얼마나 되며, 현재 어느 하구(河口)에 정박하고 있는가?

평양에는 현재 얼마나 있으며 얼마나 파괴되었는가?

답: 왜선은 길을 나누어 전라도를 침범했는데 본도의 수사(水使) 이순신 등이 전후 일곱 차례 싸워서 4백여 척을 불태워 격파하였고, 목을 벤 자 이외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부지기수이다.

현재 해항(海港)에 정박하고 있는 것은 4∼5백 척이며, 우리 나라의 어선을 약탈한 평양에 남아 있는 적선은 겨우 수십 척이다...

1. 문: 본국에는 현재 병마(兵馬)가 얼마나 되며 어디에 주둔하고 있는가?

답: 적이 국내에 두루 흩어져서 각자 둔처(屯處)하고 있기 때문에 각도의 장관(將官)이 각기 수천 명씩 거느리고 본도(本道)를 지키고 있다.

오직 전라도만은 아직까지 온전하기 때문에 병사(兵使) 최원이 군사 4천 명을 거느리고 가을부터 근왕(勤王)하고 있는데 의병 3천 명과 함께 모두 경기의 강화부에 있으면서 경성의 탈환을 도모하고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11011_006

●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월 1일 1593년]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니 제독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다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행장(行長) 등이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긴 데다가 우리 나라 사람이 밖에 있는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하는가 의심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오직 여인들만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남자들 중에는 혹 여자 옷으로 변장하고 죽음을 면한 자도 있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1001_004

● 전라도 군사가 이번에는 특별히 죽기로써 싸우다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24일 1593년]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대개 오늘의 일은 천행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구원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여러 장수들의 성세가 서로 의지되었기 때문에 중국군이 이미 물러갔는데도 적들은 그 유무를 알 수가 없으므로 이튿날 다시 오지 않은 것이니 이 또한 천행입니다.

전라도 군사가 비록 정예라고는 하지만 경계를 넘으면 힘써 싸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죽기로써 싸웠으니...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2024_001

● 전라도의 군사가 마침내 큰 승리를 거두다

[선조실록 36권, 선조 26년 3월 7일 1593년]

숙녕관에서 이 제독을 만나 왜적과의 강화, 경성 수복 등을 논의하다

...상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군사가 겁많고 나약하기 이와 같으니 지금부터는 대인이 일체 군율에 따라 하시오."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태평한 지가 오래되어 전투에 익숙치 않으나 요사이 귀국의 군병을 보니 역시 싸움을 잘합니다.

전라도의 군사가 마침내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포상하여 인심을 권려하소서." 하였다.

【행주에서 승첩을 거둔 일을 가리킨 것이다.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3007_001

● 최경회는 의병장으로서 호남 한 도와 영남 우도 보존

[선조실록 36권, 선조 26년 3월 19일 1593년]

사헌부가 아뢰기를,

..."적이 물러나지를 않고 일로에 진을 연이어 치고 있으니...최경회는 의병장으로서 정예병을 이끌고 지례·거창 두 지역 사이의 요충 지대를 차단하였으니, 호남 한 도와 영남 우도가 여태 보존된 것은 모두 그의 힘입니다...

피차 가고 머무는 것이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니, 최경희를 남원 부사에서 체직하여 일이 안정될 때까지 그대로 의병을 거느리고 유방(留防)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3019_002

● '전라도의 관곡을 급히 운반하여 경상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소서'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21일 을사 7번째기사 1593년]

안집사 김늑이 치계하기를,

"경상도에서 토적들이 일어나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대낮에도 재물을 빼앗고 인명을 살상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는데 처음 일어났을 적에 소탕하지 않으면 뒤에 도모할 대책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본도의 기근이 날로 심해지고 질역(疾疫)이 끊이지 않아 쓰러져 있는 시체들이 즐비하여, 그 참혹한 정상을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모든 곡식의 종자 역시 전부 떨어져 전라도에서 수송해 올 곡식만을 날마다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전라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이문(移文)하여 그들로 하여금 본도의 관곡을 급히 운반하여 경상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4021_007

● 김해에는 촌민들이 모두 왜적에게 부역

[선조실록 38권, 선조 26년 5월 21일 1593년]

... 김해에는 촌민들이 모두 왜적에게 부역하여 영남의 크고 작은 도로에 모두 향도가 되어 있고,

향리인 김변호와 서자(書者)인 배인 등은 왜적의 장수가 되어 매번 분탕질할 때마다 반드시 앞잡이가 되니,

적중에 머물고 있는 백성들은 이들의 소행을 보고는 모두 왜복을 입고, 다시 도망쳐 나오려는 뜻이 없다고 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5021_002

● 전시 명령불복종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1593년]

한효순이 곽재우로 하여금 진주에 달려가 함께 지키게 하니,

곽재우가 따르지 않으면서..좌순찰사 김늑이 그를 꾸짖기를,

"그대가 대장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에 어쩌려는가."

하자, 곽재우가 말하기를,

"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아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빈이 즉시 곽재우에게 정진(鼎津)을 지키게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6001_003

● 주인 도망간 진주성 사수한 호남대장부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1593년]

고종후는 글을 잘하고 그 아버지의 풍도가 있었다... 아버지와 아우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고는 죽기로 맹세하고 종군하였다.

그는 남에게 준 서신에서, "어버이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살겠는가. 다만 분명하게 한 번 죽기를 요할 뿐이다." 하였다...

성이 장차 포위되려 할 때 김천일은 그의 온가족이 모두 죽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밖에 나가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따르지 않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6001_012

● 주인 도망간 진주성 사수한 호남대장부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1593년]

김천일은...이항에 사사(師事)하여 학문으로 명성이 있었으며...그러나 체질이 허약해 병이 많았는데, 군대 내에서 세월을 지내다 보니 고생으로 몸이 야위어 옷의 무게도 이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나 지기(志氣)가 견정(堅貞)하고,

충성이 분개하였다

그래서 뭇사람들로 하여금 적과 대치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우게 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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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 도망간 진주성 사수한 호남대장부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1593년]

최경회는 자는 선우로 능성에 살며 문과에 올랐는데...전란 초에 그는 집에서 거상(居喪) 중이었는데, 고경명을 이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전 임실 현감 임계영도 군사를 일으켰다.

최경회는 좌도의 의병을 거느리고, 임계영은 우도의 의병을 거느렸다.

호남이 이미 안정되자 두 장수는 모두 달려가 영남을 구원하였다...진주성이 함락되자...등과 함께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6001_011

● 주인 도망간 진주성 사수한 호남대장부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1593년]

장윤은 순천 사람으로 무과에 올랐다...그러다가 진주성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서예원이 목사로 있으면서 항시 탈출하려고만 하므로 인심이 분개하였다.

김천일이 계문(啓聞)하여 장윤으로 목사의 임무를 섭행케 하니, 성안이 비로소 지킬 뜻을 견고히 하였다.

그가 지킨 땅은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는데, 장윤이 죽자, 군사들이 믿을 바가 없으므로 성이 함락되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6001_010

● 주인 도망간 진주성 사수한 호남대장부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1593년]

양산숙...나주에 살며 성혼을 사사하였다...그가 돌아왔을 때에는 적이 이미 성을 핍박하고 있었는데...양산숙은 말하기를,

"위태로운 처지에서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하고 주장(主將)으로 하여금 혼자만 죽음에 빠지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고, 남강을 통해 성에 들어가니, 군사들이 모두 놀랐다.

성이 함락됨에 미쳐 양산숙은 헤엄을 잘 쳤으므로 그의 힘으로 충분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끝내 김천일과 함께 죽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6001_013

● 호남대장부

'명장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1593년]

황진은 고상(故相) 황희의 5대손으로서 용맹 건장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엄중하고 충신하여 기절(氣節)이 남보다 뛰어났다...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명장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6001_007

● "여기를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1593년]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켰다.

김천일·최경회 등이 전사하였다.

...29일 동문의 성이 비로 인해 무너지자 적의 무리가 개미떼처럼 기어올랐다.

종인이 친병(親兵)과 더불어 활과 화살은 놓아두고 칼과 창을 가지고 육박전을 벌여 죽인 적의 시체가 구릉처럼 쌓이니 적이 이에 물러갔다.

적이 창의사가 지키는 서쪽과 북쪽 성문은 병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군을 모아 힘을 다해 공격해 올가가니, 창의군이 제대로 버텨내지 못하였다.

적이 드디어 성에 올라와 병기를 휘두르니,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져 촉석루로 들어갔는데, 서예원은 먼저 달아나 숨어버렸다.

김천일이 최경회·고종후 등과 청당(聽堂)에 나란히 앉아서 말하기를,

"여기를 우리들이 죽을 장소로 합시다."

하고는 술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술을 지니고 있던 자도 이미 달아난 뒤였다.

이에 불을 지르도록 명하고는 스스로 타 죽으려 하였는데 적이 바로 촉석루에 올라오자, 김천일이 그 아들 김상건 및 최경회·고종후·양산숙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종인은 이곳저곳에서 싸우다가 남강에 이르렀는데, 양팔로 두 명의 적을 끼고는 크게 소리치기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

하며, 강에 몸을 던졌다.

...성이 일단 함락되자 적이 대대적으로 도륙을 자행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6001_006

● '영남의 전공으로는 김준민이 가장 으뜸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1593년]

김준민은 용력(勇力)으로 이름이 났다.

이종인과 함께 북변을 수비하면서 힘껏 싸워 이름이 드러났으나 문벌이 낮은 관계로 일찍 현달하지 못하였다.

