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윤청신 기자]

가수 인순이가 '2020 대한민국 가수대축제'에 출연해 네티즌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1월 26일 오후 5시 30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2020 대한민국 가수대축제'는 설 특집으로 마련된 <전국노래자랑>, <가요무대>, <열린음악회>, <뮤직뱅크>, <유희열의 스케치북>, <불후의 명곡>의 대표 가수가 함께 꾸리는 프로그램이다.

이덕화와 이현주 아나운서 진행으로 방송되는 이날 NCT드림부터 김태우, 노라조, 육중완 밴드, 정훈희, 인순이, 노사연, 알리, 남진, 설운도, 이자연,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까지 최정상급 가수들이 총출동한다.

특히 '2020 대한민국 가수 대축제'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로 국민 MC 반열에 올랐던 이덕화가 약 30년 만에 마이크를 잡은 대형 뮤직 쇼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1957년생으로 올해 나이 예순 네살인 인순이(본명 김인순)는 경기도 포천군 출신으로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 미군으로 근무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외국인이 흔치 않았던 대한민국에서 인순이는 혼혈임이 쉽게 드러나는 외모로 인해 차별과 소외 등을 받으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인순이는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학교 다닐 때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라는 글도 올리기도 했었다.
인순이는 경기도 연천의 청산중학교를 졸업했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인순이는 시골 밖에도 못나가던 순진한 아이였을 때, 김완선의 이모 한백희가 집으로 찾아와 혼혈 그룹을 만들고 싶어 했다며 가수 데뷔를 권유했고, 가족 부양을 위해 가수가 되기로 결정했다.

1978년, 걸 그룹 희자매로 데뷔했다. 이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자 가수로 성공할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희자매는 디스코풍의 빠른 템포에 율동을 더한 음악들을 주로 했다. 1978년 7월 1일 희자매는 첫 정규 앨범을 발매했었고, 타이틀곡 〈실버들〉로 TBC 가요차트 7주 1위를 하며 인기를 얻었다.

희자매때 인순이는 출중한 댄스 실력과 파워풀한 가창력을 선보여 관심을 받았지만, 오히려 흑인혼혈이라는 외적 이미지에만 관심을 더 가졌다.

1980년이 되자 인순이는 1집 《인연》으로 솔로 데뷔를 치렀다. 그리고 1983년, 디스코풍의 〈밤이면 밤마다〉가 히트를 쳐 1984년 KBS 7대 가수상을 수상하며 인기 가수 대열에 올랐다. 1982년 10월 16일에는 김인순이라는 이름으로 이인옥, 장혁과 함께 《흑녀》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당시 한백희를 통해 김완선과 이주노는 인순이의 백댄서 그룹인 인순이와 리듬터치로 활동했었다. 이후 김완선과 이주노는 리듬터치를 탈퇴하고 솔로 활동을 하며 엄청난 인기를 얻게되자 당시 매니저였던 한백희(김완선의 이모)는 인순이보다 김완선의 미래가 더 밝을 것으로 예상하며 인순이와의 비즈니스 관계를 청산했다.

이후 10년간은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밤무대에서 활동하는 등 대중들에게 잊혀지기 시작했다. 1994년 4월 26일 서울 여의도성당에서 대학 교수 박경배와 결혼식을 올렸다. 외동딸 세인을 낳았다.

이후 1996년 박진영의 권유로 5년만의 댄스풍 신곡 〈또〉를 발매했다. 이때 인순이는 처음으로 배꼽티를 입고 활동했고, 방송3사 가요 차트 20위권에 진입하며 당시 나이대로는 이례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2009년 5월 8일에는 17집 《인순이》를 발매했고, 그 중 수록곡인 〈아버지〉는 2010년 5월 첫째주 라디오 방송횟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 또한 비슷한시기 비, 이효리 등의 가수들을 눌렀다는 것에서도 화제가 됐다. 또한 2010년 2월, 인순이는 1999년 이후 미국 카네기 홀에서 한국 가수론 최초로 두 번째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인순이는 팝 발라드, 알앤비, 댄스 팝 등의 다양한 장르에 넘나들며 활동했다. 특히 1990년대 백댄서팀 인순이의 리듬터치를 만들어 김완선, 이주노 등 춤의 대가들을 배출해냈고, 한국 최초의 사설 댄스팀 스파이크와 함께 댄스를 대중화 시킨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2013년에는 다문화 가정과 아이들을 위한 해밀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해밀학교는 처음 여섯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인원수가 많이 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순이는 다문화 대안학교를 설립한 이유에 대해 "어릴 때 정체성 혼란, 사춘기를 오래 겪었다"며 "아이들도 나처럼 헤매고 있진 않을까 생각. 흔들리는 아이들의 손 잡아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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