영남의 전공으로는 김준민이 가장 으뜸이었다.

형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6001_009

● '사람들은 서로 잡아 먹으며 또한 죽은 시체가 들을 덮었다'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24일 정미 4번째기사 1593년]

비변사가 아뢰기를,

"선전관 조안방이 보내온 보고서를 보니

‘경상 한 도에 왜적과 서로 대치하는 각진의 군졸은 6∼7천에 불과하고, 그 중에는 한 장수가 거느리고 있는 군졸이 혹 6∼7명인 자도 있으며, 각진에 있는 활도 겨우 1백여 장(張)뿐이었다.

이런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강한 왜적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욱이 군량이 결핍된 지 이미 오래되어 하루에 먹는 양이 한 홉의 죽에 불과하니 매우 한심하다.

본도에는 비록 약간의 비축이 있고, 이웃 도에도 또한 이송하여 온 곡식이 있다고는 하나, 중국군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 군사들은 구제할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군졸이 날로 도망하여 이와 같이 축소되는 것은,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또 경상도는 병화와 기근이 타도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금년에도 파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 자의 땅도 개간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서로 잡아 먹으며 또한 죽은 시체가 들을 덮었으니 그 형세가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도에는 이미 한 줌의 곡식도 없고, 양호에는 또한 운반할 힘이 없으니, 천병과 우리 군사들이 비록 지키고자 하여도 어찌할 수 없어서 부득불 돌아와야만 하는데, 돌아온다면 조령 이남은 앞으로 버려진 폐허가 될 것이며 영남을 지키지 못하면 호남도 홀로 보존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흉적이 오래도록 버티면서 물러가지 않는 것도 그 계략이 이에 있으니, 이것은 장차 싸우지 않고서도 우리 나라를 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6024_004

● 전라도 병력은 다른 도와는 다르게 충성과 용맹이 가상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5일 1593년]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듣건대 전일 금산에 들어왔던 왜적의 수가 거의 만여 명에 이르는데 사납고 용감함이 비길 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라도의 병력은 다른 도와는 달라 웅치의 싸움과 이치의 공수(攻守)에서 맹장(猛將)과 경졸(勁卒)이 많이 전사하였는데도, 퇴각하지 않고 끝내 조헌·고경명 등의 의병과 연합하여 왜적을 무찔러 일시에 섬멸하였으니,

그 충성과 용맹이 가상합니다...

그리고 산음에서 운봉까지와 진주에서 구례까지의 사이에는 복병하여 적을 막을 만한 굽이진 내와 산기슭이 많으니, 지세를 잘 살펴 시행 할 것과, 대군(大軍)이 타도(他道)에 있은 지 이미 오래이므로 반드시 군량이 떨어졌을 것이니 계속하여 다른 길로 운반하라는 뜻도 아울러 행이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7005_002

● ' 전라도는 곧 조선 조종(祖宗)의 땅이다.'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0일 임술 2번째기사 1593년]

좌의정 윤두수가 아뢰었다.

"신이 객관에 가서 심(沈)·호(胡) 두 장군을 만나보니, 두 장군이 말하기를

‘...이번에 가지고 오는 저들의 요구조건은 1년에 세 차례씩 조공을 바친다는 것과 전라도와 은 2만 냥을 준 뒤에야 왕자와 세 배신(陪臣)을 송환하겠다는 것이라 한다.

경략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 전라도는 곧 조선 조종(祖宗)의 땅이다.

또 은 2만 냥을 어찌 줄 수가 있겠는가.

만약 먼저 왕자를 송환하지 않는다면 조공을 허락할 수 없다. 」

고 했다.’ 하면서,

경략과 제독의 편지를 내어 보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관방(關防)을 설치하라는 것은 경략의 심원한 생각이다.

그러나 지방마다 탕패되고 인민이 산망하였으므로 양곡을 운반하는 자들은 모두 전라도 사람들인데, 지금 만약 성을 쌓고 집을 짓는다면 인력이 고갈되어 쉽게 이루기 어렵다...’

하니, 답하기를

‘형세를 보아가면서 처치할 계획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신이 일본 낭아도에 있는 관백에게 갔는데, 관백이 왕자와 배신을 옆에 앉히고서 행장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조선에서 전승(全勝)하고 돌아왔으니 공이 없지 않다.

그러나 서울을 버려두고 전라도를 빼앗지 못했으니, 이제 다시 힘을 다해 전라도를 취하라. 」

고 한 것을 우리 나라 사람이 듣고 전보(轉報)했다 한다....’

고 하였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7010_002

● '지금 전라도를 치는 것은 그 원수를 갚으려는 것뿐입니다'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8일 경오 10번째기사 1593년]

윤근수가 심유경·소서비와 이여송이 만난 일을 보고하다

행 판중추부사 윤근수가 치계하였다.

"신이 오늘 이른 아침에 왕 통판(王通判)을 보고서 동변(東邊)의 소식을 물었더니, 통판이 말하기를

‘왜장 소서비가 심유경과 함께 8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금·은 등 물건 몇 수레를 싣고 와서 조선의 도로를 경유하여 중국에 조공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제독이 병위를 성대하게 진열해 놓고서 그들을 만나 보았고, 또 대장군전(大將軍箭)을 방사(放射)하며 노하여 힐책하기를

「경상도에 있는 천병이 15만이고 내가 거느리고 있는 군사도 5만이며 경략도 대군을 거느리고 주차(住箚)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끝내 이와 같이 한다면 대병을 거느리고서 일본을 섬멸할 것이다.

...」

하니, 왜장이 매우 두려워하며 고하기를

「제가 이런 뜻을 관백에게 통지하여 다시는 이와 같이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고 하였다.’ 했습니다.

그리고 통판이 다시 말하기를

‘8일에 소서비가 심유경과 함께 제독을 보니 제독이 꾸짖기를

「내가 평양을 공격할 때 차마 다 죽이지 않은 것은 너희들에게 재생의 은혜를 내린 것인데, 지금 약속을 저버리고 전라도를 치고자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니, 왜장이 말하기를

「전라도 사람들이 우리 군사를 매우 많이 죽였으므로 지금 전라도를 치는 것은 그 원수를 갚으려는 것뿐입니다.

어찌 감히 천조의 약속을 저버리겠습니까. 」

하였다...’

하였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7018_010

● 군사가 정예롭고 양곡이 넉넉한 전라도가 보전되었다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9일 신미 5번째기사 1593년 명]

군량, 방어 강화를 요구하는 제독의 자문에 적을 공격해달라 회답하다

제독이 자문(咨文)을 보내왔는데 그 대략에,

"본부(本部)가 명을 받들어 동쪽으로 구원을 나와서 다행히 우리 황상의 천하에 널리 알려진 신무와 지용을 겸비한 장사들을 힘입어 귀국의 삼도(三都) 팔도를 다 회복하였습니다.

비록 현재 왜적의 무리가 아직까지 부산에 있기는 하지만, 군사가 정예롭고 양곡이 넉넉한 전라도가 보전되었고, 유수(留守) 유정(劉綎) 등의 군사가 대구에 웅거하여 일대의 험요한 곳을 왕래하여 응원하고 있으니 얼마되지 않는 부산의 여적(餘賊)은 양곡도 다 되고 계책도 궁하여 반드시 바다를 건너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나라를 정신(鼎新)하는 기업(基業)에는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7019_005

● 권율 등 여러 장수가 전공으로 초승된 뒤에 다시 태만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8월 1일 1593년]

...의병장 변사정이 상소하여 여러 장수가 진주성을 구제하지 않은 죄를 아뢰고, 또 아뢰기를,

"변고가 있은 이후로 궤산(潰散)이 습관화되어서 군사를 후퇴시켜도 어느 한 사람 주벌을 받은 일이 없고 구원을 하지 않아도 어느 한 사람 주벌을 받은 일이 없으니, 견양(犬羊) 같은 왜적에게 유린당하는 화가 반드시 호남을 다 휩쓴 뒤에야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이때 권율 등 여러 장수가 전공으로 초승(超陞)된 뒤에 다시 태만했기 때문에 이 말이 있게 된 것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8001_004

● '진주가 격파당한 뒤라서 사람마다 굳게 지키려는 마음이 없다'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10일 1593년]

비변사가 아뢰기를,

"...또 경주를 침범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하는데, 이 적이 먼저 선언하고서 뒤이어 실력을 행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매우 염려가 됩니다.

그런데 영남의 제장(諸將)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는 모두 1백 명도 채 되지 않고 그나마 군량의 결핍으로 인하여 대부분 지쳐 있는 데다가 막 진주가 격파당한 뒤라서 사람마다 굳게 지키려는 마음이 없으니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8010_005

● '경상도 수령들이 피신하여 온 사람도 있으니 경악스럽다'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22일 1593년]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의 수령들이 피신하여 북도로 들어온 사람이 있기도 하니, 진실로 경악 맡은 신하는 마땅히 봉강에서 죽어야 하는 법인데 경상도의 수령들이 피신하여 북도로 들어온 사람이 있기도 하니, 진실로 경악스러웠다.

이번 진주 싸움에는 적세가 호대하여...아군의 형세로는 막아내기 어려울 듯하였다.

그러나 장수는 마땅히 군세를 드날리며 자신이 해야 할 책임을 다했어야 하는데 끝내 한 사람도 달려가 구원한 자가 없었다..."

* 봉강 : 다스린 땅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22_001

● '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3일 1593년]

좌의정 윤두수를 불러 왜군의 동태·군사 징병 방법·농사 상황 등을 물어보다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신이 팔거(八莒)에 갔을 때에 사람을 잡아서 먹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군관을 보내어 베었습니다.

양호에 들어갔을 적에는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을 못들었습니다."

하였다...

* 양호 : 호서, 호남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2003_001

● 전라도 병사(兵使) 등 장관(將官)이 모두 경상도에 있다

[선조실록 48권, 선조 27년 2월 26일 1594년]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라도 병사(兵使) 등 장관(將官)이 모두 경상도에 있으니 만약 적병이 쳐들어 오는 환란이 생긴다면 이를 방어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당초 조정에서 특별히 순변사 이일을 보낸 것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둔병(屯兵)하여 이시언과 김덕령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소홀함이 없도록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요즘 이일은 역당 잡는 일로 오래 중도(中道)에 머물러 있으니..."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2026_002

● '호남 수병의 공이 작지 않다'

[선조실록 48권, 선조 27년 2월 27일 병자 1594년]

...상이 이르기를,

"..의령의 제장 등은 단지 가시로 빙 둘러치기만 하였다 하고, 또 전에 순안의 진중을 보니 군인이 소지한 것 이외에는 다른 군기(軍器)가 없었는데, 왜적이 와서 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호남 수병의 공이 작지 않다.

왜적이 호남을 빠뜨린 것도 필시 이 때문이니 그렇지 않다면 하늘의 뜻일 것이다.

혹자는 다른 곳이 격파되는 바람에 이와 같았다고 하지만 이는 웃음거리 지나지 않는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2027_001

● '굶주린 백성들의 목을 베어 적의 수급이라고 한다'

[선조실록 50권, 선조 27년 4월 17일 1594년]

...류성룡이 아뢰기를,

"요즈음 듣건대 영남의 일들은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변장(邊將)들이 흔히 우리 나라의 굶주린 백성들의 목을 베어 그것을 대전(大戰)에서 얻은 적의 수급이라고 한다니, 속이는 일들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지난날 중국군만 믿고 있다가 지금 와서는 또 김덕령에게 의지하고 병사 등 모든 장수들은 앉아서 날만 보내고 있으니 나랏일을 다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도원수는 후중(厚重)한 것 같기는 하나 이완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4017_002

● '왜놈의 수급으로 급제를 하는데 그것이 양민 학살하는 큰 함정이 된다'

[선조실록 50권, 선조 27년 4월 18일 1594년]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주의 각 진사(陣司)에 낭청 조수익을 내려보내어 군중의 제반 사정을 샅샅이 살펴오게 하려 합니다.

...요즘 군공에 관한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허위가 많아 뒷말들이 분분합니다.

심지어는 애당초 적을 상대하여 크게 싸운 일도 없었는데 군대들이 오랫동안 모아온 수급(首級)을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리지도 않고 승첩한 것처럼 꾸며 그것을 과장하여 공을 올린다고 하며,

또 초시에 입격된 자가 베어왔다는 왜두(倭頭) 역시 조사하여 밝혀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참으로 왜놈의 수급을 가져온 자는 얼마 안 되고 그 나머지들은 모두 우리 나라의 굶주린 백성들을 남모르게 죽여 머리털을 깍아낸 다음 그것으로 숫자를 채우고 있으므로,

인두(人頭)를 사고 파는 모든 사람들에겐 일정한 값이 있어 처음에는 머리 하나에 쌀 40∼50두 하던 것이 중간에 와서 10여 두로 내렸고 지금 와서는 겨우 한끼 밥만 먹여주면 곧 살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남쪽 지방 사람들은 왜놈의 수급으로 급제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양민을 학살하는 큰 함정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전해 들은 바로는 의령에 허(許)라는 성을 가진 자 3명이 모두 이러한 방법으로 과거급제를 얻었다고 하여 인정(人情)이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장수가 사정(私情)에 끌려 사실을 알면서도 원수를 속이고 원수는 또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폐단이 이렇게까지 되고만 것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4018_001

● '나라가 그나마도 믿고 나라다운 것은 호남이 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52권, 선조 27년 6월 29일 1594년]

이조가 아뢰기를,

"전주 부윤에 합당한 사람을 신들이 반복해서 생각해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그럴 수 없다고 답하고, 전교하기를,

"...나는 장차 적을 토벌하려는 것인지, 왜적에게 칭신(稱臣)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나라가 그나마도 믿고 나라다운 것은 호남이 있기 때문이며 호남의 근본은 전주에 있다.

그렇다면 전주 부윤을 제대로 얻느냐 못 얻느냐의 문제는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신중히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6029_002

●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된 지가 오래이다'

[선조실록 54권, 선조 27년 8월 15일 1594년]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된 지가 오래이다.

비록 친형제라도 천자문을 배우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높은 자리에 앉히고 대우를 하지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무술을 익히면 뜰에 내려가게 하고 천대한다.

그래서 변란을 당하기 전에 상주에는 궁수(弓手)가 3인뿐이었다 한다...

또 신묘 연간에 조회오는 왜인이 연이어 2년을 오지 않자 영남사람들은 저들에게 자중지변이 있다 핑계하면서 적이 반드시 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깔보고서야 되겠는가"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8015_001

● ‘군사가 없는데 장차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중과부적이다’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14일 기축 6번째기사 1594년 명]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저 경상도는 인민들이 흩어져 3년 동안 다시 수습할 길이 없어 짐승과 새처럼 놀라고 흩어져 굶어죽은 자를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왕왕 적중에 들어가 의지해 살고 있는데도 장관(將官)이나 수령들은 초개같이 여겨 가거나 오거나 내버려둡니다.

이는 참으로 적을 위해 백성을 몰아다 주는 것이니 어떻게 이미 떠나버린 인심을 돌려서 수복하는 계책을 도모하겠습니까.

지금의 장수된 자들은 팔짱만 끼고 무사한 지역에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조정에서 그들을 시켜 싸우고 지키게 하면 반드시 ‘군사가 없는데 장차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하고,

적을 만나면 ‘중과부적이다.’하며,

싸우다 물러나다 하다가 이 몇마디 말로 죄를 면하고 책임만 때우려고 듭니다.

만약 평소에 기율이 엄명하였다면 이들이 어찌 형벌을 모면하겠습니까..."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9014_006

● '머리를 깎고 이를 물들이는 등 왜적의 풍속을 따른 자들도 있다'

[선조실록 61권, 선조 28년 3월 1일 1595년]

도원수 권율의 장계

"...왜적을 위하여 농사를 지어 조세를 바치고 그들의 노역에 이바지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세월이 갈수록 거의 그들과 동화하여 서로간의 관계를 잊고 있습니다.

전해 들으니,

동래·부산·김해 등지에는 밭가는 자들이 들녘에 가득한데 3분의 2가 모두 우리 나라 백성들이며 그들 중에는 이따금 머리를 깎고 이를 물들이는 등 그들의 풍속을 따른 자들도 있다고 하고..."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03001_008

● '왜적이 물러간다면 슬퍼하고 머문다면 기뻐한다'

[선조실록 65권, 선조 28년 7월 26일 1595년]

이원익이 아뢰기를,

"영남이 탕패(蕩敗)하여 인심이 흩어졌으니 가령 왜적의 무리가 철수한다 하여도 투항한 백성들이 이미 살아날 수가 없게 되어 반드시 흩어질 것입니다.

만약 미리 제대로 대처해 주지 않으면 서로 모여 도적이 되어 못된 짓을 자행할 것이니 앞으로 염려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저 투항하거나 포로된 무리들은 왜적이 물러간다는 소문을 들으면 슬퍼하고 왜적이 머무른다는 소문을 들으면 기뻐하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07026_002

● '호남을 잃지 않아야 국맥(國脈)을 보전할 수 있다'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7일 기해 1번째기사 1596년]

경연을 열다.

유성룡·이덕형 등과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적이 장구(長驅)한다면 반드시 경병으로 곧바로 나아가 호남을 차지할 것인데, 호남은 정병(精兵)이 많이 있는 곳이고 성이 두텁고 완전하기는 합니다마는, 수년 동안 요역이 번거롭고 무거웠으므로 인심이 평상시와 같지 않습니다.

적이 오더라도 반드시 호남을 잃지 않아야 국맥(國脈)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남이 완전한 줄을 적이 알기 때문에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이다.

전에 듣건대 적이 공초(供招)하기를 ‘다른 도는 죄다 가졌는데, 호남에서만 위세가 행해지지 않으므로 반드시 치려 한다.’ 하였는데, 진주를 공함(攻陷)한 경우가 이 예이다."

하였다...

* 장구 : 말을 몰아 쫓아감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11007_001

● '전라도는 임난 이후로 국가에 공이 많고 양반 중에서 근왕한 자는 다 호남 사람'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17일 기유 2번째기사 1596년]

도체찰사 이원익이 왜적의 방비책·기인·방납 등에 대해 아뢰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 사람은 모두 싸우고자 한다는데, 사실인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양남(兩南) 사람은 다들 요역(徭役)에 괴로우므로 싸울 뜻이 없으나, 북돋아 인도한다면 어찌 절로 격려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영남(嶺南)의 인심을 오래 관찰했는데, 그들이 ‘임진년에는 뜻밖에 병란을 당하였으므로 그처럼 겁냈으나, 이제 다시 온다면 어찌 적과 함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있습니다만, 병란을 당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안동부터 위로는 인가가 드물고 군사를 뽑는 영이 내리면 사람들이 다 달아나 숨으나, 하도(下道)만은 다 병란을 겪었으므로 이와 다른데, 사람들이 그 마음을 가지런히 할 수 없고 그 힘을 한결같이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호남은 차역(差役)이 매우 중하므로 인심이 원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어찌 다들 난동까지야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국가가 잘 알아서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전라도는 임진년의 병란 이후로 국가에 공이 많거니와, 양반 중에서 근왕(勤王)한 자는 다 호남 사람입니다.

또 호남이 원망하는데도 나라에서 사람을 대우하는 것은 그렇지 않으니, 성색(聲色)의 차이없이 호남 사람을 필히 거두어 써야 하겠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11017_002

● 명에 원조요청 공문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 9월 20일 1597년]

"...전라도가 없게 되면 다른 도가 있어도 소방은 끝내 의거하여 근본을 삼을 만한 계책이 없게 되니, 이곳이야말로 왜적이 반드시 쟁취하려는 곳으로서 우리가 그곳을 지키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당나라 때...회양은 보장이 되었던 까닭에 장순과 허원이 죽음으로써 회양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소방의 안위는 참으로 전라도를 보존하여 지키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9020_005

● 조선인 수천 명이 왜인 수백 명과 협동(나당야합 복사판)

[선조실록 96권, 선조 31년 1월 23일 1598년]

...이조판서 이덕형이 장계를 올렸다.

"오 총병이 왜적의 간첩을 사로잡았는데 경리가 잡아다가 직접 물으니, 그가 ‘지난날 왜적들이 도산(島山)의 왜병을 구원한 것은 진짜 왜인이 아니라,

이는 조선인 수천 명이 왜인 수백 명과 협동하여 기치를 많이 벌여 세우고 기세를 올린 것이다.

배에 타고 있던 왜적도 큰 배에 탑승한 왜적은 겨우 5∼6인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었다'.."

* 도산 : 울산 왜성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01023_006

●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선조수정실록 32권, 선조 31년 11월 1일 임오 2번째기사 1598년]

...이때에 행장이 순천 왜교에다 성을 쌓고 굳게 지키면서 물러가지 않자 유정이 다시 진공하고, 순신은 진인(陳璘)과 해구를 막고 압박하였다.

행장이 사천의 적 심안돈오에게 후원을 요청하니, 돈오가 바닷길로 와서 구원하므로 순신이 진격하여 대파하였는데, 적선 2백여 척을 불태웠고 죽이고 노획한 것이 무수하였다.

남해 경계까지 추격해 순신이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가 부축하여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

순신의 형의 아들인 이완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진인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완은 그의 군사를 지휘해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진인이 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 준 것을 사례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고,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마다 통곡하였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우의정을 추증했고,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충민사라 불렀다.

* 충민사 : 1601년 여수에 건립된 최초 이순신 사액사당

http://sillok.history.go.kr/id/knb_13111001_002

● 언관에 있게 되어서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다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 11월 13일 갑오 2번째기사 1598년]

정언 문홍도가 아뢰기를,

"신이 영남에 있을 때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간사하여 자기보다 나은 자를 시기하고 국사를 그르치고 백성을 괴롭히는 죄상이 있는데도 조정에서는 보복을 두려워하고 감히 그의 간사함을 공격하지 못하고, 성상께서는 고립되어 그의 악한 소문을 듣지 못한다는 것을 많이 듣고서신이 초야에서 늘 분개해 왔었습니다.

지금 마침 언관에 있게 되어서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겠기에 동료들이 모두 모이는 것을 기다려 발론하려고 했는데, 요즈음 본원(本院)이 잇달아 좌기(坐起)하지 않아 대면해서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11013_002

● '부음이 전파되자 호남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였다'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번째기사 1598년]

좌의정 이덕형이 치계하였다...

이문욱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이 전파되자 호남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11027_005

《토착왜구 역사 (조선후기)》

● '우리 나라가 재조(再造)되고 호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선조실록 108권, 선조 32년 1월 29일 경술 2번째기사 1599년]

상이 강가로 나아가 유 제독을【유정(劉綎).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비록 불리하였으나 끝내는 대첩을 거두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가 재조(再造)된 것은 대인의 공입니다."

하니, 도독이 말하기를,

"제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모두 진야(陳爺)의 공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과인이 멀리 해외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대인의 높은 명성을 우러르며 늘 경모(景慕)하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대인이 전에 우리 나라를 위하여 남쪽 변경으로 와 주둔하시자, 흉적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으므로 우리 나라가 호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대인이 서쪽으로 돌아가시자 흉적들은 다시 발호하여 우리 나라는 날마다 대인이 동원(東援)하기만을 바랬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대인이 다시 오시어 끝내 흉적들을 도망치게 하셨으니 대인께서 시종 구제하여 주신 은혜에 대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도독이 말하기를,

"감사합니다.

재차 나와서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이순신 같은 자들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저의 군사가 대첩을 거둘 수 있었음에도 하늘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길을 잘못 들어 마침내 적추로 하여금 전군(全軍)을 철수하여 건너가게 하였으니, 한스럽습니다.

대개 대소 장관들이 각자 생각이 다르고 호령이 여러 곳에서 나와 제동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었으므로 성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조금도 자랑할 만한 공이 없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1029_002

● 우리 나라의 간사한 자들이 모든 대소 동정을 왜구와 상통

[광해군일기[중초본] 39권, 광해 3년 3월 21일 신유 1번째기사 1611년]

경상도 관찰사 윤방이 조정에 하직 인사를 올리니,

왕이 봉서를 내려 이르기를,

"부산의 왜영(倭營)에 섬 오랑캐가 오래도록 머물러 있자, 우리 나라의 간사한 자들이 모든 대소 동정을 서로 상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경은 지금 내려가서 동래와 부산의 첨사를 엄히 주의시켜 그들로 하여금 각별히 기찰하게 하되, 범법자가 있을 경우 체포하여 보고한 다음 엄중하게 다스리고, 기찰을 부지런히 하지 않는 수령과 변장도 상세하게 조사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당시에 왜인이 계속 나와서 여러 달 머물러 있자, 우리 나라에서 이익을 꾀하는 자들이 출입하면서 서로 내통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03021_001

● 왜구 접대하는 일을 전담하고 시달리는 경상도

[광해군일기[중초본] 130권, 광해 10년 7월 11일 정유 9번째기사 1618년 명]

〈오시에〉 왕이 선정전에 나아가 경상 감사 박경신, 전라 감사 이창후를 인견하였는데,...왕이 이르기를,

...경신이 아뢰기를,

"...또 조종조로부터 남쪽의 왜를 접대하는 일이 오로지 본도에 맡겨졌던 까닭에 본도 세입의 태반은 동래로 운송해 가서 왜인을 접대합니다.

근래 관에 머무는 왜인이 1천여 명에 이르렀으니 만약 때맞춰 들여 보내지 않는다면 다만 접대비를 마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리(閭里)를 횡행하며〉 틀림없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본도에 청하는 물품들은 때맞춰 지급해 보내겠습니다만, 인삼·매 등의 물품은 반드시 해조에 청한 〈연후에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조가 곧바로 처치하지 않고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해조가 때맞춰 선처하여 개유하여 들여보낸 연후에야 본도의 민력이 조금 덜어질 수 있고 보장을 만드는 대책도 전력하여 조치할 수 있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007011_009

● 국가위기에 피난지는 호남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2월 7일 신묘 10번째기사 1624년]

밤에 대신과 비국의 제신(諸臣)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정엽이 먼저 도성을 떠나 피난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방금 기탄(岐灘)에서 패했다는 기별을 들었습니다. 사세가 전과 크게 다르니 국가의 대계는 만전의 방도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종묘 사직의 신주 및 자전(慈殿)·중전(中殿)께서는 먼저 강화로 거둥하시고, 대가는 천천히 사세가 변하는 것을 보아 진퇴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좌우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이론이 없었다.

삼공과 재신들이 말을 같이하여 청하기를,

"나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장차 거둥하실 계모를 가지려면 먼저 세자를 세울 방책을 정하고서야 분조(分朝)하여 일으켜 회복할 일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니, 빨리 위호(位號)를 정하여 중외가 소망을 걸게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이가 아직 어리니 우선 천천히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경세가 영남으로 거둥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영남의 충의로운 선비 중에는 반드시 선뜻 호응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날 자가 있어서 이로 인하여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영남에 충의로운 선비가 많기는 하나 그 풍속은 문을 숭상하고 무를 숭상하지 않으므로 도움을 받기 어렵습니다.

호남의 풍속은 대부분 무예를 숭상하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이곳으로 거동하시어 진무하고 수용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면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07_010

● '호남은 참으로 우리가 회복할 수 있는 터전이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2월 11일 을미 5번째기사 1624년]

여러 도에 역적과 맞서 싸우라고 하유하다

제도(諸道)에 하유하였다.

"국운이 매우 비색하여 역적 이괄이 군사를 일으켰는데, 제장이 좌시하여 경성이 함락되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통곡할 만하다.

종묘 사직이 옮겨지고 신민이 달아나 숨게 되었다.

예로부터 난역(亂逆)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극도로 흉악한 이 역적 같은 자는 없었다.

위로 종사(宗社)와 자전(慈殿)을 염려하여 남으로 옮길 계책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신명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는 이 역적이 어찌 귀신에게 오래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저 호남은 참으로 우리가 회복할 수 있는 터전이 될 것이니, 우리 각 고을의 대소 신민은 각자 창의하여 군사와 양식을 모아 혹은 진격도 하고 호위도 하여 함께 큰 공훈을 이루도록 하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11_005

● '적들도 그를 의롭게 여겨 곧 그를 해친 자를 죽이고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다'

[효종실록 18권, 효종 8년 2월 21일 갑오 3번째기사 1657년]

고부의 유학 김양기 등이 상소하기를,

"...충신 증 이조 판서 송상현과 증 형조 판서 신호와 증 우찬성 김준은 본군 사람입니다...

다만, 송상현은 대간과 시종 출신으로 동래를 맡아 다스리고 있다가 임진년 난리에 가장 먼저 왜적의 공격을 받았는데 조복(朝服)을 입고 걸상에 앉아 몸소 적을 쏘면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는 무겁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은혜는 가볍다 하여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죽을 때까지 발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적들도 그를 의롭게 여겨 곧 그를 해친 자를 죽이고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고 나무를 세워 표시하였습니다.

신호는 젊은 나이에 붓을 던지고 나라를 위할 뿐 죽음도 잊고서 두 번이나 해전에 나가 문득 기이한 계책을 내더니, 끝내는 명나라 장수와 함께 남원을 지킬 때 미리 이름을 써서 의대 속에 넣어 자기 집 사람에게 보내고, 그 성이 함락될 때 힘껏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김준은 혼조 10년 동안 전야에 숨어 지내다가 역적 이괄의 역변에 적은 군대로 홀로 전진하여 안주를 방어하였는데,..힘껏 싸우다 화살이 다하자 불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호남의 여러 군에서 임진 왜란과 정유 재란 때 의리를 세워 적병을 토벌하고 몸을 던져 나라에 보답한 사람으로 고경명 부자와 김천일·조헌 등 여러 신하들은 그들의 소재지에 따라 사당이 세워져 제사를 받으며 모두 사액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청컨대 해조에 명하여 전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 상소를 예조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802021_003

● 영남 일대가 연거푸 기근이 들고 토적들 발생

[현종실록 3권, 현종 1년 7월 11일 갑자 2번째기사 1660년]

흥해 군수 조석구에게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영남 일대가 연거푸 기근이 들고 토적들이 들고 일어나, 경주부에서는 자물쇠를 부수고 창고에 저장된 것을 겁탈해간 변고가 있었다.

흥해는 경주와 접경 지역으로 석구가 많은 정보원을 두고 비밀리에 사찰하여 그 적당들을 체포하고 하나하나 자복을 받았다.

그리하여 병사(兵使)가 사유를 갖추어 아뢰자,

형조가 그 도둑들은 목을 베어 그 고장에다 효시하고 석구에게는 상을 내릴 것을 청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107011_002

● '그가 편당(偏黨)에 고질이 된 것이 이와 같았다.'

[인조실록 23권, 인조 8년 7월 4일 신사 1번째기사 1630년]

이조 판서 정경세가 병을 칭탁해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경세는 몸가짐이 청렴하고 검박하였으나 당론에 치우침을 면하지 못하였다.

상이 경연에서 《중용》을 강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정경세가 참찬관으로 입시하여 남방(南方)의 강(强)이라는 대목에 이르자, 나아가 아뢰기를,

"남방은 풍기(風氣)가 유약(柔弱)하기 때문에 군자가 거처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 나라의 영남은 군자들을 배출하여 인재의 부고라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염·락·관·민에 견주고 있습니다.

인물은 당연히 영남이 으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풍속이 그렇게 아름답다면 정인홍의 악역(惡逆)이 어찌하여 그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정경세가 답하기를,

"정인홍은 거처가 호남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였으니, 그가 편당(偏黨)에 고질이 된 것이 이와 같았다.

전조(銓曹)에 들어갔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자기 아우를 위하여 벼슬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잊은 탓으로 수망(首望)으로 의망한 것이 바로 허명(虛名)이었다. 소문을 들은 사람이 말을 하니 이에 병을 칭탁하고 출사하지 않았는데, 상이 억지로 나오게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807004_001

● '여인을 꾀어 왜관에서 몰래 간음하도록 하였다가 발각되다'

[현종개수실록 5권, 현종 2년 5월 29일 1661년]

동래 사람 박선동이 뇌물을 받고 여인을 꾀어 왜관에 들어가게 하여 몰래 간음하도록 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박선동 및 그 여인은 왜관 문 밖에서 효시하고 그 나머지 여인으로 왜인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신 자 및 상인으로 왜인과 교통하여 왕래한 자 역시 먼 곳으로 귀양 보내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205029_001

● 영남은 유현, 호남은 절의, 서북은 무사

[현종개수실록 7권, 현종 3년 7월 6일 정축 3번째기사 1662년]

상이 영중추 이경석에게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고 올라오게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여 매우 후하게 위로하고 이르기를,

..."경도 생각을 숨기지 말라."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초야에 있는 인물에게 묻는다면, 송시열·송준길이 반드시 공평한 말을 할 것입니다."

하고, 경석이 또 아뢰기를,

"국가는 인재를 중하게 여깁니다.

영남에는 본래 유현(儒賢)의 교화가 있었고,

호남에도 절의의 기풍이 많았으며,

서북 양로는 모두 무사의 본고장입니다.

인재에 따라 등용한다면 그것이 곧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사 가운데 뛰어나서 쓸 만한 자를 수소문하여 계문하도록 서북의 감사에게 하유하라."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307006_003

● 호남은 국가의 근본지역, 전주는 왕업 발상지

[현종개수실록 11권, 현종 5년 7월 19일 무신 5번째기사 1664년]

영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양호에서 수재에 대해 아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호남이 가장 심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전주가 더욱 심합니다.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며, 전주는 또 왕업이 일어났던 자리입니다

하늘이 다른 곳에 재앙을 내리지 않고 이곳에만 유독 혹독하게 내린 것은,

우리 전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깨워 주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심상한 변괴로 여기어 예사롭게 대처해서야 되겠습니까.

옛적에 한필부가 원한을 품어도 재이가 일어났는데, 오늘날로 보건대, 부역이 무겁고 세금이 가혹하니 필시 원망한 자가 많을 것이며, 귀양보내고, 형벌주고, 송사하는 가운데에도 원한을 머금고 울부짖은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미련한 생각에는, 상께서 특별히 애통해 하는 뜻이 담긴 교서를 내리고 묘당의 신하들에게 물으시어 재이를 해소하고 억울함을 펴줄 수 있는 방도를 찾으시고, 한갓 눈앞의 형식에만 그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호남에는 도신과 읍재 및 대부나 선비들로 하여금 가장 힘겨운 역(役)부터 조목별로 나열케 하고 각기 소회를 진달하게 하여 가볍게 해주거나 감해주기도 하고 혹은 펴주거나 용서해 주었으면 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507019_005

● 동래 부사 이지익을 인견하고 왜인의 풍속에 대해 논의하다

[현종개수실록 16권, 현종 7년 12월 15일 1666년]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동래 부사 이지익을 인견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듣자니, 왜관의 왜인이 여염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통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숙할 때도 있다고 하는데, 이 폐단을 일체 엄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여염에 드나들 뿐만 아니라 부녀자들과 간음까지 하고 있으나 풍속이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조그만 이익을 탐내 도리어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유들은 발각된 즉시 통렬히 다스려서 그 습관을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지익에게 이르기를,

"왜인을 상대하는 방법은 다그치면 일이 생기고 늦추어 주면 점점 해이해지니, 반드시 너그러움과 맹렬함을 적절히 응용하고 강경함과 유순함을 알맞게 적용해야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712015_002

● ‘소명(召命)이 조령을 넘어오지 않은 지 30년이 다되어 간다.’

[현종개수실록 18권, 현종 8년 9월 5일 병오 1번째기사 1667년]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태연이 막 경상도 관찰사로 있다가 체직되어 올라왔는데, 그의 말을 듣건대 영남의 풍속이 아주 못되어 명령하는 것들을 공공연히 따르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고,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전에는 영남의 인심이 본디 돈후하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토호들이 무단(武斷)하는 습속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국곡(國穀)을 많이 받아 먹고서 환상(還償)하지 않아 열읍의 포흠이 2만여 석이나 되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영남은 예로부터 인재가 많이 나는 곳이라고 일컬어졌으니 지금이 비록 습속이 나쁜 말세라고는 하지만 어찌 쓸만한 인재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근래에 조정에서 거두어 쓰지 않았는바, 이 때문에 백성들이 수심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재주에 따라 거두어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정경세와 이준 이후에, 남아 있는 유풍과 선속(善俗)이 없습니다.

전조에서 인재를 등용할 때에는 한때의 인재를 뽑아서 쓰므로 영남 사람들 가운데 거두어 쓰이는 자가 드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명(召命)이 조령을 넘어오지 않은 지 30년이 다되어 간다.’고 하면서 이 때문에 원통해 한다고 하니, 온 도의 인정이 어떠한지 대강 알 수가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재주에 따라 등용하는 일을 전조로 하여금 착실하게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포흠 : 관 재산을 사사로이 씀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809005_001

● 경상도 곳곳에 도적이 발생하다

[현종개수실록 23권, 현종 11년 9월 2일 병진 2번째기사 1670년]

경상도에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나, 각읍의 세폐(歲幣) 방물(方物)과 군포(軍布)를 싣고 오던 것이 도적에게 겁탈당하기도 하였다.

여염에는 명화적이 날뛰고 도로에는 살인을 하는 변고가 즐비하게 일어났다.

도신이 이 사실을 계문하였다.

상이, 토포사(討捕使)들을 신칙하여 특별히 기찰을 엄하게 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rb_11109002_002

● 돌림병이 계속 들끓어 기근으로 죽은 자가 무수하다

[현종개수실록 25권, 현종 13년 3월 29일 을해 1번째기사 1672년]

이때 작년부터 금년 봄까지 돌림병이 계속 들끓어 2월 이후로 기근 때문에 병사한 자가 무수하였다.

각도에서 알려온 보고는 실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는데도 함경도는 7백여 명, 황해도는 4백 70여 명, 평안·전라 두 도는 4백 수십여 명, 충청도는 2백 60여 명, 경상도는 5백여 명, 원양도는 1백여 명, 경기도는 3백여 명이었다.

상평청과 진휼청이 조석으로 구제해 준 기민들이 많게는 4천 3백여 명, 적게는 2천여 명이었으며, 외방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서로 떼를 지어 도적질을 함으로써 화적떼가 인명을 살상하는 변고가 도처에서 발생하였다.

민간에 저축된 건 벌써 바닥이 나서 그들이 훔쳐가는 것이랬자 고작 됫박쌀에 불과하였는데, 길에서 장사치나 여행자를 만나면 뒤질세라 서로 달려들어 약탈을 하였다.

호남과 영남의 중간 지역이 특히 도적떼의 소굴로 변했고, 충청도 청주 등 고을에서는 보름 사이에 인명을 살상한 곳이 많을 때는 열네 군데나 되었다고 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rb_11303029_001

● '동래와 부산의 백성에는 왜인의 출산이 많았다'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 윤5월 3일 경인 3번째기사 1675년]

비변사에서 아내와 간통한 왜인을 죽인 동래부 사람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하다

비변사에서,

"동래부 사람 어부동이, 왜인이 자기 아내를 간통함을 보고 그 왜인을 쳐죽여서 바다에 던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를 참견한 사람들이 여러 차례 형신(刑訊)을 받았지만 아무런 단서가 없으니 석방하여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이때는 변방의 금령이 해이해져서 관(館)에 있는 왜인들이 가만히 여염으로 다니면서 부녀자를 간음하였다.

그래서 동래와 부산의 백성에는 왜인의 출산이 많았으며, 서북의 사람도 또한 그러하여 호인(胡人)의 귀와 눈이 되어 가만히 나라의 일을 일러 주므로 식자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105103_003

● '영남은 의논이 괴격해 조가(朝家)에서 포기한다.'

[숙종실록보궐정오 19권, 숙종 14년 6월 14일 을묘 1번째기사 1688년]

이조 판서 박세채가 올린 시무 12조

"...영남의 사람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영남은 옛부터 인재의 부고로 일컬어 현유(賢儒)가 많이 나왔는데, 진실로 풍습이 다른 곳과 통하지 않아서 인물이 나지 않으므로, 마침내 청명(淸明)한 조정에 발탁되어 나와서 세상에 드러난 이로서 장현광·정경세·정온과 같은 사람이 없는 지가 지금 4기를 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의논이 괴격한 소치이며, 조가(朝家)에서 포기한 데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근년에 권간(權奸)의 시대에 한 번 나와 사나운 불길을 조성시키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한 도의 큰 수치라 이를 만합니다.

지금은 마땅히 밝게 분변하여 통용하는 방법으로 함께 대처해야 할 것이니, 그 중에 과연 죄루(罪累)를 입은 것이 아니고 재행(才行)이 있는 자는 특별히 발탁하시고, 그 허물은 작고 재행이 큰 자도 또한 차례로 선발해 천직(遷職)시켜서 진실로 마음을 낮추어 서로 따르게 한다면, 이로부터 공정하게 듣고 나란히 보게 되어 동료들끼리 협력하고 공경하여 장차 어디를 가더라도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 1기 : 12년

http://sillok.history.go.kr/id/ksb_11406014_001

● '임난에 의병을 일으켜 순절한 선비가 호남에서 많이 나왔다'

[영조실록 7권, 영조 1년 9월 10일 갑진 2번째기사 1725년]

임진 왜란 의병 최경회·최경장의 은전을 청하여 전라도 유생들이 상소

전라도 유생 이만영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임진년의 변란에 의병을 일으켜 순절한 선비가 호남에서 많이 나왔으나, 그 중에서 가장 드러난 자는 김천일·고경명·최경회 이분들입니다.

성고(聖考)께서 임어(臨御)하시던 날에 김천일·고경명두 신하는 증시(贈諡)의 은전을 받았으나 유독 최경회만 같이 받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은전의 시호를 특별히 내리소서.

또 최경회가 절의로 죽은 뒤에 그 형인 최경장이 남은 병사를 소집하여 다시 영남으로 갔는데, 추노가 최경회의 형이라는 것을 알고서 황급히 물러나 피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관작을 추증하여 권장하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그대의 상소를 보건대, 두 신하의 충절이 늠연(澟然)히 살아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109010_002

● 영남 사람은 문과에 급제한 이가 많았으나 보직에서 제외

[영조실록 13권, 영조 3년 9월 14일 정묘 3번째기사 1727년]

부응교 조지빈이 상소하기를,

"영남 사람은 문과에 급제한 이가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경서(經書)를 연구하고 행실을 근신하는 선비가 또한 얼마인지 모를 정도인데도 다만 표방에 인연하여 전연 폐기되고 있으니, 각별히 수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전조(銓曹)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 표방 : 어떤 명목이나 주장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309014_003

● 영남인은 무신년 이후 차별 대우로 조정에 등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안다

[영조실록 26권, 영조 6년 5월 17일 갑신 2번째기사 1730년]

여성군의 연속된 계청에 따라 이해와 이기에게 차율을 적용하여 처형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해(垓)·기(圻)는 무신년의 추대(推戴)와는 다르기에 조가에서 관대한 은혜가 이와 같았는데, 감히 매부와 인척을 위하여 이러한 역모에 가담했으니, 이는 반드시 충동시킨 자가 있으므로 이에 응한 것이다.

조정에서 만약 금석(金石)과 같은 법전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다면 비록 쓰이지 않은 자일지라도 반드시 기뻐하여 복종할 것이다.

영남 사람으로써 말한다면 선조(先朝) 때에 등용된 자가 많았으니, 명분과 의리에 어긋난 자는 쓸 수 없지마는, 무죄한 자는 소통하여 쓰는 것이 좋겠다.

다만 한 사람의 근거가 없는 일로 인하여 그 무리에게까지 연루되어 무신년 이후에는 차별 대우를 하였으므로 조정에 등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사람도 아니요 짐승도 아닌 어리어리한 지경에 빠져 하지 못할 짓이 없게 된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이 말하기를,

"당론은 좋지 않은 일이니, 좋지 않은 곳에서 폐단이 생기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605017_002

● '영남 사람은 지금까지 버려둔 지 어느덧 40년이 되었습니다.'

[영조실록 33권, 영조 9년 1월 13일 을미 3번째기사 1733년]

영남의 감진 어사 이종백이 도신(道臣)과 연명(聯名)으로 아뢰기를,

"...좌의정 서명균이 말하기를,

"영남 지방은 예로부터 유현의 대가가 많았는데 갑술년 이후로 금고된 자가 많으며, 더구나 무신년 을 겪고 나서는 사대부들의 인심이 크게 변하였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자, 풍원군 조현명이 말하기를,

"영남 지방의 풍속은 다른 곳과 다릅니다.

한 마을 가운데 반드시 장자(長者)가 있어 거기에 나아가 모든 일의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면 모두가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리고 영남 사람은 본래부터 고집이 많아서 자기의 소견을 한번 정하면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만약에 그들을 감복하게 할 수만 있다면 뒷날 반드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지금까지 버려둔 지 어느덧 40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명현의 후손일지라도 농부가 되는 데 만족하여 모두가 말하기를, ‘치우친 의논을 하면 역적으로 여기고 과거를 보면 조정에서 버림받으니, 차라리 내가 농사를 짓고 내가 우물을 파서 먹고 사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901013_003

● '민심수습용 영남인사는 오랑캐를 대우하는 것과 같다'

[영조실록 33권, 영조 9년 2월 25일 정축 1번째기사 1733년]

영남 사람인 정랑 김오응 등이 상소하여 영남의 인재등용에 편견없기를 청하다

영남 사람인 정랑 김오응...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연신(筵臣)들이 영남의 일을 진달했다 하는데, 이는 대개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성군 박문수는 대처하기 어렵다고 하고, 풍원군 조현명은 천하의 일에 사변(事變)은 알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진정시킬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영남이 어찌하여 대처하기가 어려우며 또한 어떤 모양의 사변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기에 진정시키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흉역(凶逆)의 무리인 정희량·조성좌가 출생하였기 때문에 영남 사람을 다 의심하는 것이 아닌지요?

역적 정희량은 안음에 살았고 역적 조성좌는 합천에서 출생하였는데, 여기는 곧 낙동강의 오른쪽 궁벽한 고을로서 정인홍이 악취를 남긴 곳입니다.

대개 일종(一種)의 잘못된 기운이 그 중간에 뭉쳐서 이렇게 흉악한 무리를 출생시켰던 것입니다...

이번의 선발하여 등용하겠다는 청은 사실상 영남 사람을 돌보아 아낀 것도 아니며 또한 나라에 수용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다만 인심이 안정되지 못함을 염려하여 얽매어두는 방법을 베풀기 위한 것뿐이니, 다만 이적(夷狄)을 대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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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 사람은 관리 추천되더라도 낙점을 받지못하는 자가 많다'

[영조실록 39권, 영조 10년 11월 11일 임오 3번째기사 1734년]

이조 판서 송인명이 영남인의 의망을 위해 현주의 규식을 회복시킬 것을 청하다

이조 판서 송인명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영남 사람은 비록 의망(擬望)이 되더라도 낙점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 청컨대 현주(懸注)의 규식을 회복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의망 : 관리로 추천된 후보

* 현주 : 주석을 달아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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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가에서 영남 사람을 다른 도와 다르게 대우한다'

[영조실록 44권, 영조 13년 7월 1일 정해 2번째기사 1737년]

영남인을 논하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영남 사람을 대우하는 것을 다른 도와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만약 구별을 둔다면 어찌 형적(形迹)의 다름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어찌 합천에 정희량이 있었다고 하여 합천 사람을 모두 버릴 것인가?

지금 한낱 김성탁 때문에 영남 사람을 모두 배척한다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민응수가 말하기를,

"영남의 풍속이 벌써 한층 변하였습니다.

옛날의 경우는 모두 남인이었는데, 지금은 그 중에 더러 갈리어 나가 다른 자가 있으니, 비록 이름은 남인이라고 하나 기사년 의 일에 대하여 이의를 세우는 자도 있었고,

비록 본래는 명류(名流)라고 일컬었으나 무신년 난역에 동참한 자도 있었으며,

또 더러는 함께 기사년의 일을 미워하여 무신년 난역에 들어가지 않은 자도 있었으니,

지금 한낱 김성탁 때문에 영남 사람 전부를 그르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옛부터 영남에 이름난 사람이 배출되고 인재가 부쩍 일어났는데, 지금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몰라서 그럴 것이다.

재주는 다른 세대에서 빌려 오지 못하는 것이니, 지금인들 어찌 전혀 인재가 없겠는가? 침체된 정치를 소통시켜서 상하가 서로 힘쓰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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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3장사와 일신의 7충신은 모두 호남 사람이다'

[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 10월 18일 을해 3번째기사 1747년]

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역시 시기가 도리어 어긋난 데서 온 것이다.

경이 천거한 사람이 대다수 18명에 이르는데 어떻게 다 등용하겠는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호남은 옛날에 명공(名公)·거경(巨卿)이 많았습니다.

진주 3장사(壯士)는 모두 호남 사람이고, 일신(一新)의 7충신 역시 모두 호남 사람입니다.

신이 인망을 채탐(採探)하여 지난번에 이미 소진했으나, 그 전에 이미 입천(入薦)되어 관직에 제수된 사람이 많았고,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혹은 출사하지 않은 사람도 역시 많습니다."

하고, 이어 여러 사람들의 성명 및 행의(行誼)를 두루 열거하고서 말하기를,

"18인은 신이 이미 천진(薦進)하였으니 조가에서 견용(甄用)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문구(文具)인 듯하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호남에 좌도가 많은 것을 민망해 하셨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문학·행의의 선비를 거두시어 조가가 취하는 바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이시면, 한 도의 풍속이 혹시 크게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고석 및 안황·정사협은 대정(大政)을 기다릴 수 없으니, 자리에 따라 녹용(錄用)하고, 다른 사람들 중에 이미 녹용한 사람 이외는 일체를 조용(調用)할 것이며, 정유년에 순절한 사람 임박에게 증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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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패지향 전주와 전라도

[영조실록 117권, 영조 47년 11월 12일 무신 2번째기사 1771년]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아! 이번에 조경묘(肇慶廟)의 일은 1천여 년 만에 있는 해동의 성대한 일인데, 풍패의 고도(古都)에서 역사하는 백성들이 많으니,

아! 오르내리시는 영령께서 어찌 민망스럽게 여기지 않으시겠는가?

인자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야 하는 것이니, 더욱이 국초에 선조의 마음이겠는가?.....

전주 등 11고을은 결전과 선무포를 특별히 감해 주고, 호남은 옛 환곡으로 올해에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을 또한 탕감해 주도록 하라.

지금의 이 하교는 진실로 1천여 년 만에 시조의 성덕을 유양(揄揚)하는 것이다...

아! 도신(道臣)은 53주의 백성들에게 선포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경묘를 우러러보며 성덕을 우러러 생각하게 하라.

기전(畿甸)·호서 등 신련이 지나가는 여러 고을은 올해의 결전(結錢)을 일체 탕감해 주고, 새 환곡을 헤아려 감해 주도록 하라...

문과 무에 대하여 똑같이 경사스러워하는 뜻을 보여야 하겠지만, 근본은 나라의 안녕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경중(京中)의 시민과 공인(貢人)에게 옛부터 남아 있는 것은 요역이라고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는가?

근례에 의거하여 탕감해 주도록 하라.

그리고 경외(京外)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 경사를 모두 알게 하라."

* 풍패 : 왕조의 발상지

* 신련 : 시조의 혼을 모신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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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제했으나 관료 보직 제한되는 영남 인사들

[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6월 22일 계사 1번째기사 1781년]

명정전에 나아가 도목정을 행하였다.

【 이조 판서 홍낙성, 참판 이경양, 참의 심염조, 정랑 이시수, 병조 판서 이성원이다.】 하교하기를,

...또 하교하기를,

"영남은 추·로의 고장으로 현송(絃誦)의 유속(遺俗)이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본도의 문무 및 음로를 거쳐 통사한 사람이 거의 수백 명에 이르고 있는데, 근년 이래로는 현직(顯職)이나 만임(漫任)을 막론하고 일찍이 단 한 사람도 통의된 사람이 없으며, 단 한 자리도 견서된 경우가 없으니, 이는 조정으로서 더없는 수치이다.

기왕의 일은 우선 용서하더라도 이번의 정사(定事)에서 또 다시 전의 일을 답습한다면, 전형을 맡은 신하가 어떻게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잘못을 면할 수 있겠는가?

우선 전조(銓曹)를 엄중히 계칙하라."

* 도목정 : 매년 이조 병조에서 행하는 인사행정

* 통사 : 벼슬

* 통의 : 보직 또는 승진 후보자를 의논하고 결정

* 견서 : 퇴임관리 중에 적합한 사람을 관직에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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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성을 포상하고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왕의 급선무다'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7월 11일 신해 1번째기사 1781년]

지중추부사 구선복이 상소하기를,

"대저 충성을 포상하고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이의 급선무입니다.

신은 김인서의 일 때문에 외람되이 하순(下詢)을 받들었으므로 간략하게 우견을 아뢰었습니다만, 오직 이뿐만이 아닙니다.

임진년 남해에서의 승첩은 이순신이 실로 원훈이고, 사력을 다하여 마음을 함께 해서 도와서 공적을 이루게 한 데에는 녹도 만호 정운의 힘이 많았습니다.

정운이 서서 죽은 것 또한 이순신과 똑같은데, 이순신의 자손은 대대로 드러내어 기용하고 있으니, 조가에서 보답한 것이 극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정운의 후손은 해서로 유락(流落)되어 하나도 드러나게 기용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임진년에 나라가 다시 구제된 것은 오로지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평양에서 세운 공훈에 연유된 것입니다.

명나라가 망하게 되자 제독의 손자가 도망쳐 동쪽으로 왔는데, 이제 그 후손들이 간혹 무예로 거용되고는 있습니다만, 세상에서 대하는 것이 도리어 향곡에서 급제한 사람만도 못합니다. 신은 이여송과 정운의 후손 가운데 그 쓸 만한 사람을 가려서 기용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비답하기를,

"경은 노숙한 원융(元戎)이다.

전후 장주(章奏)를 통하여 숨김 없는 정성을 알 수 있었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이 제독과 고(故) 만호 정운의 후손을 수용하라는 일에 관해서는 전조(銓曹)에 분부하여 쓸 만한 사람을 얻으면 즉시 초기를 올려 아뢰게 하겠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507011_001

● 조선후기 영남은 첫 벼슬도 어렵고, 호남은 재상이 배출

[정조실록 15권, 정조 7년 6월 24일 갑신 1번째기사 1783년]

도목 정사를 친행하고 선현의 자손을 특별히 등용할 것을 명하다

선정전에 나아가 도목 정사를 친행하였다.

【 이조 판서 서호수, 참판 이경양, 참의 황승원, 병조 판서 이명식이다.】 하교하기를,

"한 해 동안에 잇따라 인사 행정을 여는데, 도목을 큰 정사라고 일컬은 것은 구류(九流) 가 모두 모이고 팔도에서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진 이를 진용하고 인재를 발탁하며 선을 권장하고 공로를 보답하며 적체된 것을 풀고 말직에서 채용하는 것이 모두 도목 정사에 달려 있다.

이 몇 가지 중 하나라도 잘못되면 큰 정사를 하는 의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처음 막 벼슬하는 것은 수령이 되는 계제이고 수령에게는 백성의 고락이 매여 있다.

청백리의 후손을 쓰는 것은 청렴을 가상히 여긴 것이고, 전사한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충성을 표시한 것이다.

낭서는 비록 자격을 따라 올라가지만 송사를 맡는 사람을 간택하지 않을 수 없고,

변장은 비록 오래 근무한 자를 등용하지만 사람과 벼슬이 걸맞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 영남은 선비의 고장으로 일컬어졌지만 첫 벼슬의 직함도 반드시 진작시켜야 하고 호남은 재상이 배출되고 있으나 양사의 길에 빠지고 있다.

또 호우(湖右) 한 지역은 사대부들의 근본 지방이다.

부식해서 유지해야 한다는 조정의 기대가 작지 않으니, 있는 대로 찾아내어 의망하는 것은 전형의 부서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다..."

* 도목정사 : 조선 시대 이조·병조에서 행하는 인사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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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부는 왕업이 시작된 곳이라서 특별히 면세를 허락하다

[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 1월 26일 정미 3번째기사 1790년]

비변사가 호남 도신이 올린 세가지 폐단을 아뢰니 하교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호남의 전 도신 서용보가 연석(筵席)에서 세 가지 폐단에 대하여 아뢰었습니다...

그 가운데 또 하나는, 전주성 안팎의 공해(公廨)와 민가에 원래 조세를 면제하는 규정이 없음을 자세히 진달하고, 이어 토지 50결에 해당하는 조세를 감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것은 청한 대로 허락해 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또 하교하기를,

"전주성 안에 대하여 조세를 면제하는 일은, 다른 도에 어찌 근거할 만한 유례가 있겠는가.

그러나 본부는 왕업이 시작된 곳이어서 두 전(殿)을 봉안하고 있으니, 사체가 자연히 남다른 면이 있다.

그러니 올해부터 특별히 면세를 허락하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401026_003

● 명문가 출신들이 대관에 허통되고 헌부의 장령에 의망

[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 4월 23일 계유 2번째기사 1790년]

이조 판서 홍양호가 상소하기를,

"지난번 대관을 허통(許通)한 일은 창졸간에 우연히 고응관의 이름이 예조 낭관의 명단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듣건대 그는 호남의 이름높은 가문이며 등과한 그의 친족들은 거의 대관에 허통되었다 하기에, 별다른 생각없이 헌부의 장령에 의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추후에 듣건대, 그의 지체가 미천할 뿐만 아니라 그 친족들 중에는 향소임을 지낸 자도 있다 하니, 애당초 대관의 선발 대상으로는 비슷하지도 않은 자입니다.

또 역적 조시위의 제자로서 평소 그의 양육을 받아왔으므로 시중드는 노속이나 다름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지목한다는 말이 같은 반열의 입에서 나오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은 여기에서 저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응관의 대관 천망을 즉시 삭제하는 한편 일을 그르치고 직무를 옳게 수행하지 못한 신의 죄를 엄중하게 처결하도록 명하소서."

...이에 비답하기를,

"고응관의 일은 경이 비방하는 의견에 대해 받아들이고 사죄를 받아들였으니 이미 지나간 일이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애매한 죄과에 버려둘 수 없으니 그 곡절이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자세히 조사하여 초기(草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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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명의 후손 고정봉에게 전라 도사의 자리를 주도록 명하다

[정조실록 54권, 정조 24년 4월 11일 계사 1번째기사 1800년]

전교하였다.

"《항의신편》을 보면 그때마다 고 충렬 부자 등의 정성을 다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가 섬나라 오랑캐무리로 하여금 어안이 벙벙하게 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고 이제까지도 호해(湖海) 사이에 씩씩한 생기가 넘쳐흐르는 것만 같아 무릎을 치며 감탄이 터져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제 그 후손 정봉이 저번에 《대학유의》를 엮어 교정하는 작업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내가 그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공령(功令)으로 시험해 보았더니 삼장(三場)에서 다 선발되어 그가 지닌 재주를 한층 더 확인하였고,

경의(經義)를 조목별로 물어보니 구경(九經) 의 의심스러운 뜻에 대해 그가 대답한 말은 더욱 식견이 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의 차등 비교에서 당당하게 수석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급제시켰다.

이제 이미 방방(放榜)하였는데 이러한 가문으로 이런 사람이 나왔으니, 무슨 벼슬인들 맡기지 못하겠으며 무슨 은전인들 아끼겠는가.

우선 호남 외대 자리를 주고 그에게 역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404011_001

● 외세침략 때 방어에 유리한 산악인 영남으로 가지않고 평야인 호남으로 간 것은 충성도 높은 왕조기반 가문들과 경제력입니다

※ 고려 현종[거란] => 익산, 나주로 피난

※ 고려 공민왕[홍건족] => 안동, 영동, 금산(당시 호남) 이동

※ 고려 무신정권[몽고] => 강화도, 진도, 제주도 이동

※ 조선 선조[임진왜란] => 의주, 전주분조(광해군세자)

* 1593년 광해군이 전주별시로 나라를 구할 무관

1,000 여명, 문관 9명 선발

※ 조선 인조[정묘호란] => 강화도, 전주분조(소현세자)

※ 한국 이승만[북한] => 대전, 익산, 목포 거쳐 부산으로 이동...1946년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린 대구폭동으로 소백산맥 빨치산 우려해 우회설

1593년 호남군대의 행주대첩과 진주성 결사항전 후 병선건조를 도운 현덕승에게 '약무호남 시무국가' 로 표현한 이순신처럼 서산대사는 호국의 땅 해남 대흥사에 의발을 유언하고, 이후 13대종사 배출됩니다

고려 16국사 배출된 순천 송광사와 함께 비교불가한 호국사찰이 되는데, 대부분 전라도 출신입니다

고려(최지몽, 신숭겸, 도선 등과 나주세력), 조선(이성계, 황희 등과 전주세력) 건국의 근거지며 왕조전성기 이끈 곳이 전라도입니다

7년 임진전쟁 승리 원동력도 호남군대이며,

이들 후손이 한말 동학의 항일=>을사,정미의병,독립군=>광주학생운동=>광주항쟁으로 계승됩니다

전주에 있는 경기전 조경묘 풍패지관 오목대 이목대 승광재는 조선왕조 뿌리입니다

● 임난 최초 의병장은 호남 유팽로인데 진주성방어 명령 거부하고 성밖에서 생존한 곽재우로 둔갑한다.

호남출신 김천일 황진 최경회가 최후를 앞두고 유명한 3장사 시를 남기고 숙종이 정충비로 기린다

후대 영남인들이 왜침 거짓보고한 김성일과 생존자 곽재우 등으로 주장해 또 비를 세우니 지나친 애향심이다

‘촉석루 삼장사는 잔을 들고 웃으며 강물을 가리키노라.

강물은 도도히 흘러가니 저 물이 흐르는 한 혼은 죽지 않으리.’

순절한 황진은 황희의 5대손이고,

고종후는 고경명의 아들입니다

또 다른 황희의 5대손 황대중은 어머니를 위해 봉양한 다리를 절며 싸우다 다른 쪽까지 부상당하자 이순신이 탄복했고 남원성에서 끝내 전사했다

“옛적 효건(孝騫)이 오늘 충건(忠騫)이로다”

그 후손들이 한말 의병, 독립군이 되니, 환경이 사람을 낳고 선조의 얼을 보고 크는 것입니다

장수출신 논개는 최경회 부인인데,

70년대 진주시장이 영정을 왜장후손에게 기증해 영혼결혼식을 맺고, 우리 영사관에서도 행사에 참석한 것이 실화인가요?

'식민사관은 호남과 백제역사 파괴다'

백제는 문화전수, 임난 패배, 동학, 의병 저항 때문에 위협대상이라 축소왜곡하고, 당나라 용병 신라는 식민지배 논리에 도움되니 미화한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링크한 조선왕조실록 보면 호남을 재인식하고, 식민(영남)사관의 착시효과에 세뇌된 게으름을 반성하게 됩니다

왜 고려, 조선을 힘없는 나라 위주로 배웠는지 알게됩니다

친일독재와 그 잔당들의 역사왜곡과 뒤통수는 현재진행형이다

더 상세한 역사의 진실이 궁금하면 아래 링크한 네티즌의 놀라운 지식인 글 추천드립니다

https://m.kin.naver.com/mobile/qna/detail.nhn?d1id=12&dirId=1213&docId=137203566&qb=7Jew66as6rSR6rmA&enc=utf8%C2%A7ion=kin&rank=15&search_sort=0

● 강력범죄 어디가 1등일까?

* 출처 검색 : SBS 기사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2&oid=055&aid=0000511312

[마부작침] 최초 공개! 2016 '전국 범죄지도' ① 범죄 발생 1위 도시는?

최초 공개! 2016 '전국 범죄지도'

▶ 절도·폭력·성폭행이 많은 지역의 특성은?

▶ 인구밀도의 범죄 방정식

"천사도 악마가 될 수 있다."

지난 1971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탠포드 대학의 '교도소 실험'.

교도관 역할을 맡은 피실험자들은 가혹 행위를 서슴지 않을 정도로 악랄해졌고, 죄수 역할을 한 피실험자들은 교도관의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신경이 쇠약해졌다. 평범한 사람도 환경에 따라 '악마'로 돌변할 수 있다는 '루시퍼 효과(Lucifer Effect)'가 실험을 통해 드러났다.

과거 범죄학은 범죄 원인을 개인적 성향과 심리 등 생물학적 요인에서 찾았다. 반면 최근엔 '루시퍼 효과'에서 보듯이 환경, 공간적 특성에 방점을 둔다. 공간을 개선하면 범죄도 줄일 수 있다는 게 현대 범죄학의 관점이다. 달리 말해서 범죄 발생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범죄와 관련한 가장 종합적인 최신 자료인 2016년 경찰 자료를 최초로 분석, 공개한다. 2016년의 최신 자료는 물론 2014년과 2015년까지 함께 분석해 범죄의 지역별 특성과 차이를 알아보고 대응 방안을 찾아보았다.

경찰서 관할지에 따라 전국을 234개 지역으로 분류하고 지난 2014~2016년 3년간, 전국 252개 경찰서에 접수된 5대 강력범죄(살인, 강도, 절도, 폭행, 성폭력) 발생 현황, 경찰력 현황, 출동시간 등을 분석해 '전국범죄지도'를 만들었다.

......(중 략).....

친일파 지역별 숫자 조작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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